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등산과 알피니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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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자연과 등산 |
1.1 자연과 등산 우리가 적응하고 진화해야 할 목표는? 어쩔 수 없이 도시에 살고 있어도 주말이면 대자연속에서 지내다 와야 한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시간의 자유, 즉 주말은 평생동안 몇 번 없다. 1년에 52번, 그것도 약속이 있고, 잠자야 하고, 결혼식에 가야하고... 결국 1년에 몇 번. 이런 사람들은 결국 그 대가를 몸으로 치루게 된다. 내 몸이 원하는 자연을 외면하고 오염된 문명속에서 몸을 굴리게 되면 신체는 병이 들고, 정신은 척박해 진다. 그리고 후손에게 까지 '친도시문명'이라는 인자가 깊이 각인된 유전인자를 물려주게 된다. |
1.2 산에 왜 오르는가?
내려올 것을 힘들게 왜 올라가나?
1924년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을 앞두고 엔드류 어빙과 함께 정상 600미터 아래에서 실종된 조지 말로리는 에베레스트원정을 떠나기 전, 필라델피아의 한 강연에서 어느 부인의 '당신은 왜 위험하고 힘들며 죽을 지도 모르는 산에 갑니가?'라는 질문에 '산이 그곳에 있으니 오른다.(Because it is there.)'라는 불멸의 명언을 남겼다.(그후 75년만인 1999년 에베레스트 정상부근에서 그의 시신이 발견됨)
당시 말로리는 갑작스런 부인의 까다로운 질문에 당황스럽고 귀찮은 상황을 벗어 나고자 아무생각없이 재치로 받아 넘긴 답변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위대한 산악인이 남기고 떠난 짧은 한마디는 등산의 본질을 가장 함축성있게 설명한 명언이라고 할 수 있다. 산이 있고, 내가 그 산을 오른다. 이것은 자연 더 나아가 우주의 존재와 이곳에 있는 인간의 활동을 설명한 것이다. 왜? 라는 질문을 끝없이 파고 들면 결국에는 우주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의문으로 귀결된다. 아직 아무도 이러한 의문을 풀지는 못했지만 인간은 그속에서 다양한 삶을 영위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왜,산에 올라가나?" 라는 질문은 '우주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인 셈이고, 이에 대한 해답으로 '자연(우주)이 있고, 그곳에서 인간이 생활하고 있다.'라는 말이기에 조지 말로리의 대답은 명언이며,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산에 다니는 우리는 "내려 올 것을 힘들게 왜 올라가냐?'라는 질문을 곧 잘 받곤한다. 이런 질문에는 말로리의 명언과 비슷하게 "죽음것을 왜 살고 있냐?"라고 반문하면 어떨까? 등산의 본질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등산은 곧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으로만 생각한다. 무거운 배낭을 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노라면 숨은 차오르고 다리의 근육통도 심하게 느끼게 된다. 이런 고통을 '사서 고생'한다는 식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곰곰히 이 고통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면 별것이 아니다. 아무리 등산이 고통스럽다고 해도 신체의 손상이 오는 것도 아니고, 재산의 손실을 자져다 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견딜 수 있는 한도까지 참으면 되는 것이다.
육체적 고통이 따르는 다른 운동이나 취미활동을 생각해 보면 축구, 농구, 테니스, 조깅 등,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운동들의 신체적 고통이나 운동의 강도를 등산과 비교하면 결코 약하지 않다. 그러나 "당신은 힘들게 테니스를 왜하냐?"라고 묻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건강에 좋기 때문에 운동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운동하며 즐거워하고 건강해 지려는 이유는 앞 장의 '등산과 알피니즘 - 자연과 등산'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유전정보속에는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고 능력을 향상시켜 후손에게 훌륭한 신체적능력을 물려 줘라'라는 유전신호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런면에서 볼때 등산은 다른 어떤 운동보다도 장점이 많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등산은 무엇이 좋은가?
등산은 운동으로서의 장점을 살펴보아도 다른 운동에 비해 좋은 점이 많다. 첫째 유산소운동으로 경쟁없이 자신의 페이스에 알맞게 조절해 가며 서서히 부하를 높여 나가므로 인간생활에 필요한 운동으로서 가장 알맞은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산이라는 대상이 주는 맑은 공기와 물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은 운동의 효과를 더욱 높여 주며, 도시속에서의 운동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서적인 효과를 함께 얻을 수 있다.
