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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인권선진국으로 가는 길] (8) 어려도 인권은 있다(프랑스)

[인권선진국으로 가는 길] (8) 어려도 인권은 있다(프랑스)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로우며 평등한 권리를 지닌다.”(인권선언 제 1조) 프랑스는 대혁명 발발 40여일 뒤인 1789년 8월26일 세계 최초로 인권선언을 선포했던 인권 원조의 나라다. 그런 명성에 걸맞게 프랑스에서 미성년자의 인권은 세계 어느나라보다 앞서 있다. 고교생들도 집회·결사·언론·출판의 권리를 누리고 있으며, 사회는 이들을 어엿한 인격체로 존중하고, 이들의 주장을 귀담아 듣는 분위기도 성숙돼 있다.

▲ 프랑스 최대 고교생 연합체인 UNL 중앙집행위원들이 지난달 30일 파리 사무국에서 회의를 갖고 오는 10월 열리는 전국대의원회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파리 함혜리특파원 lotus@seoul.co.kr

|파리 함혜리특파원|9월 새학기를 며칠 앞둔 지난달 30일 파리 북동부의 로슈슈아르 거리 13번지의 아파트 2층에서 진지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난 학기 고교생 시위의 평가부터 마무리한 뒤 앞으로의 행동방향을 결정합시다.”“시위에 참가했다가 처벌된 40명의 학생들에 대한 사면문제는 어떻게 돼 가고 있지요?”“‘청소년 건강관리법’은 교내의 청량음료수 자판기를 없애고, 당분이 많이 들어간 과자류도 급식메뉴에서 제외시킨다고 하는데 이번 대의원회의에서 토론 주제로 제안하는 것은 어떨까요?”

학생들에 의한, 학생들을 위한 고교생 조합

망가진 의자들과 부서진 책상, 빈 물병, 페인트통들이 서류더미와 마구 뒤엉켜 창고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회의실에서 7∼8명의 전국고등학생연합(Union Nationale Lyceenne·UNL) 중앙사무국 집행위원들은 오는 10월17일 파리에서 열리는 전국대의원회 준비에 여념이 없다. 여드름이 듬성듬성 난 얼굴, 헝클어진 곱슬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소년, 모습은 제각각이지만 발표자의 의견을 듣고 나름대로 의견을 당당히 밝힌다.

UNL은 지난 1월부터 6월까지 프랑스 전국을 달궜던 고교생 시위를 이끈 최대 규모의 고교생 단체다.1994년 출범, 현재 프랑스 전역에 5000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좌파적인 이념을 추구하지만 정치성을 엄격히 배제한 독립적인 학생단체라고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칼 스퇴켈(17·파리 몽테뉴 고교)은 설명한다.

조합은 연 5유로(7000원 정도)의 회비와 연 8만유로 정도의 국가 지원금으로 운영된다. 우파정부 들어 지원금이 절반 가량 줄어든 탓에 월 2000유로 정도 되는 사무국의 월세와 비품구입비를 제하고 나면 살림이 언제나 빠듯하다고 한다.

재정적 궁핍은 이들에게 별 문제가 아니다. 스퇴켈은 “우리는 모든 학생들이 ‘균등한 기회’를 누리며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고교생들의 복지와 권익향상, 우리의 미래와 직결된 교육의 질 제고를 위해 모든 힘을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미성년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사회 분위기

서구 사회의 권위주의 청산에 큰 기여를 했던 1968년 5월의 학생운동을 계기로 젊은이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분위기가 확산된 프랑스에서는 때때로 고교생들의 목소리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갖기도 한다. 대학입시제도 및 교육제도 개혁과 관련한 지난 봄의 고교생 시위가 대표적인 사례다.

학생들은 영·미식 경쟁개념을 대폭 추가한 새 교육방향이 공교육을 기본철학으로 하는 기존의 프랑스 교육제도의 핵심부분까지 없앨 뿐 아니라 새로운 차별을 양산하는 ‘개악’이라며 반발했다.5000명으로 시작된 시위 참가자가 5만명으로 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정부는 바칼로레아 개혁안을 철회한 채 법을 통과시켰다. 프랑수아 피용 당시 교육장관은 연초 개각때 경질됐다.

피용의 자리를 물려받은 질 드 로비엥 장관이 2005∼2006학년도 교육정책방향 보고에서 교육기회의 균등과 청소년 직업교육 강화를 두가지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은 지난 봄 학생시위를 의식한 때문이다.

