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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summit

[스크랩] 등산과 알피니즘

 
 
 

1.1 자연과 등산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우리는 끝없이 발전하는 문명속에 살고 있다. 이 문명의 최종목표는 인간이 손하나 까닥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인가 보다. 그 결과, 한경보존을 한다고들 하고 있지만 자연은 본래의 모습을 잃고 결국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그 때가 얼마쯤 뒤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가 되면 우리의 후손들은 틀림없이 머리만 비대해지고, 근육은 숟가락만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아져 있을 것이다. 설마? 하겠지만 현재와 같은 문명의 발전방향을 바꾸지 않는한 틀림없는 현실이 될 것이다. 울창한 숲, 맑은 계곡과 호수는 없어지고 바다조차 처참하게 오염될 것이며, 이미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지각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속에서 도시문명속에 길들여 지고, 편안함과 쾌락(안락)을 추구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모두 원하는 만큼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콘크리트, 자동차, 기계, 전자 등이 뒤범벅된 도시에서 동물보다 훨씬 더 많이 노동을 하며 문명과 돈의 노예가 되어 기계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주말이면 밀린 잠을 자거나, 콘크리트 교회, 극장, 레스토랑, 커피숍 그리고 기껏해야 콘크리트 콘도 등을 찾아다니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휴식이고, 여가이고, 취미이고 인생을 사는 행복일까?

우리가 적응하고 진화해야 할 목표는?
자연속에서의 생활을 모르고 성장한 젊은이들 대부분은 시골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단지 더럽고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자연을 싫어하며, 마치 도시가 진짜 고향인 것처럼 안락을 느낀다. 이 들이 이것을 진짜 본능으로 인식하고 도시문명에 적응해 간다면 앞서 말한 무서운 결과가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왜하면 욕구는 유전정보를 서서히 변화시키고 우리의 후손들은 도시문명에 맞게 진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벌써 진행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 있는 것 같다. 우리들은 아직도 먼 옛날 우리의 조상들이 대자연속에서의 생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큰 체격과 강인한 근육을 가지고 있고, 도시에서 태어난 우리의 2세들도 그렇게 태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기야 우리가 도시문명속에서 살게 된 것이 몇 년 되었다고 벌써 유전인자가 변하겠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유전인자가 대자연속에서의 생활에 맞게 되어 있다면, 왜 우리는 도시문명을 좋아하고 끝없이 안락을 추구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동물보다 더 수준이 낮은 과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삶의 행복이 부와 명예와 무노동과 안락함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기주의적 욕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화하고 적응해야 할 목표는 끝없는 안락을 쫓는 도시문명이 아니고 대자연과의 조화이다.


자연으로 돌아 가자.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몸은 자연의 맑은 공기와 물 그리고 자연의 기운을 원하고 있다. 우리의 몸속에 있는 유전정보는 대자연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알맞게 되어 있고, 우리의 신체도 아직까지는 대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에 알맞은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평생을 도시속에서만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본질을 모르는 불행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도 때때로 분위기 좋은 자연환경을 접할 때면 '아! 좋구나'하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왜 좋은가는 모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도시에 살고 있어도 주말이면 대자연속에서 지내다 와야 한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시간의 자유, 즉 주말은 평생동안 몇 번 없다. 1년에 52번, 그것도 약속이 있고, 잠자야 하고, 결혼식에 가야하고... 결국 1년에 몇 번. 이런 사람들은 결국 그 대가를 몸으로 치루게 된다. 내 몸이 원하는 자연을 외면하고 오염된 문명속에서 몸을 굴리게 되면 신체는 병이 들고, 정신은 척박해 진다. 그리고 후손에게 까지 '친도시문명'이라는 인자가 깊이 각인된 유전인자를 물려주게 된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요 자연속의 모든 것은 아름답다. 어떤 이들은 멋지고 웅장한 풍경이나 아름다운 단풍은 좋지만, 깊은 숲속의 제멋대로 자란 나무나 수풀들이 서로 얼켜있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나뭇잎 썩는 냄새나 흙냄새가 좋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수년전 파리에 사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독일 뮌헨에서 밤기차로 파리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차창밖으로 스치는 유럽농촌의 새벽풍경에 취해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풍요로운 감흥에 젖어 들었다. 완만한 구릉과 숲, 농가, 시냇물... 그러나 파리의 루브르박물관, 에펠탑, 마르세이유 궁전 등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불쌍한 사람들이 이것을 만들기 위해 고생했을까? 자연은 또 얼마나 망가뜨리고' 이런 생각만 들었다. 이런 것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은 자연의 풍요와 아름다움을 모르는 불행한 사람들이다.
자연속으로 가면 우선 공기가 다르다. 새벽공기는 그중에서 최고이다. 만물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만 보고도, 내가 그 속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의 안락을 위해 필요이상 다른 것을 괴롭히지 않는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고 싶다. 도시속에서의 어떤 만족과 열매도 자연속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시간의 흐름속에 오묘하게 변화하는 자연은 풍요롭고, 그속에 있고 느끼는 나 역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아웃도어 라이프 (OUT-DOOR LIFE)
선진국민과 후진국민을 구별하는 여러가지 척도 가운데, ‘자연을 즐기는가?’가 있다. 선진국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주말이면 자연속으로 가서 생활한다. 별장, 통나무 오두막, 캠핑 등 여러장소에서 다양한 아웃도어(OUT-DOOR)활동을 즐긴다. 이미 이들은 진정한 삶의 풍요는 자연속에서의 생활 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가운데에도 주말을 도시에서 썩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 가운데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지만 모두 하류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웃도어 라이프(OUT-DOOR LIFE)를 즐기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냥 깊은 숲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등산, 낚시, 캠핑, 카약/카누, 래프팅, MTB, 트레킹... 그 중에서 최고는 등산일 것이다. 왜냐 하면 산은 자연의 모든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 아웃도어 라이프 인구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등산을 즐기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등산을 통해 자연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주말에 등산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업 그레이드(UP GRADE)된 것이다.

