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역사를 좌우했던 터키 최대의 도시인
세계 3대 美港 이스탄불!
터키 전도
고대는 비잔티움, 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
현재는 이스탄불
이스탄불 (영)Istanbul. 옛 이름은 Constantinople, 고대
이름은 Byzantium. 터키의 최대 도시이며 해항.
흑해 어귀에 있는 구릉성 3각형 반도의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양쪽에 걸쳐 있어서 왼쪽은 유럽지구 오른쪽은 아시아지구 양 대륙에 속한다.
이스탄불 전체 항공 촬영
아시아와 유럽, 두 대륙을 접하고 있는 이스탄불은 이탈리아의 나폴리항구(지중해
어귀인 티레니아 해에 있는 반원형 만(灣).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시의 남서쪽에 있다. 너비가 16㎞이며
카페미세노 곶에서 캄파넬라포인트 곶까지 남동쪽으로 32㎞ 길이로 펼쳐져 있다.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곳은 활화산인 베수비오 산을 비롯하여 화산으로 인해 생긴 가파른 구릉들에 둘러싸여 있어 그 경관이 한층 돋보인다. 나폴리 항구가 있으며 만을 따라 포추올리, 토레아눈치아타, 카스텔람마레디스타비아, 소렌토 등의 해안도시가 자리잡고
있다. 고대도시인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유적들이 해안선을 따라 널려 있다. 만의 입구에는 이스키아·프로치다·카프리 섬이 있고 북서쪽에 포추올리 만이 있다)와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Rio
de Janeiro]브라질의 주요 항구도시이자 리우데자네이루 주의
주도. 남아메리카 남동부 대서양 연안에 자리잡고 있다.
고대에는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렸던 이 축복 받은 도시는 세계 역사를 좌우했던 두 제국 비잔틴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수도로써 약 1500년간 번영을 누려왔고, 두 제국의 국교였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문명이 서로 맞닿는 과히 세계적인 관광지라 아니할 수 없다.
일찍이 17세기에 러시아의 피요트르 대제[Pyotr I] 러시아의 차르(1682~96 이복동생 이반 5세와 공동재위, 1696~1725 단독 재위), 황제(1721 선포). 러시아 역사상 가장 뛰어난 통치자이자
개혁가였다. 표트르는 알렉세이와 그의 2번째 부인 나탈랴
키릴로브나 나리슈키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피요트르는 그의 이복형제들과는
달리 건강하고 활동적이며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는
“이스탄불을 지배하는 것은 세계의 반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18세기에 나폴레옹
황제(나폴레옹
1세
튤립과 블루모스크
블루모스크 야경
또한 역사학자 토인비는 터키의 역사 도시 이스탄불을
일컬어 “인류문명의 살아 있는 거대한 옥외 박물관”이라
했다.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마르마라
해[Marmara Denizi]
터키의
아시아 쪽 영토와 유럽 쪽 영토를 부분적으로 갈라놓는 내해(內海). 북동쪽에
있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해 흑해와, 남서쪽에 있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에게 해와
연결된다.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길이 280㎞이고
최대너비는 80㎞이다. 면적은 1만 1,350㎢로 넓은 편이 아니나 평균수심은 494m로 가장 깊은 중앙부분은 수심 1,355m에 이른다. 강한 해류는 없고, 다르다넬스 해협 부근에서 최고에 이르는 염도는
평균 22%이다. 마르마라 해는 250만 년 전 신생대 제3기 말기와 홍적세 전반에 일어난
지각변동에 의해 생겨난 곳으로 지진이 자주 일어난다. 마르마라 해는
2개의 도서군으로 나눌 수 있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이스탄불의 전경은 수 많은 모스크의 돔과 첨탑 그리고 현대적 감각의 마천루가 은은한 잿빛 하늘과 어울려 환상적인 실루엣을 자아내고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유유히 떠있는 크고 작은 배, 양쪽 언덕의 그림 같은 궁전들과 터키 고유의 주택들, 그 사이를
잇는 보스포루스 다리 등이 한데 어우러져 여행객들의 정감을 한층 돋구고 있다. 실로 이스탄불은 한번의
여행으로 만족할 수 없는 추억의 도시가 아닐 수 없다.
