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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 피플

"우리가 원하는 건 자유왕래보다 명예회복"

"우리가 원하는 건 자유왕래보다 명예회복"

제3회 재외동포NGO대회가 지난달 24일부터 27일까지 서울에서 열렸습니다. 지구촌동포연대(KIN)가 주최하고 <오마이뉴스>가 후원한 지난 행사에서는 역사와 인권의 관점에서 각국 재외동포의 삶과 역사, 그리고 미래상을 한국정부와 시민사회가 올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고, 각국 재외동포 사회의 현안에 대한 문제해결의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700만 동포아리랑'이라는 기획기사를 연재합니다. 이 기사는 이번 기획의 마지막 글입니다. <오마이뉴스 편집자 주>
[오마이뉴스][1960년대 : 동포사회의 시작 ] 인력수출로 외화벌고 실업줄이고

한인 동포들의 유럽 이주가 본격화된 것은 1960년대 중반부터다. 제3공화국 당시 소위 '근대화 공업정책'을 추진하면서 인력수출이 외화획득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특히 서독지역에 광부·간호사 노동자들의 파견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950~70년대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룬 서독은 이 과정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거 수입하기 시작했다. 또 박정희 정권 초창기, 원조와 차관에만 의존하다보니 실업률만도 30%에 달했고, 정권은 해결책을 인력수출에서 찾았다.

1963년 한국정부와 특별고용계약을 맺고 그해부터 광산 노동자들을 수입했고 1966년부터는 간호사들을 받아들였는데, 1970년 초반 그 수는 3만명이었다. 독일노동자를 대신해 라인강 인근 루르 지방 일대 탄광지대의 지하 1200m 막장에 투입된 이들은 광부 출신이 아니었다. 처음 하는 채탄작업이 손에 익지 않고 독일말을 이해하지 못해 재해와 사고에 시달렸고, 작업 도중 사망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한국영사관은 재해 노동자를 속히 한국으로 이송하는 데만 신경쓸 뿐, 이들의 인권보호와 권익옹호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특히 '동백림 간첩단 사건' 이후 한국정보기관의 감시가 일상화되면서 노동자들은 더욱 위축됐다.

중앙정보부는 광부들 내에 정보요원을 침투시켜 이들을 끊임없이 감시했고, 노동자들의 합숙소에 상주하는 일도 허다했다. 또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다 싶으면 노동자들을 즉시 한국으로 돌려보냈다. 광산노동자들의 주장대로 '한국정부는 늘 독일정부와 기업주 편'이었던 것이다.

간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정식 간호대학이나 전문학교를 마치고 종합병원에서 근무했지만, 독일에서 주어진 일은 병원 허드렛일이었다.

[1970년대- '동백림 사건'] 박정희 반대투쟁으로 시작된 동포운동

▲ 사진은 '동백림간첩단사건'으로 법정에 선 윤이상.
ⓒ2005 한길사 제공
유럽에서 이뤄진 한국 민주화운동은 이른바 '동백림 사건' 이후, 70년대 초반부터 본격화됐다.

1967년 7월 8일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반정부 간첩단사건 발표로 불거졌던 '동백림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1965 반정부투쟁을 잠재우고 정적들을 옭아매기 위해 조작·확대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사건 이후 독일의 유학생과 교포들은 박정희 정권 반대투쟁을 본격화했고, 1974년 3월 1일 '민주사회건설협의회(이하 민건회, 초대의장 송두율)'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재유럽동포운동은 노동자·유학생·종교인을 주축으로 지역과 계급·계층을 뛰어넘는 본격적인 연대운동으로 발전했다. 또 1977년 5월에는 일본의 한민통 및 미주지역의 동포운동단체와 연대해 '민주민족통일해외한국인연합(한민련, 유럽본부 의장 윤이상)'을 결성하는 등 해외동포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해 나갔다.

독일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유럽동포운동의 급속한 발전을 이끌어냈다. 프랑스의 '민족문제연구소(프랑스, 소장 이희세)', 스위스의 '민주사회건설협의회(회장 최기환)', 덴마크의 '북구민족민주운동협의회(회장 임민식)' 등이 속속 결성됐다.

이같은 움직임에 대항해 한국 정보기관은 여러 가지 공작과 독일지역 운동세력의 와해작전들을 벌였다.

당시 유럽동포운동내 대표적 진보매체 <주체'(발행인 정철제, 계간)>의 편집국장이었던 오아무개씨는 베를린한인성당에 신도였지만, '빨갱이'라는 이유로 성당출입을 금지당했고, 재외공관의 사주를 받은 일부 신도들에게 구타당해 계단에서 밀려 떨어지기도 했다.