등산은 왜 즐거운가?
우리 인간의 유전인자속에는‘신체의 모든 능력을 향상 시켜라.’라는 신호가 들어 있을 것이다. 먼 엣날 원시시대때 부터 자연속에서 뛰고 달리며 힘을 쓰며 삶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강인한 체력과 운동능력은 삶과 후손을 이어가는 가장 중요한 것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축구나 농구와 같은 스포츠를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축구를 좋아하는 가 물으면, 재미있으니까 라고 할 것이고, 왜 재미있냐고 물으면 답변이 궁색해 질 것이다. 나는 그 근본적인 이유를‘신체능력의 향상’이라는 유전신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올림픽 경기는 바로 유전신호의 시험장이다. 우리 인간은 모든 운동능력을 종목별로 끊임없이 향상시키는데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뛰고, 달리고, 힘쓰고... 등의 운동능력외에 ‘잘 올라가는 능력’또한 우리 유전신호가 계속 향상시킬 것을 지시하는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올라가는 것은 인간의 본능 가운데 하나이다. 간난아이가 무조건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만 하고, 아이들은 높은 담벼락이나 나무를 오르며 놀기를 좋아 한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 암벽등반을 즐긴다.
‘왜 산에 오르는 가?’라고 질문하는 사람은 도시문명과 자연, 안락과 노동, 풍요와 각박함 등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들의 기준은 보상에 있다. 보상이 없는 행위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축구나 농구는 운동의 즐거움이라는 보상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등산은 힘들기만 하지 보상이 없다고 생각한다. 축구나 농구도 체력을 사용하는 고통이 있다. 등산중에 힘드는 것은 축구나 농구에서 힘드는 것과 다른 것일까? 우리가 산을 선택했다는 것은 남들은 잘 모르는 유전신호를 해독한 것이다.
등산은 모든 놀이가운데 최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연속에서의 생할에 가장 충실하기 때문이다. 등산은 삶을 일시적으로 산으로 옮긴 것이다. 등산으로 삶을 업그레이드 한 우리는 김영도 선생님께서 말했듯이 사람을 분류할 때, 재산, 지위, 직업, 성별, 성격 등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이미 그런 것은 관심밖이다. 우리는 산에 다니는 사람, 안 다니는 사람으로 분류한다.


 

1.2 산에 왜 오르는가?


내려올 것을 힘들게 왜 올라가나?

1924년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을 앞두고 엔드류 어빙과 함께 정상 600미터 아래에서 실종된 조지 말로리는 에베레스트원정을 떠나기 전, 필라델피아의 한 강연에서 어느 부인의 '당신은 왜 위험하고 힘들며 죽을 지도 모르는 산에 갑니가?'라는 질문에 '산이 그곳에 있으니 오른다.(Because it is there.)'라는 불멸의 명언을 남겼다.(그후 75년만인 1999년 에베레스트 정상부근에서 그의 시신이 발견됨)

당시 말로리는 갑작스런 부인의 까다로운 질문에 당황스럽고 귀찮은 상황을 벗어 나고자 아무생각없이 재치로 받아 넘긴 답변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위대한 산악인이 남기고 떠난 짧은 한마디는 등산의 본질을 가장 함축성있게 설명한 명언이라고 할 수 있다. 산이 있고, 내가 그 산을 오른다. 이것은 자연 더 나아가 우주의 존재와 이곳에 있는 인간의 활동을 설명한 것이다. 왜? 라는 질문을 끝없이 파고 들면 결국에는 우주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의문으로 귀결된다. 아직 아무도 이러한 의문을 풀지는 못했지만 인간은 그속에서 다양한 삶을 영위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왜,산에 올라가나?" 라는 질문은 '우주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인 셈이고, 이에 대한 해답으로 '자연(우주)이 있고, 그곳에서 인간이 생활하고 있다.'라는 말이기에 조지 말로리의 대답은 명언이며,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산에 다니는 우리는 "내려 올 것을 힘들게 왜 올라가냐?'라는 질문을 곧 잘 받곤한다. 이런 질문에는 말로리의 명언과 비슷하게 "죽음것을 왜 살고 있냐?"라고 반문하면 어떨까? 등산의 본질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등산은 곧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으로만 생각한다. 무거운 배낭을 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노라면 숨은 차오르고 다리의 근육통도 심하게 느끼게 된다. 이런 고통을 '사서 고생'한다는 식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곰곰히 이 고통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면 별것이 아니다. 아무리 등산이 고통스럽다고 해도 신체의 손상이 오는 것도 아니고, 재산의 손실을 자져다 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견딜 수 있는 한도까지 참으면 되는 것이다.

육체적 고통이 따르는 다른 운동이나 취미활동을 생각해 보면 축구, 농구, 테니스, 조깅 등,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운동들의 신체적 고통이나 운동의 강도를 등산과 비교하면 결코 약하지 않다. 그러나 "당신은 힘들게 테니스를 왜하냐?"라고 묻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건강에 좋기 때문에 운동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운동하며 즐거워하고 건강해 지려는 이유는 앞 장의 '등산과 알피니즘 - 자연과 등산'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유전정보속에는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고 능력을 향상시켜 후손에게 훌륭한 신체적능력을 물려 줘라'라는 유전신호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런면에서 볼때 등산은 다른 어떤 운동보다도 장점이 많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등산은 무엇이 좋은가?

등산은 운동으로서의 장점을 살펴보아도 다른 운동에 비해 좋은 점이 많다. 첫째 유산소운동으로 경쟁없이 자신의 페이스에 알맞게 조절해 가며 서서히 부하를 높여 나가므로 인간생활에 필요한 운동으로서 가장 알맞은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산이라는 대상이 주는 맑은 공기와 물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은 운동의 효과를 더욱 높여 주며, 도시속에서의 운동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서적인 효과를 함께 얻을 수 있다.

또한 숲이라는 환경은 도시생활에 찌든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많은 것은 제공해 준다. 식물이 만들어낸 오염안된 산소와 음이온이 가득한 공기, 그리고 휘튼치드와 같은 갖가지 물질이 우리에게 유익함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울창한 숲이나 산에가면 그곳에 있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상쾌함을 느끼는 것이다. 일주일에 1번만이라도 오염된 도시를 벗어나 산에 가면 오염된 신체를 조금이라도 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지구는 커다란 자석이며 지표상에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자기장이 흐르고 있으며, 우리의 신체는 이 자기장에 생체리듬을 맞추고 적당한 생리작용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도시에 생활하는 우리는 수많은 전자파공해속에 적당한 전자파의 흐름과 균형이 깨지고 있어 최근 그 위험성이 크게 대두되고 있다. 또한 겹겹이 둘러친 콘크리트 구조물은 지표상에 흐르는 자기장을 차단하고 있으며, 고층건물이나 고층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은 더욱 더 지표 자기장과 차단되어 생활해야만 한다. 실제로 고층에 오랫동안 지내다 보면 머리가 아프거나 무기력해지는 증상이 발생한다.
우리는 막연하지만 땅의 기운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먼 조상들 때부터 지내온 환경, 즉 땅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 이것이 우리신체가 원하고 머물러야 하는 곳이다. 등산은 차단된 땅의 기운을 강하게 받는 좋은 기회이다. 야영을 하면 더욱 좋다. 아파트에 거주하는 필자는 매 주말 등산을 하고 있지만 간혹 휴일에 부족한 수면을 취하기 위해 해가 중천에 뜨도록 늦잠을 자곤 한다. 그러나 산에서 야영을 하면 아무리 늦잠을 자려고 해도 아침이 오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땅과 가까이 수면을 취했기 때문에 충분한 휴식이 되었다는 신체반응일 것이다.

