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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

150일간의 쿤룬산맥 탐사에 관한 기록2

150일간의 쿤룬산맥 탐사에 관한 기록2

위구르인과 티베트인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모자를 쓰고 다닌다는 케리어의 여인, 모자에 대한 자긍심이 굉장해 겨우 설득시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세계의 지붕인 파미르고원에서 출발해 중국의 타클라마칸사막, 신장성, 간쑤성, 쓰촨성, 윈남성을 지나 베트남에 이르러서야 끝나는 쿤룬산맥. 산맥을 따라 기원전부터 인류는 고대문명을 꽃피우기도 하고, 험한 무역로를 개척해왔다. 불교와 이슬람 종교가 번창하면서 곳곳에 신비스러움이 어려 있는 땅이기도 하다. 무즈타그마타, 마자르, 암네마친, 공가, 잠베양 등 해발 수천미터에 달하는 고산은 오래전부터 많은 탐험대를 불러들였고, 그들의 목숨을 잠재우기도 했다. 지난호에 이어 이번호는 쿤룬산맥을 탐사하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싣고, 이번 연재를 마친다.<편집자>
쿤룬산맥탐사를 마친지 반년이 지났지만,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내 기억 속에 한 폭의 그림으로 남아 불현듯 나의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가서는 쿤룬산맥의 거대한 반영이다. 새순 연녹색의 이파리가 여름비를 맞으며 진한 녹색의 옷으로 갈아입는 푸름의 계절의 중간에서, 잊혀지지 않는 사람을 되뇌어 본다. 150일간의 탐사에서 우리가 얻은 쿤룬산맥의 정보는 중요한 의미로 남았지만 대자연, 대산맥의 아래에서 자연이 주는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선한 사람들의 맑은 눈빛과, 고단한 삶을 그대로의 무게로 감당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그들은 빈 마음 한 자락이라도 알아 줄 수 있는 속 깊은 지인들이었기에 절대 우리의 긴 여정의 옷자락을 부여잡지 않았다. 하지만 비워내고도 다시 금세 고이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고 보면,  때로는 멀리서 가까이는 내 귓가에서 살아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황롱의 작은 호수, 황롱은 황색의 용을 뜻하며 이 호수들은 용의 비닐이라고 한다


실패로 끝난 산시, 간쑤 중국 이슬람교도의 반란
중국은 실로 광대하고 다양하다. 때로는 넓다는 것이  단절과 교류를 의미하기도 한다. 쿤룬산맥 탐사 중 내가 만난 이들은 극명한 단절과 교류의 부산물로 생겨난 다양성에 머리를 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먼저 나는 단절 속에 살아가는 이들을 쿤룬산맥의 시작점인 파미르(Pamir)에서 본 기억이 새롭다. 그 단절은 종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위구르(Uighur)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종교는 매우 다양하게 변화되어왔다. 그들은 2세기 초 불교를 믿었지만 이후 네스토리우스파와 그리스도교를 믿었으며, 이슬람 세력의 동진에 따라 이슬람화되었다. 이슬람문화는 이후 그들의 절대적인 신앙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또 그들의 온전한 문화의 보존과 영유를 위해 청나라와 전쟁에 나서기까지 한다. 위구루인들의 독립을 위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1862년 산시와 간쑤 지방에서 일어난 중국인 이슬람교도의 반란이다. 둥간족이 청나라에 맞서 독립을 주장한 것이었다. 1863년에는 신장의 여러 지방에서 둥간족의 폭동이 일어났으며, 1864년에는 쿠처에 둥간·위구르인 연합 반란군정권이 수립되기도 했다. 이어 반란은 신장 전역으로 확대되어, 한때는 신장 지방 전역이 둥간·위구르인 연합정권과 우즈베크족의 코칸드 한국 장군과 야쿠브 베그 정권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청나라 세력을 신장 일대에서 추방하기도 했지만, 야쿠브 베그 정권과 둥간족 사이에는 민족적인 반목이 심했다. 결국 통일 이슬람 세력을 결성하지 못하고, 청나라 쭤쭝탕의 토벌을 받고 폐퇴한다. 둥간반란은 야쿠브 베그가 쭤쭝탕의 추격을 받고 1877년 자살함으로써 평정되었다.