이스탄불은 많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물의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있다. 두 개의 대륙에 속해 있는 세계 유일의 도시. 보스포루스로 인해 유럽과 아시아로, 골든 혼으로 인해 오른쪽 언덕의 고대 왕국 지역과 왼쪽의 언덕 지대와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조성된 근대 주택지구를 가진 갈라타(Galata) 항구 지구로 갈린다.
하기아 소피아 전체모습
술탄아흐멧 상공의 성 소피아사원
전설적인 뷔잔티온 시의 설립자는 메기리안 족의 비자스[Byzas] "비자스는 포세이돈과 케로에사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 케로에사는 이오와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며,
후에 비잔티온[비잔티움]이라고 불리게 되는
도시와 가까운 곳에서 태어났다. 비자스는 도시를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라 비잔티온이라고
불렀다. 비자스는 아폴론과 포세이돈의 도움을 받아 도시를 강성하게 만들었다. 트라케 왕 하이모스가 비잔티온을 공격해 오자 비자스는 단독 결투로 그를 물리치고, 패주하는 적들을 뒤쫓아서 트라케로 쳐들어갔다. 비자스가 없는
동안, 스키티아 왕 오드리세스가 비잔티온을 공격하여 포위했다.
그때 비자스의 아내인 피달레이아가 다른 여인들과 함께 적의 진영에 수많은 뱀을 던져서 도시를 구해 냈다. 또한 피달레이아는 시동생인 스트롬보스의 공격으로부터도 비잔티온을 구했다.")의
의해 건설이 되었다.
전략적인 요충지인 관계로 뷔잔티온은 비잔티움으로 되고, 곧 무역과 상업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으며 포도주와 어업으로 유명하였다.
오르타쿄이 사원과 보스포루스대교
비잔티움은 BC 8세기말경 그리스인들이 식민지로 건설한 곳으로서 BC 512년 페르시아 제국으로 넘어갔고, 그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기도 했다. 로마 공화정 치하에서 자유도시였다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재위기간(69~79) 동안에는 로마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
서기 196년에 로마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이 시를 점령하고 파괴했으며, 그에게 충성치 않는
병사들과 관리들을 학살하였다. 수 년 후에 셉티미우스 왕은 도시와 성벽을 재건했으며
히포드롬과 궁전을 지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콘스탄티우스1세의 정복 과정을 알아보자!
293년
그의 아버지는 부황제(caesar)의 지위에 올라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라는 칭호를 얻었고, 서로마 황제(아우구스투스)인 막시미아누스 밑에서 부황제로 일하기 위해 서로마로
갔다.
289년
아버지는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의붓딸과 결혼하기 위해 헬레나와 이혼했고, 어린 콘스탄티누스는 동로마
제국의 니코메디아로 보내져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정에서 자랐다.
카이사레아 주교 유세비우스는 어린 콘스탄티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로 싸우러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305년
로마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던 두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하고, 그들의 부황제인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뒤를 이어 공동 황제에 올랐다
312년
이탈리아를 침략해 막센티우스를 무찔렀고, 리키니우스와 이미 맺고 있던 동맹 관계를
확인했다
콘스탄티누스는 316년 발칸 반도의 영토를 빼앗았고 324년 아드리아노플(지금의 터키 에디르네)과 크리소폴리스(지금의 터키 위스퀴다르)에서 리키니우스를 패배시켜 동·서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324년
리키니우스에게 승리를 거둔 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신앙심이 없는 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신이 선택한
도구로서 브리튼 섬 북쪽 끝에 있는 해안에서 왔다고 말했으며,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신의 신성한 힘의 도움을 얻어 이 지상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기 위해 왔다고
선언했다.