납, 카드늄, 수은 등 중금속은 대부분 발암물질이며 신체에 과다하게 축적되면 각종 원인 모를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한경이 오염되어 감에 따라 우리의 몸은 이러한 중금속이나 유해물질에 점차 오염되어 가고 있다. 우리의 몸은 원래 유해물질이 들어오면 신진대사 작용을 통해 자동으로 배출시킨다고 한다. 그러나 중금속은 쉽게 배출되지 않아 지속적으로 쌓여 가지만, 등산중에 흘리는 진땀을 통해 이러한 중금속이나 유해물질이 신체밖으로 배출된다고 한다.
암이나 당뇨병, 그밖의 불치병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이 등산을 통해 완치하거나 호전시키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그동안 온갖 현대의학의 치료법을 모두 사용한 후 마지막으로 산을 선택하여 건강을 되찾은 것이다. 등산이 건강에 좋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우리도 산과 자연을 떠나 도시에서 살면 문제를 일으키게 되어 있다. 우리가 지내야할 환경은 도시가 아니라 먼 조상들때부터 지내온 산과 자연인 것이다. 그래서 물고기가 물을 찾아 퍼덕이듯이 우리는 산을 찾는 것이다.


무상(無賞)의 행위

등산이 신체적인 건강만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최초로 오른 8,000m인 안나푸르나(8,091m) 초등에 참여한 리오넬 테레이는 '무상의 정복자'라는 저서에서 등산은 '무상(無賞)의 행위'라고 하였다. 현대산업사회에 만연된 경제논리, 보상의 논리속에서 인간의 끊임없이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지만, 한편으로 정신이 피폐해져가고 있다. 이익이 없고 반대급부가 없는 행위는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하고, 효율적인것 같지만 모순과 불합리로 가득한 경제.사회 구조속에서 순수한 인간성의 상실이 심해지고 있다.
등산은 그 행위의 특성상 많은 시간과 재화 그리고 노력을 쏟아야 한다. 그러한 행위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일부 등산가는 생계나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기도 하지만) In-put 과 Out-put (투입과 산출)으로 저울질 한다면 매우 미련한 짓이며, 비생산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원래 비생산적인 놀이에 관심이 많다. 그것을 우리는 취미활동이라고 한다.

우리는 지금 복잡하게 얽힌 산업사회의 노예가 되어 과중한 일에 시달리고 있다. 원래 인간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지금처럼 많은 시간을 일에 빼앗기지 안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어느 학자가 동물들이 살기위해 투자하는 노동의 시간을 연구해 보았더니, 인간이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사자는 하루에 1시간정도만 사냥을 하고 남는 시간은 자유롭게 보내고, 대부분의 다른 동물도 하루중 몇시간만 일을 하며 삶을 유지한다고 한다. 인간만이 8시간이상(출퇴근시간과 가사노동시간을 합하면 더 늘어난다)의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먼 원시시대에는 지금처럼 많이 일을 하지 않았고, 동물들이 자연의 풍요속에서 유유자적하며 살고 있듯이 인간도 자연의 풍요와 여유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며 살았을 것이다. 지금도 도시생활을 하는 사람보다 전원생활이나 농사일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은 시간적 여유를 가지는 것을 보아도 도시산업사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인간성을 상실하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일만 하며 살 수 없다. 여유시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각자 자신이 원하는 놀이에 몰두하며 풍요로운 삶을 영위해야 할 것이다. 풍요로운 삶이 경제적인 가치추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편협한 인생관일지 모른다. 많은 부를 쌓고, 그것을 바탕으로 안락한 삶을 원한다거나, 지위에 집착하여 일생을 그것만 쫓아다닌다는 것은 불행한 삶일 것이다. 결국 부와 욕심은 세상에 남겨 놓고 자신은 땅에 묻히는 것이며, 과도하게 이런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이나 자연을 괴롭히게 된다.
일주일동안 일만 하다가 주말이면 낮잠자고 휴식하고... 그렇게 일생을 보낼 것인가? 일 말고 자신이 순수한 열정으로 몰두할 수 있는 취미활동, 이것이 바로 무상의 행위인 것이다. 각박한 생존경쟁의 틀에서 일탈하여 감성의 자유, 시간의 자유, 공간의 자유를 마음껏 즐기기는 것이 진정한 삶의 풍요일 것이다.
등산은 사람이 즐기는 무상의 행위가운데, 제일 상급일 것이다. 우리의 고향인 자연속으로 가장 깊숙이 들어가 적응하며, 오묘한 변화를 즐긴다. 그속에는 꿈이 있고, 준비가 있고, 철학이 있고, 우정이 있고, 열정이 있고, 사색이 있고, 쾌감이 있고, 좌절이 있고, 고통이 있고, 극복이 있고, 휴식이 있고, 회상이 있다. 우리가 원하는 또다른 순수한 인생이 있는 것이다.

 
 

1.3 알피니즘 I - 등산이란 무엇인가?


“등산”이란 소박한 뜻에서 산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산을 좋아하는 건강한 사람이 산을 찾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등산은 스포츠며 탈출이고 정열이기도 하며 일종의 종교와 같다”고 마칼루(8,481m)를 초등한 프랑스원정대장 쟝 프랑코가 말했다. 이처럼 등산의 두드러진 특징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은 내면적인 것이며, 등산가의 육체적 노력을 넘어선 곳에 뚜렷이 나타나는 정신적인 세계다. 이러한 등산의 세계는 그 기원과 오늘에 이른 발전 과정에서 개관할 수가 있으며 내일을 내다보게 된다.

알피니즘의 기원과 정의

“등산”이라는 말은 알피니즘(Alpinism)에서 왔으며 그 기원은 알프스에 있다. 즉, 등산은 서구적인 개념이다. 서양 사람들의 자연관과 행동양식이 등산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냈다.

(1) 자연과 인간의 만남
인류역사에서 18세기 중엽까지 자연과 인간은 대립한 존재로 자연은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이고 미지의 세계였다. 그러자 중세의 암흑시대가 지나고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인간은 자아를 발견하고 지식욕과 탐구욕과 정복욕이 움텄다.
그리하여 인간은 새로운 눈으로 자연을 대하게 됐다. 1760년 드 소쉬르의 몽블랑(4,807m) 도전 제의가 그것이다. 알프스 최고봉에 대한 이 제안은 결국 25년이 지난 1786년에 비로소 달성했는데, 이것을 기점으로 만년설에 덮인 4,000m 고도인 알프스에 인간이 도전하기 시작했다.