한족 이주정책과 진화 없는 종교로 정체성 잃어  
그 결과 청나라는 그전까지 중국의 속령이던 이 지방에 성제를 실시함으로써 중국의 한 성으로 병합했다. 신장위구르는 세계에서 가장 삭막한 지역 중 하나이다. 옛부터 거대한 타클라마칸사막을 중심으로 많은 오아시스 도시들이 생겨났지만, 지금은 거의 흔적도 남지 않고 사막의 일부가 되었다. 둥간반란에서 패한 위구르족은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했다. 석유가 나긴 했지만 한족의 자본과 도움 없이는 삭막한 사막에서 생계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이후 탱크보다 무서운 한족 이주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는 문화대혁명 후 하나의 중국을 제창한 마오쩌둥사상에 기인한다. 문화의 혼합으로 소수민족의 독립정신을 무력화시키려는 한족 이주정책 이후 위구르인들은 표면적으로 예전과 비교해 윤택해진 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정신의 박탈감에서 오는 힘없는 흐린 눈빛은 역사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소수 민족의 현재를 반영하고도 남았다.
쿤룬산맥을 쫓아 사막의 오아시스에 위치한 많은 도시들에서 내가 본 것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수많은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히잡(hijab)이나 부르카(burqah), 차도르(chaddor)로 얼굴을 가리고 무언가를 팔고 있었다. 엄격한 이슬람관습 아래서도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놓인 그들의 삶은 무거운 무게로 내게 다가왔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불 때면 그들은 ‘ 알라! ’를 외친다. 하지만 알라를 외치기 한참 전 그들은 몽골의 푸른 초원을 바람 같이 자유롭게 달리던 자유로운 민족이었다. 지금 그것을 구속하는 그들의 신에 대한 외침은 공허한 허공만을 맴돌 뿐이다. 진화 없는 종교의 단절 즉 정치와 분리되지 못한 종교의 폐해와 관습이라는 무거운 삶을 살며 정신을 잃어버린 그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티베트(Tibet)로 향했다.



타클라마칸 사막 근처에 위치한 아바시의 골목에서 만난  노천 이발소의 위구르인들



호탄왕국의 일요시장, 고대의 영화는 간데없고 값싼 생필품들이 주류를 이룬다


삶과 신앙 합치시킨 순수한 영혼의 티베트인들
단절보다는 교류를 통해 자신의 것을 지키고자 애쓰는 민족이 티베트인들이다. 어쩌면 위구르인들과 같이 그들도 한족에 굴복한 소수민족이지만, 자신이 믿는 신 앞에서 모든 것을 내던지고도 맑은 영혼과 눈을 가진 사람들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것은 ‘큰 바다와 같은 지혜를 갖춘 승려’ 달라이라마와의 교감이 통해서일 것이다. 그들은 1951년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를 침공해 100만명의 승려 중 10만명이 살해되는 야만의 시대에도 그들의 정신을 지키고자하는 노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앤드류 하비(Andrew Harvey)는 그의 저서 ‘라다크에서 찾은 부처’에서 티베트인들의 삶과 신앙은 하나이고 인간은 본래 완전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또 우리는 흔들리는 마음을 갖지 않기 위해 신에게 기도하여야 하며 종교는 선한 마음 안에서만 구원되고 윤회된다고 믿었다. 티베트인들은 4,000미터 이상의 척박한 고원에서 또는 혹한의 추위와 거센 바람 속에서도 갈라진 험한 손을 모아 기도하며 그들의 정신만은 놓지 않았다. 그것은 타협하지 않는 정신이었고 선한 마음이리라. 이번 탐사 중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한명 있다. 쿤룬산맥의 중간에 위치한 칭하이성의 암네마친(6,282m)으로 가려면 다우라는 소도시에서 차를 빌려 가야한다. 두 시간 동안이나 거리에서 차를 알아보았지만 모두들 가기를 꺼려하거나, 사륜구동차가 아니면 가지 못한다고 했다. 다시 거리에 서서 꼬박 한 시간을 더 기다린 끝에 정말 운 좋게도 소난 차이탄씨를 만났다. 그는 티베트의 여러 종족 중 전사계급에 속하는 골르크족이었다. 18세기 중국이 천하를 통일하고도 이 골르크족 때문에 티베트로의 진격을 늦출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완강히 저항한 종족이 바로 골르크족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정신과 사상을 지키고자했고, 이는 그들에게 목숨을 건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소난 타이탄씨와 쓰구냥산의 촌장
소난 차이탄씨는 다소 비싸다고 생각되는 500위안(한화 약 7만원)을 요구했지만 우리는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다음날 우리는 그의 차를 타고 암네마친으로 향했다. 차가 다다를 수 있는 마지막 지점에 도착하자마자 카메라를 들고 뛰다시피 언덕을 올랐다. 암네마친 연봉 뒤로 손바닥만한 하늘이 회색 구름에 휩싸이기 전에 사진을 찍어야했다. 4,300미터까지 올라 기다려 보았지만 야속한 하늘에선 우박만 내렸다. 우박 속에서 기다리고 있을 일행을 생각해 하산을 서둘렀다. 사진 한 장이 간절했지만 일단 점심식사를 한 후 날씨를 지켜보기로 했다. 츄에르랴오마 빙하 초입에 있는 베이스캠프로 발길을 돌렸다. 아담한 오두막에 들러 날씨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이 집 주인은 먼 한국과 일본에서 손님이 왔다며 서둘러 양고기를 삶아 내놓았다. 어디서 꺼냈는지 모두 칼 하나씩을 들고 양고기를 썰어 우리에게 준다.
2년 전에 쓰촨성의 쓰구냥산(6,250m)을 등반할 때도 이 지역의 촌장이 운영하는 여관에 묵었었는데, 그때도 너무 많은 호위를 베풀어줘 사례를 하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장족은 원래 이렇습니다. 친구가 멀리서 왔는데 돈을 받다니요. 가시는 먼 길 안전하게 돌아가십시오.” 필자는 알고 있었다. 티베트인들은 한 번 마음을 열면 모든 것을 주는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2년 전처럼 얼마의 사례를 하려해도 그들의 순수한 호위를 무시하는 것 같아 미안해하던 참에 저쪽을 보니 순박하게 뛰노는 이 집의 사내아이 손에 탐사에 동행한 히로꼬(Hiroko Suzuki. 30세. 나고야 거주)가 50위엔을 꼭 쥐어준다.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다음날도 날씨가 바뀌기를 하루 종일 기다렸다. 간신히 벗겨진 하늘 사이로 암네마친의 두번째 봉우리 사진은 찍었지만 주봉은 여전히 구름에 휩싸여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가 없었다. 직장이 있는 소난 차이탄씨는 다우로 오늘 돌아가야 했고, 그의 동생도 업무에 바빴다. 우리는 다시 주위 사진을 몇 장 더 찍고 다우로 돌아가기로 했다.



