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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뉴욕커

48세의 여성 앵커 쿠릭, 미국의 저녁을 뜨겁게 달군다


만년 3위 CBS 시청률을 1위로 끌어올려…지난 봄 연봉 1500만달러 받고 NBC서 옮겨와 푸근하고 친근한 인간적인 면이 크게 어필…‘세계를 변화시킨 인사 100인’에 뽑혀

 


요즘 뉴욕에서 가장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뉴요커는 한 여성 앵커다. 케이티 쿠릭(Katie Couric). 48세의 이 여성 앵커가 미국 사상 처음으로 첫 저녁뉴스 여성 단독 앵커로 활약하기 시작하면서 TV 저녁뉴스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3대 공중파 방송은 NBC·ABC·CBS. 이 가운데 맨해튼 49가 록펠러센터에 위치한 채널 4의 NBC는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당당한 1위 방송이다. 참신한 프로그램과 세련된 구성이 1위의 비결이다. 중산층을 겨냥한 NBC의 전략은 적중해 다른 방송사들과 시청률 격차를 보이고 있다.

▲ 케이티 쿠릭
케이티 쿠릭은 바로 이 NBC의 대표적 아침 토크쇼인 ‘투데이’의 진행자 출신이다. 그녀는 아침마다 밝고 세련된 디자인의 응접실 세트에서 남성 파트너 맷 라우어와 함께 다양한 뉴스와 저자 인터뷰, 조리법, 날씨 등을 시청자에게 전달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쿠릭은 버지니아 대학을 나와 1979년 ABC뉴스 워싱턴 지국에서 취재보조원으로 방송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1984년에 미국 마이애미 지역의 방송 리포터와 CNN을 거쳐 1989년부터 NBC 뉴스에서 일해왔다.

‘투데이’의 진행을 맡은 것은 1991년. 이후 15년 동안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투데이’를 미국의 대표적인 아침 토크쇼로 키워놓았다.

쿠릭의 성공 비결은 시청자에게 푸근하고 친근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화장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외모가 인간적인 모습으로 시청자에게 먹혀 들고 있다. 맨해튼 주민인 톰 타이터스는 “쿠릭은 옆집 이웃 같은 친절하고 푸근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미국인이 좋아한다”고 말했다.

쿠릭의 개인적인 비극도 시청자에게 어필하는 요소다. 그녀는 남편 제이 모너헌을 대장암으로 잃었다. 그래서 대장암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자신이 직접 내시경 검사를 받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중계하기도 했다.

안타까운 뉴스가 나오면 가끔 눈물을 훔쳐 시청자의 심금을 울리고, 결혼식에서 도망간 신부를 집중적으로 인터뷰하는 색다른 시도도 했다. 미국인들은 두 딸의 어머니로서 가정적인 그녀의 모습을 ‘미국의 건설 과정에서 꿋꿋이 일하면서도 가정을 지켜온 전형적인 미국 어머니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소박한 쿠릭’이 지난 봄 NBC와 계약기간이 끝나면서 CBS 저녁뉴스의 단독 앵커로 옮기자 미국은 발칵 뒤집혔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 저녁뉴스 방송은 매일 2500만명이 시청하고 4억달러의 광고수입이 발생하는 큰 시장이다. 그래서 NBC·ABC·CBS 등 방송사들은 간판앵커를 내세워 시청률 경쟁을 벌여왔다.

지난 8월까지만 하더라도 NBC의 브라이언 윌리엄스가 하루 평균 880만명의 시청자를 확보, ABC(800만명)와 CBS(730만명)를 따돌렸다.

 


CBS 저녁뉴스는 1962년부터 지금까지 전설적 앵커였던 월터 크롱카이트와 댄 래더가 진행하면서 CBS의 간판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으나 지난 10여년 동안은 시청률이 하락하면서 3위의 설움을 받아왔다.

주요 시청자층에 노인이 많아 ‘노인방송’으로까지 불리게 되자 거액을 들여 쿠릭을 영입하면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 것이다. 쿠릭이 받는 연봉은 1500만달러. ABC의 피터 제닝스(1000만달러), NBC의 브라이언 윌리엄스(400만달러)보다도 훨씬 많다. 그녀는 NBC 측에서 연봉 2000만달러와 함께 ‘투데이’에 잔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CBS로 옮겼다. 미국 방송 사상 첫 여성 앵커가 되겠다는 야심 때문이다.

CBS가 쿠릭을 영입한 것은 더 밝아진 분위기와 현대적인 세트, 정교한 그래픽 등으로 젊은층과 여성층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젊은층은 브랜드 이름이나 새로운 광고에 관심이 많고, 여성은 구매 결정권을 갖기 때문에 광고주의 주요 공략 대상이다. 따라서 ‘투데이’에서 산뜻하고 명랑하며 다정한 이미지를 구축한 쿠릭이 이러한 젊은층과 여성층의 시청자를 끌어와 광고단가를 높일 것이라고 CBS는 계산하고 있다.

CBS는 쿠릭의 영입에 이어 1000만달러가 넘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 대대적인 홍보작전을 벌였다. 뉴욕 시내를 운행하는 모든 버스에 쿠릭의 얼굴이 들어간 홍보물을 부착하고,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자체 연구센터에서 NBC와 ABC에 맞설 수 있는 독특한 캐릭터 창출 작업을 했다. 미국 방송사상 처음으로 저녁뉴스를 인터넷으로 실시간 중계하는 시스템도 도입했다. 그녀의 포스터 사진이 ‘포토샵’으로 9㎏ 이상 빠진 날씬한 모습으로 재포장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조작논란이 일기도 했다.

미국 방송계에서 여성 앵커의 수가 적은 것은 아니다. 미국 라디오·TV 뉴스 제작자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TV뉴스 앵커의 57%가 여성이다. 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한 학생의 3분의 2도 여성이어서 여성의 앵커 비율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또 남녀 공동진행의 관행을 깨기 위해 여성 2명을 메인뉴스 앵커로 내세우는 등의 새로운 시도도 진행되고 있다. 과거 여성의 사회진출 확대에 맞춰 바버라 월터스(ABC)와 코니 정(CBS), 엘리자베스 바거스(ABC)와 같은 여성 앵커들이 명성을 얻었지만 이들은 모두 남성 앵커와 공동으로 진행했었다.

따라서 케이티 쿠릭이 저녁뉴스의 단독 앵커로 나선 것은 미국 TV사상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는 것으로 방송계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단독 앵커에 선정되고 나서 쿠릭은 두바이 경제를 이끌고 있는 셰이크 모하메드 막툼 왕자, 시각장애인 중국 인권운동가 천광청 등과 함께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지난 5월 선정한 ‘세계를 변화시킨 정계·재계·종교계·학계의 영향력 있는 인사 100명’에 뽑혔으며, 포브스지가 지난 8월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명’ 중 54위를 차지했다.

쿠릭의 데뷔는 일단 성공적이다. 9월 5일 첫 방송에서 그녀는 CBS의 전설적 앵커인 월터 크롱카이트의 소개를 받은 뒤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어 기쁘다”며 아프가니스탄 특파원의 탈레반 인터뷰를 첫 소식으로 전했다. 또 최근 ‘배니티 페어’의 표지로 등장한 영화배우 톰 크루즈의 갓난 딸 수리의 사진에 대해 언급하며 관심을 끌었다.

이날 CBS 방송의 저녁뉴스는 1360만명의 시청자를 끌어들여, NBC(78 0만명)와 ABC 월드뉴스(760만명)를 압도했다. 만년 3위가 쿠릭의 활약으로 1998년 2월 16일 이후 가장 많은 시청자를 확보하면서 시청률 1위로 뛰어오른 것이다. 저녁뉴스 광고주들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25~54세 시청자들이 3대 방송 진행자 가운데 쿠릭에게 가장 큰 호감을 나타냈다는 여론조사도 CBS를 고무시키고 있다.

케이티 쿠릭의 등장으로 NBC의 톰 브로코, ABC의 피터 제닝스, CBS의 댄 래더가 1980년대부터 20년 이상 지배해 온 저녁뉴스는 브라이언 윌리엄스, 찰스 깁슨, 케이트 쿠릭의 3파전으로 세대교체됐다. 미국 방송계의 관심은 케이티 쿠릭이 돌풍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에 쏠려 있다.

 

 

 

 

 

90세 바텐더 호이 웡 “오래 살려면 술 끊고 돈 걱정 하지 마라”


홍콩 출신으로 58년간 현역에 종사,“일이 곧 운동… 나의 사전에 은퇴는 없다”
마릴린 먼로ㆍ주디 갈란드ㆍ보브 호프ㆍ윈저공ㆍ
헨리 키신저ㆍ앤터니 퀸 등 단골 손님

 


▲ 90세 바텐더 호이 웡
나이는 90세. 그러나 은퇴는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다. 그에게는 아직 할 일이 많다. 자신을 믿고 찾는 고객을 위해 술을 섞어야 한다.

뉴욕 맨해튼 타임스스퀘어 부근의 알곤킨 호텔의 바텐더 호이 웡(Hoy Wong)은 뉴욕의 최고령 바텐더다. 바텐더 생활을 벌써 58년째 하고 있지만 은퇴할 나이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실제로 호리호리한 체격의 그는 90세보다는 훨씬 젊어 보인다.

웡은 홍콩 출신이다. 홍콩이 일본에 넘어가기 직전인 1940년에 가족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했다. 그의 나이 24세 때다. 2년 뒤인 1942년에 그는 새로운 삶을 찾아 뉴욕으로 옮겼다. 다음해에 미군에 자원, 1946년까지 인도와 중국에서 근무했다.

그가 영어를 배운 것은 미군 부대에서다. 1945년 중국 광둥지역에서 급식 담당 하사관으로 일할 당시의 추수감사절 메뉴를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당시 식단표에는 구운 닭고기, 설탕에 졸인 고구마, 옥수수 등이 적혀 있다.

1946년에 뉴욕으로 돌아온 웡은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다 2년 뒤에 바텐더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은 사라진 맨해튼 최초의 호화 중국 식당 ‘프리맨 첨’이 바텐더로서의 첫 직장이다. 거기서 웡은 마릴린 먼로, 주디 갈란드, 제리 루이스, 딘 마틴, 보브 호프 등 유명인사들을 만났다. “모두 멋진 사람들이었다”고 회고한다. 명사들은 웡을 ‘미스터 호이’라고 불렀다.

▲ 단골 손님이었던 마릴린 먼로(왼쪽)와 영국의 윈저 공.(오른쪽)
마릴린 먼로는 매주 수요일마다 점심을 먹으러 왔다. 점심을 먹을 때 씁쓸한 맛의 마티니를 한 잔씩 했다. 주디 갈란드는 독한 술을 좋아했다. 구석에 앉아 매우 슬픈 표정으로 조니워커 레드를 마시던 그녀는 칵테일 잔을 내려놓지 않고 항상 손에 들고 있었다. 웡은 “주디는 매우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고 회상한다.

