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명소

중국 동부연안 도시를 가다①-상하이! 중국 현대화의 대표도시(상)




©imagepress

 

상하이의 와이탄(外灘)에 서면 처음 이곳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아주 낮선 중국의 풍경에 놀라게 된다. 상하이를 가로지는는 황포강변에 19세기 고딕양식과 바로크식, 로마식, 고전주의식, 르네상스식의 웅장하고 다양한 서양식 건축물들이 병풍처럼 서있다. 마치 서양 건축양식의 박물관인양 나란히 서있는 이 건물들은 20세기 초 서구의 자본가들이 심혈을 기울인 건물들로 중국경략을 위해 들어온 은행과 무역회사들의 중국본사 건물로 사용되던 것들이다. 이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황포강 제방은 공원화되어 상하이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관광객들의 상하이 관광 1번지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푸동개발은행 건물로 사용되는 중앙의 돔형 건물은 홍콩상하이은행의 본사건물이었고 좌우로 영국과 미국, 프랑스, 일본의 자본들이 세운 건물들이 서있다. 1842년, 아편전쟁 이후 영국과 청왕조가 맺은 남경조약에 의해 개방된 이후 상하이는 중국 최초의 경제특별지구가 되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 증거물들은 아직도 굳건히 남아 상하이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천천히 와이탄을 걸으면서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건강하게 보이는 한 노인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는 묘기를 선보인다. 필자를 위해 사진포즈를 취하면서 "내가 전에 맨하튼에 갔을 때 센트럴파크에서도 나처럼 묘기하는 노인이 있더군"하면서 유창한 영어를 선보인다. 서부 중국을 여행할 때 영어를 하는 사람 만날 확률이 0.1%도 되지 않던 것에 비하면 이곳은 확실히 국제화된 도시임에 분명했다.


©imagepress


©imagepress

오늘날 상하이는 '중국의 맨해튼'이란 소리를 듣지만 과거 1백년전에도 '동방의 파리'라든가 '동방의 진주'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당시 상하이는 아시아에서 가장 발전된 금융 시스템과 유통구조를 지닌 곳이었다. 20세기 초반 상하이의 자동차 보유대수는 나머지 중국전체의 보유 대수 보다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발전으로 이득을 본 것은 외국 자본가와 이들과 결탁한 흔히 매판자본가라 불리는 중국 자본가들뿐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전국각지에서 몰려온 중국인들은 낮은 임금에 허덕였고, 외국 자본가들은 이들은 노골적로 차별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와이탄 근처의 황포공원이다. 우송강을 가로지르는 외백도교 앞에 건설된 황포공원은 당시 이 지역에서 조계지를 만들어 살던 영국인들의 공원으로 입구에 '개와 중국인은 출입금지(華人興拘不得入內)'라는 푯말을 세워놓았었다. 중국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감을 준 이 사건은 왕왕 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됐다. 이소룡과 이연걸에 의해 영화화된 '정무문'은 당시 중국인과 외국인들의 갈등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준 영화로 기억된다. 상하이에서 실존했던 쿵푸의 대가 후오 얀지아의 죽음을 그린 작품인 '정무문'은 특히 이소룡의 영화가 사실적이다. 영화 마지막에 살해범으로 연행되는 그를 맞는 것은 총으로 무장한 서양의 경찰들. 그들을 향해 맨몸으로 돌진하는 이소룡의 모습은 영화사에 남을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지금 황포공원 안에는 높이 60m의 거대한 '인민영웅기념탑'을 만들어 과거의 치욕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imagepress

 

상하이가 무역항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때 '청룡진'이 설치되면서 부터이다. 1267년 송나라 때는 '상해진'이 설치되면서 지금의 상하이라는 이름을 얻게된 것이다. 이후로 상하이는 중국에서 가장 큰 면방직 생산 기지가 되었고 전국의 상인들이 몰려드는 강남지역 제일의 무역항이 되었다. 17세기부터는 청황조에 의해 세관이 설치되 외국과의 본격적인 통상이 시작됐다. 현대식 건물들로만 채워진 이 도시에서 과거 역사를 찾아보기 위해 용화사를 찾았다. 시내 중심에서 택시로 약 30분 거리에 있는 용화사는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삼국지의 오나라 손권이 미륵의 재림을 기원하면서 창건한 절이다. 오랜 세월을 이어온 절집이지만 근대 중국의 최대사건인 태평천국의 난 때 크게 소실된 것을 청나라 때인 1908년에 개축했다. 다만 용화사의 상징인 용화탑만은 태평천국의 난 때도 화를 면해 높이 40m에 목조 7층 8각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imagepress

 