또한 숲이라는 환경은 도시생활에 찌든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많은 것은 제공해 준다. 식물이 만들어낸 오염안된 산소와 음이온이 가득한 공기, 그리고 휘튼치드와 같은 갖가지 물질이 우리에게 유익함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울창한 숲이나 산에가면 그곳에 있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상쾌함을 느끼는 것이다. 일주일에 1번만이라도 오염된 도시를 벗어나 산에 가면 오염된 신체를 조금이라도 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지구는 커다란 자석이며 지표상에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자기장이 흐르고 있으며, 우리의 신체는 이 자기장에 생체리듬을 맞추고 적당한 생리작용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도시에 생활하는 우리는 수많은 전자파공해속에 적당한 전자파의 흐름과 균형이 깨지고 있어 최근 그 위험성이 크게 대두되고 있다. 또한 겹겹이 둘러친 콘크리트 구조물은 지표상에 흐르는 자기장을 차단하고 있으며, 고층건물이나 고층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은 더욱 더 지표 자기장과 차단되어 생활해야만 한다. 실제로 고층에 오랫동안 지내다 보면 머리가 아프거나 무기력해지는 증상이 발생한다.
우리는 막연하지만 땅의 기운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먼 조상들 때부터 지내온 환경, 즉 땅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 이것이 우리신체가 원하고 머물러야 하는 곳이다. 등산은 차단된 땅의 기운을 강하게 받는 좋은 기회이다. 야영을 하면 더욱 좋다. 아파트에 거주하는 필자는 매 주말 등산을 하고 있지만 간혹 휴일에 부족한 수면을 취하기 위해 해가 중천에 뜨도록 늦잠을 자곤 한다. 그러나 산에서 야영을 하면 아무리 늦잠을 자려고 해도 아침이 오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땅과 가까이 수면을 취했기 때문에 충분한 휴식이 되었다는 신체반응일 것이다.
납, 카드늄, 수은 등 중금속은 대부분 발암물질이며 신체에 과다하게 축적되면 각종 원인 모를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한경이 오염되어 감에 따라 우리의 몸은 이러한 중금속이나 유해물질에 점차 오염되어 가고 있다. 우리의 몸은 원래 유해물질이 들어오면 신진대사 작용을 통해 자동으로 배출시킨다고 한다. 그러나 중금속은 쉽게 배출되지 않아 지속적으로 쌓여 가지만, 등산중에 흘리는 진땀을 통해 이러한 중금속이나 유해물질이 신체밖으로 배출된다고 한다.
암이나 당뇨병, 그밖의 불치병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이 등산을 통해 완치하거나 호전시키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그동안 온갖 현대의학의 치료법을 모두 사용한 후 마지막으로 산을 선택하여 건강을 되찾은 것이다. 등산이 건강에 좋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우리도 산과 자연을 떠나 도시에서 살면 문제를 일으키게 되어 있다. 우리가 지내야할 환경은 도시가 아니라 먼 조상들때부터 지내온 산과 자연인 것이다. 그래서 물고기가 물을 찾아 퍼덕이듯이 우리는 산을 찾는 것이다.
무상(無賞)의 행위
등산이 신체적인 건강만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최초로 오른 8,000m인 안나푸르나(8,091m) 초등에 참여한 리오넬 테레이는 '무상의 정복자'라는 저서에서 등산은 '무상(無賞)의 행위'라고 하였다. 현대산업사회에 만연된 경제논리, 보상의 논리속에서 인간의 끊임없이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지만, 한편으로 정신이 피폐해져가고 있다. 이익이 없고 반대급부가 없는 행위는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하고, 효율적인것 같지만 모순과 불합리로 가득한 경제.사회 구조속에서 순수한 인간성의 상실이 심해지고 있다.
등산은 그 행위의 특성상 많은 시간과 재화 그리고 노력을 쏟아야 한다. 그러한 행위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일부 등산가는 생계나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기도 하지만) In-put 과 Out-put (투입과 산출)으로 저울질 한다면 매우 미련한 짓이며, 비생산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원래 비생산적인 놀이에 관심이 많다. 그것을 우리는 취미활동이라고 한다.