야구선수이자 마릴린 먼로의 남편이었던 조 디마지오는 매주 토요일 저녁에 와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주디 갈란드와 마찬가지로 조니워커 레드와 소다수를 마셨다. 한번 앉으면 4~5시간씩 자리를 지켰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방해받고 싶지 않은 듯 혼자 조용히 앉아 있는 스타일이었다. 영화배우 대니 케이는 남들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해 모자 달린 외투를 입고 왔다.

웡은 1979년부터 알곤킨 호텔로 옮겨 27년째 일하고 있다. 알곤킨 호텔은 1920년대 재즈 시대에 도로시 파커와 해럴드 보스 등 예술가들이 모여 잡담을 늘어 놓던 호텔이다. 이 유서 깊은 호텔에서 웡은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관을 버린 영국의 윈저공(公) 등 유명한 사람을 만났다.

한번은 영화배우 앤터니 퀸 옆에 앉은 여성이 너무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고 했다. 존 레넌과 헨리 키신저는 알곤킨 호텔의 블루바에서 스카치 위스키를 즐겨 마셨다.

 

웡이 가장 자부심을 느낀 사건 하나. 1961년 윈저공이 프리맨 첨을 찾았다. 그는 수석 바텐더에게 영국 상원의원들이 축배(toast)용으로 마시던 스타일의 마티니를 원했다.

그러나 수석 바텐더는 그 말을 잘못 알아듣고 부하인 웡에게 부엌으로 가서 토스트를 만들라고 했다. 웡은 윈저공이 원하는 것은 마티니에 레몬을 넣은 뒤 성냥불을 붙여 마시는 화주(火酒)라는 것을 알아챘다. “윈저공은 그것을 마신 뒤에 매우 좋아했어요. 한 잔 마신 뒤에 다시 한 잔 마셨죠.”

나이가 구십이 됐지만 웡의 자세는 전혀 흔들림이 없다. 중국식 악센트가 섞여 있는 말에는 에너지가 넘친다. 손님에 대한 정성도 변함이 없다. 마릴린 먼로와 주디 갈란드, 윈저공에게 보여준 성의와 능숙한 칵테일 솜씨는 다른 손님에게도 그대로 제공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뉴욕도 많이 변했다. 거리에는 사람이 늘어나고 웡보다 젊은 청년들이 바를 찾고 있다. 하지만 웡에게는 과거의 기억이 선명하다. “옛날에는 뉴욕의 물가가 지금보다 훨씬 낮았어요. 제 봉급도 지금보다 적었죠. 10달러만 있어도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수 있었어요. 영화도 보고 저녁식사도 함께 하고요. 그래도 잔돈이 남았죠.”

웡이 처음 바텐더 생활을 시작했을 때 월급은 45달러였다. 그는 일주일에 6일 반을 일했다. 일요일에는 오후에만 일했기 때문에 6일 반이다. 6일 동안은 매일 12~14시간의 중노동이었다. 당시 칵테일 한 잔 가격은 1달러. 스카치 위스키 한 잔은 75센트였다. 손님들은 웡과 14세기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신대륙 발견, 칭기즈 칸 이야기 등을 주고받고는 팁을 놓고 갔다.

지금은 임금이 많이 올랐다. 1시간에 23달러를 번다. 일은 아직 일주일에 5일씩 한다. 하루 8시간 근무하는데 근무시간 내내 서서 일하고 때로는 혼자서 바를 맡아 손님 시중을 든다. 그의 일은 40~50대 ‘젊은이’의 체력을 요구한다. 그래서 체력관리는 웡이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웡은 매일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맨해튼 집 주위에서 동네를 한 바퀴 돈다. 그리고 다시 집에 가서 낮 12시30분까지 잔다. 점심을 먹고 잠깐 눈을 붙인 다음 오후 3시15분쯤 출근한다. 퇴근 시간은 자정 무렵이다. 알곤킨 호텔의 매니저 빌 라일리스는 “웡은 하루도 결근한 적이 없다”며 “날씨가 나쁘면 평소보다 더 일찍 출근한다”고 말했다.

윙은 아직 정정하다. 그래서 생업인 ‘칵테일 제조업’을 그만둘 생각이 없다. “은퇴할 생각은 없어요. 나는 내 일을 사랑해요.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하죠. 부시 대통령은 돈, 세금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열심히 벌어서 세금을 내 부시 대통령을 도울 생각입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웡은 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는다. 여자에게도 약한 편이다. 술은? 1982년에 심장발작이 있은 이후에 완전히 끊었다. 지금은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 8월 알곤킨 호텔이 웡을 위해 90세 생일파티를 열었다. 친구와 고객 300여명이 초청됐다. 파티에 참석한 조지 아프라일(60)씨는 “40년 전 아직 미성년자였을 때부터 웡이 칵테일을 권해 마신 것을 기억한다”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웡의 얼굴이 40년 전과 다름없이 건강하다고 했다.

파티에서는 그의 장수 비결이 화제였다. 한 참석자가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건강을 유지하면서 일을 할 수 있나요?” 그의 답은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잘 먹고, 낮잠 자고, 매일 일해야 합니다. 일이 바로 운동이기 때문이죠. 돈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건강을 해칩니다.”

‘분통 터지는 세상, 술이나 마시자’는 애주가에게 웡이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오래 살려면 무엇보다 술을 끊으세요.”

 

 

 

 

월스트리트의‘귀족’과‘저승사자’가 한판 붙을까?


금융사업가로 성공한 블룸버그 뉴욕시장,
그라운드 제로 재건축 등 대형 건설사업 추진
스피처 뉴욕주 검찰총장은 11월의 주지사 선거에 출마,
당선 확실…뉴욕시 개발에 입김

 


▲ 마이클 블룸버그
‘월스트리트의 귀족과 월스트리트의 저승사자.’ 뉴요커들이 오는 11월의 중간선거 이후에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과 엘리엇 스피처 뉴욕주 검찰총장 사이에 벌어질 대결을 연상하며 붙인 말이다. 블룸버그 시장은 중간선거와 관계가 없다. 그러나 스피처 검찰총장이 이번 선거에서 뉴욕주지사로 출마, 당선이 확실시되면서 두 사람의 대결이 관심을 끌고 있다. 공화당 출신인 블룸버그의 정책에 민주당의 스피처가 브레이크를 걸 기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시장은 월스트리트의 ‘귀족’이다. 1942년 매사추세츠주 메드퍼드의 유대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회계사였다. 블룸버그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고 기술 부문에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 그래서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했다. 졸업하자마자 하버드대에 들어가 MBA를 땄다. 그리고 1966년에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인 샐러먼 브라더스에서 금융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한다.

블룸버그는 타고난 재능으로 승승장구해 취직 후 6년 만에 파트너가 됐다. 주식거래와 판매를 총괄했고, 자신이 원했던 정보체계화 업무도 담당했다. 그러나 1981년 샐러먼 브라더스와 스미스바니가 합병하면서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그러나 블룸버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샐러먼 브라더스의 주식을 팔아 1000만달러의 현금을 모았다.

그리고 대학시절의 전공을 살려 공학기술과 월스트리트의 정보를 연결시켰다. 월스트리트맨이 필요한 핵심정보를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도록 블룸버그 통신을 설립한 것이다. 월스트리트에서는 이를 ‘블룸버그 혁명’이라고 부른다. 현재 블룸버그 통신의 직원 수는 8000명에 달하며 세계에 100여개 지사를 두고 있다. 또 블룸버그 본사 건물은 타임워너 빌딩과 함께 맨해튼을 대표하는 양대 최첨단 건물 중 하나다.

50억달러의 재산을 가진 블룸버그 시장은 자선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한때 골초였던 그는 최근 “담배는 세계 최대의 살인자”라며 세계 금연운동을 위해 1억2500만달러의 사재를 털었다.

월스트리트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블룸버그는 정치에 뜻을 두고 2001년 선거에 출마, 루돌프 줄리아니 시장에 이어 5년째 뉴욕시를 이끌고 있다. 지난해 재선에 성공,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뉴욕시장으로서 그는 9·11 사태를 뒷수습했고 월스트리트에서 배운 경영노하우를 정책에 반영해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변의 대선출마 예상과 달리 블룸버그는 시장 임기를 마친 2009년에는 금연운동 등 자선활동에 매진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 맨해튼에 있는 4500만달러짜리 6층 건물을 매입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자선재단이 입주할 곳이다.

▲ 엘리엇 스피처
블룸버그가 월스트리트에서 성공해 귀족이 된 반면, 스피처 검찰총장은 월스트리트를 공격해 출세가도에 올랐다. 1959년 뉴욕시 브롱크스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스피처는 부동산 개발업을 하던 아버지 덕택에 부유하게 자랐다. 시골 출신답게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는 1981년 프린스턴 대학, 1984년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한 엘리트다.

학교를 졸업한 후 스피처는 지방법원 서기를 시작으로 법조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맨해튼 지방검사 보좌역으로 일하던 시절에 마피아 조직인 감비노 패밀리 사건을 담당해 명성을 얻었다. 당시 그는 함정수사 기법을 사용, 스스로 바지와 스웨터, 셔츠 등을 만드는 공장을 운영하면서 감비노 패밀리에게 접근했다.

결국 보스인 토미 감비노와 그의 동생 조셉 감비노를 기소하고 유죄판결을 이끌어 냈다. 정치적 야심이 있었던 스피처는 1998년에 뉴욕주 검찰총장 선거에 출마했다. 박빙의 승부 끝에 총장직을 움켜쥐었다. 검찰총장이 된 후 그는 사회구조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그 대상이 월스트리트였다.

 

월스트리트 스캔들 수사는 2002년 메릴린치에서 처음 시작됐다. 인터넷 거품이 붕괴되면서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이 투자자들을 기만하는 리포트를 작성했다는 혐의였다. 스피처는 감비노 패밀리 수사 당시에 배운 끈기와 노하우를 동원했다. 메릴린치 애널리스트들이 주고 받은 9만4400쪽의 이메일을 일일이 검사, 단서를 발견했고 메릴린치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어 수사의 칼날은 씨티그룹으로 향했다. 샌퍼드 웨일 회장이 계열증권사인 샐러먼스미스바니의 애널리스트 잭 그룹먼에게 “AT&T 주식을 고평가해달라”고 압력을 넣은 사실이 발각돼 경영실무에서 손을 떼게 된다. 스피처는 뮤추얼펀드의 각종 불공정행위도 무더기로 적발했다. BOA(뱅크오브아메리카)와 플릿보스턴 은행 등 뮤추얼펀드를 자회사로 둔 금융회사들은 엄청난 금액의 벌금을 내야 했다.

월스트리트는 죽을 맛이었지만 스피처는 ‘2002년 집념의 인물’(타임)로 선정됐다. 스피처는 범죄를 예방하려면 한 개인이 아니라 구조와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월스트리트 금융인을 감옥에 보내기보다는 자체 개혁을 하는 조건으로 벌금을 물렸다.

월스트리트의 ‘저승사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스피처는 2004년 12월 뉴욕주지사 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2년의 준비 끝에 11월의 중간선거에 임하고 있다. 민주당 아성지역인 뉴욕에서 민주당 당적을 갖고 출마하기 때문에 현재 지지율이 68%에 이른다. 그의 당선은 사실상 확정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스피처는 벌써 뉴욕주지사 자격으로 뉴욕주 행정에 대해 구상하고 있다. 그가 공화당 출신인 블룸버그의 정책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두 사람의 충돌은 주로 대형 건설사업과 관련이 있다.

