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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 피플

[스크랩] 백야도에 둥지 튼 `목수 투쟁가` 최병수

폭력적 문명 향한 실천적 저항
백야도에 둥지 튼 '목수 투쟁가' 최병수
텍스트만보기   오문수(oms114kr) 기자   
최병수. 목수였다가 경찰서에서 조서를 받던 도중에, 담당 형사에 의해 졸지에 관제화가가 돼버린 그가 따뜻하고 아름다운 여수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그림같은 등대가 있는 백야도에 둥지를 틀었다.

▲ 다리건너 보이는 곳이 최병수씨가 살고 있는 백야도이다
ⓒ 오문수
역마살이 들어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반전반핵 모임이나 환경회의만 있으면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전국으로 또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반전과 지구온난화 문제를 외치며 걸개그림과 조각, 퍼포먼스를 하던 그였다. 하지만 병마 앞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이 맞는걸까?

최병수는 국졸출신에 미대도 나오지 않았고 겨우 전수학교 2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다. 그런 그가 한국에서보다는 AP와 로이터 등의 외국에서 더 유명해지자 뒤늦게 국내 언론사에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 그의 작품들 앞에 선 최병수씨
ⓒ 오문수
왜 우리 언론이나 미술계에서는 진작 그를 찾아내지 못했을까? 작가의 내면세계라는 정형화된 틀 속에 갇힌 제도권 미술계에서는 이단아 정도로만 취급하지나 않았을까?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속에서는 창조적 사고가 나오기 힘들다.

그의 신선한 아이디어가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창조적인 생각과 개성으로 외국인들에게 부각되어 오늘의 그가 탄생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한편 교육을 받을수록 창조성을 잃어버리고 몰개성화된다는 점에 대해 곰곰이 되새겨 본다.

그는 1960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목수인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어느날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 빚독촉에 시달리는 모습과 가정불화는 주위에 대한 반항과 저항의식을 가슴속 깊이 심어주었다.

인터뷰 도중 때로 상대방을 배려해야 한다는 통념에 젖어있는 나를 당혹케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참지 못하고, 사회에 저항하는 기질은 아마 이때부터 길러지지 않았을까?

그는 가슴속에서 끓고 있는 수많은 분노와 격정을 단순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가 던져주는 가치는 분명하고 단호하다. 그는 남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타인에게 비춰지는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

허구헌날 말썽을 부리던 그였지만 숨어있는 재주가 있었다. 바로 목수인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손재주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선생님과 주위의 친구로부터 만들기에 관한한 인정을 받았다. 전업사 기술자, 자장면 배달을 하면서도 나무를 깎는 일에는 신명이 났다.

▲ 97년부터 그의 아이디어로 시작한 말풍선
ⓒ 오문수
한번 손을 대면 시간가는 줄 모르게 작업을 하여 다음날 작업장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주인한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아마 잠재된 분노와 욕구를 그림으로 조각으로 표출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으리라.

조각칼을 대는 순간은 사회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잊고 무아경에 빠질 수 있는 자신에 대해 또다른 자아를 발견했다. 조각에 매료되어 집착함으로써 번뇌를 잊고자 하는 열망이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 그의 말풍선을 본 외국인들이 따라하기 시작했다.(2001.독일 본의 지구온난화회의)
ⓒ 최병수
최병수는 한 마디로 당시의 자신을 표현했다. "더듬이가 살아 있었죠"라고.

그의 작품은 난해한 예술품이 아니라 생활속에서 대중의 눈높이를 맞추는, 그만의 뛰어난 안목이 있었다. 현실을 통렬히 비판하면서도 증오와 저주가 아닌 환경과 보다 살기좋은 사회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경찰서에서 조서를 꾸미며 세어본 그의 직업 경험은 열아홉 가지에 달했다. 밑바닥에서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문제에 고민하던 그의 산 경험은 고스란히 그의 뼛속 깊이 새겨져 작품으로 묻어난다.

스무살이 되던 해인 1980년대는 군사독재 시절의 암울한 시대였다. 하지만 민주화가 뭔지 운동권이 뭔지도 모르는 그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이 있었다. 민족미술협회 회원들인 친구들은 벽화를 그리는데 최병수에게 사다리를 짜달라고 부탁했다.

