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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티베트

중국서부극지대탐험5-문성공주 묘와 위수(玉樹)

 

천장대를 빠져 나와 문성공주 묘(文成公主 廟)를 찾아 나섰다.

당나라 태종의 양녀였던 문성공주가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어,

토번국(지금의 티베트)의 왕 송첸감포(松贊干布)에게 시집가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송첸캄포는 티베트에 최초의 강력한 통일왕조를 세우고 세력을 확장했던 인물이다.

 

문성공주(文成公主)는 당시 당나라의 도읍이었던 장안(지금의 西安)을 출발, 시닝(西寧),

마더우(瑪多),위수(玉樹)를 거쳐 라싸(拉薩)로 가던 길에 이 위수에서 1년을 머물다 갔다고 한다.

그때 이곳 사람들을 구휼히 여겨 농사기술과 방직, 자수기술을 등을 가르쳐 가난을 면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문성공주묘는 그가 죽은 후 은혜를 잊지 않은 이곳 사람들이 공덕을 기려 세운 사원이다.

 

 

우리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정부의 보조금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문성공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들어가려니 젊은 라마승이 가로 막는다. 지금은 공사 중이고 또 관람을 허락할 수 있는 노스님이 출타 중이라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러잖아도 문성공주상이 있는 법당 문을 자물통으로 채웠으니 달리 방도도 없었다.

저녁 6시 무렵. 선참급 승려들이 삼삼오오 사원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기회다 싶어 그 젊은 라마승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다.
 근조아랑이라는 이 젊은 라마승은, 집안에 한명씩은 라마승이 되어야 하는 관습 때문에 1년전에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올해 나이는 이제 16세. ‘사람이 죽으면 어떤 세상에 가게 되고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어서 귀의했다’고 또렷이 말하는 소년의 얼굴에서 그동안 보아왔던 길거리의 어린 라마승이나 티베트인과는 조금 다른 인상을 받았다. 적어도 오늘까지 그처럼 조리있고 자신있게 말하는 티베트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까. 그런 소년 라마승도 문성공주와 관련해서는 우리가 자료를 통해서 알고 있는 내용과 별반 차이가 없는 도식적인 답변만 한다. 더구나 인터뷰 내내 밖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우리와 동행했던 중국 감독관들이 신경이 쓰였나보다. 짐짓 장난기가 발동했다. “티벳인들이 왜 (한족인) 문성공주를 사랑하느냐?” 했더니 조금은 당황한 듯 “환경도 맞지 않는 이국땅에서 다른 민족인 티베트 사람에게 헌신했기 때문”이라고 얼버무린다.
 중국이 해방이라고 말하는 50여년 세월동안 보이지 않게 통제하고 그 통제에 압박당하며 살아 온 티베트 사람들의 일그러진 삶의 비애를 느끼는 순간이다. 실제로 우리 일행이 문성공주묘의 부감을 찍기 위해 맞은 편 언덕에 올라갔을 때 사원 구석에서 두 손을 뒤로하고 고개를 숙인 채 중국 감독관 앞에 서있는 소년 라마승의 모습을 목격했다. 아주 심각하고 험악한 취조를 받고 있구나 하는 느낌에 미안함과 함께 안타까움이 그 곳을 떠나서도 한 동안 머리 속을 쉽사리 떠나지 않았다.

 

문성공주 묘에서 위수현으로 들어오는 길에 본 하천과 사원.

크고 작은 사원이 워낙 많아서 그러려니 하기도 한다.

 

 

 

위수병원에서 본 위수현 모습.

 

 

대원들 몇몇이 고소증세(고산병)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쌍용 자동차 연구원 황일평 대원과 내가 심했다. 나는 몇 번의 고산등반 경험이 있었으므로 의외였는데, 난산산맥을 넘으면서 차량 주행장면을 찍기 위해서 썬루프에 몇 차례 올라가 촬영하는 동안 머리를 차게 식힌 것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여기서 적응하지 못하면 다시 시닝으로 후송할지 말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하는 상황. 가면 갈수록 오도가도 못하는 고립무원지대로 들어가기 때문에 유사시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본격적인 탐험이 시작된 첫날 이 모양이라니.  난로에 불을 지피고 물을 데우고 침낭과 고산병 예방약 등,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동원하기 위해 대원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그러나 정작 환자들의 상태는 차도가 없다. 두통은 심해지고 사고능력은 떨어지고 일순 두려움까지 밀려온다. 대원 둘이 나자빠지면 탐험은 그야말로 일장춘몽이 된다.

할 수 없어 350km를 달려 온 위수병원 전경.

 

이런저런 걱정이 두통에 더해진다. 마다 초대소의 하룻밤은 그저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무기력한 시간이었다. 그 고통을 표현하자면 치통보다 10배쯤 더 아프다고 보면 된다. 다음날 아침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황일평 대원과 나는 미음 같은 가벼운 쌀죽을 몇 수저 뜨고 위수수(玉樹)로 긴급후송 됐다. 그 지역일대에는 위수밖에 병원이 없기 때문. 333㎞를 어떻게 왔는지 모를 정도로 산 넘고 물건너 옥수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에 입원했다.

 

전장의 야전병원 같은 ‘옥수의원’은 진료기란 구식 혈압계가 전부. 손톱 때가 꼬질꼬질한 담당의사는 이제 23세가 됐다는 수련의. 이쯤 되면 차라리 진료거부가 낫겠다 싶을 정도다. 링거를 맞아야 한다고 한다. 결국 포도당과 이뇨제 등 수액을 4병씩이나 맞아야 했다. 놀라운 것은 수액이 들어가는 만큼 우리가 컨디션을 회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병원에서 수액을 맞은 다음에야 탐험대는 새로운 출발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난 이틀을 잃어버렸다.

 

* 내 생명의 은인(?) 수어노 글륵(索南格勒)과 함께.

  마음과 정성은 세계 최고의 명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