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우리 초가와 짚풀문화
경주 양동마을 산 너머 외따른 초가에 마실 갔던 할머니가 돌아오고 있다.
닳고 닳은 야트막한 언덕에 멀리 보이는 산자락을 배경 삼아 초가 한 채가 눌러앉았다. 날긋날긋 빛깔이 바랜 초가 한 채. 살림채는 말 그대로 세 칸짜리 초가삼간이고, 변변한 마루조차 내지 않은 집이지만, 둥그스름한 지붕은 뒷산을 닮았고, 흙벽의 빛깔은 들판의 황토밭과 어울렸다. 살림채 옆에는 헛간채가 바싹 다가앉고, 뒷간채는 마당 건너 멀찍이 비켜 앉았다. 뒷간 앞으로 성긴 나무 울타리를 에두른 텃밭에는 허리 굽은 할머니 한 분이 웃자란 배추며 무를 뽑느라 저녁해 가는 줄도 모른다. 1년 전 경주 양동마을 정순이 할머니(86)가 사는 초가에 들렀을 때, 내가 만난 풍경이다. 마치 그건 내가 코흘리개 시절로 돌아가 고향의 초가 마당을 어슬렁거리던 흑백사진 속의 풍경과 다를 게 없었다.
눈이 살짝 내린 순천 낙안읍성의 겨울 풍경.
집이란 단순히 거주공간에 그치는 것만이 아닌, 생활 미학의 한 실체다. 집은 당대의 생활상과 사회상이 다양하게 어우러지고 버무려진 문화지층이며, 세월의 풍경이다. 사실 초가는 지난 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에겐 가장 흔하고 보편적인 집이었다. 있는 사람들의 집이 기와집이었던 것에 비해 초가는 평범한 서민의 집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네 주거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기와문화가 아니라 초가문화였다. 초가문화는 한마디로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자연친화적인 문화요, 사치하지 않고 욕심 부리지 않는 소박한 문화요, 기와집처럼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평등의 문화요, 1~2년에 한번씩 지붕을 갈아주어야 하는 부지런함의 문화였다.
최초의 초가라 할 수 있는 움집.
‘오막살이’, ‘초가삼간’이란 말처럼 초가는 결코 화려하지도 않았다. 집을 지을 때조차 여러 명의 목수가 달라붙는 기와집처럼 시끌벅적, 요란하지도 않았다. 재료는 그저 주변에 널린 흙과 나무와 짚이면 되었다. 또한 초가집은 사람이 사는 집만이 아니었다. 굴뚝새도 살고, 지킴이 뱀도 살고, 굼벵이도 살고, 너도 살고 나도 살았다. 너도 죽고 나도 죽는 요즘의 주거 문화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자연과 인간과 생활이 공존공생해온 문화, 그것이 바로 초가문화였다. 그러나 70년대 들어 ‘초가집도 없애고’라는 새마을노래와 함께 출발한 새마을운동이 초가지붕을 함석과 슬레이트로 전면 교체하고 나서면서 초가문화는 뿌리째 뽑히기 시작했다.
문의 문화재단지에서 볼 수 있는 여막. 여막이란 과거 3년상을 치를 때, 임시로 기거하기 위해 무덤 옆에 지은 초가다.
바야흐로 풀(짚)과 흙과 나무의 문화가 콘크리트와 철골과 페인트의 문화로 교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체 높은 양반네의 문화가 정책적으로 보호되어 온 반면, 일반 서민의 기층문화는 이렇듯 정책적으로 파괴되어 왔다. 혹자는 민속마을이나 박물관에 전시된 초가를 보고, ‘초가도 보호돼 왔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이미 숨이 끊어진 문화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은 초가를 사냥하고 나서 사냥감을 자랑하기 위해 박제로 만든 전시용이나 다름없다. 내가 지난 10년간 파악한 것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 분포하는 초가와 샛집(억새지붕)은 대략 820여채, 이 중 민속마을을 제외한 초가와 샛집은 모두 합쳐 40여 채가 되지 않았다. 우리네 주거문화의 바탕인 초가문화는 그렇게 우리 생활과 역사 속에서 쓸쓸히 퇴장해버린 것이다.
병산서원에서 볼수 있는 달팽이형 통시.
과거 초가가 그토록 민초들로부터 사랑받았던 비결은 우선 자연과 어울린 농경문화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재료가 짚과 풀이었기 때문이다. 볏짚은 가볍기도 하거니와 단열(볏집 속의 구멍이 천연 단열재 노릇을 한다) 및 보온성이 뛰어나 사계절이 뚜렷한 이 땅의 기후에 잘 맞아떨어지는 재료였다. 우리 민족에게 짚이란 생명 또는 신격에 다름아니었는데, 아이를 낳았을 때 짚으로 금줄을 내거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이 죽었을 때에도 마지막 가는 길에 짚신을 놓았다. 심지어 새로 담은 장에도 짚을 둘렀고, 악귀와 질병, 액을 막을 때에도 어김없이 볏짚으로 만든 금줄을 둘렀다. 그만큼 짚을 신성한 것으로 여겼던 것은 아마도 그것이 쌀을 생산하고 남은 부산물이라는 점 때문일 터이다.
예산 정동호 초가의 짚가림 굴뚝(위). 애기똥색으로 빛나는 낙안읍성의 볏가리들(아래).
쌀이란 바로 우리 민족의 혼이나 다름없다. 우리의 조상이 이 땅에서 농경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도 쌀 때문이다. 볍씨를 뿌려 밥이 될 때까지 여든여덟 번의 손을 거쳐야 한다는 쌀! 그래서 한자로 쓰는 미(米)자를 팔십팔(八十八)을 합친 글자로 풀이하기도 한다. 우리 조상들이 무수한 외세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지켜낸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이 쌀을 지켜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소중한 쌀을 생산하는 볏짚이 더없이 신성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청풍문화재단지 가옥에 걸린 다양한 다래끼들.