우연히 유연복씨가 밑그림을 그린 <상생도>에 진달래와 개나리를 그렸다가 '신촌 벽화사건'과 '정릉 벽화사건'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문초를 받으며 졸지에 화가가 됐다.

꽃 몇 개 그렸다고 화가가 되어야 했고, 공안 검사는 말도 안되는 질문을 하는 게 이상해서, 이런저런 의문이 생겼고, 여기서부터 사회의 모순들에 눈을 뜨고 정체성 혼란을 겪게 된 와중에 <말>지에서 '인혁당사건'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사회모순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억울함과 불합리가 자신을 막아섰을 때 경찰서의 경험은 '이미지가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민족미술협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 미술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87년 6월 민주화항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최루탄을 맞고 피를 흘리는 이한열과 그를 부축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걸개그림을 기억한다.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그의 그림은 6·29선언을 이끌어냈고 미술이 줄 수 있는 힘을 자각하는 계기가 됐다. 이 그림이 로이터 통신에 게재되면서 최병수가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 6.29선언의 기폭제가 된 그의 걸개 그림
ⓒ 최병수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에 뛰어들어 '분단인' '노동해방도' '장산곶매' 등을 통해 사회정의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기 시작했다.

88년도에 있었던 원진레이온 사건을 보면서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잘못된 것을 계속 생산하고 과소비하며 멀쩡한 물건을 쓰레기로 버리면 지구는 망한다는 주제하에 '쓰레기들'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려 브라질 리우회의(1992년)에서 각광을 받고 < AP통신 >에 오르고 < TIME >지에 실리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의 작품이 외국에서 유명세를 타면서 미술의 범주를 작가의 내면세계라는 틀 속에 가두었던 제도권 미술계에 화두를 던졌다. "현장미술은 이미지를 보고 문제점을 끌어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매번 주제가 다르다.

그는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몇 시간이고 한곳을 주시한 후 이미지가 결정되면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단순하고 명백한 이미지를 그려낸다. 그의 작업은 걸개그림이 되기도 하고, 조각이 되기도 하고, 퍼포먼스일 때도 있다. 재료는 종이, 캔버스, 나무, 못, 심지어 얼음까지 이용한다.

현장미술은 광대와 같아서 대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아픈 곳을 정확하게 진단해 그것에 맞는 예술을 하는 것이 진정한 대중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어느날 우연히 남극의 펭귄 사진을 보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라 펭귄을 이미지화 하기로 결심했다.

▲ 네델란드의 헤이그 신문에난 '남극대표'라는 부제가 붙은 그의 펭귄 작품
ⓒ 최병수
지구온난화 문제를 다루는 교토의정서에서 '얼음이 녹으면 해수면이 상승하고, 해수면이 올라가면 펭귄도 사라진다'는 두 가지 생각을 하나의 아이디어로 결합시켜 일본신문의 일면에 게재됐다. 펭귄을 이용한 퍼포먼스는 전세계에 온난화에 대한 화두를 던져줬다.

환경회의가 열리는 곳이면 전 세계를 돌아다녀,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세계 정상회의가 열릴 때 '리우+10'의 행사에는 그의 '칵테일 잔'이 전세계 언론에 뿌려졌다. 세계정상들이 칵테일을 즐기는 시간에도 계속 지구환경이 파괴되고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세계정상회의당시 게재됐던 그의 작품
ⓒ 최병수
그는 인간에게 가해지는 온갖 폭력적인 문명을 향해 그의 무기인 붓과 칼, 톱과 연장을 들고 일어선다. 인간의 더러운 욕망이 빚은 파괴의 현장,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빚어진 재앙이 있는 곳, 경제적 이익만 쫒아 서슴없이 벌이는 살육의 현장에 분연히 일어나 달려간다.

