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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

고흐의 흔적을 찾아서-프랑스

고흐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행 | 프랑스
2005.07.02

[사진 출처: 네이버 유랑 까페 中에서]

 

 

파리에서 퐁트와즈행 기차를 타고 내려 오베르로 갈아타서 도착합니다.



 

반고흐 공원 내의 동상입니다.


 

 

곳곳에 이렇게 그림을 그린 장소에는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고흐가 머물던 라부씨 여관


 

 

냥이들이 자주 보입니다.


 

 

그림속의 교회입니다.


 

 

밀밭으로 가는 오솔길

 


 

 


 

 


 


 

 


 

 

고흐의 그림으로도 유명한 오베르지방에 묶어, 정말 드라마틱하기도 하고 가슴아픈 고흐의 생애를 함께 적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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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시절

1853년 3월 30일, 빈센트는 가난한 네덜란드 시골의 친절하고도 온순한 개신교 목사 테오도루스 반 고흐 Theodorus van Gogh (1822~85)와 외향적인 안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카르벤투스 Anna ornelia van Gogh-Carventus (1819~1906)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안나는 1년 전 같은 날 빈센트 윌렘이라고 이름지어 준 아기를 사산했는데, 새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도 똑같이 빈센트 윌렘 반 고흐라고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1855년에는 여동생 안나(Anna가 태어났고, 1857년에 아버지의 이름을 딴 남동생이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바로 고흐와 일생동안 수백통의 편지를 나누며 그를 후원했던 테오(Theo)입니다. 이어서 여동생 엘리자베스(Elizabeth)와 빌헤미나(Wilhelmien), 막내 남동생 코 르넬리스(Cornelius)가 태어났습니다.

빈센트의 할아버지와아버지는 네덜란드에서 가 장 오랜 전통의 개신교인 캘빈 교회 목사였다. 어머니는저명한 왕실 제본사의 딸로서 그림을 잘 그렸고 글 솜씨도 있었다. 빈센트 숙부의 형제인 헨드릭 숙부, 하임 숙부 그리고 크르넬리스 숙부 들도 모두 화상이었다. 이들 여섯 형제 중에서 오직 테오도루스만 부친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었다. 빈센트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어렸을 적에 그린 그림들이 30여점 남아 있습니다.

1864년10월1일,아버지는 빈센트를 로젠달과 도르트레히트 사이에 위치한 제벤베르겐에 있는 기숙학교에 입학시켰다. 이제 빈센트는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살게 되었다. \"층계위에 프로빌리 교장 선생님옆에 서서 우리가 타고 왔던 마차가 축축하게 젖은 길을 따라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빈센트는 기숙학교에서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를 배웠다. 성적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틸부르크에있는 한니크인스티튜트에 보내졌다. 그러나 1868년 3월 중순이 되면서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던 반 고흐 목사는 그나마 얼마되지 않는 학비마저 지불할 수 없었다. 빈센트는 열다섯 살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이 때 센트 숙부는 병으로 사업을 중단하고 브레다와 가까운 프린헨하계에서 은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파리에 있는 지점 세 개를 열고 있던 구필 화랑은 해외지점도 가지고 있었는데, 센트 숙부의 헤이그 화랑은 네덜란드 지점이었다. 1869년 7월 숙부의 권고를 받은 빈센트는 테르스테크가 새로 지점장을 맡은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서 판화와 복제화를 파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빈센트는 열성적이고 세심하며 유능한 직원이었고, 칭찬받을 만한 모범 청년이었다. 빈센트는 규칙적이며 검소한 젊은이였고, 독서와 미술과 관람을 즐기는 학구파였다.

