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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 피플

소련군 포로가 된 시베리아지역 한인의 귀환문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박 민 영

1. 머리말

일제 말기에 강제로 징집되어 일본군에 끌려갔던 한인 가운데 상당수가 1945년 해방 직후 시베리아 각지에 산재한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소련군의 포로 신분이었던 이들은 장기간 강제노역에 시달렸고, 그 결과 많은 한인들이 시베리아 현지의 황량한 벌판에서 사망하고 나머지 일부만이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몇몇 연구자들만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 그들이 왜 소련으로 끌려가야 했는지, 시베리아 동토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어느 곳으로 끌려갔었는지, 어떠한 과정을 거쳐 고국에 돌아왔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해방 이후에도 귀환하지 못하였다.
소련으로 끌려간 한인들은 패전국인 일본인들과 동일하게 취급받으며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영양실조와 추위로 죽어갔다. 하지만 일본인 포로들은 일본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소련측과 협의가 이루어져 1948년 초부터 귀환이 이루어졌으며, 이들에 대한 보상도 1960년대부터 이루어졌다. 그에 비해 한인들은 1990년대까지 미해결 상태로 계속되었고,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이 붕괴된 후에도 이들에 대한 보상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이 글에서는 시베리아지역 포로수용소에 강제 수용되어 비참한 노역을 당한 한인 ‘포로’들의 실상을 파악하고 그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고국에 돌아오게 되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시베리아에 강제 연행당한 한인들의 신분적 입장, 그리고 한인들을 시베리아에까지 끌어다 놓고도 자국인들만 귀환시켰던 일본의 대소협상(對蘇協商) 방침과 자세, 이들 강제연행 한인들을 둘러싼 이해 당사국인 한국?소련?일본 등 3국간의 이해나 관계가 어떠했나를 고찰하였다.

2. 소련군의 만주 점령과 한인 병사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소련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하였다. 이때 만주의 일본 관동군에 소속되어 있던 한국인 군인과 군속들은 소련군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가 정예를 자랑하던 원래의 관동군은 태평양전선에 투입된 상태여서 관동군의 전력은 부실한 실정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이 비우고 간 자리를 주로 정예군이 아닌 일본인들과 한인들이 메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한국인 군인과 군속들은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소련군과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8월 8일 드디어 소만 국경에서 전투가 터졌고, 관동군들은 소련군들과 최후의 일전을 치르려고 하였지만, 실제적으로 전투는 불가능하였다. 징병 2기로 끌려가 손오(孫吳)에 주둔하고 있던 원봉재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원봉재 인터뷰-면담자 : 김도형, 2002. 12)

8월 9일 저녁 9시가 되어서 중대장이 말하기를 이제 일소전쟁이 터졌다, 일소전쟁이 터졌는데 우리는 적군을 맞이해서 싸우기 위해서 전쟁 장소로다 출발해야겠다. 그러니까 제군들은 지금 모든 장비를 빨리빨리 하거라. 뭐 이런 취지의 훈시를 한 30분 동안 하대. 그래가지고 우리는 뭐, 뭐 알아요 군비가 있어요 뭐 있어요. 그 다음에 우리도 옷을 또 바꿔주대. 새 것으로. 일본 군대는 본래가 전쟁 나갈 때 새 옷으로 갈아입어요.

소련군이 침공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안 일본군은 진지를 만들고 참호를 파기도 하였다. 원봉재가 있던 손오(孫吳)부대에는 2~3만 명의 관동군이 있었으나, 대개 화기(火器)가 없이 인원만 있는 부대였다. 그가 본 병기라고는 ‘마메 땅꼬’(작은 탱크, 지프차만한 탱크)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 결과 한인 병사들은 관동군과 함께 소련군을 맞아 항전하였으나 소련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규철은 그의 회고록인 《시베리아 恨의 노래》(필사본)에서 8월 15일 저녁 무렵 총검으로 무장한 소련군의 감시 하에 관동군 병사에 수용되었다고 하였다. 일부 일본군을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개가 일본군에 잔존하고 있었다. 이때 포로가 된 한인의 숫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1만명에서 1만 5천명 정도라고 한다.