정보요원들은 광산에도 상주하면서 노동자간에 불신 분위기를 조성했고, 유학생들을 불러서 운동권 인사들과의 접촉금지령을 내리고 위협했다. 반체제 운동권 인사들은 재외공관으로부터 여권을 압수당해 독일정부에 정치망명을 신청함으로써 신변보호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 지난 2003년 10월 2일 송두율 교수가 부인 정정희씨의 부축을 받으며 기자회견장으로 걸어가고 있다. 송 교수 사건은 한국 사회에 국가보안법을 둘러싸고 엄청난 논쟁을 촉발시켰다. 하지만 정작 외국에서 우리를 보는 시각은 어떨까?
ⓒ2003 오마이뉴스 권우성
[1980년대 : 광주항쟁, 김대중 구명운동] 각국 진보단체을 움직인 힘

유럽동포들은 조국의 동지들을 대신해 유럽사회에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려나갔다. 이 과정에서 유럽 각 나라 사회당을 비롯한 진보단체들과의 연대에도 힘을 쏟았는데, 특히 세계사회민주당(Socialist International) 국제당대회 때마다 초청받는 등 유럽 진보세력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한편 유럽동포운동의 활약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 바로 '김대중 구명운동'이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구속된 김대중에게 사형이 선고되자 유럽 운동권 인사들은 즉각 가두시위를 벌이고 서명운동을 전개했고, 정당과 단체들을 찾아다니며 석방을 호소했다.

그 결과 각 나라의 정당과 단체들이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계사회민주당과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 등에서는 공개적으로 한국정부를 규탄했고, 각국 정부도 전두환 정권의 만행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특히 1972년 11월 동·서 조약을 체결했던 브란트 독일사회당 총리가 유럽동포운동을 후원해 큰 힘이 되기도 했다.

광주항쟁과 김대중 구명운동은 유럽동포운동의 양적·질적 발전을 이룬 원동력이 되었다. 지지자들이 대거 운동에 뛰어들었고,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월급을 흔쾌히 털었으며, 유학생들은 유인물 통·번역에 팔을 걷어붙였다. 종교인들도 유럽의 종교지도자들을 만나 한국 정치상황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은 더욱 확대됐다.

'베를린 노동교실(회장 윤운섭)' '전태일기념사업회 유럽본부(대표 김대천)' 등이 결성됐고, 원풍모방·동일방직 분규를 지켜본 '재독한인여성모임' 회원들은 한국여성노동자 지원을 위해 힘을 모았다. 또 '양심수후원모임'이 결성되어 구속된 조국의 동지들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또한 매년 '오월민중제'와 '갑오동학농민제' 등 다양한 대중행사를 개최해 유럽사회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한독문화협회' '한국학술연구원' 등을 결성, 한국문화와 역사를 알려나가는 데에도 힘을 썼다. 또한 민족학교와 문화모임 결성에도 힘을 쏟아 베를린의 '세종학교(민족학교, 교장 김종한)'와 '천둥소리(2세풍물모임, 단장 최영숙)', 보훔지역의 '한국민중문화모임(회장 최태호)' 등이 현재까지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1987년 재유럽민민족민주운동협의회(이하 유럽민협, 의장 정규명, 명예의장 윤이상·루이제 린저) 결성으로 모아졌고, 유럽민협은 이후 유럽동포운동의 중심체로 우뚝 서게 되며 유럽동포운동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친북' '반체제' '공작원'... 동포운동가들에게 찍힌 낙인

그 이면에 유럽민협에 대한 공관의 중상모략과 와해작전도 급증해갔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정부로부터 '반체제인사' '친북인사' 심지어 '북한공작원'이란 낙인이 찍혀야만 했다.

80년대 유럽동포에게 가해진 공안사건으로는 옥중 의문사를 당한 재독동포 안상근씨 사건(1985년)과 고국방문 중 하루아침에 간첩으로 둔갑한 재독동포 김형규씨 사건(1989년) 등이 있다.

안상근씨 옥중의문사 사건 안기부와 보안사는 당시 재독동포 진보지였던 <우리나라> 신문의 편집국장 안상근씨를 서울로 유인하여 '구미유학생 간첩단사건(양동화, 김성만, 황대권씨 등이 연루)'과 연계를 지어 이른바 '서독유학생간첩 학원침투 사건'의 주역으로 발표했다.