헤이그 시절은 그의 삶에서 가장 밝은 시절이었다. 구필 화랑은 네덜란드 왕국 의 후원을 얻을 정도로 번창했고, 그 화랑은 돈 많고 지위 높은 고급 손님을 끌 기 위해 멋지게 장식되었다. 그로서는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낸 부르주 아 분위기였다. 1872년부터 아우인 테오가 화랑에서 함께 일하게 되자 빈센트 는 몹시 행복했다. 그해 8월 학교를 다니다가 일시 귀향한 테오에게 보낸 짧은 편지를 쓴 것이 그 후 그들 사이에서 평생을 두고 오간 편지의 시작이었다. 그 후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전근가게 된 빈센트는 첫사랑의 고배를 들게된다. 외 로운 이국 땅에서 감성이 풍부한 청년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이다. 그러나 자신이 열심히 사랑하기만 하면 상대도 자연히 자신을 사랑할 것 이라는 비현실적인 착각에 빠진 것이 문제였다. 상대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 을 약속한 상태였다. 크게 낙담한 빈센트는 결국 영국을 떠난다.


★ 네덜란드 시절

고흐의 작품과 편지를 살펴보면 네덜란드에 머무르는 동안 고흐는 자연의 위대함과 진실함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자연은 위대하고 고귀하고 진실되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평온과 인내를 잃지 말고 힘써 일해야 한다.

이 시기 동안 그는 두텁고 어두운 황토색과 고동색을 사용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개인 날을 보기가 드물고, 대낮에도 새벽녘같이 어둑어둑했던 드렌테의 자연에서 받은 느낌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당한 색깔이었을 것이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경건한 노동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농부들의 손을 보면 그들이 흘린 땀방울을 읽을 수 있지. 거친 손은 직접 일구어낸 감자를 식탁에 올리는 정당한 노동의 표시야. 춥고 어두운 흙 속에서 수확을 여물어 내는 농부들의 표정에서 고흐가 오랫동안 그리고 싶어했던 삶의 진실이 자연스레 묻어났을 것이다.

그가 네덜란드에서 그린 또 하나의 중요한 작품으로 성서가 있는 정물화가 있다. 왜 성서를 그렸는지, 그리고 에밀졸라의 책을 왜 같이 그렸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당시 고흐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을 독실한 신앙심을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이 목사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려진 것임을 고려해 본다면 목사인 아버지에 대한 추도의 의미가 더 강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옆에 놓여진 에밀졸라의 삶의 기쁨이 놓여져 있는 것을 아버지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이는 그의 기독교와의 단절과도 연결된다. 어떤 이유로 기독교와의 단절을 결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후 그의 정신적 고통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 빠리 시절

파리 1886년 2월 20일, 테오는
몽마르트(Montmartre)거리 19번지에 있는 구필 화랑에서 빈센트가 보낸 짧은 전갈을 받습니다. 그 내용은 빈센트가 파리에 막 도착했으며, 루브르에 있는 살롱 카페에서 가능한 한 빨리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빈센트가 그처럼 서둘러 파리에 온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는데, 하나는 테오와 같이 생활하면 생활비를 절약할 수가 있고, 다른 하나는 코르몽의 화실에서 그림 수업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몽마르트 언덕 아래, 라발 거리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테오와 빈센트의 공동 생활이 시작됩니다. 앤트워프에 있기까지 빈센트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전혀 알지 못했는데, 파리에 와서 그들의 작품을 보게 되었고 탕기영감이 운영하던 클로젤 거리의 그림물감 상점에서 베르나르(Emile Bernard,1868-1941), 러셀(John Russell,1858-1931),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등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1870년 <니벨룽겐의 혼인 designtimesp=28451>이라는 작품으로 살롱전에서 상을 받은 코르몽(Cormon,1845-1924)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빈센트는 4월에 이들과 합류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 화실에서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알 수 없던 그는 4개월 만에 코르몽의 화실을 떠납니다.

