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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서를 기다리며 줄을 서있는 우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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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기 |
| 아흠~ 잘 잤다. 지금은 저녁 8시. 내가 일어나야 할 시간입니다.
밖으로 나가보니 주변의 네온사인들은 이미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네요. 고개를 올려 쳐다보니 우리 집의 '신평화시장' 네온사인 형도 보입니다. 언제나 나보다 일찍 나와서 반갑게 맞아줍니다.
나는 올해로 10살입니다. 동대문운동장 근처에 있는 신평화시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주 5일제는 못합니다. 시장이 쉬는 날에만 같이 쉴 수 있습니다. 아저씨가 쉬지를 않거든요.
저녁 8시부터 새벽 5시까지가 내 근무시간입니다.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습니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데, 10년이나 지난 지금은 명실상부한 베테랑입니다.
오늘은 날씨가 꽤 쌀쌀합니다. 나와 내 친구들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항상 이 자리에 있습니다.
일렬횡대로 줄을 맞춰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보기 좋으라고 줄을 맞춰 있는 건 아닙니다. 엄연히 근무시간인데요.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매일 늦던 21호가 오늘은 일등으로 서 있습니다. 집이 가장 멀다던 장씨 아저씨가 간만에 일찍 나오셨나 봅니다. 우리는 왼쪽부터 차례대로 일하게 됩니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오는 오토바이나 봉고차, 가끔은 승용차에서 내리는 옷들이 우리 일감입니다. 그들이 오면, 순서에 맞춰 아저씨들이 우리 위에 옷들을 올리고 목적지로 데려다줍니다.
오토바이 형, 옷은 꼭 계단 가까이에 내려주세요
2층은 1700원, 3층은 2000원, 4층은 2400원입니다. 넓은 건물 구석에 있건 계단 바로 앞에 있건, 층수별로 돈을 받습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계단에서 가까운 곳에 옷들을 데려다 주길 바라지만,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일은 운이 좋으면 아저씨들이 힘도 덜 들고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고생에 비해 받는 수당은 매우 적을 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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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거운 짐을 지고 계단을 올라가는 아저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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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기 | 종종 우리가 서 있는 자리 근처에 있는 전화벨이 울리면 순서가 된 아저씨들은 은근히 미소 짓습니다. 그러고는 힘차게 우리를 메고 건물 위로 올라갑니다.
일종의 특별수당인데, 시장에서 옷을 많이 사는 손님들이 목적지까지 옷을 운반해주면 대금을 지불합니다. 건물 1층까지는 3000원, 길 건너에 있는 곳까지 가면 5000원도 받습니다.
길가에서는 아저씨들이 말하는 '구루마'로 이동하기 때문에 내가 일하는 것보다 힘도 덜 듭니다. 우리 주인인 김씨 아저씨는 '전화 한 통 받아야 되는데'라고 푸념을 합니다. 오늘은 운이 별로 없나 봅니다.
주인아저씨는 올해로 58세입니다. 나를 만들어준 지는 10년 정도 됐습니다. 이제 우리는 눈빛만 봐도 아는 사이가 됐습니다.
아저씨는 내게 가끔씩 고맙다고 말합니다. 아저씨에겐 아들이 세 명 있는데, 나와 함께 일한 10년 동안 모두 대학을 졸업시켰습니다. 아저씨는 나와 함께 일하는 걸 매우 좋아합니다.
"직장에 다니면 간섭하는 사람도 많잖아, 근데 너랑 일하면 자유롭고 신경 쓰지 않아서 좋구나"하고 말합니다. 나랑 같이 일하면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한 가 봅니다.
나를 만나기 전에는 해태제과에서 근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직장이 맞지 않아 다른 일을 찾던 차에 나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10년 전만 해도 경쟁률이 엄청났습니다. 그때는 벌이도 괜찮고 많은 사람들이 원하던 유망 직종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원하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하고자 해도 다른 아저씨 중에 한 분이 나갈 때만 들어올 수 있다고 합니다.
일거리 없고 힘들어도 항상 웃는 아저씨들이 참 좋습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요즘에는 일부러 찾아와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운이 좋아 가벼운 짐이 오면 다행이지만, 가끔씩 무거운 짐들이 높은 층까지 가자고 하면 내가 봐도 막막합니다. 아저씨들이 내색은 안하지만, 굳게 다문 입을 보면 얼마나 힘들어할지 상상이 갑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가게들 사이로 친구와 마주칠 때면 한 명은 다시 물러나야 합니다. 비좁은 통로가 원망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나는 바빠서 빨리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옷을 구경하던 손님들을 혹시라도 건드리게 되면 안 좋은 소리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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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좁은 통로에서 친구와 마주치면 난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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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기 | 요즘에는 일거리가 별로 없습니다. 철이 바뀔 때는 무려 100짐도 해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에 15짐에서 많아야 20짐 정도 합니다.
근데도 우리 아저씨들은 뭐가 좋은지 항상 웃고 있습니다. 가끔은 애들처럼 툭툭 건드리며 장난치기도 합니다. 따뜻한 자판기 커피 한잔에 동장군도 비켜 지나갑니다.
날씨가 추울 때면 근처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 하기도 합니다. 우리랑 일하는 데 면허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음주운전은 일에 지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아저씨들은 적당히 드시고 옵니다.
이렇게 힘들지만 즐겁게 사는 아저씨들이 나는 무척 좋습니다.
나는 지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