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가위눌리기라도 한 걸까. 여름한철 진액으로 불볕더위를 씻어내던 매미소리가 잦아들고, 논배미를 가득 메웠던 개구리 소리마저 누그러졌다. 한껏 짙푸른 신록 탓일까. 시끌벅적하던 일상들이 스멀스멀 꼬리를 감추기에 바쁘다. 그뿐이랴. 요즘 같으면 선풍기 에어컨 찾을 까닭이 없어졌다. 후텁지근한 찜통더위로, 열대야로 잠을 설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밤기운이 서늘하다. 자연의 섭리는 지고지순한 미덕을 지녔기 때문이다.
더위가 한풀 꺾이면 으레 산에 오른다. 어제오늘 화왕산에 올랐다. 등산화 세 켤레를 닳아본 사람이라면 창년 화왕산의 수려함을 알게다. 더구나 화왕산 억새 평원을 걸어봤거나, 3년마다 달집 태우듯 억새를 태우는 행사에 참가한 산악인이라면 전국 100대 명산인 화왕산을 기억하리라. 굳이 지리산, 설악산, 월악산, 월출산의 자태를 들먹이지 않아도 좋다. 구태여 그 낱낱을 헤아려 본들 화왕산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그 멋을 모를 테니까.
어제는 아들과 나란히 올랐고, 오늘은 달랑 나 혼자서 적적하게 올랐다. 하지만 산에 오른다는 것은 혼자만의 인내심을 바탕으로해야하고, 스스로 고독감에 흠뻑 빠져야한다. 산을 아끼고, 좋아하며, 즐겨 오르는 사람은 결코 사사로운 말로 산 속의 평화를 깨뜨리지 않는다. 여럿이 오를 때도 마찬가지다. 묵언(黙言)을 하듯 침묵을 하듯 산에 오르면 잡다한 일상생활 속에서 부대끼며 한스러웠던 일들도 팥죽같이 쏟아져 내리는 땀방울에 쉬 풀려난다. 산에 오르는 묘미는 스스로에게 침잠할 수 있는 여력을 안겨주기 때문이리라.
그런데도 아들과 산을 오르면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현재 각자의 생활에 대해서 얘기 나눌 때는 나보다는 아들이 더 많은 얘깃거리를 펼쳤다. 학교생활과 대학입시, 향후 전공학과에 대해서, 장래 희망과 직업에 관해서 현재 생활과 근접하는 이야기를 했다. 미더웠다. 당장에 학교 공부만 하는 것만 해도 머리에 불이 날 지경인데도, 자기 스스로가 하고자하고, 이뤄내고 싶은 것들에 대한 선행계획 정도가 너무 야무졌다. 주로 경청하는 데 일관했지만, 충분히 이해하고, 인정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늘 어리다고, 아직 생각가지가 굳어지지 않았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열여덟 살 나이에 걸맞게 잘 헤아렸다. 아무리 아들이라고, 내 피붙이라고 해도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일찍 대학이나 시집장가 보낸 아들딸을 둔 동갑내기들의 경우 거의다가 부모 자식간의 대화부재를 하소연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는 아들 하나만 두었을 뿐인데 목욕탕이나 등산갈 때면 제가 먼저 동행하고 나서서 흐뭇하다. 그럴 때면 사는 맛이 절로 새로워진다.
그러나 오늘은 혼자서 산에 오르면서 자식한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를 가늠해보는 시간이었다. 아들한테 나는 어떻게 아빠로 존재할까. 이제 머릴 굵을 대로 굵은 아이, 제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고, 당당하게 표현할 줄 아는 아이에게 나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아무리 아버지 부재시대에 살고 있다지만 이것만큼은 가려보고 더 나은 아빠의 모습으로 아이 곁을 자신 있게 서고픈 마음 간절하다. 다만 내 욕심이었을까?
최근 미국에서는 파더링 스타일(Fathering style 일명 ‘아버지의 스타일’)을 다섯 가지로 분류해 성인이 된 자녀들의 사회생활에 아버지가 어떤 영행을 끼쳤는지를 분석한 책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책을 보면 아버지 유형에는 과잉성취형, 시한폭탄형, 수동형, 부재형, 너그러운 멘토형 등이 있는데, 현재 고등학교 2학년이 학교생활을 하면서 겪고 문제들의 근원을 추적해 보면 아빠로서 나의 영향이 꽤 크다는 것을 인정한다. 단지 위의 다섯 가지 유형에만 국한하여 나의 스타일을 얘기하지면 양극단에 선 시한폭탄형이고 너그러운 멘토형이다. 현재 아들의 성격이나 행동양태를 보면 시한폭탄형인 다혈질로 행동하기보다는 매사 긍정하고, 배려하는 폭이 커서 너그러운 성격이다. ‘나는 결코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는 심리를 은연중에 가졌던 결과일까.
산을 내려오면서 시한폭탄형이었고, 부재형이었던 내 아버지의 삶을 생각해 봤다. 지난 40년 동안 칠순의 아버지는 내 삶에 대해서 무덤덤했다. 아니, 무조건 닦달 하나만 충실했다. 당신의 삶 어느 것 하나 스스로 경영하지 않으면서 막노동을 천형처럼 고집했었고, 아내나 자식들의 삶을 처참하게 짓밟고 내몰았다. 내게 그런 아버지의 삶의 가학성이 묻어나는 것은 아닐까. 섬뜩했다. 이번 토요일 아들과 산에 오르며 과연 나는 어떤 모습의 아버지로 비춰지는지 얘기해보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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