우리는 지금 복잡하게 얽힌 산업사회의 노예가 되어 과중한 일에 시달리고 있다. 원래 인간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지금처럼 많은 시간을 일에 빼앗기지 안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어느 학자가 동물들이 살기위해 투자하는 노동의 시간을 연구해 보았더니, 인간이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사자는 하루에 1시간정도만 사냥을 하고 남는 시간은 자유롭게 보내고, 대부분의 다른 동물도 하루중 몇시간만 일을 하며 삶을 유지한다고 한다. 인간만이 8시간이상(출퇴근시간과 가사노동시간을 합하면 더 늘어난다)의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먼 원시시대에는 지금처럼 많이 일을 하지 않았고, 동물들이 자연의 풍요속에서 유유자적하며 살고 있듯이 인간도 자연의 풍요와 여유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며 살았을 것이다. 지금도 도시생활을 하는 사람보다 전원생활이나 농사일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은 시간적 여유를 가지는 것을 보아도 도시산업사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인간성을 상실하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일만 하며 살 수 없다. 여유시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각자 자신이 원하는 놀이에 몰두하며 풍요로운 삶을 영위해야 할 것이다. 풍요로운 삶이 경제적인 가치추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편협한 인생관일지 모른다. 많은 부를 쌓고, 그것을 바탕으로 안락한 삶을 원한다거나, 지위에 집착하여 일생을 그것만 쫓아다닌다는 것은 불행한 삶일 것이다. 결국 부와 욕심은 세상에 남겨 놓고 자신은 땅에 묻히는 것이며, 과도하게 이런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이나 자연을 괴롭히게 된다.
일주일동안 일만 하다가 주말이면 낮잠자고 휴식하고... 그렇게 일생을 보낼 것인가? 일 말고 자신이 순수한 열정으로 몰두할 수 있는 취미활동, 이것이 바로 무상의 행위인 것이다. 각박한 생존경쟁의 틀에서 일탈하여 감성의 자유, 시간의 자유, 공간의 자유를 마음껏 즐기기는 것이 진정한 삶의 풍요일 것이다.
등산은 사람이 즐기는 무상의 행위가운데, 제일 상급일 것이다. 우리의 고향인 자연속으로 가장 깊숙이 들어가 적응하며, 오묘한 변화를 즐긴다. 그속에는 꿈이 있고, 준비가 있고, 철학이 있고, 우정이 있고, 열정이 있고, 사색이 있고, 쾌감이 있고, 좌절이 있고, 고통이 있고, 극복이 있고, 휴식이 있고, 회상이 있다. 우리가 원하는 또다른 순수한 인생이 있는 것이다.
1.3 알피니즘 I - 등산이란 무엇인가? |
1.4 알피니즘 II - 등산은 어디까지 왔나? |
1.5 알피니즘의 태동
알프스산맥은 크게 북쪽과 남쪽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북쪽은 대양성기후의 영향으로 많은 강우량과 저기온으로 궂은 날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때가 많으며 기온변화가 심한편이나 남쪽알프스는 지중해성 영향을 받아 온화한 기후와 얕은 산세가 지중해지역으로 근접할수록 우리나라 산과 아주 유사한 모습을 연상케하는 곳도 있다. 프랑스 알프스는 스위스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레만호에서부터 시작되며 약200km의 폭으로 니스까지 370km에 이른다. 최고봉인 몽블랑은 이태리와 국경을 이루고 있고 정상이 올려 보이는 샤모니(1035M)는 산악인의 메카로서 년중 가장 많은 등산객과 광광객이 찾아드는 명소로 알프스의 심장이라할 수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 프랑스 오뜨 사브아 지역에 속해 있는 샤모니 계곡은 발므에서 보자까지 23km의 길이를 얘기하며 약200만년전 제4기 빙하기시절에 얼음 덩어리에 의해 깍여 지면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최근 약1만년전까지 계곡을 덮고 있던 얼음이 녹으면서 골짜기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워낙 산세가 험하고 지형이 복잡해서 11세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이 골짜기에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샤모니가 알려지기 시작하게된 것은 제네바지역을 다스리던 에몽이라고 하는 영주가 (1090년경) 자신에게는 쓸모없던 이땅을 카톨릭 수도자들에게 기증하게 되고 소수의 수도자들이 이곳에 수도원을 건축하고 정착하면서 부터다. 