빈센트와 테오는 레픽 거리 54번지로 이사했고 빈센트는 방 하나를 화실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그의 작품에서 이제 색채가 제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파리의 지붕과 몽마르트의 풍차들을 그리면서 누에넨에서 그렸던 어두운 색조의 그림과 다른 강한 색채를 사용한 그림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과음과 퇴폐적인 생활을 한 빈센트는 건강이 나빠졌지만, 그들의 영향을 받아 그의 화풍에 변화가 생겼고 몽마르트 정원이나 레픽의 화실 창을 통해 본 풍경을 그릴 때 점묘법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베르나르와 가깝게 지내던 빈센트는 베르나르의 부모가 살고 있는 아니에르를 방문하여 그 곳의 풍경을 그리면서 더 많은 색채를 보게 되고,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베르나르와 함께 클리시 거리 포세라는 대중식당에서 전시회를 갖습니다. 그러나 빈센트가 식당주인과 언쟁을 하는 바람에 전시회는 끝이 났고 클리시 거리에 있는 탬버랭이라는 선술집에서 작품을 전시하게 됩니다. 빈센트는 그 선술집의 주인이며 드가의 모델이었던 세가토리와 사귀었지만 헤어지고 맙니다.
6월에 빈센트는 벵 화랑에 전시된 일본 그림에 강한 충격을 받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그의 그림의 색채는 더 밝아지고 양식도 많이 변합니다. 11월에는 샬레 레스토랑에서 <쁘띠 블르바르의 인상파 화가들 designtimesp=28457>이라는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의 작품과 함께 앙케텡, 베르나르, 드 코닝, 로트렉 등의 작품이 전시되었습니다 . 이 전시회를 통해 빈센트는 고갱, 기욤, 쇠라 등을 알게 됩니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빈센트는 \"프랑스의 공기는 나의 생각을 맑게 해주어 작업을 더없이 훌륭하고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게 해준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1년 6개월이 지나자 그는 파링에 대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하면서 \"인간적으로 혐오스러운 화가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남프랑스의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반감을 느끼면서도 그나마 너그럽게 함께 있어 주고 인도해 준 사람들은 세잔, 고갱, 쇠라 정도를 꼽을 수 있습니다. 동료 화가였던 기욤은 \"빈센트는 자신의 의견을 좀더 잘 표현하기 위해 옷을 입지 않은 채 무릎을 꿇기까지 했는데, 그런 그를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고 말했습니다. 빈센트는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탕기 부인에게 위협적인 욕설을 퍼붓기도 했지요. 결국 테오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고, 게다가 빈센트가 집을 언제나 어수선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휴식을 취할 수도 없었습니다.
빈센트는 갑자기 파리에 왔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파리를 떠났습니다. 16시간 동안 기차여행을 하고 빈센트는 1888년 2월 20일 하얗게 눈이 내린 아를에 도착합니다. 이제 그의 나이는 서른 네 살이었고, 화가에 입문한지 6년째에 접어들었습니다.


★ 아를 시절

나는-결혼하고 싶은 생각도 자식을 갖고 싶은 생각도 안하게 되었다만, 그리고 그런 식으로는 전혀 생각도 안 했건만,그래도 서른 다섯 살이나 돼 가지고 이 꼴로 있는 것이 때로는 우울하다. 그래서 그림하고의 악연이 지겨워진다. \"예술에 대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을 잃게 한다.\" 아닌게 아니라 옳은 말이겠지만, 그와 반대로 진정한 애정은 예술을 싫어하는 법이다......인간으로서도 참을 수 없는 숱한 환쟁이 녀석들을 안 만나기 위해서 남프랑스 어딘가에 틀어박히고 싶다.
1888년 아를로 간 그는 여관과 식당을 겸한 \'레스토랑 카렐\'에 머물렀다. 진실 한 관계를 여성에게서 추구했다가 좌절한 그는 육체적인 관계만을 맺었으나, 차차 라셸 이라는 조용한 창녀와 친해지기 시작했고, 그녀와 함께 삶을 나누었 다. 망명적 존재, 사회의 폐물,...., 예술가들처럼 그녀도 우리의 친구이고 누이 동생일세. 우리들과 마찬가지로-그녀도 폐물의 처지에서 착실한 독립을하려한 댔 자 조금도 이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네. 아를에서의 그림은 색채의 해방이 라는 점에서 분명히 새로운 것이었다. 대담한 색으로 고양된 격렬함, 확고하고 분명하며 향상된 이미지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짙은 블랙 커리를 몇 잔이나 마시고 몸으로 고통을 느 끼면서 그리는 가운데 황색의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다. 해가 뜨면 질 때까 지 온종일 죽도록 그림을 그리고, 밤이 되면 머리가 아파올 때까지 독한 압셍트 를 마시고서 창녀를 찾거나 집에 돌아와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들의 우울 증이나 그 밖의 것은 너무나 예술적인 우리들의 생활 태도에 비롯된 것이며, 숙명적인 유산이기도 하다.