블룸버그는 두 번째 임기를 맞아 ‘뉴욕시의 경제발전 계획을 확정하겠다’는 뜻을 품고 있다. 그래서 논란을 빚고 있는 그라운드 제로(9·11 테러 지역)의 재건축 작업을 재개하고, 맨해튼 서부지역과 브루클린의 애틀랜틱 철도기지창 지역도 재건할 계획이다. 하지만 지난 9월 스피처는 “애틀랜틱 철도기지창에 고층 아파트와 농구경기장을 만들려는 블룸버그의 계획이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스피처가 ‘맨해튼 중부지역에 9억달러짜리 모이니핸 스테이션을 만들겠다’는 블룸버그의 계획에 반대입장을 표시하자 뉴욕시의회 셀던 실버 의장이 이 계획을 중단하겠다고 거들고 나섰다.

모이니핸 스테이션 신축계획이 중단된 다음날 스피처는 뉴욕시가 맨해튼 서부지역의 기차야적장을 뉴욕주 교통공사로부터 매입하려는 시도를 비난했다. “뉴욕시가 제안한 5억달러는 헐값에 불과하므로 보다 높은 가격의 매수자를 찾기 위해 경매에 부쳐야 한다”고 제안했다. 재정상태가 나쁜 뉴욕주 교통공사를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와 스피처의 정치적 대결은 서로 다른 당적뿐 아니라 임기 때문에 생기는 측면이 있다. 4년 임기의 뉴욕시장은 한 번만 연임할 수 있다. 블룸버그의 입장에서는 임기가 3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추진력이 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에 반해 4년 임기의 주지사는 무한정 연임이 가능하다. 그래서 스피처는 향후 장기집권을 구상하면서 뉴욕시 개발작업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하고 있다. 뉴욕시의 개발작업이 주정부 재정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 차이가 개인적으로는 친한 두 사람을 정적(政敵)으로 만들어 버렸다.

블룸버그 시장은 내년에 스피처 주지사 체제가 출범하기 이전에 뉴욕시 개발계획을 모두 확정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스피처는 당선이 확실시되기 때문에 벌써 블룸버그의 개발계획에 발언권을 행사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측근들은 말한다. 월스트리트의 귀족과 저승사자의 싸움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뉴욕필 지휘자 로린 마젤 “자신의 품질 높여야 인생 성공”


“세계 젊은이의 다양한 재능이 발산되는 뉴욕은 변화무쌍” 끝없이 뉴욕 예찬
프랑스 태생으로 8세때 지휘한 음악 신동… 11월 중순에 한국 방문

 


▲ 로린 마젤
객석이 텅빈 넓은 홀에서 점퍼 차림의 그가 목소리를 높인다. “제1 바이올린, 소리가 너무 높아요. 트럼펫은 너무 강하고.” 그러자 다시 조화로운 멜로디가 홀을 가득 메운다. 날카로운, 그러나 웃음을 머금은 지휘자의 눈이 만족하는 내심을 표시한다.

로린 마젤(76). 그는 지난 10월 4일 오후 맨해튼 예술공연장인 링컨센터 애버리 피셔 홀에서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모습은 당당했고, 목소리는 또렷했다. 눈가의 주름과 흰머리가 그의 나이를 알려준다고 할까.

1842년 창립된 뉴욕필은 베를린필, 비엔나필과 함께 세계 3대 교향악단의 하나다. 2002년부터 이 교향악단을 지휘하고 있는 로린 마젤은 원래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미국으로 건너와 뉴욕에서 교육받고 자란 뉴요커다. 7살에 지휘 레슨을 받기 시작해 8세 때 아이다호대학 오케스트라 공연으로 지휘자로 데뷔하면서 ‘음악신동’으로 불렸다. 배우였던 아버지는 2차 대전 당시 피츠버그의 탄약공장에서 일했다. 그 인연으로 마젤도 피츠버그 심포니 활동을 3년간 했다. 바이올린을 들고 현악 4중주를 연주했고 개인연주회도 가졌다.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며 경제학과 문학,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천재도 한두 번은 자신의 재능에 회의를 품는 법이다. 마젤도 마찬가지였다. 20세가 되면서 그는 자신의 음악재능에 의심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더 배우기 위해 1951년에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다. 이탈리아어를 할 줄 몰랐지만 젊은 도전정신과 패기로 이탈리아 회화책 10쪽을 달달 외워 심사위원들을 멋지게 속아넘겼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한 후 마젤은 독일 바이로이트 교향악단의 지휘봉을 맡게 된다. 그리고 베를린과 런던에서 지휘자로 활동한 뒤 미국으로 돌아와 클리블랜드와 피츠버그 오케스트라에서 정확한 연주로 명성을 얻었다. 1982년에는 비엔나에서 오페라단을 이끌기도 했으나 1990년대 초반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이어 베를린필 지휘자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2002년부터 구스타프 말러,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브루노 발터, 레너드 번스타인, 주빈 메타 등이 활약한 뉴욕필의 음악감독 겸 지휘자로 발탁돼 활동하고 있다. 그의 연봉은 발표되지 않았으나 연간 200만달러(19억원)로 추정된다.

마젤은 음악가로서 대성한 사람이다. 그래서 기자회견장에 나온 그에게 성공의 비결을 물어 봤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덕분”이라며 웃었다. 하지만 곧이어 “유전자 외에 열심히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16세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튼튼한 체력도 성공비결의 하나다. 날렵한 몸매와 약간 그을린 피부를 가진 그는 지금도 풀세트 테니스 게임을 즐긴다. 마젤은 “음악가의 성공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누구의 후원이다, 운이 좋았다 등 온갖 평가를 하지만 결국 품질이 성공을 결정하는 요소”라고 강조했다.

마젤은 유럽과 뉴욕에서 모두 생활했다. 그래서 뉴욕이 유럽과 다른 점을 지적해 달라고 부탁했다. “비엔나와 베를린은 2차 대전이라는 매우 참혹한 전체주의 경험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비엔나는 유럽의 코스모폴리탄 도시가 됐습니다. 하지만 뉴욕의 경험은 매우 특별해요.”

“뉴욕에서는 세계에서 다양한 인종과 민족의 젊은이들이 몰려옵니다. 이들이 독특한 새로운 문화를 만들죠. 수많은 사람이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면서 한번 일어난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는 변화무쌍한 곳, 그곳이 바로 뉴욕입니다.”

마젤은 자신이 자란 뉴욕에 훨씬 강한 애착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뉴욕에 대한 애착은 자연스럽게 뉴욕필에 대한 찬사로 이어진다.

“7년 전에 나는 뉴욕필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토스카니니, 번스타인 등 쟁쟁한 거목의 뒤를 이어 내가 뉴욕필의 일원이 된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200여명의 오케스트라 단원과 연주를 하면서 항상 자극을 받고 영감을 느끼며 새로운 삶의 동기를 얻습니다.”

마젤이 뉴욕필을 찬양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뉴욕의 특성 때문이다. 세계의 수도인 이곳의 다양성이 그를 사로잡는다. 뉴욕필의 단원들이 단순히 젊고 인종이 다양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재능을 발산하고 있는 까닭이다.

뉴욕필에 대한 마젤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하나. 2001년에 그가 뉴욕필의 음악감독으로 확정됐을 때 당시 98세이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뉴욕밖에 모르는 골수 뉴요커다.

“아버지, 믿지 못하시겠지만 제가 이 뉴욕필에서 지휘자 제안을 받았어요.”

“어~ 이제 제대로 된 일 하나 맡았군.”

마젤은 말을 삼갔지만 불교의 이상을 추구하는 아버지가 그의 음악사상에 미친 영향은 큰 것 같다. 그는 지금도 100세가 넘은 아버지를 링컨센터 등 자신이 활동하는 곳에 모셔서 구경을 시키고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마젤은 집중력이 뛰어난 사람 같았다. 한번 악보를 보면 사진을 찍듯이 모두 외워버리는 비상한 기억력을 갖고 있다. 한 가지 일을 맡으면 거기에 집중하고 다른 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래서 요즘 유행과는 달리 동시에 2개의 오케스트라를 맡지 않았다”고 말했다.

“연주 곡목은 어떻게 선정하시나요?”

“청중에게 내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곡과, 청중이 좋아하는 문화적 분위기의 곡을 함께 선택합니다.” 청중과 메시지를 교환한다는 균형 잡힌 대화 자세이다.

▲ 11월 내한공연을 갖는 로린 마젤과 피아니스트 협연자 양희원씨.
마젤은 2004년에 이어 오는 11월 15~17일에 다시 한국을 찾는다. 뉴욕필은 이번 공연에서 드보르자크의 ‘사육제 서곡’과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베토벤 교향곡 3번 ‘에로이카’ 등을 연주한다. 마젤은 “뉴욕필 음악감독으로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때가 바로 해외 투어에 나섰을 때”라며 “뉴욕의 분위기로 한국 청중들의 귀를 사로잡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인다. 마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70대 중반인 그가 10년은 젊게 느껴진다. “어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면 씁쓸한 맛을 내지만 나는 점점 달콤해지는 것 같아요.”

 

 

 

 

 

‘믿음 상술’로 유대인과 중국인 사로잡은 한상(韓商)

 
미국 뉴저지주에서 의류업체 운영하는 권혁규 사장
“사업 성공 비결은 신뢰와 윈윈 전략”
“유대인은 깐깐하고 중국인은 느긋…
상술 면에서는 대국 기질 있는 중국인이 한 수 위”

 


마주 대하고 앉으니 정 많고 소박한 한국인의 모습이 그대로 배어난다. 얼굴에는 웃음이, 말에는 겸손함이 담겨 있다. 20여년간 미국생활을 한 사람 같지 않다.
그러나 입을 열자 독특한 시각(視角)이 기자의 귀를 사로잡는다. 한국에서는 듣기 어려운 국제적 한상(韓商)의 경험이다.

미국 뉴저지주의 의류무역업체인 ‘리갈웨어’의 권혁규(權爀珪·53) 사장은 한국·중국·필리핀 등에서 캐주얼 웨어를 납품 받아 미국 내 유대인 도매상이나 미국 백화점에 납품한다. 업무가 업무인 만큼 중국 출장이 잦고 항상 유대인 의류무역상들과 접촉한다. 세계 최대의 장사꾼을 자부하는 유대인과 중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셈이다. 그래서 권 사장에게 이 두 장사꾼들의 상술(商術)에 대해 물어봤다.

▲ 권혁규 사장.

“유대인들이요, 중국 사람들 때문에 죽어납니다. 요즘 뉴욕 맨해튼 6번가 주변에서 의류무역업을 하던 유대인들이 중국인들에게 질려 업종을 변경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요. 제 주변에만 해도 10여명이나 돼요.”

