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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친구들

[스크랩] 구스타브 크림트 여인 에밀리 플뢰게

구스타프 크림트와  그의 연인들

여인에 대한 테마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

1902년 181 x 84cm 빈역사박물관

 

에밀리 플뢰게는 클림트가 이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간절히 찾았던 영원한 연인이다.

글쓰기를 지독히도 싫어했던 클림트가 에밀리에게는 4백여통의 엽서를 보냈다고 하니

에밀리를 향한 클림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은 클림트가 그린 에밀리의 초상화로 유명하지만,

정작 에밀리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는 후문...

클림트는 이 그림을 팔아버린 후에 두 번 다시 에밀리의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주변의 카페나 주점 등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그림이 있다면 그 중 하나가 '구스타프 크림트(Gustav Klimt)'의 작품이 아닐까.
왠지 몽환적이고 뇌쇄적이며 애로틱한 분위기의 작품. 상당히 장식적이며 화려한 가운데 자리잡은 인물들은 한결같이 방금 정사를 끝낸 듯 몽롱한 시선을 내리깔며 관객을 대하고 있다.

크림트의 여성에 대한 애정과 집착이 없었다면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까.
많은 예술작가들이 그들의 마음 한쪽 빈 구석을 이성(異姓)에서 찾으려 했었고 크림트 또한 다르지 않았으리라. 오죽했으면 당대의 카사노바라 불리웠겠는가. 그의 작품에 대한 평은 인터넷 여기저기 잘 실려 있으니 살짝 접어두고 오늘은 그의 여성 편력과 에로티시즘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희망1

1903년   189x67cm   캐나다국립미술관

 

클림트는 평생 한번도 결혼하지 않았지만 사생아를 무수히 남겼다.

그가 자신의 자식으로 유일하게 인정한 아이는

그늘의 여인, 미치 침머가 낳은 두 아이였다.

임신한 여성의 누드를 그린 <희망1>은 미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둘째 아들의 죽음들 겪고 난 후에 완성한 작품이다.

탄생의 희망과 죽음의 절망, 사랑과 관능이 어우러진 임부의 초상에서도

여지없이 도발적인 에로티시즘의 향기가 짙게 베어 나오지만,

기본적으로 완벽한 여성성, 생명과 육체에 대한 찬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생전 독신으로 삶을 살았던 크림트는 수많은 여인을 품에 품었다.
속설에 의하면 모델로 선 여자는 모두 그와 잠자리를 했다고도 하는데, 이렇듯 여성편력이 심했던 크림트. 당연한 결과겠지만 그에게는 14명의 사생아가 남겨졌다.
1918년 2월 6일 그가 세상을 떠나자 사생아의 어머니들이 상속을 요구하기에 이르고 복잡한 유산 문제에 직면한 그의 여인 중 '에밀레 플뤠게'가 배분하게 되는데 크림트의 여인 중 '에밀리 플뤠게'에게서만 유독 자식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당시 유럽은 아르누보(전통으로부터의 이탈, 새 양식의 창조를 지향하여 자연주의·자발성·단순 및 기술적 완전을 이상으로 했다.)가 성행하던 시기이며 변혁의 태동 한 가운데 서 있었지만 외설적고 뇌쇄적인 크림트의 작품세계는 많은 이들을 당혹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였으리라.
1900~1903년 비엔나 대학 강당의 천정화 '철학', '의학', '법학'이 분리파 전시회에 발표되고부터 수많은 논란과 비평이 있었다.
세번째 작품인 '법학'에서 그의 에로티시즘은 사회적 논쟁의 최고조에 달하였다. 정부와 비평가들은 물론이고 일반 여론까지 들고 일어나 '춘화'다. 혹은 '변태 성욕자'라고 까지 비난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일로 그의 작품은 점차 외면되기 시작하여 생애의 하향을 걸어야만 하였다.

우여곡절 속에 살아온 크림트.
말년엔 풍경화와 초상화를 많이 그렸었는데 특히 초상화 작업은 매우 열심이었다. 이유는 오스트리아의 많은 여인들이 그의 손으로 그려진 초상화를 원했기 때문인데 크림트의 초상화가 가지는 에로틱한 분위기와 장식적이고 화려한 색채는 비엔나 상류층 부녀자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었으며 일종의 유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통해 크림트는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적당했기 때문이었다고도 하겠다.