하지만 극히 짧은 여름과 혹독한 기후 그리고 진입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이 골짜기에서 사람들은 오랫동안 외부세계와는 단절된 상태로 가혹한 자연환경과 함께 스스로 생존하는 법을 배우며 비참하게 살아야만 했다. 당시 중세유럽의 교황과 카톨릭은 모든 국가와 백성들에게 정신적 지배자로 절대적 위치와 존재로 군림했으며 국가와 백성들은 교회와 교황청에 반드시 세금을 납부해야하는 의무를 지고 있었다. 하지만 샤모니만은 공제 수확물에 대해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세금을 감면또는 면제받고 있었는데 일부성직자와 특권층 귀족을 제외하고는 절대 불가능한 이 면세 혜택은 교회에서 특별히 눈감아준 것이 아니라 샤모니 사람들이 굽힐줄 모르는 용기와 끈질긴 투쟁으로 오랫 동안 싸워서 교황청으로 부터 얻어낸 그들의 이득이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이 지역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끈질기며 강인한 성격과 전통적 보수성 기질은 아마 이런 어려운 생활환경과 투쟁의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듯하다.(당시로서 수확물에 대한 면세요구는 교회로부터 파면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일로 얼마나 샤모니의 생활과 환경이 생존하는데 열악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외부 사람들의 발길이 샤모니를 찾기 시작하는 것은 1860년 나폴레옹3세가 왕후와 함께 사브아지방 순방차 이곳을 지나며 험난한 계곡 진입로를 노새와 가마가 통과할 수 있도록 정비하게 되고 이후 몽블랑을 보다 가까이서 전망하기 위한 일부 상류층 신분의 여행객들이 시종과 함께 먹을 것을 가득 실은 노새를 이용하여 찾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알피니즘의 시작
하지만 직업적인 채굴자로서 그들의 등정과 산행을 우리는 알피니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빙하를 건너고 어려운 암벽을 오르는 그들의 지식과 기술은 이후 순수하게 몽블랑을 오르기 위해 샤모니를 찾는 많은 등반가들의 좋은 길잡이가 된다. 예로 알프스 등산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긴 몽블랑 초등자 쟉 발마는 등반가라고 하기보다는 샤모니의 직업적인 수정 채굴자였다. 그러면 샤모니의 순수한 알피니즘으로서 등반은 언제부터 시작되는가? 바로 1741년 영국인 포콕과 윈드햄에 의한 몽탕베르(1909M) 등정부터이다. 모험가와 군인이었던 이 두사람은 제네바에 여행을 왔다가 멀리 보이는 몽블랑 (하얀산이라는 뜻)에 매료되어 샤모니를 찾게 되는데 당시만 해도 절벽과 원시림으로 진입이 극히 어려워서 3일 만에야 샤모니에 도착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수도원장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몽탕베르를 오르는데 이후 이 등정기록은 샤모니에 새로운 등반열기를 몰고 오는 동기가 된다. 그리고 1760년 제네바의 자연과학자인 오라스 베네딕뜨 드 소쉬르는 혼자서 몽탕베르와 브레방(2525M)정상을 단숨에 오르고 나서 당시만 해도 미지의 세계로 접근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 왔던 얼음 구덩이와 눈으로 덮인 몽블랑 등정의 가능성을 확신한 후 제네바로 돌아 온다. 하지만 당시 제네바에서 상당한 재력가로 알려진 소쉬르는 수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원정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몽블랑 등정의 꿈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그는 몽블랑에 대한 열정을 누구든 자기 대신 정상을 오르는 사람에게 사례하겠다는 상금을 내걸게 되고 1786년 8월 8일 두명의 샤모니사람에 의해 몽블랑의 첫등정은 이루어진다.