옛날 우리가 흔히 쓰던 생활도구의 재료가 된 것도 대부분 짚과 풀이었다. 짚풀로 된 도구는 거의 모든 생활에서 쓰였으므로 그 종류 또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가마니, 멍석, 바구니, 삼태기, 동고리, 채반, 맷방석, 짚둥우리, 씨오쟁이, 두트레방석, 쇠신, 짚신, 용문석, 화문석, 바재기, 밧줄, 도롱이, 자리, 둥구미, 똬리, 망태기, 다래끼, 주루막 등등. 헤아려보면 한도 끝도 없다. 쌀농사를 가장 흔하게 지었던 까닭에 짚풀 중에서도 볏짚을 많이 이용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도 과거의 일반 서민들은 짚풀을 가지고 그저 단순한 도구가 아닌 보기에 좋고, 쓰기에 편한 도구를 수없이 만들어냈다. 짚풀문화를 일러 ‘서민문화의 꽃’으로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신안군 도초도에서 만난 둥근멍석.
현재 아산의 외암리 민속마을, 강원도 영월군 서면 쌍용리와 홍천군 두촌면 철정2리, 인제군 기린면 진동1리, 경북 문경시 동로면 적성2리, 청송군 청송읍 금곡동 등에서는 마을회관이나 경로당에서 여러 노인들이 모여 짚풀도구를 만들고 있으며, 경남 하동군 적량면 고절리와 하동읍 신기리 등에서는 소중한 짚신 만들기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또 전남 무안군 일로읍 산정리에 가면 새끼를 꼬는 마을을 볼 수 있고, 전남 화순군 북면 송단리에서는 복조리 짜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전북 무주군 설천면 배방마을에서는 인동초로 바구니를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박물관 중에서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짚풀생활사 박물관이 짚풀문화를 만날 수 있는 대표적인 박물관이다. 전남 함평군 나산면 상축리에서는 우리네 농기구와 짚풀 생활용품을 전시한 개인 전시관을 볼 수 있고, 강원도 영월군 서면에 자리한 ‘들꽃 민속촌’과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에 있는 ‘두루뫼박물관’에서도 온갖 짚풀도구와 잡동사니를 만날 수 있다. 한편 경기도 파주시에서는 해마다 짚풀문화 공예품 공모전을 열어 짚풀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부안 돌모산의 당산 옷입히기(위)와 용줄돌기(아래).
짚은 단순히 생활용품의 재료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신앙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 집안신을 모시던 집에서는 짚으로 터주가리를 만들어 집안의 재물과 운수를 맡아 보는 터주신의 신체로 삼았고, 몇몇 섬에서는 띠풀로 띠배를 만들어 풍어제를 지냈으며, 당산제 때는 새끼를 꼬아 용줄을 만든 뒤 당산에 두르고 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생활이 어려웠던 민초들은 죽어서도 관을 쓸 수 없어 짚가마니로 관을 대신한 ‘덕장’을 했고, 섬마을에서는 짚으로 이엉을 덮어 비바람을 가린 초분으로 가묘를 썼다. 과거 80년대까지 초분은 서남해 여러 섬 지역에 꽤 많이 분포하고 있었으나, 80년대 말부터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관청에서 초분을 비위생적인 장법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초분이란 것이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희귀한 유물이 돼 버렸다. 현재 초분은 신안군 도초도를 비롯해 증도, 영광군 송이도와 낙월도, 완도군 청산도 등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위도 띠뱃놀이에서 모선이 띠배를 끌고 먼바다로 나서고 있다.
특히 송이도에서는 학계에서도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것으로 보았던 ‘앉은초분’을 만날 수 있다. 앉은초분은 일반적인 초분에서 유골을 거두어 마치 가부좌를 튼, 앉은 사람 모양으로 뼈를 앉히고 그 위에 다시 짚으로 이엉을 덮은 것을 말한다. 일반적인 초분이 길다란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앉은초분은 작은 짚가리를 옮겨놓은 것처럼 위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모습이다. 모양으로만 보면 원추형 짚가리처럼 생겼는데, 높이는 약 1미터 정도이며, 그냥 초분과 마찬가지로 아랫자락에 돌멩이를 매달아 놓았다.
섬 특유의 임시가묘인 초분(위)과 이 땅에서 이미 사라진 것으로 보았던 앉은초분(아래).
유독 섬 지역에서 많이 초분을 모셨던 현실적인 까닭은, 옛날 대부분의 남자들이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갑자기 상을 당하는 경우, 상주가 없는 관계로 임시 무덤인 초분으로 대신했던 것이다. 고기잡이를 나갔던 자식이 돌아와 부모의 주검을 볼 기회를 주기 위한 셈이었다. 또한 과거에는 음력 섣달에 사람이 죽었을 때 땅을 파헤치면 지신이 노하고, 땅을 파헤치는 자에게도 해가 된다 하여 3년간 초분에 시신을 모셨다가 매장했다고 한다. 이렇게 매장된 묘에서 탈골된 뼈를 거두어 이장할 때에도 곧바로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달 동안 초분에 모시며, 이승바람을 쏘이게 한 뒤에야 이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이런 관습과 논리만으로는 별로 초분을 해야만 하는 당위성과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 실제로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초분을 할 필요가 이제는 없지 않느냐는 뜻을 내비쳤다. 오랜 전통과 습속으로 면면이 전해오던 초분문화가 당대에 이르러 대가 끊어지게 생긴 것이다. 글/사진: 이용한 http://blog.daum.net/bink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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