신시가지 탁심 미니전차
324년 11월
8일에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수도로 채택되면서 '신로마'(New Rome)로 개칭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에 대해서 알아보자.
(그리스도교도임을 공언한 최초의 로마황제. 330년에는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고, 뒤에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치하에서 콘스탄티노플은 그리스도교 도시로 포고되었으며, 그리스도교 세계의 종교 중심지가 되었다.) 신학
논쟁에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325)를 열었다
그는 337년
5월 22일 죽었으며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사도교회에 묻혔는데, 무덤 주위에는 사방에 각각 6개씩 기념물이 늘어서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 과대망상증을 표현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확신,
즉 자신은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그리스도교 전파를 위해 인생과 공직을 바쳤다는 믿음을 표현한 것이었다.
서기 395년 데오도시우스(379-395년) 왕의 사망 후 왕국은 그의 두 아들, 로마의 서쪽 편을 통치하는 호노리우스(Honorius:395-423년)와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쪽 편 로마를 통치하는 알카디우스(Arcadius:395-408년)에 의해 두 개의 제국으로 분할되었다. 서로마는 다음 세기에 바바리안 족(독일)에 의해 476년 멸망되고 동로마만 남게 되어 이때부터 동로마제국은 비잔틴제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스탄불 지하철 내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비잔틴의 황제:527~565 재위). 527년 왕위에 오른 유스티니안 황제는 이 도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일리리아 사람으로 농민 집안 출신이며 유스티니아누스라는 로마식 이름은
삼촌이었던 유스티누스 1세 황제에게서 딴 것이고 그의 출세는 삼촌의 덕택이었다. 젊었을 때 그의 삼촌이 고위 군 사령관직을 맡고 있던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훌륭한 교육을 받았지만 항상 그리스어의 악센트를 잘못 발음했다고 한다. 518년에
유스티누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 황제의 총애를 받는 조카로서, 나이 들고 자식이 없는 삼촌의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주도했다. 법적으로 유스티누스의 양자로 입양되었으며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525년에 부황제(caesar)의 칭호를
받았으며 527년 4월
4일 공동 황제(augustus)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여배우 출신으로 그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부인 테오도라는 황후가 되었다. 527년 8월 1일
유스티누스 1세가 죽자 그를 계승해 단독 황제가 되었다)
(등극한지
5년 만에 니카(Nika) 독직행위를 뿌리뽑고 빈부에 상관없이 기득권을 축소시키려던
정부의 시도는 가난한 사람에게도 부자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532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니카 반란'(니카란 경기장에서 응원하는 소리로 '무찔러라', '이겨라'라는 뜻)이 일어나 대중적 불만이 가장 극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 녹색당과 청색당이라고 알려진 콘스탄티노플의 정파들이 연합해 시장 사무실과 공공건물을
비롯해 황궁과 거기 인접해 있는 '신성한 지혜의 교회'
일부까지 공격을 가하고 불을 질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경기장에 모여 시장과
유스티니아누스의 두 각료인 요한네스와 트리보니아누스의 해임을 요구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 요구에
동의했으나 군중들은 이제 통제를 벗어나 특정한 이권집단들에게 이용당하는 것 같은 상황이었다. 다음날
전황제 아나스타시우스의 조카 히파티우스가 황제로 선포되었으며 몇몇 원로원 의원들의 지지를 받았다.