두사람의 초등소식을 전해 들은 소쉬르는 몽블랑을 오르는 꿈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이듬해 다시 대규모의 원정팀을 구성해서 몽블랑 정상을 밟게 되는데 이때에도 타고난 체력과 뛰어난 재능을가진 쟉 발마가 그들 원정의 길잡이를 했다. 어쨌던 2등을 했지만 소쉬르는 몽블랑에 대해 남다른 열정과 등정의 욕망을가지고 제네바에서 부터 수십년간 셀 수 없이 샤모니를 오르 내리며 새로운 알피니즘에 불을 당겼다. 당시 소쉬르는 과학자답게 과학적 관찰을 목적으로 많은 인원과 과학 장비를 가지고 연구원정등반을 하였는데 이때 그가 남겨 놓은 관찰기록들은 이후산악등반의 선구적인 기술적 자료들로 남게된다. 이후 몽블랑은 새로운 기록들을 세우기 위한 많은 알피니스트들이 찾기 시작하고 1808년에는 마리 파라디라고 하는 처녀가 샤모니에 들렀다가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몽블랑을 오르는데 가이드의 등에 업히고 밀려서 정상에 오른 그녀는 거의 반주검이 되어 샤모니로 돌아 온다. 이 여성 초등기록은 순수 알피니즘에 의한 등반이라할 수 없다. 알피니즘에 의한 첫 여성등정은 1838년 앙리엣 당즈빌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그녀는 처음부터 몽블랑 등반을 준비해 왔고 샤모니 가이드들도 놀랄 정도로 치밀한 계획과 꼼꼼한 등반으로 나중에 가이드들로 부터 몽블랑의 아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이렇게 몽블랑의 등정이 여러 차례 걸쳐 성공하게 되고 샤모니는 모험을 즐기는 탐험가와 새로운 봉우리를 찾아 오르려는 많은 알피니스트들의 발길들로 이어지기 시작하자 이 지역의 산세와 기후를 잘 알고있는 샤모니 수정채굴자들은 자연히 그들의 유급 길잡이로 나서게 되고 나중에는 직업적인 산악가이드로 탈바꿈하게 된다. 드디어 1821년에 샤모니 산악가이드협회가 (초창기는 샤모니 산악동지회라 일컬었음) 결성되고 샤모니는 알피니즘의 중심지로 변모하게 되며 더욱 많은 등반가들이 샤모니로 모여 든다. 등산의 붐이 일기시작한 18세기 후반부터 샤모니를 찾은 등반가는 거의 대부분 1857년 설립된 영국 산악회소속의 영국인들이었다. 대표적으로 영국에서 건너온 에드워드 윔퍼는 1860년부터 1871년 사이 샤모니의 수많은 첨봉들에 초등기록을 남기면서 그의 새로운 암벽등반기술을 선보이게 되고 그를 통해 샤모니에는 더 많은 어려운 첨봉들을 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낳게 한다. 이렇게 불붙기 시작한 알프스의 등반열기는 스위스의 마터호른 초등을 계기로 알피니즘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참고] 알피니즘이란 알프스의 봉우리를 순수하게 등반을 목적으로 오르는 새로운 사상. 알피니스트는 알피니즘을 추구하는 등반가. 몽블랑의 빙하 옛날 이지역 사람들은 몽블랑을 신의 저주를 받은산 이라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몽블랑 정상에서 샤모니로 흘러 내리는 여러 빙하는 재난과 재앙을 불러 일으키는 공포의 대상으로 악마가 서식하는 지옥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이론으로 빙하의 발달과 생성과정이 밝혀지기전 빙하 속의 거대한 얼음탑과 갈라진 무시무시한 크레바스의 생김새는 충분히 옛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문명의 발달로 빙하의 비밀이 벗겨지고 많은 탐험가와 등반가들이 빙하를 오르내리면서 빙하는 더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이 빚어 놓은 조화와 현상으로 이해되자 이 아름다운 경관을 보기 위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게되는 새로운 명소로 바뀌게 된다. 지금은 기후변화로 인하여 빙하의 규모와 크기가 많이 줄어 들었지만 1741년 처음으로 포콕과 윈드햄이 몽탕베르에 도착해서 보았던 어마어마한 빙하는 현재 등산열차 역사가 자리한 곳보다 더 높은 빙탑들이솟아 있었다. 그들은 이 빙하를 보고 큰 바다가 심한 폭풍우로 순식간에 얼어 붙은 파도와 같다고 기록을 남겨 놓았다. 그 이후 이 빙하를 메르 드 그라스(빙하의 바다)라 부르게 되는데 표고차 3000미터의 차이를 가지고 폭1200미터 총7000미터 길이로 샤모니 마을까지 펼쳐진 프랑스 최대 빙하다. 메르 드 그라스 빙하는 때에 따라서 규모가 커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1590년과 1645년사이 지속적인 대기 온도의 강하로 1645년겨울에는 전유럽을 강타한 극심한 추위가 빙하의 움직임을 급속도로 빨리하여 샤모니계곡을 완전히 갈라 놓았다. 