크림트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럽의 역사에서 격동의 시기였다.
영국은 이집트를 삼키고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며 이탈리아는 터키를 급습하고, 프랑스는 알제리의 지배를 강화하는 등 새로운 세력인 부르조아지들의 식민지 쟁탈과 20세기의 문턱에서 산고를 치를 즈음이었다.
이러한 격변의 시대에 시민들 또한 정상적이지 못하였다. 청교도적 도덕은 사라지고 인륜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졌고, 퇴폐와 문란이 가득한 시절이었다. 이러한 시대에 그의 그림을 이렇다 저렇다 떠들던 사람들도 뒤돌아서 딴짓하던 시절이었다.
의연히 작품앞에서 크림트의 에로티시즘을 꼬집던 사람들. 바르지 못한 사회에서 바르지 못한 그림을 나무라는 사람들. 거울 속의 자신을 나무라는 턱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바르게 알아야 할 것은 크림트의 에로티시즘은 인간의 성(性)을 위한 에로틱이 아니라는 것이다. 작품의 표면에 나타나는 몽환적이고 섹스어필한 분위기와는 달리 작품의 이면(裏面)에서 보여지는 그것은 인류의 오랜 역사와 같이 하는 '페미니즘(feminism)'이 크림트에 의해 노골화 되고 상징적으로 나타난 시작이었을 뿐이라 하겠다.

"이거 너무 야해~"라는 생각에 앞서 그림 속을 찬찬히 둘러보고, 그 속에 숨어있는 이성의 관계, 삶과 생애, 고락(苦樂)에 대해 천천히 다시 돌이켜 봄도 좋은 감상이 아닐런지.

 
구스타프 크림트와  작품보기
 
구스타프 크림트는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제국의 수도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른스트는 보헤미아출신의 동판조각사이자 금세공사였다. 구스타프는 7형제중 장남이었으며, 일가는 모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크림트는 청년기에 이미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극장이나 미술관의 장식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관습적인 주제를 아카데미적 양식으로 그리는 벽화가로 출발했으나 1900-1903년에 그가 그린 비엔나 대학의 벽화가 공개되자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 결국 이 벽화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 벽화에서 그는 인간의 행로에 수반되는 고통과 두려움, 인간의 정신적 방황이 추상적 패턴을 복합시켜 왜곡된 양식으로 표현되었다. 크림트 예술의 큰 특징은 세밀하고 아름다운 장식성과 여성의 이미지 표출이라 하겠다.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민감함은 여성의 초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매력과 신비적인 특질을 강조하는 크림트의 독창성이 돋보인다. 그의 작품들은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베토벤. 후리즈]에서 보여준것처럼 선의 리듬을 나타내는 솜씨와 멋진 장식적 표현은 [키스]처럼 놀라울 정도로 화려한 문양을 낳게 한 재능을 보였다. 크림트는 그가 처한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이기보다는 언제나 개인의 자유와 예술의 자유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항상 여유있고 풍성한 푸른 '수도사'스타일의 스모크를 입고 방랑하는 쪽이 성격에 맞을 정도로 보헤미안다운 기질을 갖고 있었다.

진보적인 예술의식을 갖고있던 크림트는 유럽의 인상파나 상징파의 작품을 접하게 되면서 시야가 넓어짐에 따라 그가 속해 잇던 '빈미술가협회'의 보수적인 체제에 불만을 갖게되어 1897년 친구들과 협회를 탈퇴하여 독자적인 조직을 결성했다. 이 그룹 비엔나 제세션(Vienna Secession 분리파)은 예술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가졌고 유럽 여러나라이 움직임을 인식함에 따라 빈의 폐쇄적인 향토주의를 비판했다. 말수가 별로 없던 크림트였지만 분리파의 회장에 선임되어 열정적으로 활동하며 비엔나에서 모더니즘 미술운동의 지도적 위치로 진보적인 미술가들을 이끌게 된다. 이 분리파 전시에서는 아르누보 양식이 지배적이었고 분리파 양식은 바로 아르누보를 가리키는 말이 되어 버렸고 이러한 운동은 후에 비엔나에서 기능적 디자인의 효시가 되었다. 1905년 크림트의 탈퇴로 처음과 같은 생명력은 상실되었으나 크림트의 특이한 색채, 공간구성은 그후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1918)와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와 같은 본격적인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전수되었다.

그의 그림을 처음 알게 된 것은 8년 전 어떤 작가 분의 강의에서였다. 그 작가 분이 좋아하는 작가가 에콘쉴레와 쿠스타프 클림트라는 말을 듣고 다음날 도서관에서 화집을 찾아보았다. 클림트의 그림은 첫 눈에 나를 사로잡았다. 화려한 색체와 장식적인 요소들 그리고 화면에 흐르는 묘한 여체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숨이 막혀오는 걸 느꼈다.
클림트는 1862년 7월 14일 빈 교외 바움가르텐에서 금 세공사인 아버지 에른스트 클림트와 안나 사이의 7남매 중 둘째(장남)로 태어났다. 아마도 그의 그림에서 보여지는 금박이나 장식적인 요소들이 그의 아버지의 직업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되어진다.