신장위구르의 카시가르에서 난(밀가루를 반죽해 화덕에 구운 위구르인들의 주식)을 팔고 있는 오누이의 모습


설련화 피는 봄에 다시 오십시오
“설련화 피는 봄에 다시 오십시오.” 아쉬운 작별인사를 뒤로 하고, 우리는 늦은 밤 다우로 돌아왔다. 소난 차이탄씨는 잠시 자기 집에 들르자며 우리를 초대했다. 히로꼬에게 전통 의상인 추바푸르(털로 만든 옷)를 입어보라고도 하고, 또 한 상의 음식을 내온다. 따뜻한 마음에 감사의 말을 전하고, 처음 약속한 500위엔을 건넸지만 그는 ‘친구에게는 돈을 받지 않습니다. 긴 여행 조심해서 끝내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뒤돌아섰다. 차가운 바람에 스산한 거리였지만 마음만은 더워지고 있었다. 그의 살림살이에서 보면 500위엔은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그는 우리를 새로운 친구로 생각해 마음의 교류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탐사가 끝난 지금 다시 그때를 생각해보면 차이탄씨가 귀찮을 정도로 내게 계속 말을 걸어왔는지 알 것 같다. 친절을 친절로 받아들이지 못한 어리숙한 문명인은 바로 나였던 것이다. 필요에 따라 사람을 사귀고, 이용하는 게 더이상 흠이 안되고, 속도가 중시되는 현대사회에서 삶을 꾸려가는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가진 조금의 것들조차 버거움을 느끼는 요즘이다. 아마도 거대한 쿤룬산맥 아래 단절과 교류 속에서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어쩌면 그동안 잊고 있던 내가 아니었을까?


글사진 | 임성묵(월간사진 2005년 8월호 게재)


임성묵(hunzapeak@korea.com)은 월간 ‘사람과 산 ’ 빅월클라이잉 전문기자와 고산 거벽 등산학교 강사로 활동 중이다. 지금까지 파키스탄 브락상 피크 변형루트 등정, 파키스탄 카체브랑사 북봉 초등, 파키스탄 혼보로 피크신 루트 개척, 힌두쿠시 무스듬 피크 루트 개척, 파키스탄 아딜피크 북 서벽 루트 개척, 파키스탄 트랑고 타워 서벽 루트 등반, 중국 사천성 총라이 산맥의 쓰구냥 동계등반 등의 경력을 가진 전문 등반인이다. 2002년 2회 알파인 클라이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