유대인이 중국인에게 당하는 이유는 이렇다. 미국 내 유대인들은 1970~1990년대에 한국에서 의류를 납품 받아 미국 백화점에 공급했다. 유대인이 이익을 남기는 전형적인 방법은 제품의 각종 흠과 납기일 지연 등을 이유로 20~30%씩 납품 가격을 할인하는 것. 한국의 봉제공장 사장들은 매달 직원들의 월급을 줘야 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이 클레임(보상 요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국 사장들은 느긋하다. 노동 인력이 풍부하고 직원들이 봉급을 회사에 맡겨 뒀다가 1년에 한 번씩 찾아가는 경우가 많아 기업주들의 자금 압박이 한국보다 훨씬 약하기 때문이다.

중국업체와 10년 이상 거래한 유대인 A씨는 최근 광저우의 의류업체에 주문한 바지 3000벌이 사양과 달라 클레임을 청구했다. 그러나 중국인 거래상에게서 “가격을 할인해 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듣고는 할 수 없이 헐값 처분 해야 했다. 다른 유대인B씨는 납기 지연에 항의했다가 “싫으면 그만두라”며 면박을 당하고는 거래선을 파키스탄으로 바꾸었다.

“중국인들은 대국(大國) 기질에 자존심이 아주 세요. 그래서 째째하게 물건값 깎아가며 유대인에게 머리 숙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유대인이 중국인에 당하면서 한국 의류무역업체들은 뜻밖에 톡톡한 재미를 보고 있다. 유대인 공급량이 줄어들자 JC페니 등 미국 백화점들이 한국인 의류업체에 주문량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업체들은 중국 내 조선족을 이용해 중국업체들을 통제할 수 있지만 유대인들은 중국에 동족(同族)이 없다는 것도 약점이다.

권 사장은 “조만간 국제비즈니스 업계에서 유대인과 중국인 간의 상권대전(商權大戰)이 벌어질 것”이라며 “두 민족을 다 겪어본 내 생각에는 중국인이 한 수 위인 것 같다”고 평가했다.

권 사장은 원래 은행원 출신이다. 조흥은행에 다니던 1983년 아내 신정화(辛貞花·51)씨의 손을 잡고 적금을 깨서 뉴욕대 경영대학원에 유학했다. 그리고 MBA를 취득한 뒤 아메리칸 드림을 일구기 위해 당시 한국이 가장 강점을 갖고 있던 의류업에 손을 댔다.
그러나 금융업에서 의류업으로의 전환은 쉽지 않았다.

특히 미국 의류 도매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사람을 믿지 못해 물건을 조금씩 주고, 만족스러우면 주문량을 늘려가는 방식을 썼다. 유대인답게 품질관리가 몹시 까다로웠다. 수년 뒤 신뢰가 쌓이자 주문량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중국인 거래선이 문제였다. 주문량은 산더미같이 쌓여있으나 중국인들은 제대로 된 품질의 옷을 제 시간에 공급하지 못했다. 수년간의 노력 끝에 이제 권 사장은 유대인과 중국인을 상대하는 노하우를 상당히 터득했다

 

권 사장은 가장 즐거운 때에 대해 “내 아이디어로 새 옷을 기획해서 납품해 매우 잘 팔린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라고 답한다. 평생을 일만 해온 그다운 답변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두 딸은 대학생이 되었고 아내와 두 딸이 모두 건강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다고 한다. 그는 이제 맨해튼 브로드웨이에 매장도 있고 한국과 중국에 사무소도 갖춘 성공한 재미동포 기업인이 됐다.

권 사장은 국제 거래를 하다 보니 세계 무대에서 한국인의 위상에 대해 느끼는 점이 많다. 특히 중국을 들락날락 하면서 조선족에 대해 깊은 애착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가 재미동포와 한국인, 조선족에 관한 에피소드를 꺼낸다.

▲ 뉴욕의 차이나 타운
중국 무역을 10여년 정도 하다가 3년 전에 상하이에 지점을 열었다. 그리고 한국인 직원 2명, 조선족 직원 6명을 채용했다. 한국인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근면성 때문에 세계 어느 곳을 가든지 열심히 일한다. ‘리갈웨어’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중국인 거래업체가 재미동포와 한국인, 조선족을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재미동포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대하고 말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서울에서 온 한국인들의 말도 존중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조선족은 차별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권 사장은 같은 한국 핏줄인 데도 대접이 다른 이유에 대해 “내가 사장이라는 점도 있지만 미국인에 대한 우대심리가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조선족은 중국인들의 평균임금보다 3~4배 많은 월 1000달러씩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중국인들이 조선족을 푸대접하는 걸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권 사장은 중국 내 조선족들의 생활을 보면 20여년 전 첫 이민 시절에 미국 백인들이 한인 동포 1·2세들을 푸대접 하던 생각이 난다고 했다. 그래서 조선족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하다. 한국 경제가 번성하려면 결국 중국 경제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고 이를 성공시키려면 조선족과 힘을 합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조선족의 지위가 점점 올라가면서 중국사회에서 점점 대우가 개선되는 것을 뿌듯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권 사장은 “조선족의 지위 향상은 결국 한국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며 “최근 미국 업체들이 저임금을 노리고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공장을 이전해도 지금처럼 그냥 중국에 머물고 싶다”고 했다.

권 사장은 “비즈니스 업계에서 성공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파트너와의 신뢰와 윈윈(Win-Win) 전략”이라고 말한다. 국제 비즈니스맨답게 이에 대한 설명도 국제적이다.

“몇 년 전 중국의 저가 고품질 섬유가 몰려들어 미국 섬유업체들이 망해가자 미국 정부가 긴급수입제한 조치(세이프가드)를 발동했지요. 그래서 중국산 수입이 중단되자 월마트와 JC페니 등 미국 소매업체들이 공급망을 인도와 파키스탄 등으로 돌렸습니다. 하지만 인도와 파키스탄 제품의 경우 중국보다 가격은 낮아도 품질은 중국을 따라오지 못해요. 그래서 미국 소비자들이 피해를 보자 미국 정부가 다시 세이프가드를 철회하고 중국의 쿼터를 늘렸죠. 그러나 안정적으로 물량을 확보하려는 미국 소매업체들이 중국 리스크 때문에 거래선 회복에 주저하고 있어요. 경제적 효율성 측면에서 보면 중국과 미국이 신뢰를 상실하는 바람에 윈윈 전략에 실패한 거죠.”

권 사장의 꿈은 자신의 자녀를 포함해 한인 2세들이 미국 사회에서 번성하는 것이다. 자신이 중국 사업에서 조선족과 동맹관계를 맺듯이 미국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들도 점점 성장하는 미국 교민 사회의 힘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포 2~3세들은 1세들이 고생해 이룩한 부(富)를 바탕으로 훌륭한 교육을 받아 주류사회에 적극 진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포들이 미국의 정치·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한국인 핏줄끼리 믿고 도와주는 것이 윈윈 전략이 되는 시대가 온 거죠.”

 

 

 

 

 

울트라 우먼 CEO ‘마사 스튜어트’의 멈추지 않는 전진


최근 주식 부정거래 이미지 벗고 부동산에까지 사업 영역 확대… 창업 관련 책도 내
평범한 주부에서 미디어 제국을 건설한 여왕… 세계에 영향력 있는 50대 여성 기업인

 


▲ 마사 스튜어트
뉴욕의 여성에게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만큼 유명하고 오프라 윈프리만큼 친근하게 느끼는 여성을 꼽으라고 하면 누구를 선택할까? 많은 사람이 주저하지 않고 ‘마사’를 선택할 것이다. 미국 주부는 자신의 주방에서 그녀의 요리책과 잡지책을 들고 그녀가 출연하는 TV의 요리 프로를 보면서 가정과 인생을 설계하고 가꾸어 나간다.

‘살림의 여왕’ 마사 스튜어트(65).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주부로 지내다가 출판·방송 등을 아우르는 미디어제국(마사 스튜어트 리빙 옴니미디어)을 건설한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 미국 주부의 우상인 그녀는 한때 주식거래부정으로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경영인으로서 독보적인 선례를 만들며 재기하고 있다.

마사는 어린 시절과 대학, 결혼 생활 내내 범 뉴욕권인 트라이스테이트 지역(뉴욕·뉴저지·코네티컷 3개 주)을 지킨 대표적인 뉴요커이다. 1941년 맨해튼과 인접한 뉴저지주 저지시티의 한 낡은 연립주택에서 폴란드계 이민노동자의 6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부유하진 않았지만 부지런했던 그의 부모는 딸에게 요리와 바느질, 정원 가꾸기를 가르쳐 훗날 마사제국 번성의 바탕을 마련해줬다.

영리한 데다 외모도 뛰어났던 마사는 공부를 잘했고, 학교 신문ㆍ미술반 등 다양한 특기활동을 즐겼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잡지와 TV에 광고 모델로도 얼굴을 비췄다. 그녀는 뉴욕의 명문 여성대학인 버너드 칼리지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거기에서 미술과 유럽 역사, 건축사 등을 공부해 미적 감각과 관련 지식을 연마했다.

대학 시절에 만난 친구 앤디 스튜어트와 결혼한 뒤로 약 7년간 월스트리트의 증권거래인으로 일했으며, 1973년부터는 코네티컷에 터를 잡고 전업주부가 됐다. 그녀의 진짜 재능이 발휘된 건 이때부터다. 자기 집 지하 주방에서 주문요리사업을 시작해 사업에 재미를 붙인 그녀는 1979년 자신의 요리 노하우를 담은 책 ‘엔터테이닝’을 출판했다. 책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그녀에게 명성을 안겨줬다.

마사는 이후 출판·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면서 평범한 미국인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1997년 마사 스튜어트 리빙 옴니미디어를 설립하면서 인터넷 카탈로그사업까지 추가, 명실상부한 종합 미디어그룹을 일구게 된다. 자신의 월스트리트 경험을 살려 2년 뒤에는 이 회사를 뉴욕 증시에 상장시켜 6억달러의 재산을 손에 쥐기도 했다. 성공하려면 남 밑에 있지 말고 회사를 세워 독립하라는 미국인의 비즈니스 철칙을 실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0년 25만부로 출발한 마사의 잡지 ‘마사 스튜어트 리빙’은 최고 전성기에 발행부수가 200만부를 넘어섰다. 마사 스튜어트 리빙 옴니미디어는 이 잡지 외에도 ‘마사 스튜어트 웨딩’과 ‘마사 스튜어트 키즈’를 발행하고 있다.

▲ 마사 스튜어트가 TV쇼 '마사 스튜어트 리빙'을 진행하는 장면.