(2) 알피니즘의 정의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알프스에 오르면서 그 정신과 행위가 “알피니즘”이라고 불리게 됐다. 그러나 등산이 알프스 지역을 벗어나 세계 전역으로 번지면서 알피니즘의 명칭은 일반화됐다. 영국에서 나온 등산 백과사전(Encyclopedia of Mountaineering, Penguin Books)에는 알피니즘을 눈과 얼음에 덮인 “알프스 정도의 고소에서 행하는 등반”으로 풀이했다. 한편 프랑스 등산가 뽈 베씨에르는 만일 등산이 알프스가 아니고 히말라야에서 시작했으면 히말라야니즘, 피레네이에서면 피레네이니즘...... 로 불렸을지 모른다고 했다. 모두 알피니즘이라는 뜻의 일반성을 말해 준다.
알피니즘의 어원은 ‘Alpinisme’이라는 프랑스 말이다. 등산이 프랑스 알프스에서 프랑스어를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뒤 알프스를 중심으로 한 여러나라에서 뒤따르고 마침내 Alpinism(영국), Alpinismo(이탈리아), Alpinismus(독일)로 불리게 됐다.

알피니즘의 세계

알피니즘은 자연과 인간의 만남의 장이다. 따라서 자연을 떠나서 알피니즘은 존재하지 않으며 등산정신이 결여된 곳에 알피니즘은 없다. 알피니즘의 세계는 외적인 자연과 내적인 인간 정신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1) 무 대
등산활동이 전개되는 곳은 지구의 5대륙 6대주에 걸친 고산군이다. 이러한 고산군은 고도와 능선과 벽, 눈과 얼음, 허공 등을 조건으로 이루어진 대자연이다. 위의 개념에서 허공은 추상화 된 듯 하지만, 특히 고도를 추구하는 알피니즘에서 허공은 중요한 요소다. Touching the Void(영), Sturz ins Leere(독)같은 표현은 그 좋은 예다.(Void와 Leere는 모두 ”허공”을 뜻함)

(2) 육체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
등산은 강한 체력을 요구한다. 사실 등산 활동은 극한화 할 수록 그 노동 역시 격화한다. 체력 문제가 중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등산의 참 모습은 육체적 노력을 넘어선 정신적 내면의 세계에서 찾게 된다. 등산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거기에 등산만이 가지는 특징이 나타나는 것을 본다. 등산이 일반 스포츠와 다른 것은 이러한 특징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아래와 같은 비교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3) 특수성
일반 스포츠는 제한된 구역에서 제한된 조건하에 벌어진다. 플레이그라운드가 있고, 규정과 심판과 관람자가 있으며 또한 상대와 技를 겨룬다. 이에 반해 등산의 무대는 대자연이며, 여기에는 규정도 심판도 관람자도 없다. 물론 경기 상대가 없다. 이밖에 등산에는 보상이 따르지 않으며 오히려 죽음이라는 위험이 같이 한다. 리오넬 테레이는 등산을 “무상(無賞)의 행위”라고 했다.


알피니즘 정신과 형식

등산은 230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등산계를 개척해 나간 선구자들의 정신과 그 행동 양식의 변천을 그리고 있다. 다시 말해서 1760년 이래 자연과 인간이 대결해 나간 그 과정이다. 무슨 일이나 처음에는 초보적 단계에서 시작하여 시대의 추이에 따라 발전한다. 알피니즘도 바로 그 길을 밟아왔다. 즉 18세기의 등산은 문자 그대로 원시적이었다. 선구적인 알피니스트들은 원시적인 복장과 기구로 기술도 없이 오로지 정상을 노렸다. 이른바 피크 헌팅(Peak Hunting)인데, 이 때 그들은 원주민을 안내인으로 내세웠다.
그러자 알프스에서 고도 4,000미터 봉우리들이 거이 등정되면서 안내자 없이 오르게 됐고, 그들은 정상 아닌 첨봉과 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머메리(A.F. Mummery)는 그 대표적인 등산가로 그는 “의지가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며 이른바 “베리에이션 루트(Variation Route)”의 개척을 주장했다. 그의 등산정신은 “머메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길 없는 곳을 뚫고 나가려면 자연히 등반을 돕는 보조기구를 쓰게 되어 인공등반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발전했다.
알프스의 4,000m 등반이 어느 정도 마무리 지면서 알피니즘은 외부로 고도를 추구한다. 그리하여 안데스와 가후카츠 등지를 거쳐 8,000m의 세계로 뛴다. 히말라야의 여명은 머메리가 1895년 낭가 파르바트(8,125m)에서 실종하자 더이상 밝아오르지 않은채 세계 산악계는 20세기를 맞는다. 이처럼 등산은 알프스에서 히말라야로 무대를 옮긴 듯 했지만, 알프스에서 여전히 불가항력의 성지가 인간의 접근을 거절하고 있었다.
아이거(3,970m), 그랑드 죠라스(4,205m), 마터혼(4,478m)의 3대 북벽이다. 그러나 일찌기 “등정주의”에서 “등로주의”로 방향 전환을 한 유럽 등산계가 이 난공 불락의 벽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30년대부터 이 거대한 벽에 대한 도전이 시작되어 등산계는 Big Wall Climbing의 시대로 이행한다. 한편 히말라야에서는 8,000미터 자이언트 급 가운데 에베레스트(8,848m)와 낭가 파르바트가 각각 20년대와 30년대에 도전을 받았고 처절하고도 집요한 싸움이 50년대까지 이어졌다. 즉 히말라야는 1950년에서 64년 사이에 인간이 처음으로 8,000미터 벽을 뚫은 안나푸르나 등정을 계기로 세계최고봉급 14봉이 완등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높이를 추구하고 어려움과 싸우려는 알피니즘의 정신을 8,000미터 고도를 “무산소”와 “단독”, 그리고 “연속”이라는 새로운 과제로 대했다. 이 3대 과제를 들고 나온 알피니스트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는 1978년 에베레스트와 낭가 파르바트에서 스스로 그 난제를 풀었는데 이것을 기점으로 세계 알피니즘은 일대 방향 전환을 한다.

 
 

1.4 알피니즘 II - 등산은 어디까지 왔나?