이 발표 후 안상근씨는 서울 구치소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국제법에 저촉됨에도 불구하고 서독 망명권자를 유인하여 구속하고 구치소에서 의혹에 찬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한국정부는 망명여권 소지자인 안상근씨가 자진 귀국하여 자수하였다고 독일정부에 보고했지만, 독일 측에서는 "타살의 개연성이 크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됐다. '동백림 사건' 이래 한국의 역대 독재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독일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데다가 구미유학생간첩사건이 과장, 조작되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구치소에서 자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사실에 미루어볼 때, 뒤늦은 감은 있지만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재독교포 김형규씨 간첩사건 국가안전기획부는 1987년 11월 2일 일시귀국했던 재독교포 김형규씨(당시 37세·함부르크 거주·전 광산기능공)를 간첩혐의로 체포, 검찰에 송치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이 주장한 방북 기간에 김씨가 서독에서 일하며 병원치료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는 간첩조작의 대상이 됐고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오랜 기간 병원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김형규씨 간첩조작사건에 대해 유럽운동권은 정권에 대한 국제적 압박을 가했으며, 이 문제를 서독국회 청문회에 상정하는 한편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7천부의 서명을 받기도 했다. 서독 정부의 적극적 대응에 힘입어 김씨는 3년 4개월만에 돌연 석방되어 독일로 귀환했다.

▲ 사진은 '동백림간첩단사건'으로 법정에 선 윤이상.
ⓒ2005 한길사 제공
[1990년대] 자랑스럽게 범민련 결성했지만

1990년 11월 19일. 유럽동포운동가들은 이날을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있다. 베를린에서 남·북·해외 대표들이 모여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결성을 결의한 날이기 때문이다. 범민련 결성은 해외동포운동의 방향을 조국통일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하지만 뒤이어 위기가 닥쳤다. 조직 내부에 북한사회에 대한 인식차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게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국내운동에 의해 해외동포운동이 좌지우지되다보니 국내운동의 분열이 그대로 해외동포운동에 투영됐다. 이 와중에 1995년 11월 유럽동포운동의 대표적 지도자였던 윤이상 선생이 타계했다.

유럽동포 통일운동의 분열에는 또한 안기부의 치밀한 정치공작도 크게 작용했다. 1990년대 유럽동포운동은 '프락치 노이로제'에 시달릴 만큼 프락치 사건이 빈발했는데, 분열과 대립의 틈을 뚫고 들어온 이들은 20대 유학생에서부터 60대 좌익 활동가까지 신분이 다양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최00 교수 사건을 꼽을 수 있다.

최00 교수 프락치 사건? 지방 대학 법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해직된 최 교수가 독일에 온 것은 대략 1994년 전후.

진보적 교수로 알려졌던 그는 동포운동가들을 만나 범민련 활동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이에 동포운동가들은 그를 범민련 핵심간부로 임명했다. 하지만 최교수는 반대세력들을 개량주의·기회주의로 몰아붙였고, 이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범민련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98년 유럽 범민련의 북쪽 상대자였던 베를린 주재 북한 대표부의 김00 참사가 미국으로 망명했다. 김 참사와 비공식적 관계를 가져온 것으로 알려진 최교수도 이 때 범민련 관련 문서·디스켓을 들고 사라져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교포 운동가들 사이에서 최교수가 안기부와 관계 맺고 유럽범민련을 와해하기 위해 독일에 온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하지만 이미 상처는 회복불능 상태에 이르렀다.

▲ 2003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됐던 송두율 교수가 수사관들에 이끌려 서울구치소에 수감되기 위해 승용차로 향하고 있다.
ⓒ2006 오마이뉴스 권우성
[2000년대] 아직도 넘어서지 못한 분열의 골

지금도 독일동포사회 분열의 골은 아직도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운동권 인사들은 아직도 고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재외공관 또한 교민사회의 화합을 위한 노력에는 소극적이다.

예를 들자면, 김대중씨가 1998년 대통령 자격으로 취임 후 처음 독일을 방문했을 때, 환영만참에 초청받은 사람들은 군사독재 시절 "간첩 김대중을 사형시키라"며 시위했던 사람들이었다. 2000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강연이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열렸을 때는 김대중 구명운동을 벌였던 인사들이 참가했지만, 이들은 '정보원들의 감시대상'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 탄핵에 박수쳤던 인사들은 방독 행사에 초대되었지만 탄핵 규탄과 민주수호를 위해 힘을 썼던 인사들은 대다수 초대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소수 초대되었던 운동권 인사들은 그 자리에서도 감시 대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민단체 대표자모임이나 각종 공관주변의 행사에 운동권 인사들은 당연히 배제된다.

재외공관은 참여정부의 정책에 부응하는 재외동포정책으로 개선해야 한다. 파견 노동자로서 유럽사회에 정착한 동포들을 한국의 경제발전에 큰 몫을 담당했던 역군으로 자리매김하고, 운동권 인사들에 대해서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공헌했던 노력을 인정하며 고립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참여정부는 역대 정권하에서 망명객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인사들에 대한 조건 없는 자유왕래를 보장하여야 한다. 어려운 조건에서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민주인사들의 공로를 정부 차원에서 인정하며 그동안에 있었던 인권탄압에 대한 사과가 있을 때만이 비로소 우리가 추구했던 민주사회가 왔다고 볼 수 있다.

/오마이뉴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