1888년 10월 23일, 고갱은 아를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테오가 보내 주는 돈으 로 살았다. 절약을 위해 보다 요령이 있는 고갱이 요리를 했고 함께 그림을 그 렸다. 빈센트의 생활은 참으로 건전하고 질서가 잡히게 되어 건강도 회복했다. 그러나 서로 화를 내게되고, 1888년 12월 23일 일요일 밤 11시반, 아를의 창녀 촌 1번 집의 라셸은 빈센트에게 불려나가 그로부터 무엇을 잘 맡아 달라는 말을 들었다. 피범벅의 붕대를 머리에 두른 빈센트는 곧 사라졌다. 그녀가 신문지를 펼치자 잘린 귀가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실신했다. 다음날 경찰이 빈센트 가 사는 노란 집에 가보니 그는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빈센트는 곧 병 원에 수용되었다. 2월 초, 그는 상당히 회복되었지만 건강은 여전히 좋지 못했 다. 시민들은 두려운 나머지 그를 병원에 수용시켜야 한다는 탄원서를 보냈고, 빈센트는 독방에 수용되었다.1889년 5월 초, 아를 병원측은 빈센트를 생-레미 부근의 사립 요양원에 보냈다.


★ 생-레미, 오베르 시절

생-레미 시절은 참으로 평온한 시기였으나, 미술사에서는 가장 \'소용돌이 치는\'광기의 작품으로 해석되는 그림을 그런 시기이기도 했다.

1889년 5월 8일, 빈센트는 프랑스의 생레미에 있는 생폴 드 무솔 요양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닥터 레와 수간호사인 플레가 그를 맞아 주었습니다. 테오의 요청으로 그를 위해 나란히 있는 방 두 개가 마련되었는데, 하나는 화실로 사용할 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빈센트가 기거할 방이었습니다 1889년 5월 8일, 빈센트는 프랑스의 생레미에 있는 생폴 드 무솔 요양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닥터 레와 수간호사인 플레가 그를 맞아 주었습니다. 테오의 요청으로 그를 위해 나란히 있는 방 두 개가 마련되었는데, 하나는 화실로 사용할 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빈센트가 기거할 방이었습니다.
빈센트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환청과 환각 증세가 이어지고 그에 따른 공포가 엄습해 오는 발작증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엄청난 자책감에 시달립니다. 9월에 <별이 빛나는 밤 designtimesp=28480>과 <붓꽃 designtimesp=28481> 두 점이 파리 앵데팡당 살롱전에 전시되었고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즈음 빈센트의 작품은 동료 화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며, 테오의 집은 물론 탕기 영감의 미술용품 가게에도
전시되었습니다. 11월, 빈센트는 제8회 살롱 전시회에 그의 작품을 몇 점 풀품해 달라는 옥옥타브 마우스의 요청을 받기도 합니다. 빈센트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11월 30일 그림 여섯 점을 보냅니다. 그러나 12월 24일, 갑자기 심한 발작증세를 보이더니 1주일 동안 발작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물감 튜브를 빨아먹다가 발작이 진정되면 평소처럼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1890년 1월 18일 브뤼셀의 20인전에 그의 유화 여섯 점이 전시되었고, 권위 있는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르의 지극히 호의적인 평론 \'고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르
메르퀴르 드 프랑스 designtimesp=28482>에 실리게 됩니다.