잘 나가던 마사에게 2002년 큰 위기가 찾아왔다. 기업 내부정보를 이용한 주식거래부정으로 인해 감옥에 수감된 것이다. 제약회사 임클론의 암 치료제가 미국 FDA(식품의약국)의 승인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내부정보를 사전에 입수, FDA의 발표 직전에 자신이 보유하던 주식을 처분해 주가하락에 따른 손실을 줄였다는 혐의였다. 마침 마사가 재판을 받던 시점엔 엔론사태 등 대규모 기업의 월스트리트 스캔들로 기업가의 도덕성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내부정보를 이용한 주식거래로 그가 본 이득은 4만5000달러(약 4500만원)에 불과했다. 마사는 “나는 시범 케이스로 단죄받았다” “벌이 너무 가혹하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이 일로 “재기하지 못할 것”이란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를 정상에 올려놓은 가장 큰 동력이 ‘현명하고 편안한 어머니 또는 이웃집 아주머니’의 이미지였던 만큼 부당이득을 취한 부정 경영인이란 정반대의 이미지는 치명적이었다. 그녀는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마사는 “다시 돌아올 거예요(I’ll be back)”라는 자신의 말처럼 화려하게 재기했다. 그녀가 수감된 기간은 2004년 10월부터 2005년 3월까지 5개월. 물리적으로는 길지 않지만 거짓말과 부정이란 이미지 때문에 기업가 인생에 치명타가 될 뻔한 이 기간을 그녀는 오히려 자신을 홍보할 절호의 기회로 활용했다. 여성 전용 수용시설인 웨스트 버지니아주 앨더슨 감옥에 수감된 그녀는 동료 수감자에게 요가와 꽃꽂이를 가르쳤다. 자신에게 돈과 선물을 보내는 대신 자선단체에 기부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홈페이지에 올려 역시 ‘기 죽지 않는 여장부’라는 평을 끌어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그녀의 적극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5개월 복역 이후 이어진 5개월의 가택연금 기간에는 전자발찌를 착용한 채로 방송에 출연하고 그 장치를 클로즈업해 시청자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이 전략은 그녀에 대한 동정 여론을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올해 10월에는 다친 손을 응급처치 받았던 병원에 감사의 뜻으로 100만달러를 기부키로 해 다시 한번 여론의 조명을 받았다.

마사는 감옥을 나온 뒤로 그간의 ‘휴식’을 벌충하기 위해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쏟아내고 있다. 처음으로 한 일은 단행본 출판. 자기 집 주방에서 주문요리사업으로 출발해 거대기업을 일군 그녀의 인생을 돌아보듯 2005년 10월 ‘창업 성공을 위한 열 가지 조언’이란 부제가 붙은 ‘창업’에 대한 책(‘The Martha Rules’)을 냈다. 

불과 한 달 뒤엔 전공분야인 제과ㆍ제빵에 대한 또 한 권의 책을 냈다. NBC방송을 통해 방영된 TV쇼 ‘어프렌티스’를 통해서도 복귀를 알렸다. 그녀가 진행하는 TV쇼 ‘마사 스튜어트 리빙’은 2006년 에미상 6개 부문에 올라 변함없는 명성을 과시했다.

기존 사업도 확장하고 있다. 슈퍼마켓 체인 K마트를 통한 ‘마사 스튜어트’ 가정용품(침대시트·커튼·목욕용품 등) 사업을 이어가면서, 메이시 백화점과 새로 제휴하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생활용품을 선보이기로 했다. 시어즈 백화점을 통해서는 ‘마사 스튜어트’ 인테리어 제품도 판매할 계획이다.

사업영역은 출발점이었던 살림과 인테리어에서 벗어나 부동산으로 확대되고 있다. 마사는 부동산 개발업체인 KB홈과 라이선스를 맺고, 노스캐롤라이나주 캐리 지역에 마사 스튜어트 자택의 디자인 및 인테리어를 활용한 주택단지(650가구 규모)를 조성하기로 했다. 그녀의 인테리어 감각은 이미 책과 방송을 통해 미국 주부를 사로잡은 만큼 이 주택은 대단한 관심을 끌어모았다.

마사 스튜어트는 11월, 임클론의 주식내부거래와 관련된 모든 책임을 정리하고 자신을 옭아맸던 부정의 굴레를 벗어던졌다. 민사소송에서 19만5000달러의 벌금을 내고, 향후 5년간 상장사 간부로 일하지 않기로 감독당국인 증권거래위원회(SEC)와 합의했다. 공식 경영활동에 제약은 받게 됐지만 그녀는 마사 스튜어트 리빙 옴니버스 의결권의 92%를 보유한 대주주여서 회사에 대한 영향력은 줄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마사 스튜어트 리빙 옴니버스의 잡지, 인터넷 사이트 등에는 여전히 금발의 마사 얼굴이 가득하다. 제약이 끝나는 5년 뒤 그녀는 70세가 된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지금의 활발한 행보를 주목하는 이들은 70세의 마사가 다시 CEO(최고경영자)로 복귀할 것으로 보고 있다.

마사는 10월, 미국 경제주간지 포천이 선정한 ‘전세계 영향력 있는 50대 여성 기업인’ 가운데 28위(2005년 21위)를 차지해 변함없는 입지를 과시했다. 2005년에는 폴 뉴먼, 콜린 파월, 로버트 레드퍼드 등과 함께 시사주간지 타임이 꼽은 ‘우아하게 늙어가는 미국인 10명’ 가운데 하나로 선정됐다. 경영인뿐만 아니라 대중의 우상으로서 최고의 주가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한복으로 뉴욕 정복” 한국 디자이너 2인이 뛴다


이영희씨 한복박물관 개관 2주년 패션쇼…힐러리도 참석해 “한복, 원더풀” 찬사 보내
배영진씨는 맨해튼 인근에 전문점 오픈… “미국인에 맞는 혼례복과 파티복 적극 개발”

 

 


 

한국의 유명한 한복 디자이너인 이영희씨와 배영진씨가 세계 패션의 중심지 뉴욕에서 한판 ‘한복 승부’를 벌이고 있다. 뉴욕에 먼저 진출한 이씨가 세를 확장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업계 후배인 배씨가 도전장을 내는 형태다.

40만여명의 동포가 사는 뉴욕 한복업계는 이씨가 선점한 상태다. 이씨는 2004년 9월에 뉴욕에 한복박물관을 개장하고 한복가게를 내는 등 뉴욕 공략에 나서고 있다.

이씨는 “세계 패션 중심지인 뉴욕에서 성공해야 한복이 세계적 의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매년 뉴욕에서 한복 패션쇼를 열고 미국 박물관에 한복을 기증하는 활동도 하고 있다.

▲ 디자이너 이영희씨(왼쪽). 디자이너 배영진씨.

이씨는 지난 9월 맨해튼 32가의 한복박물관에서 ‘한국의 바람’을 주제로 개관 2주년 기념 패션쇼를 열었다. 미국 현지와 한국에서 온 모델 20여명이 참가, 전통한복과 모던한복 등 총 80여점을 소개했다.  모시, 실크, 면, 마 등 전통적인 한복 소재뿐 아니라 한지와 천연섬유를 가공해 짠 자연친화적인 새섬유와 대나무 숯이나 쪽, 소목, 오배자 등의 자연물로 염색한 섬유들을 다양하게 활용해 한국 전통 질감과 색감을 현대적으로 재현해 냈다. 12년간 파리 컬렉션을 통해 다듬어진 이씨 특유의 감각으로 한복의 우아한 멋을 격조 높은 패션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다.

이씨는 “전통한복의 조형미를 해체하고 다시 조합해서 전통적 평면 구성과 현대 패션의 입체적 표현이 조화를 이루게 해 한복의 세계화를 이루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이에 맞서 드라마 ‘궁’으로 명성을 얻은 한복 디자이너 배영진씨는 재미사업가 김기씨와 손을 잡고 지난 11월 24일 맨해튼 인근 뉴저지 포트리 메인스트리트에 한복전문점 ‘코세르’를 개장했다. 30여평 크기의 가게에는 나비 수백 마리를 수놓은 붉은색 한복 치마를 비롯, 400여점의 전통한복과 궁중의상, 개량한복, 전통침구, 액세서리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통한복의 혼례복은 한 점당 350~3000달러에 이를 정도로 고가의 제품이지만 개점 2주일 만에 30여점이나 팔려나갔다. 코세르 매장 안에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인사동을 방문했을 때 배씨의 가게에 들러 한복을 감상하던 모습의 사진이 걸려 있다. 또 붉은색·핑크색·검은색·황금색 드레스와 색동저고리, 양털 재킷, 베개, 스카프, 핸드백, 한복 노리개, 쿠션 등이 고풍의 가구들과 함께 멋지게 조화되어 있다.

코세르 측은 개점 한 달 전인 10월 15일에는 재미동포 사업가와 정치인, 언론인 등 400여명을 초청해 한복 패션쇼를 개최했다. 특히 직업모델을 동원하는 전통적인 방식 대신 뉴욕의 재미동포가 직접 모델로 등장해 한복을 입고 출연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한복 대중화를 위해 ‘동네 패션쇼’를 개최했던 셈이다.

배씨는 “서울 인사동 가게까지 옷을 찾아 오는 재미동포들을 보고 미국에 점포를 내고 싶었다”며 “단순히 혼례용품뿐 아니라 다양한 한국적인 옷을 선보이겠다”고 말했다.

배씨는 한복을 활용한 혼례복과 파티복 등이 한국적인 것을 추구하는 2세에게 크게 어필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뉴욕동포가 40만명이나 되고 결혼 적령기의 인구가 많기 때문에 시장성도 충분하다는 판단이다. 실제로 외국인과 결혼하는 동포는 한복 저고리와 치마, 바지 등 한국적인 것을 더욱 찾는 경향이 있다. 친구와 즐기는 파티에서도 한복 소재를 살린 파티복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서울 가게를 찾던 재미동포는 개점 후에 이곳 가게로 몰려 오고 있다고 한다. 고객은 주로 중장년층 주부다. 이들은 드라마 ‘궁’에 출연한 탤런트가 입었던 옷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코세르 측은 한인 외에 외국인을 상대로도 적극적인 판촉 활동을 벌일 예정이다. 코세르가 위치한 포트리 메인스트리트 인근에는 최근 대규모 주택 개발작업이 진행 중이며, 개발이 완료되면 경제력이 있는 부유한 외국인이 대거 입주할 전망이다. 벌써부터 코세르 앞을 지나가던 외국인들은 페티코트 위에 아름답게 걸쳐 있는 나비가 수놓인 붉은 한복 치마에 호기심을 느끼고 가게에 들러 옷을 살펴보곤 한다. 외국인은 한복의 아름다운 재질과 색깔이 이브닝 파티 복장으로 매우 적합하다고 보고 있다.

