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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친구들

[스크랩] 관능미와 장식성으로 그려낸 시대정신 - Gustav Klimt

Gustav Klimt (1862~1918)

  - 관능미와 장식성으로 그려낸 시대정신 -


 

클림트는 과연 누구인가?

 

클림트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알려진 내용들은 그리 많지 않으며 그 진위 여부조차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런류의 신비감이 우리를 클림트에게 이토록 집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클림트는 1862년 7월 14일 비엔나 교외의 바움가르텐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곱명의 아이중 둘째로 태어났다. 당시 금세공업자였던 아버지가 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해야만했던 클림트는 14살이 되던 해에 다니던 학교마저 그만 두게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그림에 대한 그의 천부적인 재능이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특별하고도 위험스런 장난에서 시작되었다.(정치현실을 비난하는 그림을 담벼락에 그려서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 그 사건을 계기로 그의 예술적인 재능이 조금씩 인정받게 되었고 비엔나의 국립응용미술학교인 Kunstgewerbeschule에 입학함으로써 직업적인 화가로서의 인생을 살게 된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그림의 소재로써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관심갖을 만한 대상이 못된다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 사회로부터 고립되기를 원했다. 그가 관심갖은 대상은 오직 여성뿐이었다. 수많은 여성들의 초상화를 남겼지만 정작 자신의 초상화는 하나도 남기지 않을만큼 철저하게 자신의 삶과 작품을 분리해서 생각했으며 보통 화가들과는 달리 작업공간과 생활공간을 명확히 구분했다는 점에서도 철저히 고립되고자 했던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화가로서 표현의 자유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조롱과 야유가 섞인 비판도 서슴지 않는 강인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당시 미술계의 주류를 이끌었던 미술가협회의 오랜 전통에 도전하여 외국의 새로운 미술경향들을 소개하고 젊은작가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 분리파(Secession)를 설립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편 것이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일생에서 특이할만한 점은 많은 여성들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화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그의 몰락은 여자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여성학적인 관점에서 여성의 지위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 그의 작품이 탄생할 수 있도록 예술적인 영감을 불어넣어 준 것은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머니와 누이의 만성적인 정신질환과 가족들의 잇따른 죽음은 그에게 있어서 모성과 사랑 그리고 가족애에 대한 절실한 갈망을 낳게했다. 특히 가족의 죽음은 그의 작품세계에 있어서 색채와 주제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영원히 반복될 삶에 대해서 좀더 따뜻한 시선을 갖게 된다.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그의 성숙하지 못한 애정관도 불우했던 어린시절과 어느정도 연관성이 있다. 2명이나 되는 그의 아이를 낳았고 한때는 적극적인 구애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결코 결혼할 수 없었던 여인 미치 침머만과 사회적으로 폭넓은 경제활동을 하면서 그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사업적인 동반자로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 그의 여인이었던 에밀 플로게 그녀 역시 결혼하지 않은 대상이었다. 말년에 그는 손가락에 치명적인 화상을 입고 작품활동보다는 의상디자이너로서 활동하가다 자신의 욕실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완성되지 않은 많은 작품과 그가 CIA에 의해서 납치되었다고 주장하는 그를 신봉하는 많은 사람들을 남겨둔채로...

 

 

구스타프 크림트는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제국의 수도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른스트는 보헤미아출신의 동판조각사이자 금세공사였다. 구스타프는 7형제중 장남이었으며, 일가는 모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어릴때는 그의형인 베르거에게 사사하였다. 크림트는 청년기에 이미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동생 에른스트와 함께 극장이나 미술관의 장식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관습적인 주제를 아카데미적 양식으로 그리는 벽화가로 출발했으나 1900-1903년에 그가 그린 비엔나 대학의 벽화가 공개되자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 결국 이 벽화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 벽화에서 그는 인간의 행로에 수반되는 고통과 두려움, 인간의 정신적 방황이 추상적 패턴을 복합시켜 왜곡된 양식으로 표현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베토벤. 후리즈]에서 보여준 것처럼 선의 리듬을 나타내는 솜씨와 멋진 장식적 표현은 [키스]처럼 놀라울 정도로 화려한 문양을 낳게 한 재능을 보였다. 크림트는 그가 처한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이기보다는 언제나 개인의 자유와 예술의 자유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항상 여유있고 풍성한 푸른 '수도사'스타일의 스모크를 입고 방랑하는 쪽이 성격에 맞을 정도로 보헤미안다운 기질을 갖고 있었다

