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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onderful dream

[스크랩] 탐험 (探檢 exploration) - 무역과도 연계

탐험 (探檢 exploration)

요약

미지 세계에 실제로 들어가 탐사·연구 등을 행하는 것. 탐험의 본뜻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역사상 탐험도 군사적 정복이나 재산·진화(珍貨)·자원 등의 획득이 주목적이었던 경우가 많지만, 언제나 그 내부에 흐르고 있던 것은 미지의 세계를 찾는 인간의 지적 탐구심·호기심이었다.

설명

미지 세계에 실제로 들어가 탐사·연구 등을 행하는 것. 탐험의 본뜻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역사상 탐험도 군사적 정복이나 재산·진화(珍貨)·자원 등의 획득이 주목적이었던 경우가 많지만, 언제나 그 내부에 흐르고 있던 것은 미지의 세계를 찾는 인간의 지적 탐구심·호기심이었다. 위험이나 생명을 걸고서라도 성취한다는 본능적인 면에서 모험과 다를 바 없으나 모험은 탐험의 한 요소가 될 수 있을 뿐 같은 것은 아니다.

고대의 탐험(기원전∼4세기)
탐험을 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 본능인 이상 탐험의 역사는 인류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시적 사냥이나 자연채집 식생활시대, 또 1만 년 전 민족대이동시대에는 인류생활 속에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한 탐험과 모험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역사적 자료로서 나타나는 것은 고대 오리엔트 도시국가의 발달 무렵부터이며, 그들은 꽤 먼 지역과 이미 교역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 전제 조건으로서 지리적 지식의 획득을 위하여 활발한 탐험 활동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탐험 가운데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여행기인 《한노 주항기(周航記)》에 서술되어 있는 BC 500년 무렵 카르타고인 한노의 아프리카 서쪽 연안의 주항이다. 또한 헤로도투스의 《역사》에도 이집트왕 네코 때 페니키아인의 아프리카대륙의 주항 탐험과 그 밖의 탐험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이 중에는 시인 아리스테아스가 유라시아대륙 북방의 스텝지대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여행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오늘날 실크로드의 시초가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대에 탐험사상 큰 역할을 한 것은 BC 334∼BC 324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대왕의 동방정벌로,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소아시아까지 뻗어가 유럽의 그리스문화가 동방문화와 융합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로마시대에는 넓은 국토에 비례해 각지의 탐험도 확대되어 K. 프톨레마이오스는 그 당시까지의 탐험기록자료를 집대성한 《지리학집성》을 저술하였으며, 이것은 당시 완전한 지리서로 여겨졌다.

중세의 침체시대(5세기∼16세기)
암흑시대에는 유럽에서의 탐험활동도 둔화되어 1096년 시작된 십자군원정에서 약간의 활동을 볼 수 있을 뿐 오히려 중국·아랍에서 활발하였다. 중국은 이미 한(漢)나라 무제(武帝)시대에 장건(張騫)이 서투르키스탄까지 세력을 뻗었고 400년 이후에는 칙명으로 먼 나라까지 간 사신, 불교성지로 간 승려, 동서무역을 목적으로 상인 등이 서역·남방 여러 나라·인도·유럽 등의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또한 620년대에 마호메트의 대원정을 계기로 아랍인의 탐험적 활동도 시작되었다. 중세 말기 봉건제도 붕괴 및 신흥 상공업도시의 상공업경제 발흥과 함께 1254년 마르코 폴로의 아시아 대여행 등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국가적 원조 아래 지구적 규모로 세계를 파악하려는 본질적 탐험활동도 나타나 1492년 C.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활발한 지리적 탐험시대의 막을 열었다.