이영희씨와 배영진씨는 디자인의 주력 스타일에서 약간 차이를 보인다. 이씨는 한국 박물관을 운영하며 한국의 전통미를 보다 강조하는 반면, 배씨는 서구인의 입맛에 맞는 보다 개량된 스타일을 추구한다. 그래서 한복 요소를 가미한 파티복과 혼례복도 적극 개발 중이다. 배씨는 “뉴욕에서 한복이 널리 퍼지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입을 수 있도록 개량되어야 한다”며 “개량한복을 통해 뉴욕 패션과 한복 패션의 접합점을 찾아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이영희씨의 패션쇼.
하지만 무엇보다도 두 사람의 대결을 더욱 관심있게 만드는 것은 차기 미국의 유력한 대선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과의 연관 때문이다. 이씨는 지난 9월 뉴욕에서 패션쇼를 열고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을 한복박물관에 초청해 정치자금 모금행사를 열었다. 점점 커가는 뉴욕의 한인 정치세력을 한복 홍보의 한 힘으로 활용하겠다는 생각이다. 이를 위해서는 힐러리 클린턴과 같은 주류사회 유명인사의 인정이나 도움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당시 힐러리 의원은 맨해튼 코리아타운에 위치한 한복박물관에서 100여명의 한국인·외국인 참석자와 정치자금 모금 행사를 가지면서 “한복 원더풀”을 외쳤다. 행사에는 한인권익신장위원회 박윤용 회장과 뉴욕한인청과협회 김영해 회장 등 재미동포뿐 아니라 가수 아트 가펑클의 아들인 제임스 가펑클 부부 등이 참석했다. 힐러리 의원은 50여평 크기의 한복 전시장을 둘러보고 “의상과 자수가 너무 아름답다”며 “한국인이 한국의 전통문화에 자부심을 가질 것 같다”고 말했다. 한복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나타난 가펑클은 “이씨의 한복이 너무 멋지다”며 탄성을 연발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배씨는 든든한 동업자를 갖고 있다. ‘코세르 뉴욕’의 사업을 맡고 있는 김기씨는 재미동포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힐러리 클린턴 의원의 후원자 중 한 사람이다. 김씨는 최근 힐러리 의원이 감사의 표시로 초청한 뉴욕주 후원자 모임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초대되어 헤드테이블에서 힐러리 의원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김씨가 비록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힐러리 의원과의 친분 관계는 향후 미국 주류사회 진출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이씨와 배씨는 모두 앞으로 뉴욕에서 가게를 더욱 확장하고, 주류사회에 한복의 인식을 확산시키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배씨는 포트리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맨해튼에도 매장을 낼 계획이다. 국내에서 명성을 얻은 두 한복 디자이너가 뉴욕에서 본격적인 한판 승부에 돌입한 것이다.

 

 

 

 

“위기의 월스트리트를 구하라” 존 테인 뉴욕증권거래소 사장


런던·홍콩·상하이에 신규자금 빼앗겨…
합병과 구조조정·전산시스템 도입으로 난국 돌파
골드먼삭스에서 최고책임자로 일한 수재…
부시 정부에 포진된 골드먼삭스 인맥 도움받아

얼굴은 역삼각형이고 윤곽이 날카롭다. 약간 큰 키에 짙은 회색 양복을 입은 외모가 영락없는 수재형이다. 안경 너머로 쏘아보는 날카로운 눈빛이 명석한 두뇌회전을 반영하고 있다. 지난 10월 뉴욕 외신기자 클럽에 기자회견차 들른 존 테인(John Thain) 뉴욕증권거래소(NYSE) 사장은 위기의 월스트리트를 구하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배수진을 친 유능한 사령관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테인 사장은 1955년 5월에 일리노이주 안티오크에서 태어났다. 1977년 MIT 전기공학과를 졸업했고, 1979년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을 나왔다. 뉴욕증권거래소로 옮기기 전 그는 월스트리트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골드먼삭스에서 잔뼈가 굵었다. 4년 동안 골드먼삭스의 공동 COO(최고운영책임자)를 지낸 뒤 5년간 CFO(최고재무책임자)를 역임했다. 그리고 2003년 7월부터 골드먼삭스의 사장이자 COO로 일했다. 3억달러의 주식을 성과급으로 받을 정도로 정말 잘나가는 수재형 골드먼삭스맨이었다.

▲ 뉴욕증권거래소 존 테인 사장(왼쪽)과 존 스노 전 미국 재무장관.

테인 사장이 2004년 1월 증권거래소로 자리를 옮긴 것은 월스트리트의 상징인 뉴욕증권거래소의 위기감 때문이다. 미국인은 2001년 엔론사태로 상징되는 월스트리트의 초대형 부패스캔들에 대응하기 위해 사베인스-옥슬리법을 제정했다. 기업의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이 조치는 당시에는 불가피했지만 기업들은 각종 투명성 강화 조치에 맞추기 위해 많은 추가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자본은 본질적으로 규제를 싫어하고 자유로운 곳으로 이동하는 법이다. 각종 규제 조치가 강화되자 세계 자본은 뉴욕행을 멈추고 런던과 상하이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지인 뉴욕이 불과 5년 만에 IPO(기업공개)에서 중국에 뒤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뉴욕증권래소는 증권브로커 24명이 1792년 뉴욕 월스트리트에 모여 연방정부채 매매위탁수수료율을 협의한 것이 출발점이 되어 1817년 뉴욕 증권거래위원회로 발족했다. 1863년부터 현재의 이름을 쓰면서 월스트리트의 핵심적인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다.
월스트리트가 오늘날의 명성을 이룬 계기는 1901년 미국의 대표적인 철강회사인 US스틸이 당시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IPO를 월스트리트에서 한 것이다. 이후 월스트리트는 런던의 금융가인 씨티지역을 대체하는 새로운 세계금융중심지가 됐고, 월스트리트는 세계 주요 기업인과 금융인의 선망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9·11 사태와 월스트리트 스캔들 이후 사정은 달라지고 있다. 지난 2년간 이뤄진 세계 25대 IPO 중 11개를 런던(LSE)이 가져갔고 6개는 홍콩증권거래소에서 이뤄졌다. 뉴욕거래소의 IPO는 4건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존 테인 사장이 소방수로 나선 것이다.

테인 사장은 2003년 12월 증권거래소 사장이 되기 위해 골드먼삭스를 떠난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내가 이직하겠다고 헨리 폴슨 골드먼삭스 회장(현 미국 재무장관)에게 이야기를 하자 냉정하기로 소문난 그가 놀라 여러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테인 사장은 취임 후 어떤 전략을 택했을까. 그가 취한 전략은 크게 두 가지이다. 세계 다른 국가의 증권거래소와 합병해 몸집을 불리고, 뉴욕증권거래소의 구조조정을 하는 것이다.

먼저 그는 2004년에 장외거래소인 아치펠라고와 합병을 선언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화가 난 일부 주주가 테인 사장을 포함해 증권거래소 이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주주들은 이 합병 과정에서 테인 사장의 고향인 골드먼삭스가 주간사를 맡아 공정하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테인 사장의 행보는 멈추지 않았다. 뉴욕증권거래소는 대서양 건너 유럽지역으로 영역을 넓혀 유로넥스트를 인수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유로넥스트는 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포르투갈 등 4개국에서 증권거래소를 운영하는 유럽 2위의 증권거래소다.

테인 사장은 지난 10월 기자회견에서 “새해 1분기까지 유로넥스트와의 합병을 완료하기 위해 ‘NYSE유로넥스트’라는 지주회사를 세울 예정”이라며 “지주회사 아래에서 뉴욕증권거래소와 유로넥스트의 4개 증권거래소가 종전과 같이 별도로 운영될 것”이라고 말했다.

▲ 미국 뉴욕시 월스트리트 옆에 위치한 뉴욕증권거래소(NYSE) 의 전경.
테인 사장은 유럽에 이어 아시아 증권거래소로도 세력을 넓히고 있다. 세계 2위 거래소, 달러·유로화와 함께 세계 3대 통화인 엔화권의 도쿄증권거래소와 협력하겠다고 했다. 또 중국과 인도 증시에 대한 관심도 보였다.

테인 사장의 다른 전략은 뉴욕증권거래소의 내부 구조조정이다. 뉴욕증권거래소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시스템이 상당히 낙후된 측면이 있다. 예컨대 한국의 증권거래소를 가보면 전표를 건네주는 중개인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거래가 모두 전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가 거래를 중개함으로써 시간과 비용이 절약된다. 하지만 뉴욕증권거래소는 스페셜리스트라고 알려진 거래중개인이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 전산화 작업을 서둘러 진전시키기 못하는 이유는 이 중개인단체가 해고를 우려해 저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전산화 및 효율성 강화 움직임은 세계 최대인 뉴욕증권거래소라도 저항할 수 없다. 뉴욕증권거래소는 지난 10월 하이브리드 트레이딩 시스템을 도입했다. 중개인 방식에 전자거래 방식을 병행하는 형태다. 개혁의 첫 단추를 누른 것이다. 

테인 사장은 요즘 뉴욕의 월스트리트와 워싱턴 정가를 주름잡고 있는 골드먼삭스 인맥의 대표적인 상징 중 하나로 꼽힌다. 골드먼삭스 출신은 예전부터 고위층이 공직에 봉사한다는 이념하에 정계 진출의 전력이 많았다. 하지만 조지 W 부시 행정부 들어서는 예전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헨리 폴슨 재무장관(전 회장), 조슈아 볼튼 백악관 비서실장(전 전무), 로버트 스틸 재무부 국내금융차관(전 부회장), 루벤 제프리 상품선물거래위원장(전 이사), 랜달 포트 국무부 고문(전 이사)이 모두 골드먼삭스 출신이다. 지난 11월 말에 뉴욕연방은행 금융시장 담당 부총재에 임명된 윌리엄 더들리도 골드먼삭스 수석이코노미스트를 지냈다.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정책을 주물렀던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 존 코자인 뉴저지 주지사도 골드먼삭스 출신이다. 월스트리트에서는 골드먼삭스가 강력한 파워집단으로 성장한 비결에 대해 뛰어난 영업성적 외에 가족주의 전통에서 비롯된 ‘밀어주기’ 전략도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테인 사장은 뉴욕증권거래소 개혁의 선봉에 서 있지만 보수는 연간 400만달러의 ‘푼돈’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보수 때문에 구설에 오른 리처드 그라소 전 뉴욕증권거래소 이사장과는 다른 모습이다. 현재 뉴욕주 라이에 살고 있는 테인 사장은 MIT 경영대학원 이사, 인시아드 경영대학원 이사, 뉴욕연방은행 국제자본시장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월스트리트는 일단 테인 사장의 활약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그의 갈 길은 아직 멀다. 막대한 전산비용의 효율화, IT 발전에 따른 주식거래의 탈(脫)공간화, 런던과 상하이 등 주요 선진국 증권거래소의 약진 등이 그가 넘어야 할 과제의 목록이다.

 

 

 

 

10년 넘게 한인 권리 신장에 앞장선 김동석 소장


한인유권자센터 운영…
시민권 취득·유권자 등록 운동 벌이며 한인의 정치력을 키워 나가
선거 때 공화·민주당에서도 큰 관심 보여…
“비자면제·이민법 재개정 등 현안을 정계에 전달”

▲ 한인유권자센터 1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는 김동석 소장.
미국 중간선거가 한창이던 지난해 10월 15일 오전 뉴욕 맨해튼과 인접한 뉴저지주 노르우드시(市)에서 ‘이변’이 생겼다. 미국 공화당 정치인 30여명이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한인 교회를 대거 방문해 일요예배를 보던 한국인을 상대로 대대적인 선거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뉴저지주는 21개의 카운티로 구성되어 있으며, 노르우드는 이 중 하나인 버겐카운티(인구 80만명)의 70개 도시 중 인구 1만명의 소도시다. 이 조그만 소도시에서, 그것도 소수민족인 한인의 교회를 방문한 사람은 공화당 연방 상원의원 후보인 톰 킨 2세 뉴저지주 상원의원, 존 루니 주하원의원, 샬럿 벤더버크 주하원의원, 짐 팔사 노르우드 시장 등이다. 연방상원·주의회·지방의회·지자체의 현역 혹은 후보 정치인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공화당 선거본부를 연상시켰다.