군중들과 제위 찬탈자는 경기장에 집결했다. 이 시점에서
2가지 요소가 작용해 유스티니아누스를 구원했다. 테오도라가 그를 설득해 자기 입장을
굽히지 않도록 했으며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벨리사리우스와 문두스 같은 장군들이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모아 경기장의 군중들에게 단호하게
맞섰다. 그들은 나르세스의 도움을 받아 우위를 차지했으나 반란군중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희생을
치렀다. 히파티우스는 처형당했다. 이 봉기로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 자리에서 쫓겨날 뻔했다. 반란에 의해 도시는 크게 파괴되고 수 많은 인명을
잃었다. 이 반란 후 유스티니안 황제는 재건에 착수하여 불과 몇 년 후 콘스탄티노플은 지구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도시가 되었다. 유스티니안 황제의 가장 큰 업적은 고대 도시의 하나의 상징 같은
성소피아 성당의 재건이었다. 이 당시(565년) 동로마제국의 영토는 유프라테스로부터 지브랄타 해협까지 뻗쳤다)
그랜드바자르 시장 풍경
유스티니안 이후 페르시안, 아랍, 그리고
슬라브 족 등 많은 부족들의 침략이 있었고, 1071년에 셀죽 터키에게 동부 소아시아 지방을
내어주고, 같은 해에 게르만 족들에게 이탈리아를 내주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동안(1097년) 서유럽의 라틴족들에 의해 위협 받기 시작했고, 제4차 십자군 원정에서 콘스탄티노플이 공격 받았으며, 그 다음
해인
1451년 술탄 메흐멧(Sultan Mehmet)2세가 왕위에 올라 콘스탄티노플 점령 준비를 시작했으며,
1453년 4월 첫 주일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시의 성벽 앞으로 진격하였다.
그로부터 7주간의 포위가 시작되었고 비잔틴제국과 이탈리아 동맹군은 숫자적으로
330년부터 1453년까지 실로 1123년간 콘스탄티노플은 비잔틴 제국의
수도였지만 막을 내리게 된다.
정복자는 그의 병사들에게 3일 간의 약탈을 허락하고 즉시 시의 재건을 시작, 1년 후에 3번째의 언덕 위에 궁전을 지었다. 20년 후에 그는 두 번째로 톱카프(Topkapi) 궁전을
지었다.
1470년에 정복자의 모스크라
하는 사원을 지었으며, 이 사원은 모든 것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시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터키족, 그리스족 그리고 아르메니아인들을 소아시아와
트레이스(발칸반도 동부에 있는 고대 국가)로부터
데려왔고, 1492년, 스페인으로부터 수 많은 난민을
받아들였다. 이들은 대부분 이스탄불에 정착하여 이스탄불은 다시 한번 번창하고 인구가 많은 거대한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16세기 중반 오스만제국은
가장 강대하여 유스티니안의 제국 정도의 영토를 가졌다.
슐레이만 대왕때(1520-1566) 12개 이상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점령지로부터
약탈하거나 거두어들인 세금으로 굉장한 부를 가진 왕국이 되었다. 이 당시 많은 모스크와 궁전이
세워졌으며,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건물은 유명한 건축기사 시난(Sinan)에 의해 1557년에 세워진 슐레이마니예(Suleymaniye) 모스크로써 오스만제국의 황금시대를 상징한다.
슐레이만 이후에 왕국의 쇠퇴가 보이기 시작하여 모슬렘과 기독교로 이루어진 왕국 내 타락의 징조 및 왕실의 실정으로 정부 관리들이
부정부패에 빠져 있었다. 16세기 말 경에는 사실상 왕국은 왕의 어머니나 처첩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18세기
말엽에 유럽 제국과의 싸움에서 모욕적인 군사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발칸반도 쪽의 큰 영토를 포기해야 했다.
왕국은 무정부 상태와 폭동으로 약체가 되었고, 독립의 꿈을 살찌우고 있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사회적, 정치적인 소요를 이끌게 되었다. 그 후
오스만제국은 불란서혁명과 같은 서구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1876년에는 오스만 헌법이 공포되고
국회가 수립되기에 이르렀다. 1910년 대에는 터키는 세계대전의 패전국에 끼게 되었고 승전국들은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나눠 가지기 위해 진격했다. 1919년 그리스의 침공 시에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장군이 그들을 격파하고 영토를 보존할 수 있었다.
