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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동 새벽인력시장 “일당은 나중… 불러만 주면 행운”

창신동 새벽인력시장 “일당은 나중… 불러만 주면 행운”



일 새벽 서울 창신동 인력시장에 일용직 노동자들이 일감을 기다리고 있다. 5~6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 200~300명이 북적였으나 급감하며 지금은 30~40명에 불과하다. /김대진기자
“‘메뚜기’들이 난리 피우네.” 이모씨(59)는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오늘 하루 먹고 살 일감을 기다리는 참이다. 지난 4일 새벽 4시40분. 아직 어둠이 짙다. 이씨는 서울 창신동 인력시장 대포집에 앉아 술로 하루를 시작했다. 안주는 신김치 한 접시가 전부다.



‘메뚜기’는 일용직 노동자를 일컫는다. 보름이나 한 달짜리 장기간 일을 못 구한 채 하루하루 일거리를 찾아 사는 이들이다. 하지만 요즘은 메뚜기짓도 없어서 못할 정도다. 철근, 콘크리트, 아시바(비계) 등 기술이 있는 이들도 사정은 똑같다. 일당이 얼마인지는 뒷일이다.

이씨는 사흘을 놀다 나왔다. 다행히 오늘은 일거리를 약속받았다. 어디로 가게 될지는 아직 모른다. 불안하다. 어떤 때는 갑작스레 제주도로 일하러 간 적도 있다.

“여기 드나든 지 30년이 넘었는데 불안해. 어차피 내년까지밖에 일을 못하거든.”

인력시장에서 60세 이상은 ‘팔리지’ 않는다. 이씨는 일할 수 있을 때까지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하루짜리 일이라도 노는 것보다야 낫지 않느냐”는 게 이씨의 말이다. ‘오야지(소개인)’가 부른다. 이씨는 곧 “잠실로 가게 됐다”며 자리를 떴다. 얼굴에 웃음이 달려 있다. 새벽 5시20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시간이다. 오야지들이 나와 일감을 분배한다.

이들에게 이곳은 직장이나 다름없다. 매일 출근하고 얼굴 도장을 찍는다. 일감이 없어도 얼굴을 내비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감을 얻지 못한다.

5~6년 전까지만 해도 창신시장은 북적였다. 하루에 200~300명은 모였다. 일감도 임금별, 난이도별로 골라 할 정도로 넘쳐났다. 큰 공사가 많은 때는 돈이 적거나 힘든 일은 다들 안 하려 할 정도였다. 지금은 다 모여봐야 30~40명 정도다. 일감이 급감해서다. 건설경기가 죽은 탓이 크다.

이씨와 함께 소주를 마시던 설재호씨(57)는 “물가 올라가는 걸 보면 우리 일당은 더 낮아지는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설씨는 젊었을 때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카타르 등지를 돌며 일했다. 해외 건설경기가 좋던 1970~80년대 얘기다. 당시만 해도 철근 기술 하나만 있으면 먹고 살만 했다.

건설시장의 불경기가 지속되면서 일감이 줄었다. 그에 반비례해 설씨의 근심은 늘어만 갔다. 어렵게 일해 번 돈은 교육비로 다 썼다. 돈이 모이지 않았다. 대학 2년생 아들의 등록금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아들 졸업 때까지 2년은 더 벌어야 한다.

창신시장에 모이는 사람들은 다 나름대로 인정받는 ‘기술자’다. 일당도 일반 일용직 노동자의 2배다. 철근은 12만~13만원, 콘크리트는 11만~12만원, 아시바는 13만~14만원까지도 받는다.

그래도 허무함은 일용직과 똑같다. 일감 걱정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도 퇴직금이 없는 직종이다. 주름만 더 깊게 파인다. 하루 안 나와도 신경쓰는 이가 하나 없다.

노성숙씨(54)는 “내가 게으르게 산 것도 아닌데…”라며 푸념했다. 30년 가까이 부지런히 일했지만 노씨는 여전히 전세살이다. 요즘은 전셋값이 올라 더 고단해졌다. 나이를 문제삼는 곳도 있다. 대기업 건설현장의 경우 60세 인부에게 일감을 주는 곳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 55세가 한도다. 때문에 벌써부터 불안해진다.

사람들은 일감을 기다리며 정치를 이야기했다. 잘근잘근 씹을 안주로는 대통령이 최고다.

“노무현은 대체 뭘 하는 게야.” “예전엔 중산층이 될 거란 희망에 부풀었는데 지금은 아예 밑바닥으로 추락할까 겁나.”

사람들은 아침 6시가 돼서야 뿔뿔이 흩어졌다. 일감을 구한 이들은 일터로 갔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대포집에서 남은 소주를 마저 마셨다. 더러는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오야지의 손짓이 이들의 하루 운명을 갈랐다.

〈이고은·김기범기자 freetr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