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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하루키 회고록-내가 만난 한반도/⑩ 김대중씨와 일한연대연락회의
한국 대통령후보였던 김대중씨가 도쿄 구단의 호텔 그랜드팔레스에서 백주에 납치당했다는 뉴스를 처음 들은 것은 그날, 1973년 8월8일 저녁 하마마쓰쵸의 일본적십자 본사 앞에서였다. 민방 50사가 참여한 ‘베트남 어린이에게 사랑의 손을’의 1억엔 모금 캠페인이 끝나고 민방련과 일본적십자가 남북평등이라며 모금액 절반을 사이공 적십자에 넘기려 하고 있었다. 우리는 파리평화협정이 하노이, 사이공 양쪽 정부와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3자 간에 조인된 점을 존중해 임시정부를 무시하지 말고 모금을 3등분해서 나눠주도록 요구하려고 모여 있었다. 내가 거기에 도착하자마자 베헤이렌(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 사무국장 요시카와 유이치씨가 사건이 터졌다고 일러 주었다. 구단 호텔에서 한국 정치가 김대중씨가 납치됐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를 비롯해 많은 일본인은 김대중씨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김씨가 납치당한 그 날 발매된 잡지 <세카이(세계)> 9월호에 실린 김씨와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씨의 대담 ‘한국민주화의 길’을 읽고 비로소 수난당한 한국인 정치가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김대중씨는 민주주의를 향한 정열을 얘기하고 한일관계에 언급하면서 일본사회당이 북한하고만 관계를 맺고 한국에 무관심한 점을 비판했다. 그 얘기를 읽었을 때는 이미 그 사람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 돼 있었다. 그만큼 인상이 강렬했다.
그 잡지에는 또 재일 한국인 정경모라는 미지의 필자 논문이 실려 있었다. (한일협정이 체결된) 1965년부터 8년이나 지난 세월인데도 우리는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닫고 나는 경악했다. <세카이>에는 봄부터 ‘TK생’이라는 익명의 필자가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2회째 싣고 있었다. 그것은 그 다음달부터 매호 연재되게 됐고 금세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김대중씨는 5일 뒤 범인 일당이 서울 자택 근처 노상에 그를 데려다 놓고 가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갔다. 텔레비전에서 김대중씨는 고통스런 표정으로 울고 있었다. 살해당하지 않은 건 다행이었으나 김대중씨 적대세력의 무서운 만행에 우리는 다시한번 전율했다. 그와 함께 일본 정부 경찰이 왜 도중에 범인의 자동차를 제지할 수 없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깊어갔다.
하지만 우리가 대처하는데는 시간이 걸렸다. 8월23일이 돼서야 지식인 78명이 서명한 김대중씨 일본방문을 요구하는 성명이 발표됐다. 나도 참여했으나 그때는 멀리서 바라봤을 뿐이다. 그 성명을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사람이 저널리스트 아오치 신씨였다. 서명자 다수는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을 하던 지식인들이었다.
김대중씨는 자신이 의장 자격으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 본부를 결성하기 전야에 납치당했다. 의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조직을 결성하고 운동을 시작했다. 약칭 한민통이라 불린 이 조직 중심에는 재일 한국인 활동가 배동호, 김재엽, 정재준, 조활준, 곽동희씨, 김대중씨 동향 친구 김종충씨, 김대중씨 보디가드였던 김군부씨 등이 있었다. 이 사람들이 일본인들에게 손을 쓴 것이 큰 역할을 했다.
리버럴한 아시아주의자인 자민당 국회의원 우쓰노미야 도쿠마는 김대중 우인으로서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사회당 의원 덴 히데오도 마찬가지였다. 프로테스탄트계의 일본기독교단 총감사 나카지마 마사아키씨, NCC의 쇼지 쓰토무씨 등은 이미 그 해 1월 김대중씨를 만났다. 앞서 말한 성명의 서명자에 그런 사람들이 가세해 김대중씨를 돕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9월5일이 되자 경시청이 김동운 일등 서기관 지문을 현장에서 채취했다고 발표했다. 납치는 KCIA(한국중앙정보부)의 범행이라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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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9일부터는 우쓰노미야씨가 위원장을 맡고 있는 중의원 결산위원회가 한·일 유착에 메스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센세이션을 불렀다. 10월26일 돕는 모임은 베헤이렌의 작가 고나카 요타로씨를 한국에 보내 김대중씨의 재방일을 요구하는 성명을 중앙청에 전달했다.