닥터 페이롱은 빈센트의 병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믿었지만, 2월 22일 아를을 방문했다가 발작증세가 다시 일어나는 바람에 그러한 희망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4월 말 편지를 다시 쓸 정도로 회복된 빈센트는 테오에게 \"제발 오리에에게 내 그림에 대해서 더 이상 쓰지 말라고 부탁해라. 나는 슬픔 때문에 너무나 상심해 그가 공개한 내용을 차마 볼 수가 없다. 그림을 그린다는 일이 나를 혼란시키고 있다. 그러나 내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이보다 더욱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라고 편지를 씁니다.

1890년 1월, 그의 그림이 브뤼셀에서 전시되었다. 빈센트의 작품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비평가들은 빈센트의 강렬한 색채를 야만적일 정도로 공격했다. 그러나 비록 단 한 편이었지만 빈센트를 극도로 찬양하는 글이 사회 주의 경향의 잡지에 실렸다. 알베르 오리에의 글로 생전에 그에 대해 쓰여진 유 일한 글이기도 했다.

1890년 5월 17일 빈센트는 혼자서 파리로 떠났다. 그후 오베르로 간 빈센트는 그곳에서의 2달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한다. 이곳에서 그는 가셰를 만난다. 빈 센트는 도착 이튿날부터 맹렬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최후의 비극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목격담에 의하면 그는 총상을 입고서 밤늦게 하숙집에 돌아와 2층 자기 방에 들 어가 누웠다. 곧 의사들이 불려 와서 치료를 했으나 그들은 모두 외과전문의가 아니었다. 밤이되자 호흡 곤란이 격심해졌다. \'이렇게 죽고 싶어\'라고 말한 형 은 30분 뒤에 죽었다.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반이었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혼자 남은 테오는 형의 저고리 주머니에서 접혀진 종이를 찾았다.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그후 테오는 형이 죽은 지 6개월 뒤에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으나 33세 의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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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듯이 고흐는 고향인 네덜란드로부터 파리, 아를, 쌩레미, 오베르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을 옮겨 다녔다. 그러는 동안 그의 작품성향도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되는데 이 글에서는 일반적인 방법을 따라 그가 거주했던 지역에 따라 작품시기를 구분하였다.

1. 네덜란드 시기 (1880-1885)

고흐의 작품과 편지를 살펴보면 네덜란드에 머무르는 동안 고흐는 자연의 위대함과 진실함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연은 위대하고 고귀하고 진실되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평온과 인내를 잃지 말고 힘써 일해야 한다.

나는 농부화가가 된 것 같아. 정말 그런 기분이야. 앞으로도 농부들을 계속해서 그리고 싶어. 옛집에 돌아온 것 같이 편안해." 

그림 1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Oil on canvas, 114.5*81.5cm, van Gogh Museum, Amsterdam, Netherlands 

이 시기 동안 그는 두텁고 어두운 황토색과 고동색을 사용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개인 날을 보기가 드물고, 대낮에도 새벽녘같이 어둑어둑했던 드렌테의 자연에서 받은 느낌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당한 색깔이었을 것이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경건한 노동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농부들의 손을 보면 그들이 흘린 땀방울을 읽을 수 있지. 거친 손은 직접 일구어낸 감자를 식탁에 올리는 정당한 노동의 표시야."

춥고 어두운 흙 속에서 수확을 여물어 내는 농부들의 표정에서 고흐가 오랫동안 그리고 싶어했던 삶의 진실이 자연스레 묻어났을 것이다.   

그림 2 성서가 있는 정물, 1885, Oil on canvas, 65*78cm, van Gogh Museum, Amsterdam, Netherlands

 

그가 네덜란드에서 그린 또 하나의 중요한 작품으로 성서가 있는 정물화가 있다. 왜 성서를 그렸는지, 그리고 에밀졸라의 책을 왜 같이 그렸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당시 고흐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을 독실한 신앙심을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이 목사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려진 것임을 고려해 본다면 목사인 아버지에 대한 추도의 의미가 더 강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옆에 놓여진 에밀졸라의 삶의 기쁨이 놓여져 있는 것을 아버지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이는 그의 기독교와의 단절과도 연결된다. 어떤 이유로 기독교와의 단절을 결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후 그의 정신적 고통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2. 파리 시기 (1886.2-1888.2)

 네덜란드를 떠나 파리로 온 고흐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접촉하게 된다. 특히 폴 시냑에밀 베르나르를 자주 만났고 쇠라의 미학에 대한 많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들의 영향을 받아 고흐의 그림은 색깔이 좀 더 밝아지고 빛을 표현하기 위해 점점이 끊어서 표현하는 방식도 시도해 보았다.