미륵전을 지나 대웅보전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향불을 태우며 기도를 하고 있다. 시내에서 꽤 덜어진 탓에 관광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고요한 풍경 소리만이 귓전을 맴도는 경내에서 마침 장례식이 있었다. 노란색 가사를 입은 승려들이 죽은자를 위해 경전을 읽고, 가족들은 부적을 태운다. 생활 깊숙이 자리한 불교의 위상을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용화사를 나와 상해의 유일한 정원인 예원으로 갔다. 강남 정원의 특징인 아기자기함과 한정된 공간을 무한하게 확장시키는 설계를 지닌 예원은 특히 운남지역에서 운반해온 2만톤짜리 대호석으로 만든 대가산(大假山)이 일품이다. 1559년 명나라의 관료 반윤단이 아버지를 위해 고향에 세운 예원은 건축 기간만 18년에 면적이 20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다. 바로 상하이 지역에 모여들던 거대한 상업 자본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imagepress

최근 북경정치를 좌우하는 것이 장쩌민처럼 상하이 지역 인사이듯 예원을 만든 반윤단 역시 정치적인 야심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가 예원의 담위에 용모양의 기와를 얹었는데 이 소문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용모양 기와를 사용한 것에 대해 추궁을 당했다. 반윤단은 황제의 추궁에 순간적인 재치로 "이 동물은 제 상상 속의 동물입니다. 용은 발톱이 다섯인데 이 것은 발톱이 세 개이지 않습니까?"라며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반윤단의 정치적 야심이 은연중에 나타난 것이라 보고 있다. 상하이는 예로부터 북경에 맞서는 강남의 정치 일번지였던 것이다.
 


©imagepress

 

용화사와 예원이 상해의 과거 영화를 보여준다면 회해로 남쪽의 프랑스 조계지 안에 있던 구 건물은 현재 중국 공산당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바로 중국공산당 1차 전당대회가 열렸던 일대회지(一大會址)가 그것이다. 불과 수년전만 해도 이 곳은 허물어져가던 상하이의 흔한 구저택가 였지만 지금은 일대회지를 중심으로 새 단장을 해 상하이 최고의 갤러리와 레스토랑이 모인 '신천지'가 되었다. 일대회지 안은 최고급 자재를 사용해 당시의 기록들과 기념물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특히 1차 대회에 참석한 인물들의 밀랍인형이 있는데 1921년 이곳에 모였던 당원은 단 13명에 불과했다. 그것이 불과 30년도 지나지 않아 중국전체를 석권하는 힘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 기적 같은 일이었다.


©imagepress

 

일대회지 지역이 최고급의 문화지역으로 단장된데 비해 바로 길 건너는 100년 이상 변함없이 상하이 서민들이 살고 있는 리롱지역이다. 1층은 상가이고 2층은 거주지인 이 건물은 특히 과거 상하이의 대표적인 건축물이었지만 지금은 재개발로 인해 거의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 리롱지역에 바로 한국임시정부청사가 있다. 마침 이날도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 임시정부청사 주변에 잔뜩 모여있었다. 원래 건물은 낡아서 90년대 초 상하이정부가 해체하려던 것을 우리정부의 요청을 받고 박물관으로 개조해 개방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여전히 원주민들이 살고있고 좁은 골목과 열악한 주변환경으로 우리의 중요한 역사가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인상을 씻을 수 없다. 그나마 이곳이 제일 장 보존된 편이고 중경이나 기타 지역의 임시정부 청사는 전혀 관리되고 있지 않아 안타까움을 더한다.


©imagepress

우리 역사와 관련된 또 하나의 유적지가 있다면 상하이 북쪽의 노신공원 안에 있는 매정이다. 매화정자라는 이름의 이 건물은 바로 윤봉길의사의 호인 매헌에서 따온 것이다. 1932년 김구선생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윤봉길의사는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및 상하이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공원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시라카와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주중 일본공사 시게마쓰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오사카로 이송, 12월 18일 가나자와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되었다. 그의 나이 불과 24세 였다. 이런 설명이 각인되어 있는 기념석에 서있으니 가슴이 뭉클했다. 그의 이러한 쾌거에 상하이 주민들은 '수억의 중국인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청년이 해냈다'며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대주기 시작했다.


©imagepress

공원 안을 걷다보니 노신의 동상이 보인다. 중국 근대화에 빼놓은 수 없는 지식인이었던 문학가 노신과 신민지 나라의 불행을 벗고자 테러리스트가 되어야했던 청년의 동거는 참으로 아이러니 했다. 상하이는 그처럼 아시아가 겪어야 했던 수난과 고난이 한데 엉켜있는 곳이기도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