하지만 11월2일 김종필 총리가 일본에 와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와 회담하고 김대중사건에 장막을 쳤다. 김 총리는 사죄의 뜻을 표명하고 김대중씨의 해외활동에 대해 그 이후로 문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김대중씨의 출국은 허용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일본정부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른바 정치결착이다. 돕는 모임은 이날 아오치씨 등에게 항의문을 총리관저에 전달하도록 했다. 나도 동행했다. 11월18일에는 정치결착에 항의하고 김대중씨의 재방일을 실현하는 국민집회가 열렸다. 요미우리홀에 약 500명이 모였다. 한민통의 도움으로 성사됐다. 12월의 한일각료회의 개최에 항의하는 시위에 가담한 사람은 7명이었다. 아오치씨와 나는 그 데모에 참가해 함께 걸었다.
주목할 일은, 그 해 연말에 이화여대 학생들 데모에 호응해 일본 기독자 여성활동가들이 기생관광에 반대하는 여성들모임을 조직하고 한국에 가는 관광객에게 처음으로 삐라를 뿌린 것이다. 그 삐라는 옛 일본군 종군위안부 문제를 지적했다.
차제에 일본인이 지속적으로 운동을 해나갈 자립적인 운동체가 필요하다는 의식이 높아졌다. 1974년 1월에는 한국문제 기독자 긴급회의가 결성됐다. 그 뒤 기관지 <한국통신>을 내고 한국의 운동문서들을 소개했다. 이윽고 3월28일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한국민주화운동에 연대하는 운동체를 만들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김대중씨를 돕는 모임 관계자 외에 의원들과 그 비서, 기독교도, 변호사, 학생 등이 참가했다. 나도 거기 있었다. 긴 논의 끝에 ‘일본의 대한정책을 바로잡고 한국민주화투쟁에 연대하는 일본연락회의’라는 명칭을 붙이기로 했다. 그것은 우리가 불러일으키려 했던 운동의 사상을 표현한 것이었다. 나중에 <일·한연대 뉴스> 1호에 아오치씨가 썼듯이, 한국의 투쟁에 연대하는 우리의 운동은 일본의 한국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 둘은 밀접히 연관돼 불가분의 관계라는 게 참여자들의 생각이었다. 4월18일 결성집회를 열자는 결론까지 내렸다.
바로 그때인 4월3일 서울 학생들이 궐기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이름의 선언이 발표되고 투쟁을 선동하는 시 ‘민중의 소리’도 배포됐다. 박정희 정권은 최고 사형까지 언도할 수 있는 대통령긴급조치 4호를 발동해 학생들을 겁주려 했다. 그 뉴스가 전한 충격속에 4월18일 예정돼 있던 결성집회가 열렸다. 집회는 내가 쓴 결성선언을 채택했다. 그 선언은 “불굴의 한국민중은 이런 탄압에 맞서 들고일어섰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궐기는 봄을 향한 민중의 반박(정권)민주화투쟁의 횃불이다.”면서 일본의 원조가 “한국민중의 피와 땀을 빨아 비대해진 뒤 일본을 관류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기생관광에 나서 한국여성을 돈의 위력으로 능욕하는 일본인은 일·한 양국정부의 공범자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최후로 “한국민중에 가해지는 중압을 일본을 바꿈으로써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다시태어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다”라며 새로운 운동체의 결성을 선언했다.
그러나 집회 당시엔 아직 누가 대표를 맡을지 정하지 못했다. 집회 뒤 나는 아오치씨에게 대표직을 맡도록 촉구했다. 아오치씨는 내가 사무국장을 맡아준다면 대표를 맡겠다고 했다. 나는 그걸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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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타계한 1984년까지 10년간 아오치씨는 운동에서 물러선 적이 없다. 나의 한·일연대운동은 아오치씨와 함께 걸었던 공동사업으로 시작됐다.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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