파리에서 인상주의의 영향과 함께 고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일본풍을 들 수가 있다. 당시 서구 미술에 일본화는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데 이를 일본풍이라고 불렀다. 고흐도 일본화를 좋아해서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매혹적인 작은 일본화들을 많이 걸어놓은 덕분에 내 작업실은 그리 나쁘지 않아보였지"

 윤곽선 안에 단조로운 색을 칠하는 일본화풍은 이후 고흐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림 3 탕귀영감의 초상, 1887, Oil on canvas, 74*93cm, Musee Rodin, Paris, France 

파리에서 그린 작품으로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이 탕귀영감의 초상이다. 이 작품은 인상주의로부터의 영향과 일본화의 영향이 결합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단순하면서 강렬한 색체굵은 외곽선 안을 메우고 있고, 배경으로 쓰인 일본화들은 당시 분위기를 전해준다. 이 작품과 앞의 감자 먹는 사람들을 비교해보면 그의 그림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불과 2년 만에 이정도의 변화를 보인 것은 놀랍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반 고흐는 급속히 인상주의의 영향을 벗어난다. 영향을 벗어난다기 보다는 인상주의를 소화하고 인상주의 이상의 것을 찾아 나섰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상주의를 보고 배운 다음 그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있었다.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받은 느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색체가 아니라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색채를 골라 쓰기 시작했고 형태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았다. 일본화로부터 받은 영향도 계속되어 굵은 외곽선과 단순한 채색은 작품에 계속적으로 나타난다.

고흐는 파리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파리는 그의 그림을 인정해 주지 않았고, 대화를 나눌 상대도 별로 없었다. 그는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적으로 혐오스러운 화가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남 프랑스의 어딘 가로 떠나고 싶다."

그는 결국 1년 6개월 만에 파리를 떠나 남부 프랑스의 아를로 향하게 된다.

 

3. 아를 시기 (1888.2-1889.5)

 약 15개월 동안 아를에 있으면서 그는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다. 이 기간 동안 무려 일백구십 점의 작품을 제작해 내었는데 이로부터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이 시기는 그의 독자적 양식을 확립하는 시기로 작품의 양뿐만 아니라 질적 변화에서도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색채는 작품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된다. 다음의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의 특징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나는 내 눈앞에 있는 것을 똑같이 재현하기 보다는 나 자신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색채를 주관적으로 사용한다. 

그림 4 밤의 카페 테라스, 1888년 9월, Oil on canvas, 65.5*81cm, Kroller-Muller Museum, Otterlo, Netherlands

 이제 색채는 그의 가장 본질적인 관심사가 되어 버린다. 강렬한 색채는 터질 듯한 그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밤의 카페 테라스는 이러한 경향을 잘 나타내주는 작품이다. 누이에게 보낸 다음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는 검은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밤을 그렸지. 아름다운 푸른색과 보라색, 초록색만을 사용했단다. 이렇게 밤을 배경으로 빛나는 광장은 설퍼옐로와 라이미 그린을 사용해 그렸지."

그림 5 열 네 송이 해바라기, 1888, Oil on canvas, 73*93cm, National Gallery, London, UK

 일본화를 통해서 그는 단순미를 배웠고 그의 작품 가운데 해바라기는 단순미를 잘 표현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노란색만을 사용한 것으로 그 채도만을 달리하여 표현하고 있다. 배경마저도 노란색으로 그린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그러나 아를에서 그는 절망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데서 오는 고독, 오랫동안의 이국생활로 인한 신경의 긴장, 기대가 컸던 만큼 큰 절망을 안겨다 준 고갱과의 만남으로부터 그의 정신은 이성을 잃고 만다. 1888년 크리스마스 전날 밤 그는 고갱과의 언쟁 끝에 발작을 일으켜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다.