공화당 정치인들은 2시간 동안 머물며 한인 신도 600여명과 함께 예배를 보고 헌금을 했다. 예배 전후에는 입구에 서서 한국인 교인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한 표를 부탁했다. 킨 후보는 정치자금모금 행사에서 1시간당 50만달러의 정치자금을 걷고, 2006년 봄 딕 체니 부통령의 총기 오발사고 당시에는 그의 지원이 감표 요인이라며 지원유세를 회피해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미국 주류사회의 고위 정치인이 한인교회에 몰려온 이유는 물론 ‘한 표’ 부탁하기 위해서다. 킨 후보는 민주당 아성인 뉴저지에서 현역인 민주당 로버트 메넨데스 후보에 맞서 전투 중이었다. 뉴저지주는 당시 박빙의 접전지역이었고, 킨 후보는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한인에게 달려왔다. 킨 후보는 결국 패배했지만, 대통령급 대우를 받는 미국 연방상원의원 후보가 조그마한 한인교회를 직접 찾아 선거유세를 한 것은 한인 정치력 신장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이 ‘이변’의 배후에는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Korean American Voters’ Coucil, www.koreanvoter.com)의 김동석(49) 소장이 있다. 한인유권자센터가 이날 교회 앞에서 유권자등록 캠페인을 벌인다는 소식에 공화당이 먼저 한인교회 유세를 제안했다. 민주당도 유세를 제안했으나 공화당에 순위가 밀려 포기했다.

김 소장은 1985년 당시 정부가 싫어 미국으로 이주한 뒤 한인 정치력 확대 운동을 하고 있다. 유권자센터를 창립한 것은 1991년 뉴욕 브루클린의 한인·흑인 갈등과 이듬해의 LA 흑인 폭동이 계기가 됐다.

“가해자인 흑인은 정치적 보호를 받으며 거리를 활보하는데, 피해자인 한인을 대변해 주는 미국 정치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미주 한인들의 정치력 부재를 절감했죠.”

▲ 지난해 10월 뉴저지주 한인교회를 찾아 유세를 벌인 톰 킨 공화당 연방상원의원 후보(왼쪽에서 세번째)와 김동석 소장(맨왼쪽).
김 소장은 1996년 3월 한인이 밀집해 사는 뉴욕시 플러싱 지역에, 2000년에 뉴저지주 포트리에 사무실을 얻고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가며 한인 유권자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생업인 사진·복사가게를 소홀히 하면서도 각종 행사장과 종교집회장으로 한인을 찾아다니며 시민권 취득 운동, 유권자 등록 운동을 벌였다. 골프를 치지 못하면서도 한인 결집을 위한 골프 행사를 주최하기도 했다. 지난 10년간 1만3000명의 시민권자를 유권자로 등록하고 영주권자 800여명의 시민권 취득을 대행했다. 10년 전 8%이던 한인 유권자의 투표율은 2004년에 25%로 뛰어 올랐다. 뉴욕과 뉴저지 지역의 한인이 시장과 의회의원으로 출마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한인이 결집하면서 2004년 대선부터 공화당과 민주당 정치인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2005년 중간선거에서는 지역정치인이 한인을 상대로 선거운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지요.”

김 소장은 투표의 힘을 믿는 정치력 신봉자이다. 미국에서는 정치자금이 매우 중요해 많은 한인이 정치자금을 제공하면서 백인 정치인과 연대관계를 맺지만, 그는 투표권을 활용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고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뉴욕의 한인이 거주인구에 비해 영향력이 없는 것은 투표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론이다. 그래서 그의 모든 생각은 한인의 투표참여, 즉 정치적 표의 집결에 쏠려 있다. 개인적으로는 진보적 성향이지만 한인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면 진보·보수를 따지지 않고 공화·민주당 정치인과 접촉한다.

김 소장의 전략은 성공하고 있다. 지난해 6월에는 자원봉사자 고교·대학생 7명과 함께 뛰어,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정부가 모든 선거업무에서 한국어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만들었다. 한국인 유권자수가 공식 통계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입증해 얻어낸 성과다. 이제 버겐카운티 동포는 대선·총선·예비선거·지방선거 등 연평균 3~4차례나 되는 각종 선거에서 마치 한국처럼 한국어 선거공보와 부재자 투표용지를 받고, 한국어 안내하에 한국어로 선서를 한 뒤 투표할 수 있게 됐다.

김 소장은 지난해에는 일본군 종군위안부에 대한 미국의회의 결의안 통과 및 한국의 비자면제협정 체결을 위해 게리 애커만, 죠셉 크라울리, 믹 그레고리, 피터 킹 등 미국 연방·주의회 의원을 직접 접촉해 지지를 얻어냈다. 뉴저지 교회 유세를 온 킨 후보에게 김 소장은 한인 정치력 신장 현황, 한·미 비자면제협정의 필요성, 하원에 계류 중인 종군위안부 결의안의 중요성, 이민법 개정 필요성 등 한인 사회의 현안을 ‘입력’시켰다. 킨 후보는 기자와 만나자 “1992년 LA 폭동 사건 이후 한인사회의 정치력 향상에 주목하고 있다”며 “한·미 비자면제협정을 적극 지지한다”고 김 소장의 ‘입력’ 내용을 되풀이했다.

김 소장은 110회 연방의회가 개원함에 따라, 지난해 하원 국제관계위원회를 만장일치로 통과했으나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해 자동폐기된 일본군 종군위안부 결의안 통과와 비자면제협정 체결을 올해 중점사업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또 ‘지역 정치인 감시 프로젝트’를 가동해 지역정치인이 한인사회 이슈에 어떻게 대응하고 활동하는지에 대한 모니터링을 실시할 계획이다. 미국 소수민족의 최대 이슈인 이민법 개정과 관련해서는 히스패닉을 비롯한 다른 이민자 그룹과 연대하고 있다.

김 소장은 한인동포도 유대인의 정치적 단합력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대인은 미국사회에서 2%(600만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들은 2차 대전 후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통해 정치적으로 급성장했다.

김 소장은 “수많은 인종이 모여 사는 미국에서 소수계 중의 소수계인 한인이 살아나가려면 유대인처럼 미국 정계에 스스로를 강력하게 주장할 수밖에 없다”며 “과거 유대인처럼 우리에게는 ‘고학력의 한인 2세’라는 귀중한 자산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제 뉴욕시나 뉴저지주의 주의원이나 시장 후보는 김 소장의 유권자 센터를 찾는 일을 당연하게 여긴다. 김 소장의 다음 목표는 워싱턴 정가에 한인 사회의 존재를 인식시키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인에게 한국 문제를 외교문제가 아니라 미국 국내 정치문제로 인식하도록 만들겠다는 의도다. 이러한 김 소장의 노력이 결실을 거두면서, 지난해 3월 김 소장이 뉴욕 플러싱의 한 연회장에서 개최한 센터창립 10주년 기념식에는 10대부터 80대까지 각계 각층의 한인 500여명이 참석해 대성황을 이뤘다.

김 소장은 “한인의 투표참여가 늘어나면서 그 동안 주류사회의 무관심 영역이던 한인 정치력이 점점 탄력을 받고 있다”며 “다수인 백인 유권자가 공화·민주 양당으로 팽팽하게 나눠진 상황에서 한인이 흑인·남미계와 함께 중요 변수로 부각했다”고 평가했다.

 

 

 

 

 

협박 사건에 휘말린 오노…


“나 때문에 비 틀스 해체 말도 안돼”
“전 운전사가 사생활 폭로, 살해하겠다고 위협”…
당사자는 “육체적 학대 받았다” 맞받아쳐
생전의 백남준과 친해 추도식 때 깜짝쇼 펼쳐… 전위예술을 추구하는 세기의 팜므 파탈


매우 날카롭고 매서운 성격이었다. 예술가로서의 자부심도 강했지만 자괴감도 컸다. 자신의 예술과 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또렷이 말했지만 남편에 관한 사항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오노 요코(小野洋子?4). 비틀스 멤버인 존 레넌(1940~1980)의 부인. 존 레넌이 비틀스보다 아내를 택함으로써 비틀스 해체의 주범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세기의 팜므 파탈(위험한 여인)인 그녀. 기자가 그를 만난 것은 2006년 4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추도식이 끝난 뒤였다.

오노는 그날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했다. 검은색 옷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커다란 중국 도자기를 450 조각으로 부순 뒤 관객에게 나누어줬다. 관객이 도자기 조각을 가지고 가는 동안 오노는 푸른색 실로 뜨개질을 하면서 백씨를 추모했다. 그 조각은 백남준의 뼛조각을 상징했다. 관객이 그 도자기 조각을 간직하면서 백남준을 기억하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 2006년 4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추모행사를 마치고 포즈를 취한 오노 요코.

2006년 2월 백남준의 장례식장에서도 오노는 깜짝쇼를 했다. 수백 명의 조문객이 모인 앞에서 백씨가 생전에 연출했던 퍼포먼스를 흉내내 ‘넥타이 자르기’를 재현했다. 1962년 백씨가 독일에서 플럭서스 그룹을 창시한 요제프 보이스를 만난 뒤 관객의 넥타이를 잘랐던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재현한 것이다.

오노 요코는 1933년 2월 일본 도쿄의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도쿄의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뉴욕의 은행지점장으로 발령이 난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온다. 1960년대 전위예술 그룹인 플럭서스의 창시자 존 케이지와 함께 플럭서스의 멤버로 활동한다. 이때 백남준과 만나 평생 동안 동료이자 친구로 지냈다. 백남준의 평생 동지인 샬럿 무어맨과 아내 구보타 시게코를 소개해 준 것도 그녀였다. 플럭서스의 멤버로서 오노는 산업사회의 일상적인 대중문화를 비판하고 전위 미술가와 음악가, 시인이 창조하는 새로운 문화를 추구했다.

▲ 백남준 추모행사에서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퍼포먼스를 벌이는 오노 요코.
오노는 젊은 시절부터 독창적인 전위예술가였지만 사생활은 불안했다. 일본인 첫 남편과 이혼했고, 공연기획자인 둘째 남편과도 헤어졌다.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리던 그녀는 1966년에 자신의 전시회장을 찾은 레넌을 만나 결혼한다. 레넌은 런던의 인디카 갤러리에서 그녀의 작품 ‘천장회화(Yes Painting)’의 일부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돋보기를 통해 ‘예스(yes)’란 글자를 발견하고는 오노에게 빠져들게 됐다고 한다.

오노와 레넌은 서로 영감을 주고받았다. 그녀는 비틀스의 대표곡 ‘이매진’의 탄생 과정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녀의 예술적 재능은 존 레넌뿐만 아니라 ‘토킹 헤즈 앤드 블론디’ ‘B-52’ 등 수많은 록밴드에 영향을 미쳤다.