UNL의 기관지 발행인을 맡고 있는 아망딘 뒤프라즈(18·멜랑시 그레시보당 고교)는 “고교생 개인은 미성년자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목소리를 모으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에게 투표권은 없지만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민주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배운다.

UNL은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각 지역 고교생들의 목소리를 취합, 통일된 의견을 도출한다고 민주주의 발전 중앙집행위원인 에덴 브르통(17·블르아시 데세뉴 고교)은 설명했다. 지역에서 뽑힌 대의원들은 2개월에 한번씩 전국 회의에 참석해 회원들의 의견을 전달한다. 대의원들은 상당수가 학급 대표, 지역사회 학생대표 등을 맡고 있어서 전국대의원회의에서 취합된 의견은 고교생활 지역자문회(CAVL)와 국가자문회(CNVL)에서 토론되고 자연스럽게 지방·중앙정부의 교육 관계자들에게 전달된다.

부모들이 활동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브르통은 “민주주의 시스템을 몸소 터득하는 기회라며 오히려 격려해 준다.”며 활짝 웃었다.

lotus@seoul.co.kr

청소년의회제란

|파리 함혜리특파원|프랑스는 고교생들의 의견을 최대한 제도에 반영하고 학생들의 교육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청소년의회제도를 두고 있다. 일선 학교에서 전국 단위까지 그물망처럼 탄탄하게 짜여진 피라미드 구조로 대화하고, 의견을 나누고, 토론을 벌이는 민주적인 방식을 통해 어엿한 인격체인 청소년들의 권익향상을 뒷받침하는 제도다.

고교생활 자문회(CVL)

학교단위의 기구. 학생대표 10명과 교사 및 진로지도 전문가, 의료담당자 등 학교 관계자와 학부모 대표 등 성인 10명으로 구성되며 교장이 위원장을, 학생대표 중 1명이 부위원장을 맡는다. 학교의 내부 규율, 교육지원 방식, 지도 방향, 시간표, 학교 환경, 위생, 안전, 학생회 활동, 기금활용문제 등 학생들의 학교생활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다루지만 결정권은 없다.

지역별 고교생활자문회(CAVL)

시·도 교육감이 위원장을 맡는 아카데미(한국의 시·도 교육청) 단위의 자문회. 지역 단위의 교육관련 현안들과 학생들의 복지 및 권익향상과 관련된 문제들을 주로 다룬다. 최대 40명으로 구성되며 절반인 20명이 학생이다. 학생대표들은 지역에 소속된 학교 CVL에서 선발된 대표들이다. 나머지 성인 위원들을 교육감이 선발한다.

국가 고교생활자문회(CNVL)

교육 장관이 위원장을 맡은 국가 단위의 기구.1년에 최소 2차례 소집된다.30개 지역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학생들이 2년 임기의 위원으로 활동하며 각 대표는 궐석시를 위해 부대표를 둔다. 교육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방향을 제시하며 학업, 교재와 관련한 문제, 고교생들의 체육·문화·사회 활동 지원방안 등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lotus@seoul.co.kr

“학생들 ‘공통의 선’ 기성사회에 전달”

|파리 함혜리특파원|프랑스의 대표적인 고등학생 단체인 UNL의 회장을 맡아 지난 1년8개월간 활동해 온 콘스탄스 블랑샤르(18·파리 라브아지에 고교졸업)는 “많은 저소득층 학생들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다.”며 “모든 학생이 ‘균등한 기회’ 속에서 고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성사회에 호소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쟁력 있는 개인에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배격하고, 사회 공통의 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UNL의 이념은 다분히 좌파적이라고 소개한 블랑샤르는 “지난 봄 학생시위는 불평등한 조건에 있는 학생들을 더욱 사회 밖으로 내모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법안을 정부가 강행한 데 반발해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블랑샤르는 공부도 남에 뒤지지 않은 모범생인데다 활달한 성격, 남의 어려움을 보면 가만히 안 있는 품성 탓에 중학교 때부터 줄곧 학급대표를 맡아 일하다 2002년 1월부터 UNL에 가입했다.

“우리가 처한 공동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우리 힘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이 단체에 열성을 바쳐 활동하게 된 동기라고 밝힌 블랑샤르는 “우리가 힘을 모았을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이슈가 있을 때마다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바칼로레아(프랑스 대학입학 자격시험)를 무난히 통과,9월부터 파리 1대학 법학과에 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