오를 곳이 없다

21세기를 맞이한 세계는 지적, 공간적으로 좁아졌다. 지구의 공백이 사라진 지 오래며 인간들의 이동이 심해지면서 사람의 발이 닿지 않는 곳을 보기 드물게 됐다. 초등하기까지 32년이 걸렸던 에베레스트를 예로 든다. 1993년으로 초등 40주년을 맞는 그 정상에는 하루 35명이 오르고, 표고 5,400미터인 베이스캠프에는 300개의 천막이 줄을 이어 때아닌 촌락을 이루고 500명이 득실댔다. 만고의 고요에 잠겼던 지구의 벽지 에베레스트 산록의 쿰부 빙하가 장터로 돌변하고 악취가 코를 찔렀다. (라인홀트 메스너의 네팔 현지 보고)
이 40년 사이에 최고봉에 오른 자는 386명이고 100명이 죽었다. 한편 북미 대륙의 최고봉인 매킨리(6,194m)는 같은 해 초등 80주년을 맞으며 5월 하순 한 주간에 500명이 도전하고 15명이 죽었다. 1993년까지 매킨리 등정자는 7,172명이고 사망자는 71명이었다. 등산의 메카 알프스는 어떤가? 고도는 낮은 편이나 여름 한철 티롤 지방에서 113명, 스위스 알프스에서 149명 그리고 노말 루트로 관광객도 오른다는 몽블랑에서 여름 한철 10명의 희생자가 났다. 등산기술은 발달하고 장비도 놀랍게 개량되었으나 산사고는 날로 늘고 있다. 문명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등산세계에도 그대로 일고 있는 셈이다. 대중 소비와 매스레져시대의 취약성이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침해하고 이것이 산사고로 이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명과 자연

인류의 발달은 자연을 정복하는 과정을 밟아왔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현대문명이다. 그런데 밝은 미래를 약속했던 문명사회에 어느새 어둡고 무서운 그림자가 가리기 시작했다.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개발(Graben)이 무덤(Grab)을 뜻한다고 했는데, 위대한 시인은 18세기에 벌써 문명의 병폐를 예언했다. 1953년 에베레스트를 초등한 힐라리(E. Hillary)는 네팔 정부에게 에베레스트를 5년간 입산 금지 조치를 내리라고 제언했다. 오늘날 지구의 끝 에베레스트가 지상 최고의 쓰레기터로 둔갑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힐라리는 대자연의 보호를 역설한 것이다. 이제 인간은 “문명을 추구할 것이냐”,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냐”의 기로에 섰다.

등산가의 조건

등산가는 단순한 등산 애호가가 아니다. 몸이 튼튼하고 산이 좋아서 산에 오른다고 모두 등산가라고 할 수는 없다. 등산가는 “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는 왜 산에 오르는가?”근원적인 물음을 언제나 안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을 스스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는 등산의 역사를 공부하며 뚜렷한 등산관을 지니고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오늘날 산에 가는 사람은 많다. 그들 가운데 알피니스트로서의 정신과 몸가짐을 가지고 산에 가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는가? 미답봉이 없어진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산에 오르는 과정이며 정신이다. 이것을 고도(Altitude)보다 태도(Attitude)라고 말한다. 등산계에 미답봉이 없다는 것은 모험과 공포의 대상이 없다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문명의 난숙은 생활의 편의를 가져왔고 인간을 나약한 존재로 만들었다. 이에 대해 프랭크 스마이드가 편의성(Expediency)을, 이반 슈나드가 불확실성(Uncertainty)을 논한 것은 주목할 일이다. 이러한 편의성과 불확실성의 문제는 조금도 새로운 논리가 아니다.
등산계를 개척해 나간 지난날의 선구자들은 언제나 어려운 조건하에 무서운 등반을 했다. 그들의 알피니즘은 편의성과 거리가 멀었고 언제나 불확실성이 따랐다. 몽블랑의 등반이 쉽다고 하기 전에, 마터혼의 훼른리 산릉이 별것 아니라고 하기 전에 그들의 초등이 어떻게 이루어졌던가 생각해 볼 일이다.

등산과 인생

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등산은 스포츠가 아니라 삶의 방법”죠지 휜치(George Finch)가 말했다. “산의 정복은 인간의 자기정복의 일부”라는 아놀드 런(Arnold Runn)의 말도 있다. 등산에 관한 금언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모두 위대한 등산가들이 산과 만나면서 얻은 등산관이요 인생관이다. 그런데 산과 인간의 관계는 옛날과 크게 달라졌다. 지난날 등산은 인간의 탐구욕과 지식욕과 정복욕에서 시작했다지만 지금은 인간의 생존 조건으로 됐다. 문명이 인간을 파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문명사회에서 잃는 것을 자연으로부터 보충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활력의 재충전이다.
현대인은 많은 자격증을 얻으려고 한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윌더니스 씨티즌쉽(Wilderness Citizenship)이다. 등산관을 바탕으로 한 인생에 주어지는 대자연 시민증이다. 여기 그러한 자격과 권리를 취득한 사람이 있다. 1950년 인간으로서 처음 고도 8,000미터 안나푸르나에 오른 프랑스 원정대장 모리스 에르조그는 그의 원정기를 아래와 같이 맺었다.

“안나푸르나는 우리가 빈 손으로 갔지만 앞날을 살아가는데 필
요한 다시없는 보물이다. 안나푸르나를 오르고 우리 인생의 새
장이 열렸다.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르나들이 있다.”

 
 
 

