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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summit

1년만에 찾은 얼음속 동료 -‘엄홍길의 약속’ 결국 지켰다

1년만에 찾은 얼음속 동료
[한겨레]
엄홍길의 약속’ 결국 지켰다
에베레스트에서 박무택 대원 주검 찾아
고 박무택(숨질 당시 36) 대원의 주검은 이미 히말라야와 하나가 돼 있었다. “이제 가자! 무택아!” 차가운 얼음 속에 묻혀 있던 박씨의 얼굴을 말 없이 어루만지던 엄홍길(45·트렉스타 이사) 대장이 피켈(빙벽 등반 때 찍고 올라가는 손도구)로 조심스럽게 얼음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1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얼음가루를 날리며 살을 깎아낼 듯 불어대던 찬바람이 갑자기 흩어졌다. 차갑게 굳은 박 대원의 얼굴에 햇살이 비치며 희미한 웃음이 스치는 듯했다. 엄 대장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29일 오후 1시30분(한국시각). 인간의 의지를 시험하는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8750m 고지에 대한민국 산사나이들이 만들어낸 뜨거운 우정이 단단하게 솟아났다. 1년 전 한 발 비켜 설 곳 없는 에베레스트에서 유명을 달리한 박무택 대원의 주검이 엄 대장이 이끄는 ‘휴먼원정대’의 손에 의해 수습되는 순간이었다. 세계 등반 사상 초유의 일이다. 무거워진 몸 운구못해 눈물
장민·백준호 대원은 못찾아
박 대원은 지난해 5월 장민(당시 28), 백준호(당시 38) 대원과 함께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산은 자신의 머리 위에 오른 인간을 쉽게 놓아 주지 않았다. 추위와 체력 저하로 대원들은 자신의 몸과 영혼을 산에 맡겨야 했다. 지난 3월14일 엄 대장은 자신과 케이2 등 히말라야 네 봉우리를 같이 등반한 박 대원 일행의 주검을 찾아 나섰다. 세계 산악인들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몸 하나 제대로 추스르는 것도 불허하는 에베레스트에서 숨쉬지 않는 동료를 찾아 온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 했다. 4월 초 5200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지만 산은 좀체 원정대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5월 초 박 대원을 찾아나선 1차 시도는 세찬 눈보라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초속 20m의 바람이 허리를 꺾고 다리를 흔들었다. 악천후는 계속됐다. 이대로 실패하는 것은 아닌가 두려움이 앞섰다. 날씨를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엄 대장과 원정대는 출발하기 전 자신과 박 대원의 가족, 그리고 산악인들에게 했던 ‘약속’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29일 새벽 4시30분 8300m에 설치된 캠프3을 출발한 휴먼원정대는 7시간 만에 박 대원이 누워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장민·백준호 대원의 주검은 찾을 수 없었다. 이미 체력은 견딜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 있었다. 대원들이 박 대원의 주검이 다칠세라 정성스럽게 얼음을 떼어내는 데만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엄 대장과 대원들은 박 대원의 차가운 주검을 쓸어 안았다. 70㎏이던 박 대원의 몸무게는 히말라야와 하나가 되며 100㎏으로 부쩍 무거워져 있었다. 캠프3까지 거리는 ‘고작’ 2㎞. 그러나 세계 등반 사상 유례가 없는 이 길은 그야말로 끝이 없는 싸움이었다. 100m를 나아가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 엄 대장과 대원들은 눈물을 훔쳤다. “미안하다. 너를 다시 여기 놓아두는구나!” 대원들은 주검 운구가 불가능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대원들이 위험한 상황에 놓일 처지였다. 50m 높이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산사나이들은 뜨거운 우정의 돌무덤 하나를 만들었다. 원정대 격려방문 산악회장
고산병 사망 뒤늦게 알려져
한편, 에베레스트에서 숨을 거둔 후배들을 찾아나선 ‘휴먼원정대’를 격려하기 위해 현지를 방문했던 계명대 산악회 한승권(50) 회장이 고산병으로 숨진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한 회장은 휴먼원정대의 노고를 격려하기 위해 지난달 말 출국해 중국을 거쳐 지난 3일 해발 5100m에 설치된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고 계명대 산악회는 29일 밝혔다. 4번에 걸친 히말라야 등반 경력을 자랑하고 이 가운데 2번은 등반대장을 맡기도 했던 한 회장은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다음날 하산하던 중 갑자기 고산병 증세를 호소해 티베트 라사의 한 병원에서 며칠 동안 치료를 받았다. 한 회장은 그러나 지난 8일 귀국을 앞두고 비행기 탑승 시간을 기다리던 중 호텔에서 갑자기 병세가 악화돼 그 자리에서 숨졌다. 한 회장의 이런 죽음은 휴먼원정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원들에게 상당한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이유에서 그동안 비밀에 부쳐졌다. 이에 따라 계명대 산악회는 유족들과 함께 최근 라사를 방문해 현지에서 한 회장의 주검을 화장한 뒤 유골을 경북 경산의 한 공원묘지 납골당에 안장했다. 계명대 산악회는 다음달 10일께 세 대원의 추도식이나 합동영결식을 할 예정이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