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의 눈발을 헤치고 연인이 나란히 쌍섶다리를 건너고 있다.
포근포근 눈이 내린다. 길가에 나앉은 집들도 저마다 지붕에 두툼한 눈을 푹 눌러썼다. 자꾸자꾸 눈은 내려 멀리 보이는 산도 하늘도 마을도 온통 하얀 눈 세상이다. 눈이 오는 날이면 강원도 영월하고도 주천에는 강을 가로지르는 섶다리에서 사륵사륵 눈 밟는 소리가 들려오곤 한다. 날리는 눈 속을 헤치며 누군가 한발한발 섶다리를 건너는 소리다. 주천 인근에서는 주천리와 판운리 두 군데 마을에서 섶다리를 볼 수가 있다. 주천리에 있는 섶다리는 쌍으로 다리를 놓은 쌍섶다리고, 판운리에 있는 섶다리는 하나만 다리를 놓은 외섶다리다. 섶다리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강을 끼고 자리한 양쪽의 강마을을 하나로 이어주던 흔하고 친근한 다리였다.
쌍섶다리가 있는 주천리의 아이들이 얼음이 언 강에서 썰매를 타고 있다.
그러나 경제개발과 도로건설로 웬만한 강마다 튼튼한 시멘트 다리가 생겨나면서 섶다리는 그 쓰임을 다하고 하나둘 사라져갔다. 지금 볼 수 있는 주천리와 판운리의 섶다리도 한때 사라졌던 것을 다시 옛날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주천에 쌍섶다리를 처음 놓은 것은 약 3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라에서는 강원관찰사(지금의 도지사)에게 특별히 억울하게 죽어간 단종을 추모하는 제사를 올리도록 했는데, 원주에서 단종이 묻힌 영월 장릉으로 가려면 반드시 주천강을 건너야 했다. 이 때 주천강을 사이에 둔 주천리와 신일리 사람들은 단종을 기리는 마음과 관찰사와 참배객이 주천강을 잘 건너도록 두 개의 섶다리를 놓았다. 지금도 주천에는 쌍섶다리를 놓을 때 “에헤라 쌍다리요/나무꾼은 나무 베고/장정은 다리 놓고/에헤라 쌍다리요” 하면서 부르던 <쌍다리 노래>가 전해오고 있다.
지게를 지고 사륵사륵 판운리 섶다리를 건너고 있다.
주천리에 쌍섶다리가 있다면, 주천에서 고갯마루를 넘어가 만나는 판운리에는 외섶다리가 있다. ‘솔갑다리’라고도 불리는 이 섶다리는 구불구불 마을을 휘돌아나가는 평창강 줄기를 가로질러 얼금설금 지네발처럼 서 있다. 판운리에서는 옛날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마을 사람들이 다같이 모여 버드나무를 베어다 다릿목을 강바닥에 세운 뒤, 그 위에 튼튼한 소나무를 얹어 다릿몸을 만든 뒤, 솔가지를 가지런히 펴서 위에 얹고, 뗏장을 떼다 흙과 함께 덮어 해마다 섶다리를 놓았다. 이 일은 수십여 명의 일손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판운리에서는 해마다 품앗이처럼 마을의 젊은이들이 모두 나와 이틀에 걸쳐 섶다리 놓는 일을 ‘마을축제’의 하나로 이어오고 있다.
인적 끊긴 뇌운계곡 상류에 외롭게 놓인 나무다리.
본디 섶다리는 이듬해 얼음과 눈이 녹아 봄 장마가 지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마련이지만, 판운리에서는 봄 장마 이전에 다릿목과 발판을 거두었다가 날이 추워지면 다시 내어다 썼다. 이 곳의 섶다리는 판운리의 중심마을인 밤뒤 마을과 강 건너편 마을 미다리(뫼다리)를 잇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미다리’라는 땅이름도 섶다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겨울이면 섶다리를 놓고 장마철이면 이 섶다리가 떠내려가 ‘다리가 없는’ 때가 많아 ‘다리가 없다’는 뜻에서 ‘미다리’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섶다리’라는 이름은 풋나무나 물거리를 일컫는 ‘섶나무’를 엮어서 만들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섶다리란 것이 여기저기 세운 버팀목에다 얼기설기 나무와 솔가지를 얹은 뒤, 뗏장을 덮은 것이라 그리 튼튼하지 못했으니, 장날이나 잔칫날 마을 사람들이 술 한잔 걸치고 오는 날이면 누군가는 어김없이 다리에서 떨어지는 일이 생기곤 하였다.
평창강과 주천강이 만나 서강을 이루는 선암마을 한반도 절벽의 겨울 풍경.
옛날 강마을에는 섶다리와 함께 나무다리라는 것도 있었다. 지금도 판운리에서 평창강을 거슬러 더 올라가 만나는 뇌운계곡에 가면 이 나무다리를 볼 수가 있다. 섶다리와는 또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이 나무다리는 소나무를 잘라만든 통나무를 여러 개 뗏목처럼 잇대어 놓은 다리로 그 길이가 30여 미터에 이른다. 섶다리가 품이 많이 들어가는 다리인 반면 나무다리는 다릿목을 세우고 그 위에 긴 통나무를 여러 개 질러놓으면 되는 것이어서 상대적으로 간편한 다리였다. 이런 나무다리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동강이나 평창강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었지만, 역시 마을에 튼튼한 시멘트 다리가 놓이면서 하나둘 사라지고 말았다.
선암마을의 기울어가는 건조실, 기울어가는 농촌의 현실.
섶다리가 있는 판운리에서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면 평창강이 주천강과 만나 서강으로 한몸이 되는 옹정리 선암마을이 나온다. 선암마을은 최근 한반도 모양의 절벽이 있는 마을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선암마을 앞산에 올라 이 절벽을 보고 있으면 ‘아!’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나온다. 산에서 내려다본 한반도 절벽은 그야말로 위성에서 내려다본 한반도의 모습과 꼭 빼닮았다. 심지어 호미곶의 툭 삐져나온 꼬리까지 고스란히 닮아 있다. 그러나 최근 한반도 절벽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시멘트로 전망대를 만들어놓는 바람에 옛날의 자연스러운 운치는 덜한 편이다.
그냥 방치해둔 감나무에 눈과 추위에 언 감들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다.
한반도 절벽을 간직한 옹정리 선암마을은 청정 서강의 출발점이요, 서강 풍경의 백미라 부를만한 곳이다. 현재 선암마을에는 모두 열 가구가 살고 있다. ‘선암’이란 이름답게 이 곳은 풍수를 따져 보더라도 활짝 핀 연꽃 속에 마을이 들어앉은 모양을 하고 있어 ‘승지’라 할만하다. 석회암 지대이긴 해도 땅이 비옥해 농사 또한 옹골차다. 주민들의 인심도 경치만큼이나 좋아서 가는 이 오는 이 모두 선암에서는 이웃사촌이나 다름없다. 만일 선암마을에 들르게 된다면 강변 나루에 나가 서강을 느적느적 가로지르는 줄나룻배에 올라 천천히 강을 건너볼 일이다. 만일 얼음이 꽝꽝 얼어 건널 수 없다면, 어린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썰매를 타도 좋을 것이다.
* 글/사진: 이용한 http://blog.daum.net/bink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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