3. 포로수용소의 강제노역

소련군에 의해 포로가 된 일본군들은 철도편 혹은 도보로 소만 국경을 건너 소련 땅에 끌려갔다. 이규철은 8월 말 1개 대대 1천명 단위로 편성되어 하얼빈 방향으로 철로를 수리하면서 북으로 북으로 행군을 계속하였다. “야폰스키 다모이, 다모이”(다모이=歸家)하는 말들을 들으면서 화차에 실려졌다. 일본군이 가지고 있던 피복?식량뿐만 아니라 아직도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병참 창고의 물자까지도 모두 화차에 실려졌다. 이들 대부분은 만주 흑하(黑河)에서 아무르강을 건너 소련 땅으로 들어갔다.
김종빈은 철도로 흑하(黑河)까지 실려 왔고, 여기서 소만 국경인 아무르강을 건너, 소련 땅인 블라고베시첸스크로 들어섰다. 그리고 며칠을 열차로 달려 카자크 공화국의 동쪽 끝이며, 외몽고(外蒙古)와 중국 신강성(新疆省)의 북쪽에 위치한 우스트-카메노고르브스크(Ust'-Kamenogorvsk)라는 벽지의 수용소에 도착하였다. 이규철도 블라고베시첸스크에서 화차를 타고 9월 4, 6일경 도착한 곳이 세렛칸 수용소였다.
원봉재가 소속된 손오부대도 1천 명을 단위로 1945년 8월 20일부터 도보로 흑하에 도착하였으며, 9월 6일경에 흑하를 건너 블라고베시첸스크에 도착하였다. 그후 바로 미하일로-체스노스카야(Mihailo-Zesnokovskaya)로 이동하여 그곳에 수용되어 목재소에서 강제노동을 하였다. 또한 손오부대의 군속으로 있던 이태호는 열차를 타고 북쪽으로 이동하여 시베리아의 치타와 이르쿠츠크를 지나 11월 4일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도착하였다.
포로수용소에 도착하자 인원의 접수는 소대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사는 소련인 통역이 서투른 일본말로 신상?계급 등을 묻고, 장교가 이를 기록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한인 포로들은 자신이 한국인임을 말하였다.
수용소 입소 절차가 끝난 후 일본군의 편성대로 바라크가 배정되었다. 수용소 안은 포로만의 대대?중대?소대 등의 편성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한인 포로들도 여전히 일본군 중?소대별로 있어야만 하였다. 한인들은 자신들이 ‘카레이스키’(한국인)라는 것을 호소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수용소에 입소하여 며칠 후부터 강제노역이 시작되었다. 포로의 식사는 1일분의 흘렙(소련 주식의 검은 빵) 3백그람, 설탕 약간, 그리고 한 끼 한 그릇의 죽이 전부였다. 날마다 중노동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태호는 수용소 생활의 참담한 실태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수용소에서 생활하는데 배가 고파 가지고 사람이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멀건 죽 같은 것 하고, 빵 200g하는 담뱃갑 만해요. 그리고 설탕 조금 넣고 그래가지고 멀건 죽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이제 밥도 한 공기 그걸로 한 1/3정도 그러니까 뭐 이게 먹는 게 아니죠. 그래 배가 고파 가지고 하늘이 노랗고 말이죠.

수용소 생활은 굶주림과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거기에다 강도 높은 노역은 포로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포로수용소마다 노역 작업은 달랐다. 벌목장 근처에 있는 수용소 포로들은 주로 벌목을 하였으며, 혹은 벽돌공장에서 일하기도 하였으며, 도로공사에 동원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소련은 시베리아지역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힘들고 어려운 일에 포로들을 사역하였던 것이다. 김종빈의 경우에는 채석장에서 돌을 깨고 이것을 화차에 실어 보내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이규철은 콜호즈에서 감자 캐는 일을 하였다.
처음 소련군에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수용소에 수용되었을 때는 8월의 여름이었다. 그러나 10월에 들어서면서 시베리아의 찬 기운이 몰아쳤다. 포로들은 관동군의 방한모, 방한 외투, 방한 장화로 무장하고 있으나, 영하 40~5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에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 작업이 제대로 진척될 리 없었다. 매일같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일본인의 경우에는 특히 이질에 약하였기 때문에 이질에 걸려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봄이 되면 지난 겨울동안 처리되지 못하고 쌓아두었던 시체들을 한꺼번에 매장하기도 하였다.
한편 한인 포로들은 포로 수용소측에 강력히 요청하여 한인만의 소대로 편성하여 독립 바라크를 배정받고 같이 기거할 수 있었다. 이병주나 이태호의 증언에 따르면 수용소 생활을 한 지 1년 정도가 되어 한인만의 독립부대가 편성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한인들은 함께 생활하면서 같이 작업에 나가게 되었다.
한인 포로들은 한 곳에서 계속 노역을 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봉재의 경우에는 블라고베시첸스크에서 미하일로-체스노코프스카야로, 이어 와자이예프, 하바로프스크 등지로 옮겨가며 노역을 하였다. 김기용도 원봉재와 마찬가지로 계속 이동하며 노동을 강요당하였다. 김종빈의 경우에도 우스트-카메노고르브스크에서 스탈린스크로 이동하여 탄광에서 작업을 하였다.