크림트 예술의 큰 특징은 세밀하고 아름다운 장식성과 여성의 이미지 표출이라 하겠다.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민감함은 여성의 초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매력과 신비적인 특질을 강조하는 크림트의 독창성이 돋보인다. 그의 작품들은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베토벤. 후리즈]에서 보여준 것처럼 선의 리듬을 나타내는 솜씨와 멋진 장식적 표현은 [키스]처럼 놀라울 정도로 화려한 문양을 낳게 한 재능을 보였다. 크림트는 그가 처한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이기보다는 언제나 개인의 자유와 예술의 자유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항상 여유있고 풍성한 푸른 '수도사'스타일의 스모크를 입고 방랑하는 쪽이 성격에 맞을 정도로 보헤미안다운 기질을 갖고 있었다. 크림트 작품의 특징인 수직으로 중심을 가르는 인물 - 골격이 튀어나오는 마른 몸매와 비틀린 자세 - 과 장식적임 배경을 기본으로 하고있다.

하지만 다른 작품의 탐미적인 분위기와는 다른 세기말 적인 암울함과 공포가 느껴지는 이 여성의 회색의 피부와 그리다만 것 같은 얼굴, 처진 가슴, 뒤틀린 자세는 아름답지 않고 기괴하기까지 하다. 뱀비늘 같은 배경과 무수히 떨어지는 유성 같은 빗살은 인물에 비해 오히려 따뜻한 느낌을 준다. 객관적으로 절대 아름답지 않지만 몸을 감싸는 긴 머리카락과 뱀비늘 같은 배경은 염세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진보적인 예술의식을 갖고있던 크림트는 유럽의 인상파나 상징파의 작품을 접하게 되면서 시야가 넓어짐에 따라 그가 속해 있던 '빈 미술가협회'의 보수적인 체제에 불만을 갖게되어 1897년 친구들과 협회를 탈퇴하여 독자적인 조직을 결성했다. 이 그룹 비엔나 제세션(Vienna Secession 분리파)은 예술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가졌고 유럽 여러나라의 움직임을 인식함에 따라 빈의 폐쇄적인 향토주의를 비판했다. 말수가 별로 없던 크림트였지만 분리파의 회장에 선임되어 열정적으로 활동하며 비엔나에서 모더니즘 미술운동의 지도적 위치로 진보적인 미술가들을 이끌게 된다. 이 분리파 전시에서는 아르누보 양식이 지배적이었고 분리파 양식은 바로 아르누보를 가리키는 말이 되어 버렸고 이러한 운동은 후에 비엔나에서 기능적 디자인의 효시가 되었다.

1905년 크림트의 탈퇴로 처음과 같은 생명력은 상실되었으나 크림트의 특이한 색채, 공간구성은 그후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1918)와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와 같은 본격적인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전수되었다. 초상도 그렸지만 대상인물의 특성을 그림과아울러 대상에게는 없는 고귀한 감정을 담는 독특한 필칠르 가하기도 했다. 1918년 사망

 

 

Gustav Klimt (1862 ∼ 1918)


오스트리아의 화가, 비엔나 분리파의 창시자.

▷ 생애 비엔나 분리파를 창시하여 종래의 미술 개념의 지평을 넓히는 진보적인 미술 운동을 지배했으며,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선배이자 스승으로 그들과 더불어 오스트리아 현대 화단을 대표하는 가장 탁월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평가되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 ~ 1918). 그는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바움가르텐에서, 보헤미아에서 이주해 온 금세공사 에른스트 클림트의 7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느 해인가는 크리스마스 때인데도 집에 빵 한 조각 없었다."는 여동생의 술회가 말해 주듯 극심한 가난 때문에, 장녀를 광적인 종교에 잃고 막내딸마저 병으로 잃은 뒤 남은 다섯 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잘 키워 보겠다는 양친의 집념에도 불구하고, 그는 짐나지움에 입학하지 못하고 공장 노동자나 장인으로 예정된 미래를 짊어진 채 고등 공민 학교인 "뷔르거슐레"에 입학한다.