 

4. 쌩 레미 시기 (1889.5-1890.5)  


그림 6 별이 빛나는 밤, 1889, Oil on canvas, 92*73cm,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US 

그는 스스로 요청하여 쌩 레미의 정신요양원에 입원한다. 이 시기동안의 그의 그림은 그 동안 보이지 않던 큰 변화를 보인다. 즉, 고정된 물체 속에서 역동적인 힘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세상은 그의 내적인 비전에 따라 경련적으로 형성되고 또 변형되어 화폭 위에 전개된다. 이러한 역동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소재들 중의 하나가 삼나무다. 혹자는 고흐의 삼나무를 흙에서 피어나는 불꽃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하늘로 피어 오를 듯한 삼나무와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하늘의 구름과 아름다운 별과 달을 그는 자주 그렸다. 그는 삼나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나무들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만큼 아름다워. 마치 햇살이 눈부신 풍경 속에 검은 얼룩이 찍힌 것 같아."

 

5. 오베르 시기 (1890.5-1890.7)  

그림 7 오베르의 교회, 1890, Oil on canvas, 34*42cm, Museum of Art,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 Providence, US

 

쌩 레미에서의 생활에 싫증을 낸 고흐는 동생의 추천으로 오베르에 오게 된다. 하지만 오베르에 오게 된 이후부터 그의 외로움은 더 커졌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컸다. 그러나 이 시기는 가장 많은 작품을 낸 시기 중의 하나이다. 결과적인 해석일지는 모르나 이 시기의 그림은 그의 불행한 종말을 암시라도 하는 듯 짙은 어둠의 이미지가 강하다. 오베르의 교회에 나타나는 무거운 하늘의 이미지가 그렇고 까마귀가 나는 밀밭의 하늘이 또한 그러하다. 특히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그 역동적인 이미지만큼이나 불길한 이미지도 크게 느껴진다. 바람에 쓰러질 듯 흔들리는 밀밭과 파도 치듯 구부러진 길은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그의 심리상태를 보는 듯하며, 금방 폭풍우가 몰아칠 듯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에서 불길함이 다가온다. 그 속을 날고 있는 까마귀의 존재가 이러한 느낌을 더욱 증대 시키고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이 작품을 남기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그림 8 까마귀가 나는 보리밭, 1890, Oil on canvas, 103*50.5cm, van Gogh Museum, Amsterdam, Netherlands

 

6. 작품의 특징 정리

 위에서 살펴본 것을 바탕으로 작품의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색채가 작품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는 파리로 가면서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네덜란드에서 쓰이던 색과는 전혀 다른 원색에 가까운 강렬한 색의 사용이 그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것은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둘째, 그는 정지해 있는 사물에서 그 속에 숨어 있는 역동성을 발견해 내었다. 그의 그림은 특히 쌩레미시기 이후부터 상당한 역동성을 느끼게 한다. 그림 속의 대상들은 꿈틀거리는 듯 삐뚤어져 있고 특히 이러한 역동성은 하늘을 표현하는 데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별이 빛나는 밤에서의 하늘과 구름과 별과 달의 어우러짐, 그리고 까마귀가 나는 보리밭에서의 보리밭의 역동성은 그의 심리 상태와도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초조함과 불안으로 가득찬 마음으로 보는 세상은 절대 안정적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떤 힘을 그는 자연에서 상징적으로 느꼈는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고흐하면 자화상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시의 돈이 궁한 화가들은 모델을 구할 수가 없어서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이유가 될 수는 있다고 본다. 하지만 고흐의 자화상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도구로 보인다. 자화상을 그리는 동안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게 되고 그는 새로운 다짐을 하였을 것이다. 정신적 발작이 심했던 만년의 자화상에서도 초췌한 외양과는 달리 눈에서만은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