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이여, 총부리를 착취자에 돌려라” | |
광복60돌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열전 ⑥ 최초 여성 사회주의자 김알렉산드라(1885~1918) | |
이본영 기자 | |
한인사회당 결성·한인 적위대 조직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은 극동에도 곧 전파돼 소비에트 권력이 섰지만, 이후 혁명군(적군)-빨치산 대 백군(반혁명군)-외국간섭군은 극동시베리아를 놓고 1922년까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혁명세력에 쫓겼다가 1918년 9월4일 하바로프스크에 입성한 칼미코프 장군의 백군은 복수극을 시작했다. 다음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악사들이 처형당하고, 그로부터 11일 뒤 ‘한인 최초의 여성 사회주의자’ 김알렉산드라(1885~1918)가 같은 곳에서 총살당했다. 1차대전 뒤 혁명의 물결에 뒤덮인 유라시아대륙 동서에서는 약소민족 출신 두 여성의 뜨거운 삶이 찬 강물 속으로 던져졌다. 김알렉산드라의 처형 4개월 뒤, 스파르타쿠스단을 이끌며 독일 혁명을 시도한 유대인 로자 룩셈부르크(1870~1919)의 주검은 군인들에 의해 베를린 운하에 내던져진다. 김알렉산드라는 연해주 우수리스크 근처에서 함경북도 출신 김두서의 딸로 태어났다. 만주 철도 건설현장 통역관을 지낸 아버지한테서 물림을 받은 김알렉산드라는 여러 나라 말에 능통했다. 아주 어릴 때 어머니를 잃은 그는 10살 때 아버지마저 여의고 아버지 친구인 폴란드인 스탄케비치에게 맡겨졌다.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학교를 마치고 교사로 일하던 김알렉산드라는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했다. 1914년 이혼한 김알렉산드라는 우랄산맥 벌목장 통역으로 일하게 된다. 한·중·러 노동자들의 체불임금을 받아주기도 하며 신망을 얻었고, 1917년 초 러시아사회민주당에 들어갔다. 그 해 7월 블라디보스토크로 온 김알렉산드라는 중국과 한국 출신 노동자, 1차대전 전쟁포로 등을 상대로 혁명을 선전하는 일을 전개한다. 이듬해에는 하바로프스크 시당 서기와 회계, 극동소비에트 외무위원직을 맡는다.
그러나 이들의 희망에 찬 날들은 오래가지 않았다. 연해주에 상륙한 일본군 등 외국간섭군의 지원에 힘입은 백군이 한인 적위대를 포함한 혁명세력과의 시가전 끝에 하바로프스크를 탈환했기 때문이다. 1918년 9월10일 마지막까지 남았던 소비에트 간부들은 기선에 올라 아무르강 상류를 향해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백군 포함에 나포된다. 김알렉산드라를 주시해오던 일제는 자국민임을 주장하며 백군에게 그의 체포를 요구했다고 한다. 김알렉산드라는 심문에서 러시아혁명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조선 인민은 러시아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혁명에 성공할 때에만 자유와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인사회당 중앙위원을 지낸 이인섭은 그가 조선의 13개 도를 상징하는 열세발자국을 걸은 뒤 총탄을 맞았고, 그 뒤 하바로프스크 시민들은 오랫동안 아무르강에서 낚시를 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하바로프스크/글·사진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박물관서 창고로…사라져가는 흔적들
사진·유물 전시 이젠 볼 수 없어
극적인 삶을 산 김알렉산드라의 족적은 러시아 극동 혁명사에서 여러 모로 기릴 가치가 있다. 그의 두 아들 중
첫째는 어머니의 처형 뒤 입양돼 나중에 중앙아시아로 이주했고, 작은 아들은 2차대전에 소련군으로 참전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혁명전쟁이 끝난 1923년 하바로프스크 향토박물관(현 극동국립박물관)에는 김알렉산드라를 기념하는 공간이 마련됐다고
한다. 스탈린시대에 이 공간이 없어졌다가, 언제부터인지 다시 김알렉산드라와 한인 빨치산들의 사진 및 유물들이 전시돼 수년 전까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그들의 흔적은 박물관에서 밀려나, 쉽게 찾을 수 없는 창고로 향했다고 박물관 직원은 전했다.
이런 변화에 대해 김세르게이 전 하바로프스크공대 역사학부장은 “시대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주의 전통을 달가워하지 않는 풍토가 낳은 장면이라는 얘기다.
하바로프스크의 옛 칼마르크스 거리 22번지에는 김알렉산드라가 처형되기 전까지 일하던 3층짜리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현재 은행 등이 들어서 있다. 건물 외벽에는 러시아혁명 50주년을 맞아 김알렉산드라의 얼굴이 동판 부조로 부착됐지만, 최근의 새단장
공사로 찾아볼 수 없었다.
극동국립박물관의 세르게이 샤프첸코는 “리모델링이 끝나면 다시 붙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건물이 자리잡은 과거의
칼마르크스 거리는 일부만이 옛 이름을 달고 있고, 나머지에는 제정러시아의 극동 시베이라 총독 무라비예프 아무르스키의 이름이 붙었다고 기자의 현지
안내를 맡은 고려인 동포가 일러줬다.
하바로프스크에는 아무르스키 거리에 잇닿은 김유천 거리가 있다. 김유천은 1921년 빨치산으로 내전에 참여했고,
이후 한인들로 조직된 소련군 76연대의 중위로 1929년 중국 만주 군벌과의 국경 싸움에서 전사한 인물이다.
하바로프스크/글·사진 이본영 기자
“러 사회주의가 성공해야 조선 독립하리란 신념에 러 한인
투사들 몸 던져”
김세르게이 교수
2년 전 퇴임한 김 교수는 그러나 방대한 자료들이 문서고에 있는데도 자신은 이미 늙었고, 후학은 없다고 말했다.
“지금 60살만 됐어도 자료들을 수집해 큰 책을 쓸 수 있을 텐데…”라며 한숨을 쉬었다.
러시아혁명기의 한인 운동에 대해 김 교수는 한마디로 “‘러시아 사회주의가 승리해야 조선이 빨리 독립하고, 소비에트
주권이 확립되면 다음에는 소비에트가 조선 해방을 도울 것’이라는 신념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1918~22년 내전 기간에 극동지역 한인 중
10%인 1만명이 총을 들었는데, 이는 어느 민족보다도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이라는 게 그런 판단의 근거다.
김 교수는 김알렉산드라에 대해 “하바로프스크 소비에트정부에서 외무와 재정을 함께 맡을 정도로 유능했다”며 “그의
처형 때 일본군도 현장에 있었다”고 말했다.
많은 한인들처럼 김 교수도 가슴아픈 가족사를 가졌다. 1937년 연해주에서 강제이주당한 어머니와 7남매는 “운이
나빠” 중앙아시아 사막지대에 떨궈졌고, 몇 달 만에 어머니와 누이, 자신을 빼고는 풍토병 때문에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스탈린보다
지식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다 죽어 나가던” 1938년 5월 훈장 겸 한의사인 그의 아버지도 총살당했다. 이 때 각 도시에서 구금돼 있던 한인사회
지도자들이 잇따라 처형당했는데, 김 교수는 그 일의 정확한 과정이라도 밝히고 싶다고 했다.
그는 사회주의와 독립을 떼놓지 않은 한인 투사들을 말하면서는 현재의 편협한 구도로 역사를 보지 말자고 했다. 그는
“역사를 위조하지 말고, 사실에 근거해 옳게 분석하자”고 역설했다.
하바로프스크/글·사진 이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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