이 재해를 샤모니 사람들은 악마의 장난으로 생각하여 제네바주교를 찾아가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올리게 되는데 어쨌던 그 이듬해 온화한 기후가 다시 찾아와 빙하는 재해 이전의 상태로 다시 줄어 들었다. 기록에의 하면 1645년경 빙하는 최고로 증가하고 그 다음은 1850년경 그리고 가장 심한 감퇴 현상은1955년부터 현재까지이며 지금도 빙하는 계속해서 줄어 들고 있다. 아마도 공해에 의한 대기 온도상승으로 이상 현상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라고 자연보호주의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빙하는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활동하는가? 고산의 눈은 매우 건조하고 차갑다. 몽블랑 정상 10미터 깊이의 눈은 영하20도 정도나 된다. 그리고 3600미터 암봉주변의 지형은 바람의 방향에 따라 많은 량의 눈이 쌓이는데 몽블랑 정상이나 3000미터 주변의 쌓인 눈은 낮에 강한 햇볕에 의해 표면부터 녹으면서 젖기 시작하고 녹은 눈은 섭씨10도까지 상승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 위에 새로 쌓이는 신설에 의해 녹은 눈은 다져 지면서 굳어진다. 이런 계속적인 현상은 약 30미터깊이 (15년걸림)정도에 이르면 물도 통과할 수 없는 매우 견고한 얼음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중력에 의해 밀려나기 시작하는 이러한 두꺼운 얼음층들은 해발 2700미터에 이르러 갈라지면서 빙탑을 형성하게 되고 무너지는 빙탑들은 다시 아래로 밀려 나면서 크래바스를 만들어 놓는다. 빙탑과 크레바스는 산새의 굴곡에 따라 높이와 크기가 달라지는데 급경사 일수록 횡단으로 갈라지며 틈이 벌어지고 완만할수록 틈은 좁아든다. 그리고 돌출부가 있는 곳에서는 수직의 빙탑이 형성되고 기복이 심하면 붕괴된다. 새로 쌓이는 신설의 무게와 중력에 의해 움직이는 빙하의 유속은 지형에 따라서 다르지만 평균 약 시속 1Cm의 속도(1년에100미터정도)로 아래로 흘러 내린다. 이렇게 움직이는 빙하는 많은 암반과 조각들을 계곡 아래로 운반하는데 얼음 사이에서 떨어진 암석조각들은 일정한 띠를 형성하고 이 흔적들은 빙하의 흐름에 따른 곡선과 일치하며 가장자리보다 중심부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 띠들은 수십년 동안 빙하흐름의 속도변화를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연구자료로 쓰인다. 19세기 어느 알피니스트가 등반중 잃어버린 장비를 우연하게 몇 년후 빙하 하류에서 발견하면서 빙하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게된 이 놀라운 현상은 빙하의 생성시기와 시대적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큰 도움이 될뿐아니라 더이상 악마가 서식하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후 1879년경 몽탕베르에는 호텔과 식당이 들어서게 되고 빙하를 연구하기 위한 자연과 학자들은 이곳에서 자료수집과 측량을 통해 수많은 연구기록들을 발표한다. 이렇게 해서 빙하의 비밀이 벗겨지자 사람들은 자연이 빚어놓은 최고의 걸작품인 빙탑과 얼음동굴들을 보기 위해 메르 드 그라스가 있는 몽탕베르를 오르기 시작하고 샤모니의 산악가이드와 가마꾼들은 빙하를 건너는 그들의 길잡이 가된다. 19세기 나폴레옹3세와 그의 왕후 유제니까지 다녀간 몽탕베르와 메르 드 그라스 빙하는 1908년에 이르러 최초의 등산열차가 개통되면서 알프스의 최고 관광코스로 발전한다. 현재 샤모니 계곡의 대표적인 빙하는 가장 큰 메르 드 그라스빙하 표고차가 가장크고 유속이 제일 빠른 보쏭빙하(표고차3600미터 유속하루에 약1미터)와 타코나빙하 그리고 아르장티에르빙하가 있다. |
1.6 간추린 등산사 ① 등정주의(Peak Hunting) ② 가이드레스(Guideless) ③ 등로주의(Mummerysm) ④ 곡예등반(Acrobatic Alpinism) ⑤ 북벽등반 ⑥ 직등주의(Direttissima) ⑦ 고산등반 ⑧ 크린 클라이밍 ⑨ 프리 클라이밍 훈련의 목적으로 인공암벽이 세워지고 암벽등반을 스포츠화하여 인공암벽에 서의 우열 경쟁 (1980년대) 등반의 변천사 ① 몽블랑 초등 - 마터호른 초등까지 (황금시대) * 1865년 : 최후의 처녀봉 마터호른(Matterhorn;4,478m)이 에드워드 윔퍼(Edward Whymper)에 의해 초등됨. ② 알피니즘의 광역화와 은의 시대 ③ 철의 시대와 머메리즘의 개화 ④ 히말라야 등산의 시작과 네셔날리즘(Nationalism) ⑤ 전후 알프스지역의 등반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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