1.5 알피니즘의 태동

샤모니 몽블랑지역의 개요와 기원

<샤모니계곡>
알프스산맥은 가장 높은 몽블랑(4807M)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부터 프랑스 지중해 연안 니스에 이르기까지 장장 1200km에 달하는 유럽 최대의 산맥으로 약 600만년전 지각의 대변동에 따른 굴절 변화에 의해 형성되었다. 알프스의 어원은 올프(Aulp)라고 하는 (방목을하는 목장) 말에서 부터 유래되었으며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지방에서는 다양한 기후조건과 풍성한 초목으로 임업과 목축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
알프스산맥은 크게 북쪽과 남쪽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북쪽은 대양성기후의 영향으로 많은 강우량과 저기온으로 궂은 날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때가 많으며 기온변화가 심한편이나 남쪽알프스는 지중해성 영향을 받아 온화한 기후와 얕은 산세가 지중해지역으로 근접할수록 우리나라 산과 아주 유사한 모습을 연상케하는 곳도 있다.
프랑스 알프스는 스위스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레만호에서부터 시작되며 약200km의 폭으로 니스까지 370km에 이른다. 최고봉인 몽블랑은 이태리와 국경을 이루고 있고 정상이 올려 보이는 샤모니(1035M)는 산악인의 메카로서 년중 가장 많은 등산객과 광광객이 찾아드는 명소로 알프스의 심장이라할 수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 프랑스 오뜨 사브아 지역에 속해 있는 샤모니 계곡은 발므에서 보자까지 23km의 길이를 얘기하며 약200만년전 제4기 빙하기시절에 얼음 덩어리에 의해 깍여 지면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최근 약1만년전까지 계곡을 덮고 있던 얼음이 녹으면서 골짜기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워낙 산세가 험하고 지형이 복잡해서 11세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이 골짜기에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샤모니가 알려지기 시작하게된 것은 제네바지역을 다스리던 에몽이라고 하는 영주가 (1090년경) 자신에게는 쓸모없던 이땅을 카톨릭 수도자들에게 기증하게 되고 소수의 수도자들이 이곳에 수도원을 건축하고 정착하면서 부터다. 하지만 극히 짧은 여름과 혹독한 기후 그리고 진입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이 골짜기에서 사람들은 오랫동안 외부세계와는 단절된 상태로 가혹한 자연환경과 함께 스스로 생존하는 법을 배우며 비참하게 살아야만 했다.
당시 중세유럽의 교황과 카톨릭은 모든 국가와 백성들에게 정신적 지배자로 절대적 위치와 존재로 군림했으며 국가와 백성들은 교회와 교황청에 반드시 세금을 납부해야하는 의무를 지고 있었다. 하지만 샤모니만은 공제 수확물에 대해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세금을 감면또는 면제받고 있었는데 일부성직자와 특권층 귀족을 제외하고는 절대 불가능한 이 면세 혜택은 교회에서 특별히 눈감아준 것이 아니라 샤모니 사람들이 굽힐줄 모르는 용기와 끈질긴 투쟁으로 오랫 동안 싸워서 교황청으로 부터 얻어낸 그들의 이득이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이 지역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끈질기며 강인한 성격과 전통적 보수성 기질은 아마 이런 어려운 생활환경과 투쟁의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듯하다.(당시로서 수확물에 대한 면세요구는 교회로부터 파면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일로 얼마나 샤모니의 생활과 환경이 생존하는데 열악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외부 사람들의 발길이 샤모니를 찾기 시작하는 것은 1860년 나폴레옹3세가 왕후와 함께 사브아지방 순방차 이곳을 지나며 험난한 계곡 진입로를 노새와 가마가 통과할 수 있도록 정비하게 되고 이후 몽블랑을 보다 가까이서 전망하기 위한 일부 상류층 신분의 여행객들이 시종과 함께 먹을 것을 가득 실은 노새를 이용하여 찾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알피니즘의 시작
<1900년경 몽블랑을 전망하기 위해
쁠랑쁘라를 오른 관광객들>
샤모니를 둘러 싸고 있는 셀수 없는 첨봉들의 암반속에는 진기한 빛을 발하는 고귀한 천연수정들이 숨겨져 있다. 샤모니에서 발굴되는 이 수정들은 높이의 차이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는 특색을 지니고 있는데 당시 채굴자들은 특별한 등반장비도 갖추지 않은채 수정을 찾아 발길이 닿지 못하는 높은 봉우리까지 서슴치 않고 오르기 시작했다.(샤모니의 수정은 높은 곳에서 발굴될수록 색깔이 더욱 아름답다.) 진정한 등반을 직업적인 그들의 행적부터 정리할 수는 없지만 기록에 남지 않은 많은 봉우리들을 그들은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직업적인 채굴자로서 그들의 등정과 산행을 우리는 알피니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빙하를 건너고 어려운 암벽을 오르는 그들의 지식과 기술은 이후 순수하게 몽블랑을 오르기 위해 샤모니를 찾는 많은 등반가들의 좋은 길잡이가 된다. 예로 알프스 등산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긴 몽블랑 초등자 쟉 발마는 등반가라고 하기보다는 샤모니의 직업적인 수정 채굴자였다.
그러면 샤모니의 순수한 알피니즘으로서 등반은 언제부터 시작되는가? 바로 1741년 영국인 포콕과 윈드햄에 의한 몽탕베르(1909M) 등정부터이다. 모험가와 군인이었던 이 두사람은 제네바에 여행을 왔다가 멀리 보이는 몽블랑 (하얀산이라는 뜻)에 매료되어 샤모니를 찾게 되는데 당시만 해도 절벽과 원시림으로 진입이 극히 어려워서 3일 만에야 샤모니에 도착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수도원장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몽탕베르를 오르는데 이후 이 등정기록은 샤모니에 새로운 등반열기를 몰고 오는 동기가 된다.
그리고 1760년 제네바의 자연과학자인 오라스 베네딕뜨 드 소쉬르는 혼자서 몽탕베르와 브레방(2525M)정상을 단숨에 오르고 나서 당시만 해도 미지의 세계로 접근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 왔던 얼음 구덩이와 눈으로 덮인 몽블랑 등정의 가능성을 확신한 후 제네바로 돌아 온다. 하지만 당시 제네바에서 상당한 재력가로 알려진 소쉬르는 수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원정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몽블랑 등정의 꿈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그는 몽블랑에 대한 열정을 누구든 자기 대신 정상을 오르는 사람에게 사례하겠다는 상금을 내걸게 되고 1786년 8월 8일 두명의 샤모니사람에 의해 몽블랑의 첫등정은 이루어진다.
<샤모니시내에 있는 몽블랑 초등자
미셸 갸브리엘 빠꺄 동상과 몽블랑>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샤모니 최초의 의사 미셸 갸브리엘은 수정채취자인 쟉 발마를 조수(현재의 산악가이드)로 몽블랑 등정을 위해 8월7일 샤모니를 출발한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 6시 23분 그들은 처음으로 당시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알프스 최고봉의 정상에 도착한다. 이들의 모든 등반과정은 샤모니에서 망원경으로 자세히 관찰되고 기록되었다.
두사람의 초등소식을 전해 들은 소쉬르는 몽블랑을 오르는 꿈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이듬해 다시 대규모의 원정팀을 구성해서 몽블랑 정상을 밟게 되는데 이때에도 타고난 체력과 뛰어난 재능을가진 쟉 발마가 그들 원정의 길잡이를 했다. 어쨌던 2등을 했지만 소쉬르는 몽블랑에 대해 남다른 열정과 등정의 욕망을가지고 제네바에서 부터 수십년간 셀 수 없이 샤모니를 오르 내리며 새로운 알피니즘에 불을 당겼다. 당시 소쉬르는 과학자답게 과학적 관찰을 목적으로 많은 인원과 과학 장비를 가지고 연구원정등반을 하였는데 이때 그가 남겨 놓은 관찰기록들은 이후산악등반의 선구적인 기술적 자료들로 남게된다.
이후 몽블랑은 새로운 기록들을 세우기 위한 많은 알피니스트들이 찾기 시작하고 1808년에는 마리 파라디라고 하는 처녀가 샤모니에 들렀다가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몽블랑을 오르는데 가이드의 등에 업히고 밀려서 정상에 오른 그녀는 거의 반주검이 되어 샤모니로 돌아 온다. 이 여성 초등기록은 순수 알피니즘에 의한 등반이라할 수 없다.
알피니즘에 의한 첫 여성등정은 1838년 앙리엣 당즈빌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그녀는 처음부터 몽블랑 등반을 준비해 왔고 샤모니 가이드들도 놀랄 정도로 치밀한 계획과 꼼꼼한 등반으로 나중에 가이드들로 부터 몽블랑의 아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이렇게 몽블랑의 등정이 여러 차례 걸쳐 성공하게 되고 샤모니는 모험을 즐기는 탐험가와 새로운 봉우리를 찾아 오르려는 많은 알피니스트들의 발길들로 이어지기 시작하자 이 지역의 산세와 기후를 잘 알고있는 샤모니 수정채굴자들은 자연히 그들의 유급 길잡이로 나서게 되고 나중에는 직업적인 산악가이드로 탈바꿈하게 된다.
드디어 1821년에 샤모니 산악가이드협회가 (초창기는 샤모니 산악동지회라 일컬었음) 결성되고 샤모니는 알피니즘의 중심지로 변모하게 되며 더욱 많은 등반가들이 샤모니로 모여 든다. 등산의 붐이 일기시작한 18세기 후반부터 샤모니를 찾은 등반가는 거의 대부분 1857년 설립된 영국 산악회소속의 영국인들이었다.
대표적으로 영국에서 건너온 에드워드 윔퍼는 1860년부터 1871년 사이 샤모니의 수많은 첨봉들에 초등기록을 남기면서 그의 새로운 암벽등반기술을 선보이게 되고 그를 통해 샤모니에는 더 많은 어려운 첨봉들을 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낳게 한다. 이렇게 불붙기 시작한 알프스의 등반열기는 스위스의 마터호른 초등을 계기로 알피니즘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참고] 알피니즘이란 알프스의 봉우리를 순수하게 등반을 목적으로 오르는 새로운 사상.
알피니스트는 알피니즘을 추구하는 등반가.