4. 시베리아 한인 포로의 귀환과정

소련에 억류중인 일본군 포로에 대해 일본 정부는 연합군 사령부와 교섭하여 그들의 귀환작업을 서둘렀다. 하지만 외교권을 상실한 일본은 미국 정부를 통해 소련 정부에 그들 동포의 귀환을 요청하는 비밀회담을 진행시켰다. 1946년 가을에 그 교섭은 소위 ‘미소협정’이 체결되면서, 그해 12월 5일부터 마이즈루(舞鶴)에서 명우환(明優丸)이 입항하면서 일본인의 귀환이 개시되었다. 무학인양원호국(舞鶴引揚援護局)은 나홋카?원산?대련에서 자국 귀환자를, 함관인양원호국(函館引揚援護局)은 사할린으로부터의 귀환자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해방 후 미군정하에서 시베리아에 끌려간 한국인 군인?군속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군정 당국에서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시베리아의 한인 포로들은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소련 당국에 여러 차례 귀국허가를 신청하였다. 하지만 소련 당국은 한국에는 정식 정부가 없으므로 교섭상대자가 없어 귀국시키지 못하겠다고 이들의 청원을 거절하였다. 한편 김기용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하바로프스크에 있을 때 국제적십자 마크가 찍힌 엽서로 고향에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 엽서를 받은 그의 부친 김한웅(金漢雄, 당시 북한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이 북한 당국에 요청하여 한인 포로의 귀환을 소련 당국에 요구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일본 정부의 계속적인 요청이 있었고, 일본군 포로들에 대한 송환이 시작되면서 한인 포로들의 송환도 1948년 5월부터 시작되었다. 이들 중 가장 먼저 송환된 사람은 황규영이다. 그는 일본의 무학(舞鶴) 항구를 통해 1948년 7월 송환되었으며, 방선이라는 사람이 1950년 4월에 마지막으로 송환되었다.
한인 포로들의 송환은 중환자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강한 한인 포로들은 대개 하바로프스크에 집결하여 1948년 12월부터 나홋카에서 배편으로 귀환하였다. 원봉재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나홋카에 모인 한인은 12월 20일경 2,162명이 소련 배를 타고 흥남항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나홋카에는 일본군 포로를 위한 마지막 수용소가 건설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3~4일을 대기한 후 송환되었다. 김종빈의 경우 일본 병원선을 타고 마이즈루 항구에 도착하여 그곳 수용소에서 대기하다가 미군들의 심사를 받고 부산으로 귀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개의 한인 포로들은 나홋카에서 배를 타고 흥남항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원봉재의 경우처럼 나홋카에서 배를 타고 흥남항에 도착하였는데, 흥남항에 도착한 시베리아 포로들을 위해 환영 인파가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환영은 곧 “소련에 가서 재건에 봉사한 걸 수고하였다”는 감사의 표시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곧바로 여학교에 수용되었고, 1949년 1월 6일경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태호의 경우, 1948년 8월경에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하여 11월까지 약 3개월 동안 공산주의 교육을 받고 나홋카에서 배를 타고 흥남으로 귀환하였다. 그 후 남한지역 출신의 한인 포로 약 470명이 40일 정도 제5여자중학교에 수용되어 있다가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1948년 중반부터 시작된 한인 포로들의 귀환은 1949년에도 계속되었다. 1949년 크라스노야르스크의 기관차 공장에서 강제노역을 하던 한인 포로 83명이 1949년 9월 21일 소련 마가당을 출발하여 10월 14일 북한에 도착하였다. 그 가운데 남한 출신자 40명 중 제1차로 10월 31일에 10명, 제2차로 11월 4일에 5명이 남한으로 귀환하였다. 그렇지만 일제의 헌병 정보원으로 활동하던 1백여 명은 그대로 소련에 억류되어 있었으며, 공산주의 사상교육을 받고 소련에 귀화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귀환한 포로들 가운데 38선을 넘어 남한에 온 포로 출신자들 324명은 인천국립수용소에 수용되어 조사를 받고 각자 귀향하였다. 이때 시베리아 포로들에 대해서는 당시의 신문기사에 자세히 다루고 있다.

5. 맺음말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되었던 한국인 군인과 군속들은 1945년 8월 소련군의 만주 침공과 더불어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들은 그해 9월 일본군 포로 60만 명과 함께 시베리아 각지에 수용되어 강제노역을 당하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3년 6개월 동안 억류된 후 1948년 12월 귀국하였다. 남한 출신의 한인 포로들은 북한에서 약 2개월 동안 머물다가 인천으로 내려와 이곳 국립수용소에서 다시 3개월간 조사를 받은 후 석방되었다.
한인 포로 가운데는 귀환하지 않은 채 소련에 잔류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소련 공산주의 사상교육을 받고 소련군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
소련에 억류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포로에 대한 사상적?정치적 교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소련이 수많은 포로들의 인력을 동원해 그들의 전후복구, 부흥사업에 최대한으로 이용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소련이 일본 관동군을 포로로 잡고 시베리아로 끌고 간 이유는 명확히 밝힐 수 없다. 하지만 가장 유력한 설로는 소련과 일본의 밀약설이다. 즉, 제2차대전에서 패한 일본은 전승국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무조건 수용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전쟁보상 차원에서 소련은 일본의 영토 일부인 북해도의 할양(割讓)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연합국 사령부와 일본 정부로서는 소련의 이러한 요구에 응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주에 있던 관동군의 인력을 소련의 시베리아 개발사업에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일본군에 강제 동원된 한인 포로들은 패전국 일본과 소련, 그리고 연합국 사령부간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에 철저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해방을 맞이한 상황에서도 시베리아 포로수용소에서 3년간 인권을 유린당하며 잔혹한 강제노역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귀환 후에도 남북분단이라는 이데올로기 대치상황에서 상당한 기간에 걸쳐 정치적 상황이 고려된 여러 가지 제약이 가해짐으로써 중첩되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