지리적 탐험시대(16∼17세기)
원양항해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도항로의 발견과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달은 세계 주항의 기운을 촉진시켜 1519년 포르투갈인 F. 마젤란은 5척의 선단을 이끌고 에스파냐 세비야에서 서쪽으로 도는 대항해에 나섰다. 고생스러운 여행 끝에 마젤란은 태평양으로 나오는 데 성공하였으나, 필리핀제도에서 원주민의 싸움에 말려들어 죽고 선단 가운데 1척만이 세비야의 산루카르항에 돌아옴으로써 역사상 최초로 세계 일주에 성공하였다. 이리하여 16세기 말부터 해상무역과 유럽인의 아메리카대륙 내부 침공도 활발해졌다. 콜럼버스는 이 대륙을 동양(인도)의 일부로 알고 있었으나 1501년 A. 베스푸치는 신대륙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그 뒤 에스파냐·영국 등이 이 대륙에 침략적인 탐험활동을 시작하였다.

과학탐험의 시작(18세기)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에 걸쳐 유럽에서는 전쟁·혁명 등으로 탐험활동이 활발하지 못하였으나, 이 무렵부터 주목적이 침략·재보획득·포교 등이 아닌 탐구심과 과학정신을 목적으로 하는 현대적 탐험활동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테라 오스트랄리스(Tera Australis;남방대륙)라는 지구상 남방을 거의 둘러싼 미지의 대륙이 있다는 생각은 16세기 말부터 있었고,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였는데, 이 환상을 부정하고 마지막 대륙 오스트레일리아의 존재를 증명한 사람이 J. 쿡이다. 가장 위대한 근대 탐험가로서, 태평양을 중심으로 1772∼1776년에 걸친 3차의 항해로 많은 섬과 해협을 발견하였으며, 이에 의해 태평양의 지도는 크게 바뀌었다.

내륙탐험의 시대(19∼20세기)
항해에 의한 지리적 탐험이 일단락되자 이번에는 미지의 내륙 오지로 주의가 쏠렸다. 노예무역 근거지라는 사실만으로 이제까지 미개척지였던 아프리카대륙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달로 자원획득의 처녀지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어 여러 탐험의 손길이 미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D. 리빙스턴은 3차에 걸쳐 포교활동을 겸한 아프리카 오지 탐험을 시도하여 영국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실크로드의 주요 통로이며 또한 불교예술의 보고였던 동투르키스탄은 19세기 말부터 유럽인에게는 미지 세계였던 만큼 탐험가들의 동경의 땅이었다. 그래서 19세기 말∼20세기에 여러 탐험가들이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러시아의 N.M. 프르제발리스키와 스웨덴의 S.A. 헤딘은 주로 지리학적 견지에서 탐험하여 프르제발리스키는 위치와 실재가 논쟁의 표적이 된 <떠도는 호수>라고 불렸던 로프노르를 발견했으며 헤딘도 그 호수 일대를 조사하던 중 BC 5세기 무렵 번영하였던 선선국 수도 누란(樓蘭)의 유적을 발견하였다. 헝가리인으로 뒤에 영국에 귀화한 M. 스타인은 이곳을 3차례에 걸쳐 학술탐험을 하였고 그 결과인 방대한 수집품·지도작성·지명연구·보고서 등은 중앙아시아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와 같은 내륙탐험 후에 남겨진 것은 북극과 남극이었다. 각 나라는 이 양극의 극점 도달경쟁에 주력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시도와 실패 후에 1909년 최초로 북극에 도달한 사람은 미국인 R.E. 피어리였다. 남극점 도달한 경쟁은 더 치열하였는데, 마지막으로 노르웨이의 R. 아문센과 영국인 R.F. 스콧의 경쟁으로 좁혀져 아문센은 11월 12일 14일, 스콧탐험대는 1912년 1월 6일 남극에 도달하였다. 한편 스콧탐험대는 그 귀로에 전원이 동사하였다. 현대의 탐험의 특색은 탐험대상지역의 확대와 국제적 규모, 뛰어난 과학기술 및 국력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 있다. 특히 그 대상이 우주공간까지 확대되어 마침내 달 탐험이 1969년 미국의 아폴로 11호에 의해 이루어졌다. 한편 바티스카프에 의한 바다 탐험과 지각이나 지구의 내부 조사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출처 : 중국교역
글쓴이 : 크닐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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