1876년 비엔나 장식 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그의 예정된 운명의 손길을 뿌리치고 화가로서의 훗날을 예비하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교사로 재직 중이던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 한스 마카르트 같은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미술 수업을 시작한 그는, 그의 뒤를 이어 진학한 동생 에른스트, 그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학생으로 인정받고 있던 프란츠 마츠와 함께 동인을 결성하여 예술적 이상을 교류하면서, 라이헨베르크 국립 극장의 천장화 제작 같은 일들을 주분 받아 학비를 조달하고 아울러 화가로서의 경력도 쌓아 나간다.

1883년 학교를 졸업한 그는 에른스트, 마츠와 함께 쿤스들러 콤파니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이 활동에 나선다. 부쿠레슈티 국립 극장 장식, 피우메에 있는 리예카 국립 극장 장식,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의 대계단 장식 등이 이 세 젊은 예술가의 공동 작업의 소산이었다.

1890년에는 비엔나 구(舊) 국립 극장의 실내 장식 작업으로 그 해 처음 제정된 황제대상의 첫 수상자가 되기도 하는 등 그는 점차 뛰어난 장식 화가로 비엔나 문화계의 전면에 도드라졌다.

1892년 그의 둘도 없는 예술적 동지였던 동생 에른스트가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부친마저 유명을 달리하면서 그는 심각한 정신적 위기와 함께 남은 가족과 동생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도 또 내면적 위기도 그의 화가로서의 성장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 비엔나의 미술계는 현대 예술의 새로운 흐름에서 소외된 채 길고 나른한 동면에 빠져 있었다. 늙고 고루한 예술가들의 횡포와 과도한 상업적 배려에 짓눌려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화단을 바라보며 진작부터 새로운 미술의 기운을 고취시킬 수 있는 어떤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1897년 '동떨어진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자신들의 독점적 위치를 이용하여 악화를 구축하고 있던 비엔나의 보수적인 예술가 집단인 쿤스들러 하우스를 탈퇴하고 요셉 호프만, 콜로만 모저 등과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창설, 초대 회장에 선임된다.

비엔나 분리파의 정신적 수원(水源)이었던 헤르만 바는 "우리는 삭막한 일상과 너절하고 하찮은 것에의 집착, 그리고 모든 형태의 악취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련다."라고 외쳤고, "오스트리아를 아름다움으로 덮어 버리자!"고 촉구했다. "각 세기마다 고유한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란 슬로건을 내세운 그들의 야심은, 예술로부터 상업성의 비계를 걷어 내고, 외국의 탁월한 작품들을 소개하여 비엔나를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구출하며, 위대한 예술과 부수적 예술 부자들의 예술과 빈자들의 예술을 가르는 구분을 철폐하고 도시 계획, 건축, 가구, 생활 필수품 등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예술을 창조하겠다는, 말하자면 '총체 예술'을 확립하겠다는 것이었다. 지체 없이 기관지 성스러운 봄을 창간하고, 기금을 모금하여 분리파 전당을 건설한 클림트는, 이후 8년 간 일본 미술전 인상파 미술전 등 스물 세 번의 분리파 전시회를 기획, 추진하면서 오스트리아에 새로운 예술의 씨를 파종한다.

1894년 오스트리아 문교부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비엔나 대학 강당의 천장화 철학 의학 법학이 발표된 것도 바로 이 분리파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이미 서서히, 그리고 노골적이고 강렬한 에로티시즘을 누설하고 있던 클림트는, 앞의 두 작품에 대해 쏟아진 과도하고 병적으로 관능적이라는 비난은 그런 대로 받아넘겼으나, 1903년 발표된 법학에 대해 문교부와 비평가들은 물론이고 일반 여론까지 들고일어나 '춘화' 혹은 '변태성욕자의 무절제'라고 비난하자, 그를 후원하는 한 실업가의 도움을 받아 문교부로부터 받았던 사례금을 돌려주고 그 작품들을 비엔나 대학에 서 철수시킨다. 외설적이라는 비난은 비단 이 작품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902년 거장 베토벤을 기념해 만든 30여 미터에 이르는 대작 벽화 베토벤 플리체도 여론의 격렬한 분노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비록 자국 내에서는 그의 작품이 이렇듯 경원되고 혐오되었으나 바깥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그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는 철학에 금상을 안겨 주었으며, 로댕은 벽화 베토벤 플리체에 대해 "너무나 비극적이고 너무나 성스러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던짐으로써 그를 격려하고 그의 예술의 진가를 확인해 주었다. 비엔나 분리파는 클림트의 지휘 아래 속속 젊고 재능 있는 화가들을 발굴하여 전시 기회를 제공하고 모네, 샤반느, 막스 클링거, 맥도널드, 매킨토시 같은 외국의 뛰어난 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하면서 오스트리아에 모더니즘의 씨를 뿌리고 다시 그 영향을 유럽 전역으로 파급한다.