몽블랑의 빙하
옛날 이지역 사람들은 몽블랑을 신의 저주를 받은산 이라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몽블랑 정상에서 샤모니로 흘러 내리는 여러 빙하는 재난과 재앙을 불러 일으키는 공포의 대상으로 악마가 서식하는 지옥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이론으로 빙하의 발달과 생성과정이 밝혀지기전 빙하 속의 거대한 얼음탑과 갈라진 무시무시한 크레바스의 생김새는 충분히 옛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문명의 발달로 빙하의 비밀이 벗겨지고 많은 탐험가와 등반가들이 빙하를 오르내리면서 빙하는 더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이 빚어 놓은 조화와 현상으로 이해되자 이 아름다운 경관을 보기 위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게되는 새로운 명소로 바뀌게 된다.
지금은 기후변화로 인하여 빙하의 규모와 크기가 많이 줄어 들었지만 1741년 처음으로 포콕과 윈드햄이 몽탕베르에 도착해서 보았던 어마어마한 빙하는 현재 등산열차 역사가 자리한 곳보다 더 높은 빙탑들이솟아 있었다. 그들은 이 빙하를 보고 큰 바다가 심한 폭풍우로 순식간에 얼어 붙은 파도와 같다고 기록을 남겨 놓았다. 그 이후 이 빙하를 메르 드 그라스(빙하의 바다)라 부르게 되는데 표고차 3000미터의 차이를 가지고 폭1200미터 총7000미터 길이로 샤모니 마을까지 펼쳐진 프랑스 최대 빙하다.
메르 드 그라스 빙하는 때에 따라서 규모가 커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1590년과 1645년사이 지속적인 대기 온도의 강하로 1645년겨울에는 전유럽을 강타한 극심한 추위가 빙하의 움직임을 급속도로 빨리하여 샤모니계곡을 완전히 갈라 놓았다. 이 재해를 샤모니 사람들은 악마의 장난으로 생각하여 제네바주교를 찾아가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올리게 되는데 어쨌던 그 이듬해 온화한 기후가 다시 찾아와 빙하는 재해 이전의 상태로 다시 줄어 들었다. 기록에의 하면 1645년경 빙하는 최고로 증가하고 그 다음은 1850년경 그리고 가장 심한 감퇴 현상은1955년부터 현재까지이며 지금도 빙하는 계속해서 줄어 들고 있다. 아마도 공해에 의한 대기 온도상승으로 이상 현상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라고 자연보호주의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1840년경 한 화가가
그린 메르드 그라스의 모습>

그러면 빙하는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활동하는가? 고산의 눈은 매우 건조하고 차갑다. 몽블랑 정상 10미터 깊이의 눈은 영하20도 정도나 된다. 그리고 3600미터 암봉주변의 지형은 바람의 방향에 따라 많은 량의 눈이 쌓이는데 몽블랑 정상이나 3000미터 주변의 쌓인 눈은 낮에 강한 햇볕에 의해 표면부터 녹으면서 젖기 시작하고 녹은 눈은 섭씨10도까지 상승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 위에 새로 쌓이는 신설에 의해 녹은 눈은 다져 지면서 굳어진다. 이런 계속적인 현상은 약 30미터깊이 (15년걸림)정도에 이르면 물도 통과할 수 없는 매우 견고한 얼음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중력에 의해 밀려나기 시작하는 이러한 두꺼운 얼음층들은 해발 2700미터에 이르러 갈라지면서 빙탑을 형성하게 되고 무너지는 빙탑들은 다시 아래로 밀려 나면서 크래바스를 만들어 놓는다.
빙탑과 크레바스는 산새의 굴곡에 따라 높이와 크기가 달라지는데 급경사 일수록 횡단으로 갈라지며 틈이 벌어지고 완만할수록 틈은 좁아든다. 그리고 돌출부가 있는 곳에서는 수직의 빙탑이 형성되고 기복이 심하면 붕괴된다. 새로 쌓이는 신설의 무게와 중력에 의해 움직이는 빙하의 유속은 지형에 따라서 다르지만 평균 약 시속 1Cm의 속도(1년에100미터정도)로 아래로 흘러 내린다. 이렇게 움직이는 빙하는 많은 암반과 조각들을 계곡 아래로 운반하는데 얼음 사이에서 떨어진 암석조각들은 일정한 띠를 형성하고 이 흔적들은 빙하의 흐름에 따른 곡선과 일치하며 가장자리보다 중심부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 띠들은 수십년 동안 빙하흐름의 속도변화를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연구자료로 쓰인다.
19세기 어느 알피니스트가 등반중 잃어버린 장비를 우연하게 몇 년후 빙하 하류에서 발견하면서 빙하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게된 이 놀라운 현상은 빙하의 생성시기와 시대적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큰 도움이 될뿐아니라 더이상 악마가 서식하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후 1879년경 몽탕베르에는 호텔과 식당이 들어서게 되고 빙하를 연구하기 위한 자연과 학자들은 이곳에서 자료수집과 측량을 통해 수많은 연구기록들을 발표한다.
이렇게 해서 빙하의 비밀이 벗겨지자 사람들은 자연이 빚어놓은 최고의 걸작품인 빙탑과 얼음동굴들을 보기 위해 메르 드 그라스가 있는 몽탕베르를 오르기 시작하고 샤모니의 산악가이드와 가마꾼들은 빙하를 건너는 그들의 길잡이 가된다. 19세기 나폴레옹3세와 그의 왕후 유제니까지 다녀간 몽탕베르와 메르 드 그라스 빙하는 1908년에 이르러 최초의 등산열차가 개통되면서 알프스의 최고 관광코스로 발전한다. 현재 샤모니 계곡의 대표적인 빙하는 가장 큰 메르 드 그라스빙하 표고차가 가장크고 유속이 제일 빠른 보쏭빙하(표고차3600미터 유속하루에 약1미터)와 타코나빙하 그리고 아르장티에르빙하가 있다.
 