부안 해창 마을 앞 갯벌에서는 새만금간척사업에 반대하는 장승제에 갯벌의 주인인 꿈틀거리는 갯지렁이와 게, 망둥어, 소라, 굴을 주제로 한 솟대를 세웠고, 2002년 7월 북한산 관통도로를 반대하는 사패산 터널 입구에는 10여 미터의 망루를 설치했다.

우리는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학살에 분노하지만, 우리 안의 또다른 부끄러운 모습인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푸옌성 양민학살 사건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베트남 푸옌성에 사죄와 평화를 기원하는 생명솟대를 세웠다.

그의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망둥어가 사람들을 맞이한다. 갯지렁이, 펭귄과 곰, 돼지, 고래와 연어, 나비 등이 널려있다. 그의 동물관에 대해 <목수, 화가에게 말을 걸다>의 저자인 김진송씨는 '신화적 상상력'에서 나온거란다. 그는 인간과 자연, 동물을 항상 동등한 시각에서 바라봄으로써 작품속에 등장시키고 이미지화 한다.

▲ 새만금 해창 갯벌에 세워진 솟대
ⓒ 최병수
그는 지금 기계문명을 둘러싼 반전과 성장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 인간문명의 폭력성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이라크에 들어가기 전 요르단 의사들이 수술하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경고했음에도 3일을 굶으며 이라크로 들어가 바그다드의 해방광장에서 이라크전 반대 퍼포먼스를 했다.

▲ 한 이라크 할아버지가 폭격에 맞아죽은 손자를 안고있다. 잘린 다리에서 평화를 그리는 꽃이 핀다
ⓒ 최병수
그가 말하는 '소통'이란, 그림을 통해 감상하는 사람들이 '이해하는'것이다. 그는 피카소나 초현실주의의 그림에 대해 과연 몇 사람이나 이해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자신의 화풍을 고집하기보다는 보여지는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사회에 문제점을 제기한다. 그는 아프리카 원주민의 그림을 '영혼의 울림'으로 여기지만, 피카소의 그림은 '돈'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림은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 미술 아닌 게 없고, 음악 아닌 게 없단다. 미술 교육은 좋고 싫음에 대해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회화를 직접 못하면 감상하는 눈이라도 길러줘야 한다고 말한다.

"터프하게 보이고 싶어서 머리를 빡빡 깎느냐?"는 물음에 1999년부터 목각 작업을 하면서 머릿속에 톱밥이 들어가 귀찮아 잘랐는 데 시원하단다.

뒤틀린 심사와 함께 상업주의와 배웠슴네 하면서 허세를 부리는 위선자들을 통렬히 비난하는 그로서는 항상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주위에서는 전시장에 전시해서 돈도 벌고 가정도 꾸리라고 권했으나, 그는 "운동을 하는 거지 화가가 아니다"는 말로 돈벌이에 무관심했다.

인간과 환경 지킴이의 투사같던 최병수는 위암 3기로 위의 3분의2를 도려냈다. 몸을 추스르기 위해 강화도에 살다가 우연히 지인이 초대해 여수에 왔다가, 따뜻하고 경치좋은 백야도의 한 폐교 정문 입구의 조용한 집에서 요양과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전화를 받는 목소리는 몸이 불편한 환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카랑카랑 했다. 내공 때문일까? 그는 얼마 전 자다가 지네한테 물렸는데도 가벼운 치료만 받았다. 오히려 "지네의 독이 어혈을 풀어 주는 보약이 된 것 같다"며 너털웃음이다.

바닷가에 살면서 몸도 많이 좋아지고, 서울처럼 골치 아픈 문제를 직접 대면하지 않아서 머리가 특히 맑아졌단다.

시간이 없어서, 의지가 약해서, 자신이 없어서 직접 나서지 못하면, 행동하는 미술인, 실천하는 미술인을 이 사회가 나서서 후원해야 하지 않을까? 그는 지금 강남의 땅 한 평값도 안되는 정든 이 집도 다시 떠나야 할 처지다.
기사 작성에 도움을 주신 <목수, 화가에게 말 걸다>의 저자 김진송님께 감사드립니다.

<남해안신문>에도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6-12-31 10:34
ⓒ 2007 OhmyNews
출처 : 배꾸마당 밟는 소리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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