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양산 지명유래와 시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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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이훈익 옹은 "해수와 밀물이 혼합되어 드나들어 '황무지'였는데 점차로 방죽을 막아 농경지로 개답한 곳"이고 "주민들이 차차로 뚝을 여기저기 쌓아 보뚝은 줄줄이 이어져 줄보뚝이라는 지명까지 생겼는데 그의 명칭을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주부토가 된 것이라는 전해온다"는 설이 있다.
신라 시대의 장제라는 것도 "길다란 제방이라고 해서 장제가 된 것"이라는 설을 전한다. 수주로 개명된 것은 계양산 북쪽 수소(樹蘇) 마을에 주청사(州廳舍)가 있어 이곳이 수소나무 우거진 밀림 속 마을이란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고, 이곳의 옛 지명인 주부토의 주(主)가 님의 음차(音借)이며 이것이 나무와 음이 가깝기 때문이란 설도 있다 한다. 개경 근교 장제 지방의 호족으로 부평이씨의 시조인 이희목에게는 고려개국 벽상공신으로 후대하고 그의 본거지인 수소마을의 이름을 따서 수주로 높여주고 종전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란 지명 또한 예사롭지 않다. 이곳 부평 지역이 고려의 수도인 개경의 방비를 위한 남쪽의 요충지로 그리 불린 것인데, 평안도와 황해도의 안북(安北), 안변(安邊)도호부와 경상도의 안동(安東)도호부와 형세를 함께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계양산은 한서(漢西) 지방의 주산이고 부평의 진산(鎭山)이다. 옛부터 계양산 일대에는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되고 고려시대 이후로 황무지가 개간되면서 평야지대가 펼쳐지면서 커다란 읍호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큰 읍을 이룬 계양산 일대에는 많은 관인과 문인이 찾아들었다.
고려의 대문호였던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는 고종 6년(1219) 좌사간(左司諫)의 높은 벼슬에서 부평부사로 좌천되어 왔다. 그는 계양군수로 재직하면서 보는 것마다 가는 곳마다 읊은 즉흥시가 <자오당기(自娛堂記)> <명월사시(明月寺詩)> <망해지(望海誌)> 등에 전해오고 있다. 이북의 저명한 한학자인 김상훈 등이 번역하여 남쪽의 출판사인 보리에서 겨레고전문학선집으로 출간된 '이규보 작품집'(전2권)에는 계양산 일대의 풍광과 함께 백성을 걱정하는 목민관으로 백운거사의 심정이 담겨있다. '파한집(破閑集)'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인주이씨 문중의 이인로(李仁老) 또한 계양관기(桂陽管記, 계양서기)에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겪은 일을 파한집에 남겼고, 조선 전기의 대표적 문인인 성현(成俔)도 <차부평헌운(次富平軒韻)>이란 아름다운 한시를 남겼는데, 이들의 작품 겨레고전문학선집 18권으로 출간된 '거문고에 귀신이 붙었다고 야단'에 담겨 있다. 이들 외에도 조선의 많은 문인들, 이제, 민제인, 송광연, 이희보, 김안로, 양성지 등의 문인들이 계양산의 평화롭고 아늑한 풍취를 시문으로 달래었다. 이들의 시문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의 글을 한데 모아서 출간한다면 계양산의 면면한 역사가 한층 도드라질 것이다.
오늘날 롯데그룹에서 골프장 개발계획이 추진되고 있는 계양산 북쪽 기슭에 있는 마을로 나무가 무성하고 음산하여 '나무소리(수소리樹蘇里)'로 불렸다고 한다. 이훈익 옹은 목상동이 "부평이씨의 발상지라 전해지며 거주형적이 보인다"고 '인천지명고'에 기록하고 있다.
'하늘과 같이 높은 고개'라 하여 하누재라 불렸던 고개를 한참 넘어서야 부평읍에 다다를 수 있었던 목상동은 그 이름처럼 오늘날까지도 인천에서 가장 자연이 잘 보존된 지역으로 남아 있는, 부평의 본향과도 같은 곳이다. 길이 보전해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것이다. /문학평론가
출처 : 형과니의삶
글쓴이 : alz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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