그의 작품은 굉장히 여성스럽다. 알록달록한 색체에서 또 아라베스크같은 복잡한 장식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 화려함을……. 쿠스타프 클림트 주변에 아주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그의 작업장에는 누드 모델들, 그리고 외부에는 고위층 사교 모임의 여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삶에서 주목할 두 여인이 있다. 그 여인은 정신적 구원의 여인 에밀리 플뢰게와 육체적 안식처인 마치라고이야기할 수 있다.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사교계 여성들과는 '플라토닉 러브'만을 나누었고, 모델들과는 육체적인 사랑만을 즐겼다고 전해져온다. 정신분석자 에리히 노어먼에 의하면 이런 경우의 남자들은 여성에 대한 공포가 심해서 여성을 분리헤서 한족 부류의 여성들하고만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에밀리라는 여인을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왜 안정된 결혼 생활을 하지 않고 수많은 사생아를 뿌리며 독신으로 살았을까? 에밀리가 그를 거부한 것일까? 에밀리 역시 클림트만큼 미스터리한 존재인 것이다.

1918년 1월 11일 치명적인 심장발작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된 클림트는 다급히 에밀리를 찾았다고 한다. 그의 자식을 가진 누드 모델 출신 마치를 찾은 것이 아니었다. 마치 입장에서는 비극의 여인이 아닐 수 없다. 사랑하는 클림트에게 버림받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에밀리는 1952년 클림트가 사망하기까지 그 어떤 사람과도 사귀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클림트는 에밀리에게 400통이 넘는 엽서와 편지를 보냈다. 묘하게도 그것들은 사라의 밀어로 도배된 내용이 아니었다. 그냥 평범하고 일상적인 내용들이었다고 한다.

 

 

유디트1

1901년  84x42cm   빈오스트리아미술관

 

유디트는 성서 속 인물이다.

<구약성서> 외경인 '유딧서'에서 정숙한 여인 유디트는 자신의 미모로

이스라엘을 유린하는 호로페르네스를 거짓 유혹하여 그의 머리를

잘라 버린 여걸로 존경 받고 있다.

그런데 클림트는 그런 유디트를 음탕하거 선정적인 요부, 팜므 파탈로 그렸다.

클림트가 창조한 유디트는 성적 황홀경에 이른 듯

눈을 게슴츠레 뜨고 저절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쾌락의 신음 소리을 흘려 보내는 듯 하다.

 

 

 

 

 

 

 

유디트 Ⅱ

1909년  178x46cm   베네치아국립현대미술관

 

클림트의 '황금의 시기'는 보통 <유디트1>을 그리기 시작하여

<유디트>를 완성할 때까지를 일컫는다.

황금빛을 배제하고 다채로운 색상으로 그려진 유디트의 성적 매력이

더욱 위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고급 매춘부로 묘사된 유디트의 몽롱한 눈빛과 독기서린 표정,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낚아챈 갈고리 같은 손가락이 불안한 오르가즘을 암시하여, 빈 시민들은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한 살로메로 오인했다는...

 

 그의 묘한 사랑은 「유디트 Ⅰ-Ⅱ」에 잘 표현되어 있는 것 같다. 유디트는 앗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해 죽인 유명한 이스라엘의 애국 여걸이다. 하지만 클림트는 몽롱한 성적 욕망에 취한 요부로 표현하고 있다. 클림트의 여성관이 잘 표현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여성에 대한 공포를 품고 있는 것 같다. 그는 그림 속의 유디트를 무척 사랑하지만 결코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 그녀를 바라보며 그냥 슬퍼하고만 있는 듯하다.

사랑에 대한 테마

The Kiss

1905~1908   180 x 180cm 빈오스트리아미술관

 

'현대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클림트의 <키스>는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면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그림이다.

클림트의 트레이드 마크인 황금빛이 더욱 매혹적인 이 작품은

꽃들이 가득한 벼랑에서 클림트의 영원한 쏘울메이트,

에밀리 플뢰게를 안고 입맞춤하는 클림트 자신을 상상하며 그린 그림이다.

사랑의 완성 「키스」. 클림트는 그림「키스」속에 있는 여인은 에밀리라고 이야기한다. 「키스」속의 여인은 온화한 미소를 가진 여인이다. 「유디트」에서 보여진 서적인 여인이 아니다. 그는 드디어 여성에 대한 공포와 남성의 위기 의식, 강한 여성의 종속감을에서 벗어나 그녀에게로 다가가 키스를 했다. 그가 아닌 새로운 자아와의 교류를 시작했으며 플라토닉 러브의 허구에서 벗어나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사랑의 완성 키스를 했다. 



 

   유키구라모토- 로망스

 

 

 

 
출처 : 사랑을 위하여
글쓴이 : 문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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