1.6 간추린 등산사


알피니즘의 발달

① 등정주의(Peak Hunting)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정상등정의 목적 (18-19세기)

② 가이드레스(Guideless)
가이드의 도움이 없는 등반에 더 큰 가치를 인정(19세기 중반)

③ 등로주의(Mummerysm)
단순한 정상 등정의 가치보다 얼마나 더 어렵고 새로운 루트로 등반했는가 를 더 중요시 함.(19세기말) - A.머메리에 의한 머메리즘의 창시 '좀 더 어렵 고 다양한 루트로의 등반(More Difficult Variation Route)'

④ 곡예등반(Acrobatic Alpinism)
등로주의로 부터 비롯된 암벽등반기술의 발달시기(20세기 초)

⑤ 북벽등반
머메리즘과 암벽등반기술.장비의 발달을 바탕으로 알프스의 험난한 북벽을 등반하던 시기(1900년-1940년)

⑥ 직등주의(Direttissima)
머메리즘을 극한으로 추구하기 위해 대암벽을 직선으로 오르는 것을 추구하 던 시기(1950-1960년대) - 인공등반의 발달

⑦ 고산등반
히말라야를 비롯한 6,000m - 8,000m의 고산등반 원정시대 (20세기초-)

⑧ 크린 클라이밍
미국 요세미테 지역에서 오르려는 목적만으로 암벽에 무분별하게 사용하던 피톤과 볼트를 사용하지 않고 등반하려는 정신(1970년대)

⑨ 프리 클라이밍
인공적인 장비등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인간의 능력만으로 암벽을 오르는 스타일 (1975년 이후)

⑩ 인공암벽과 등반경기
훈련의 목적으로 인공암벽이 세워지고 암벽등반을 스포츠화하여 인공암벽에 서의 우열 경쟁 (1980년대)


등반의 변천사

① 몽블랑 초등 - 마터호른 초등까지 (황금시대)
* 1786년 : Michel Paccard와 Jacque Balmat의 몽블랑(4,807m) 초등
* 1760년 - 1800년 : 여명시대
* 1800년 - 1840년 : 개척시대
* 1840년 - 1865년 : 황금시대 - 마터호른을 제외한 모든 봉이 등정됨.

* 1865년 : 최후의 처녀봉 마터호른(Matterhorn;4,478m)이 에드워드 윔퍼(Edward Whymper)에 의해 초등됨.

② 알피니즘의 광역화와 은의 시대
* 가이드레스(Guideless)등반의 시작
* 알프스지역을 벗어난 코카서스, 남미, 북미, 히말라야등의 등반
* A.F.머메리(Albert Fredelic Mummery)의 바리에이션 루트로의 등반 주창 - 머메리즘

③ 철의 시대와 머메리즘의 개화
* 암벽등반기술.장비의 발달
* 북벽등반
* 동계등반

④ 히말라야 등산의 시작과 네셔날리즘(Nationalism)
* 히말라야 8,000m급 고산등반의 시작
* 영국/독일/프랑스/미국등 산악선진국의 거국적 초등경쟁
* 히말라야지역의 황금시대

⑤ 전후 알프스지역의 등반변화
* 디렛티시마(직등주의)
* 동계 북벽등반
* 단독등반, 시간단축

⑥ 히말라야 은의 시대와 바리에이션 루트의 초등
* 1970년 안나푸르나 남벽 초등
* 1975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초등

⑦ 1980년대 히말라야에서의 알파인 스타일 등반과 철의 시대
* 단독등반
* 무산소 등반
* 동계 등반
* 벽 등반
* 알프스등반 방식에 의한 소규모 속공등반
* 연결/종주 등반

★ 히말라야 8,000m의 초등

순위 산 이 름 고 도 초등년도 국 가 대 장 초 등 자
1 에베레스트 8,848m 53. 5.29 영 국 존 헌트 E.힐라리, 텐징
2 K 2 8,610m 54. 7.31 이태리 A.데지오 A.캠파그노니
3 칸첸중가 8,598m 55. 5.25 영 국 C.에반스 J.브라운
4 로 체 8,511m 56. 5.18 스위스 A.이글러 E.레이쓰
5 마칼루 8,481m 55. 5.15 프랑스 J.프랑코 L.테레이
6 다울라기리 8,167m 60. 5.13 스위스 M.아이젤린 K.디엠버르거
7 마나슬루 8,156m 56. 5. 9 일 본 Y.마키 이마니시
8 초오유 8,153m 54.10.19 오스트리아 H.티치 H.티치
9 낭가파르밧 8,125m 53. 7. 3 독 일 K.M.헤르릴코퍼 헤르만 불
10 안나푸르나 8,091m 50. 6. 3 프랑스 M.엘조그 M.엘조그
11 가셔브럼 I 8,068m 58. 7. 5 미 국 N.클린치 P.K.스코오에닝
12 브로드피크 8,047m 57. 6. 9 오스트리아 M.슈머크 F.뮨터스텔러
13 가셔브럼 II 8,035m 56. 7. 7 오스트리아 F.모라벡 S.라쉬
14 시샤팡마 8,013m 64. 5. 2 중 국 허 담 중국,티벳 12명


 
 
 
 
 
 

 

 

 

 

 

 

 

 

 

 

출처 : yangyiy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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