1900년대로 접어들면서 비엔나 분리파의 지나치게 장식적인 경향과 계급적 모호성에 대한 비난이 안팎으로 제기되면서 분열의 조짐을 보이자, 자신의 작품에 대한 집요하고도 잔인한 비난에 지쳐 있기도 했던 클림트는, 1905년 돌연 회장직을 사임하고 독자적인 예술 세계로 침잠한다. 난장판 같은 소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그는, 1907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접한 비잔틴 예술의 영향으로 금빛 물감과 금박이 등장하는, 그의 예술의 가장 중요한 시기, 이른바 "황금 시대"의 경작에 매달린다. 다나에 세기의 세여자와 물뱀 1, 물뱀 2, 희망 2 등이 이 시기, 그의 주요한 소출들이었다. 그리고 대표작이자 "황금 시대"의 절정인 키스가 발표된 1908년을 기점으로 그의 그림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비엔나 장식 미술학교 시절, 처음에는 부업이 그리고 나중엔 본업이 되다시피 한 여러 극장의 실내 장식 작업, 스토콜레 저택 벽화같은 분리파 시절의 건축과 연관된 작업들에서도 내내 장식성은 그의 공기였다 그것은 그의 그림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그런데 "황금 시대"를 종료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분리파 내의 반 분리파였던 아돌프 로스의 저서 장시과 죄악의 영향도 약간은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발언이다. "장식은 이제 우리 문화와 아무런 유기적 관련을 맺지 못한다. 장식은 더 이상 진보할 수 없고, 그러므로 지진아적, 비정상적 현상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그 자신의 말대로 과연 장식성에서 벗어났는지는 의심스럽다. 그의 그림의 중요한 상수인 관능성과 마찬가지로 장식성은 그의 최후의 그림들에서까지도 짙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장식성과 관능성, 아름답지만 부패하기 쉬운 이 '살아있는 송장'들을 그는 최후까지 끌고 갔던 것이다.

그의 그림은 1908년을 넘어가면서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예전에 비해 색채가 많은 의미를 전달하는 독립된 구성 요소로 등장하게 되었고, 간간이 나타나던 화면의 정사각형 형태가 거의 고정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소재 면에서 풍경과 초상이 그의 그림의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말년의 그는 일년을 둘로 나누어 살았다. 저 유명한 아프리카 풍의 긴 장옷을 걸치고 일년의 반은 비엔나의 작업실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작업에 몰두하고, 나머지 반은 그와는 사돈지간인 의상 디자이너 에밀리에 플뢰게와 함께 아터 호반에서 고요한 휴식과 명상을 즐기곤 했다. 자작나무가 있는 농가언덕 위의 정원 스콜로스 캄머 정원의 길, 아티 호수 근처의 운터아크 교회와 같은 그의 대부분의 풍경화들은 바로 아터 호수 주위의 풍광을 대상으로 한 것들이었다. 고흐와 모네, 일본 판화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은 그의 아름다운 풍경화들을 베르타 주커칸들은 '채색된 슈베르트의 선율'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초상화 또한 그가 풍경화와 더불어 말년에 즐겨한 작업이었다. 프리차리들러 부인의 초상, 아델 블로흐 부인의 초상, 마르가레트 스톤브로우 비트겐슈타인 부인의 초상, 요한나 슈타우데 부인의 초상등 그는 화려하고 현란한 장식과 색채로 비엔나의 부녀자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에게서 초상화를 그려 받는 것은 비엔나 상류층 부인들의 긍지이자 영광이었다. 자신의 삶과 그림을 둘러싼 그 모든 소음에서 벗어나, 가슴을 벌레처럼 파먹어 대는 그 집요한 금전적 번민에서도 벗어나 자연 속에 파묻혀 관조와 명상의 나날을 보내며,