1922년 터키는 독립되고 오스만 왕국은 종말을 고했으며,
갈라타다리 근처의 고등어 케밥
유럽 지구에 전체주민의 3/4 이상이 거주하며, 주요 상사·호텔·사무실
등이 집결되어 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옛 도시(Stamboul) 안에는 비탈이 가파르고 꼭대기가 평평한 7개의 구릉이 있는데, 이곳은 가장 중세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좁은 해협인 골든혼(Golden Horn) 건너편에
자리잡은 베이욜루는 이스탄불 시의 현대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구역으로, 극장과 수많은 터키 정부청사들이
들어서 있다. 이스탄불의 기후는 아열대 및 지중해성 기후로서 연평균기온은 14℃, 연강수량은
760~900㎜이다.
터키의 제조업 공장들 가운데 약 1/3을 수용하며, 주요공업으로 섬유·시멘트·유리·가죽제품 제조업과 담배 가공업,
자동차 및 트럭 조립, 인쇄, 조선 및
선박수리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많은 대규모의 터키은행과 외국 보험회사들이 시내에 자리잡고
있으며, 관광업이 중요한 수입원이다.
커다란 역사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도시로서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수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다.
터키 글씨의 예술로 표현한 국기
고대에 세워진 많은 그리스도교 교회의 상당수가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며 더러는 모스크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들 중 가장 큰 것은 하기아소피아 로서 1453년 모스크로
바뀌었다가 1935년에 박물관이 되었다.
하기아소피아는 터키어로는 Ayasofya. 성 소피아 사원, 신성한 지혜의 교회(Church of the Divine Wisdom)라고도 함.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지휘로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진 교회.
매우
독특한 이 건물은 세월이 흐르면서 파손되기도 했지만 세계적으로 위대한 기념물로 평가된다. 돔을 올린
바실리카 양식이며 놀랍게도 6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지어져
537년에 완공되었다.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투스의 이시도루스가 설계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톱카프 궁전에는 문서·도기·갑옷·직물 등 터키의 중요한 수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곳은 수세기 동안 터키의 문화 중심지였다. 새로 생긴 문화시설에는 1969년 예술 센터로 개관된 아타튀르크 문화궁전이 있으며, 여러
학술단체와 연구소·박물관·도서관 등도 있다.
터키 최대·최고(最古)의 고등교육기관인 이스탄불대학교가 있으며, 그밖에
이스탄불공과대학교, 마르마라대학교,
보스포루스대학교, 미말시난대학교, 을디즈대학교
등이 있다. 철도를 통해 동서 유럽 및 중동의 시리아·이라크와 연결된다. 이스탄불 시의 유럽 지구와 아시아 지구를 잇는
보스포루스 다리(길이 1,073m)는 세계에서 가장 긴
고속 현수교들 중의 하나이다.
오후의 태양이 위스키달 이라는 노래로 유명한 아시아 민요의 마을 창문들이 보스포루스 해협에 반사가 된다. 이스탄불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육상 실크로드의 끝이고 해상 실크로드의 시작이었다. 북아프리카나 로마에서 실려 온 물품이 이곳에서 아시아 실크로드 종착지로서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금도 대 시장인 그랜드바자르(카팔르차르시)는 4000여개의 상점들이 밀집되어 있다.
이렇듯 피부색이 다른 여러 모습의 민족들, 수많은 종교와 사상, 신화가 이스탄불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하나가 되면서 공존과 화해라는 참 문화를 일구어낸 것이다.
이스탄불은 서양의 품 안에 요염하게 안긴 동양의 자태로 오늘도 여러 회원님들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스탄불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호쉬겔디니즈!
터키
이스탄불에서 터키지기 필자 (turkhan@hanmail.net)
다음카페-터키 길라잡이 (http://cafe.daum.net/turkhan)
이스탄불 황혼
'* 유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수원정모] 수원은 좀 특별합니다.. ^^ (0) | 2006.05.02 |
---|---|
[스크랩] 신의 걸작품 요정의 바위 카파도키아 지역 (0) | 2006.05.02 |
[원더풀! 세계의 비경]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물의 도시’ (0) | 2006.04.06 |
[스크랩] 바이칼호 (0) | 2006.03.22 |
[스크랩] 지중해 크루즈 (0) | 2006.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