마주 앉자 오노는 “바쁘다”며 빨리 물어보라고 재촉한다. 그래서 뭣 때문에 바쁘냐고 물었다. “저술활동, 공연 제작, 작곡, 음반 취업, 미술 전시… 무지무지 바빠요.” 그녀는 자신의 예술 활동에 대해 매우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역시 남편인 존 레넌 때문이다. 기자가 존 레넌에 대해 물어보려고 하자 갑자기 “그 부분은 묻지 마세요”라며 날카롭게 대답했다. 하지만 물러설 기자가 아니다.

“레넌과 나는 서로 아주 가까웠어요(very close). 예술적인 이야기도 많이 했지요.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매일 남편 생각이 나요. 비틀스 음악을 아직도 가끔 들어요.”
오노는 전위예술가와 비틀스가 맹활약한 1960~1970년대를 매우 그리워하고 있다. 그녀는 “1960년대에 예술가는 아주 큰 파워를 갖고 세상을 바꿀 수도 있었다”며 “멋진 사상도 많았다”고 했다. 특히 비틀스는 보통의 밴드보다 엄청난, 믿을 수 없는 일을 이뤄냈기 때문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노는 원래 미술가 출신이지만 작곡도 한다. 여러 차례 음악앨범도 냈는데, 그녀의 음악활동에는 역시 비틀스가 큰 영향을 미쳤다. 오노는 “의식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비틀스의 음악풍이 배게 된다”고 말했다.

오노는 남편의 유산과 저작권을 관리한다. 그리고 남편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자선사업도 한다. 2006년 10월에는 아이슬란드에서 레넌이 주창한 평화정신을 기리기 위해 레넌의 생일날 ‘레넌겳윰?기부금’ 10만달러(약 9300만원)를 의료봉사로 유명한 ‘국경없는 의사회’와 비영리단체인 ‘헌법권리 센터’에 각각 5만달러씩 기부했다. 오노는 또 남편과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지난해 남편의 음반 판매로 생긴 로열티 수익이 덜 지급됐다며 음반사 EMI 등을 대상으로 1000만달러(약 93억원)의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오노는 요즘 독특한 사건 때문에 뉴욕에서 화제다. 운전사의 협박 사건 때문이다. 오노의 전 운전기사인 코랄 카산(50)은 200만달러(약 19억원)를 내놓지 않으면 오노의 적나라한 사생활 사진과 녹음테이프를 공개하겠다고 협박하고 심지어 살해 위협까지 한 혐의로 체포됐다. 오노가 살해 협박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카산은 육체적 학대를 받았다고 맞받아치고 있다.

카산은 자신이 오노의 운전사였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학대받은 애인이기도 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카산이 오노에게 보냈다는 협박편지의 내용을 보면 그는 운전사였으며 동시에 오노의 애인이었다. 하지만 오노의 변덕과 의존성향, 학대행위로 인해 결혼생활과 자존심, 오노와의 연애 등 모든 것이 파괴됐다고 주장한다. 그는 심지어 오노를 성희롱 혐의로 고소하기 위해 변호사와 접촉하기도 했다. 외신은 법원이 문제의 오노 포르노 비디오가 담긴 컴퓨터를 압수해 정밀분석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오노 측의 주장은 다르다. 카산과 성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돈이 궁해 그녀를 협박했다는 것이다. 오노는 자신이 카산을 경찰에 신고한 것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노는 20세기의 팜므 파탈로 불린다. 레넌이 비틀스 대신 그녀를 택하는 바람에 비틀스가 해체되었다는 주장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잘라 말한다. “비틀스같이 유명한 밴드의 해체 이유를 한 사람 탓으로 돌리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도 밴드 해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해체됐다고 보는 것이 정당해요.”

시대를 앞서가던 여성 전위예술가로서, 세계적 추앙을 받는 대중음악 우상의 아내로서 평생을 살아온 그녀. 과연 행복할까. “(한숨을 내쉬며) 내 인생은 성공적이지 못했어요. 나는 항상 부족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추구하고 있죠.”

 

 

 

 

 

 

 

반기문 사무총장의 ‘입’ 유엔 대변인 미셸 몽타스

 

 

유엔의 각종 현안을 언론에 적극 해명… 아이티 출신으로 30년 넘게 언론 홍보 생활
          민주화 상징인 남편과 아이티에서 방송국 운영하다 남편 피살 후 뉴욕으로 피신

 

 

미국 뉴욕 유엔본부 2층의 언론 브리핑실에서는 매일 정오에 기자를 대상으로 한 정오 브리핑이 열린다. 반기문(潘基文) 유엔 사무총장의 동정과 유엔의 각종 결정, 활동 상황에 대해 브리핑을 하고 기자의 질문에 답변이 주어진다. 유엔본부와 전세계 유엔기구의 담당자들이 직접 와서 설명을 하기도 하지만 일상적인 브리핑은 주로 유엔 대변인이 한다. 그래서 유엔 대변인은 유엔과 사무총장의 입이다.

미셸 몽타스(Michele Montas). 반 총장의 대변인을 맞아 지난 1월 2일 반 총장과 함께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아이티 출신의 방송인이다. 그녀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정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퍼부어 오다 2000년 4월에 살해된 아이티에서 가장 유명한 반정부 언론인 장 도미니크의 부인이기도 하다. 본부 3층 대변인실로 찾아가니 푸른색 코트를 입고 막 들어온 그녀가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서 기품이 느껴진다.


 

▲ 지난 1월 유엔 브리핑실에서 조국인 아이티 인권상황에 대해 보고하는 내용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미셸 몽타스(오른쪽) 유엔 대변인.


 


몽타스는 1970년대 초반 남편 장과 함께 ‘라디오 아이티 인터내셔널’을 운영하며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프랑스어가 모국어인 몽타스는 1973년부터 1980년까지 앵커를 맡았다. 두 사람은 정부의 인권 침해, 정치적 부패, 공권력에 의한 폭력 등을 고발하는 일을 했다. 그러자 라디오 방송국은 1980년부터 1994년까지 여섯 차례나 외부의 습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몽타스 부부는 두 차례나 망명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메인대학과 컬럼비아대 저널리즘스쿨에서 공부한 몽타스가 유엔과 인연을 맺은 것은 망명 과정에서다. 1980년 11월 아이티 정권에 의해 구금된 뒤 미국 뉴욕으로 추방된 그녀는 유엔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와 홍보국원으로 일하면서 유엔과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방송국을 운영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했지만 정부의 압박은 계속됐다.

장은 1986년과 1987년 등 아이티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했다. 1990년대에는 민주화 운동인 라 벨라스 운동을 적극 옹호했다. 그러나 1994년에 라 벨라스 운동이 라 벨라스 정당으로 변신하면서 크게 실망하게 된다. 당내의 많은 인사가 민주인사가 아니며, 2000년 총선 후보를 선택한 방식도 국민의 민주적 열망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은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고, 그 옆에는 든든한 아내 몽타스가 함께 했다.

하지만 2000년 4월 3일 미셸 몽타스의 가족에게 비극이 찾아왔다. 남편 장이 라디오 방송국의 문을 들어설 때 괴한이 나타나 일곱 차례나 총격을 가한 것이다. 몽타스는 남편의 암살자에 대해 묻는 질문에 “암살 후 수년간 계속된 자체 조사 과정에서 나온 증거를 보면 집권당이던 라 벨라스가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남편 장이 암살됐을 때 아이티 국민은 매우 큰 충격과 고통을 받았다. 장은 아이티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그런 만큼 남편의 살해는 아이티 민주주의의 살해로 간주됐다. 당시 아이티 대통령은 3일간의 추도기간을 선포하고 국회의사당에 검은색 조기를 달도록 했지만 그녀는 그 진심을 믿지 못하고 있다.


▲ 2004년 2월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당시 대통령인 아리스티드를 지지하는 시민이 반대파에 맞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몽타스는 남편이 살해된 후에도 딸과 함께 ‘라디오 아이티 인터내셔널’에서 계속 일했다. 그러나 그녀의 언론활동에 대한 협박과 위협은 계속됐다. 2002년 크리스마스 때 경호원이 그녀를 집에 내려주고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총에 맞아 암살됐다. 2003년 2월 그녀와 방송국 직원에 대한 협박이 이어지면서 방송국을 폐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뉴욕으로 도피했다. 그녀에게 가장 뼈아픈 추억이다.

뉴욕에서 그녀는 2003년 9월부터 2004년 9월까지 유엔총회 의장의 대변인을 맡았다. 그리고 이후 유엔 공보국의 프랑스어 방송부문 총책임자로 일해왔다.

몽타스의 요즘 주된 업무는 반기문 총장을 보좌하는 일이다. 언론인 출신인 그녀지만 반 총장 취임 직후에 언론이 비판적인 논조를 누그러뜨리지 않으면서 더욱 바빠지고 있다. 예컨대 반 총장이 공식업무를 시작한 첫날에는 후세인의 사형과 관련된 반 총장의 발언이 문제가 됐다. 반 총장은 출근 첫 날인 지난 1월 2일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 처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후세인은 이라크인들에 대한 흉악한 범죄에 책임이 있다”면서 “처형은 각국이 법에 따라 정하는 문제”라고 대답했다. 이는 전날 유엔의 아시라프 카지 이라크 특사가 인권에 반하는 범죄, 학살, 전범의 경우에도 유엔은 사형에 반대하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고 밝힌 직후에 나온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반 총장의 발언이 나오자 뉴욕타임스는 “반 총장 발언은 인간의 인권에 기초해 사형제에 반대해온 유엔의 기존 입장을 부인한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또 워싱턴포스트도 “반 총장의 발언은 사형제 비판론자이자 이라크 전범 재판에 대한 유엔 참여를 반대해온 코피 아난 전 사무총장과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라며 “인권 옹호자들은 반 총장의 발언은 오점을 남긴 것으로 보이는 후세인 처형에 위신을 세워준 것이라고 염려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반 총장의 사형 관련 발언이 문제가 되자 진화에 나선 것은 대변인인 미셸 몽타스. 그녀는 다음날 정오 브리핑에서 “사무총장은 사형제 금지 여부에 관한 유엔 총회의 논의가 계속 진행 중인 것을 알고 있고, 이것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각 회원국의 입장을 존중한다”며 “모든 인간은 생명과 자유, 안전의 권리를 갖는다는 세계인권선언 조항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그녀의 적극적인 해명 이후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기자들은 여전히 수단의 다르푸르 사태, 유엔 고위직 임명 등 쉽지 않은 질문을 그녀에게 쏟아내고 있다. 공격자인 언론인에서 수비자인 대변인으로 바뀐 그녀의 일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몽타스는 비폭력주의자다. 그녀는 2004년 아이티 내정이 몹시 혼란해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무력충돌이 벌어진 당시 “정부가 아이티의 몇몇 도시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정부군이 민간인에 대해 보복공격을 했다”며 “이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무장투쟁에 반대하고 정치적 세력 간 협상을 통한 타협책을 강조한다. 몽타스의 꿈은 조국인 아이티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녀는 당초 아이티에서 언론인으로 계속 활동할 생각이었지만 유엔 대변인직을 통해서 아이티의 인권침해 상황을 전세계에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해 대변인직을 맡았다고 했다. 그녀는 “아이티는 내 일부분”이라며 “지금은 사정이 허락하지 않지만 언젠가 아이티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 연어알
글쓴이 : 북극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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