191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쿠르베, 르느와르와 더불어 개인 전시실을 갖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고 오스트리아 예술가 협회 회장으로, 비엔나 예술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대되기도 한 그의 말년은 분명 평화로운 것이었다. 1918년은 시 마치 흑사병과도 같은 맹위를 떨치며 전 유럽을 강타해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이 비엔나를 기습해 분리파 예술가들을 몰살시킨 해였다. 클림트는 1월 18일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져 신체 일부가 마비된 채 투병하다 결국 스페인 독감에 걸려 2월 6일 평생의 연인 에밀리에 플뢰게가 지켜보는 가운데 56세의 나이로 영면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건축가 오토 바그너도, 비엔나 공방의 창설자인 디자이너 콜로만 모저도, 임종의 클림트를 스케치했던 28세의 청년 에곤 쉴레도 갔다. 비엔나 분리파라는 '성스러운 봄'이 장엄하게 저무는 순간이었다. 클림트의 삶과 그림을 관류했던 것은 사랑이라는 고전적인, 그리고 언제나 현재적인 테마였다. 그가 과연 자신의 화두를 풀었는지 못 풀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풍경화에 몰두한 그의 말년의 모습에서 그저 어렴풋이 헤아려 볼 뿐이다. 완전한 사랑이란 영원히 인간의 손에 쥐어지지 않으며,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건 낡고 남루한 집 같은 사랑일지도 모른다.

 

 

   약력...

  

   1862  7월14일 빈 교외 바움가르텐에서 탄생  금세공사인 아버지 에른스트   크림트와 어머니 안나 사이의 7남매중 둘째

   1867  빈으로 이사. 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

   1876  빈응용미술학교에 입학  

   1883  응용미술학교 졸업. 에른스트,마취와 함께 <예술가조합>결성

   1883  유고슬라비아 파우메 시립극장 장식작업

   1886  <예술가조합>으로 첫 프로젝트,

           빈의 새 국립극장 계단공간의천장과 루넷의 회화 장식작업 맡음

   1887  옛 국립극장 실내풍경 작업 위탁

   1888  새 국립극장 프로젝트 완성. 황금십자훈장 받음

   1891  오스트리아 미술가협회인 <퀸스틀러하우스>가입

           에밀리의 언니 헬레네와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 결혼 . 에밀리                초 상화  

   1898  <런던 국제 화가,조각가,판화 협회>회원으로 인정받음

   1899  제7회 빈 분리파 전시. 미완성작인 '학부회화'중 '철학' 출품

   1902  빈 분리파의 베토벤을 주제로 전시를 가짐.'베토벤 프리즈' 출품.

           마지막 에밀리 초상

   1903  라벤나와 피렌체 여행중에 본 초기 기독교 모자이크화의 영향을  받아

           금박을 이용한  황금 스타일 창출

   1905  아르누보 그룹으로 불리는 클림트 그룹이 분리파에서 이탈

   1907  '학부회화' 최종판 빈과 베를린에 전시.에곤 쉴레 만남

   1908  클림트 그룹이 <미술전> 조직해서 아르누보 스타일 전시

           '키스'가 오스트리아 국립 회화관에 의해 구입됨

   1909  빈에서 열린 국제 미술제 참여  

   1911  로마에서 열린 국제미술제에 8점 회화 출품. '죽음과 삶'으로 1등

   1912  드레스텐의 <미술대전>에 출품

   1913  풍경화 제작

   1914  콩고 박물관을 보고 원시미술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음

           로마에서 오스트리아 미술가동맹 전시가 열림

   1918  2월 6일 심장발작으로 사망

 

 

*클림트와 아르누보

 

 처음에는 관습적인 주제를 아카데미적 양식으로 그리는 벽화가로 출발했지만 곧 인간의 정신적 방황을 왜곡되고 추상적인 패턴양식으로 표출시키게 된다.  하지만 당시 미술가 들에게 그의 파격적인 그림은 거부감을 안겨주게 된다.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아름다운 장식성과 극도의 여성스러움, 신비감을 강조함으로써 자유과 예술의 공존을 꾀하였으며 당시의 미술가들과는 달리 진보적인 예술의식을 갖게 되었다.비엔나에서 모더니즘 미술운동의 지도적 위치로 진보적인 미술가들을 이끌게 된다. 이 분리파 전시에서는 아르누보 양식이 지배적이었고 이는 비엔나에서 기능적 디자인의 효시가 되었다. 한편 클림트의 독특한 색채와 공간구성은 그 후 에곤 쉴레(Egon Schiele)와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등 표현주의 작가들에게 전수되었다.클림트는 당시 유행하던 양식을 응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표현법을 보여주며 정교한 장식성으로 아르누보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그림은 비잔틴 모자이크에 영향을 받은 화려하고 다양한 문양과 감각적인 색채를 이용한 화풍으로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매우 독특한 작품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그의 비잔틴 모자이크 장식적 특징은 미묘한 색체속에서 관능적인 드로잉과 도발적이고 정열적인 에로티시즘 화풍을 담고 있는데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환상적이고 몽롱한 느낌을 받는 것은 이러한 영향때문이다. 또한 그는 에로티시즘을 강조함과 동시에 기괴함과 격렬함을 같이 공존시킴으로써 마치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미궁속으로 빠져들게끔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으며 감각적이고 감정을 환기시킨다.

 

*클림트의 여인들

 

클림트의 작품세계를 알기를 원한다면  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여성으로 미치 침머만, 에밀 플로게,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가 있다. 미치 침머만은 한때 클림트의 모델이었고 그와의 사이에서 두 명의 사생아를 낳았으며 그로부터 애정어린 보살핌을 가장 많이 받은 여성이다. 미치와 아이에 대한 클림트의 애정은 후에 '희망'이라는 작품을 탄생시켰다. 치명적인 심장발작으로 죽음을 눈 앞에 둔 클림트가 그토록 애타게 외쳤던 이름은 '에밀리'였다. 마치 '좁은문'의 알리사와 제롬처럼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정신적인 지주로서 항상 곁에 머물렀으며 정신적인 관계의 선을 절대로 넘지 않았다고 한다. 달콤한 사랑의 말도 오가지 않았으며 때론 사업의 동반자로서 때론 여행의 동지로서 만족했다. 마지막으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부유한 금융인의 딸로서 매우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클림트를 위해서 기꺼이 누드모델을 서줄만큼 그를 신봉했으며 꽤 오랜동안 정부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디트'와 '키스'를 탄생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여인들

 

1898-1899, Full-face Portrait of a Lady

1905, 마르가르트스톤보로 비트겐슈타인의 초상
 
 
1906, 프리차 리들러의 초상 
 
1907,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1 
 

 1912,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2
 

 1913, 처녀
 

 1916-1917, Girl Friends
 

 !917-1918, Lady with Fan
 
 
 

 소니아닙스의 초상화
 

 
 
 
 

 Serena Pulitzer Lederer
 
 
 
 
인연

 1985, 사랑
 

1905-1909, Fulfillment
 
1917-1918, 아담과 이브
 
 1907-1908, The Kiss
 

 
 
벽화

1902, Praise to joy
 

1902, The Beethoven Frieze
 

루트를 연주하는 시
 

절대적인 힘
 

행복의 추구
 
 
 
우울한 영혼의 풍경화 
1899, Still Pond
 
1901, 아테르제 호수의 섬

1905-1906, Tree of Life
 

1906-1907, Sunflower
 
1906, 해바라기가 있는 시골정원

나무아래 핀 장미꽃

Avenue in the Park
 
 
죽음과 삶

1901
 

1905, The Three Ages of Woman
 

1916, 죽음과 삶
 
모자상

희망 1
 
 
초기작품

1882, Youth

1883, Fable
 

1884, Idlly
 

1888, 부르크 극장 내부
 
1889, 조각의 우화

1890-1891, Ancient Greek

1893-1894, 로덴부르크의 임시무대에 오른 광대


Two girls with Oleander
 

조각
 
 
기타

 
 
 
 
누드
황금 물고기(1901-1902)
 
물뱀1(1904-1907)
 
물뱀2(1904-1907)
 
Danae(1907-1908)
 
 
사랑 가득한 연주곡  
 
첨부이미지 Eternal Love Affair - Ernesto Cortazar
첨부이미지How, Where, When? - Pachelbel, Johann
첨부이미지Songbird - Steve Raiman
첨부이미지Rainbow On The Moon - S.E.N.S
첨부이미지Dance With The Wind - Steve Raiman
첨부이미지Little Comfor - Daydream
첨부이미지Dreaming - Ernesto Cortazar
첨부이미지We Three Kings - Jim Brickman
첨부이미지Early Snowfall - Jim Brickman
첨부이미지Jingle Bells - Jim Brickman
첨부이미지Claudine - 막심
첨부이미지 

 


 

 

 
가져온 곳: [shoesyoo] 
출처 : 사랑을 위하여
글쓴이 : 문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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