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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스크랩] [바다도시와 해양문명 이야기] <23>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암스테르담 곳곳에서 발견되는 항구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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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학자 주강현의 바다도시와 해양문명 이야기] <23>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척박한 육지 자연조건 속 '해상무역·조선업' 등 특화
 

서유럽 최대 항구는 어디일까. 두말할 나위 없이 로테르담(Rotterdam)이다. 로테르담은 네덜란드 남쪽에 자리 잡았다. 로테르담이 서유럽 항구 1번지임은 암스테르담과 결부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도 없다. 네덜란드는 정말 작지만 강한 나라이고, 로테르담이나 암스테르담 역시 작지만 강한 항구이다.


암스테르담,예술과 학문의 본향
로테르담,현대건축 박물관 도시


해수면보다 낮은 습지에 건설된 네덜란드는 진창 속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다. 베네치아가 이탈리아 동북부의 습지에 말뚝을 박고 건물을 세운 것과 같다. 물을 뿜어내기 위해 풍차를 세웠음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

척박한 환경 속에서 네덜란드 사람들은 청어절임 기술을 개발한다. 청어는 그네들에게 금광과도 같았다. 북해에서 1천500여척의 배에서 1만명 이상의 어부들이 30만통 이상의 막대한 청어를 잡아들였으며 이를 수출한다. 그래서 암스테르담을 '청어의 도시'라고도 했다. 암스테르담 시내 곳곳 아무 데서나 먹을 수 있는 하링(초절임)은 청어전통의 흔적이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바다의 마부'라고도 애칭한다. 청어로 벌어들인 돈으로 배를 만들었는데 지극히 실용적인 배였다. 영국 건조비에 비하여 월등히 싼 가격으로 조선업을 석권한다. 암스테르담 곳곳의 조선소에서 배들이 신속히 만들어진다. 은행업, 금융업, 보험업, 증권거래 같은 선박 관련 산업도 발전한다. 중앙역 근처의 유서 깊은 증권거래소가 좋은 증거물이다. 하멜이 조선을 탈출하여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보험료 청구였다.

구교도 에스파냐로부터 네덜란드 신교도가 독립을 쟁취한다. 그런데 독립 과정 자체도 그야말로 독립적이다. 네덜란드에는 애초에 왕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권보다는 장사꾼만이 존속했다는 표현이 솔직할 것이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담(Dam)광장이다. 왕궁이라는 건물이 서 있기는 하지만 한때 시민들의 공간으로 활용되던 공간이다. 담광장에는 어시장과 기중기, 화물계량소 등이 밀집해 있었다.

서구 도시들은 대개 교회, 수도원, 성, 궁전, 자선시설, 대학, 다리, 성문 등으로 구성되며 상업행위가 시의 존재와 번영의 가장 주된 이유였을지라도 단지 일시적으로만 주목을 받고 그친다. 그러나 암스테르담은 달랐다. 신교도 도시였으나 교회는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 않으며, 광장은 오로지 상업지구로서만 기능했다. 구교회와 붙어있는 거리가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공창촌임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공창이 적어도 암스테르담에서는 병존 가능함을 암시한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무역인과 호객꾼, 행상인, 선원, 그리고 그네들을 기다리는 창녀들이 거리를 메웠다.

자유를 향한 신교도들의 열망과 자본의 힘이 그네들을 해양제국으로 내몰았다. 많은 역사가들이 이야기한다. 왜 중국은 그 큰 힘을 가지고 바다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반면에 유럽은 바다로 나아갔을까. 중국은 가진 것이 많았고 유럽은 가난했기 때문이다. 척박한 네덜란드의 자연조건 속에서 바다로 나가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1580년, 네덜란드 젊은이들이 포르투갈인의 배를 타고 처음 인도로 간다. 포르투갈 항해기술을 슬쩍하여 자신들이 직접 동방항로를 개척한다. 자금력과 조선기술은 있지만 왕권은 없는 자유주의자들의 자본주의적 열망이 17세기에 그네들을 세계 최고의 해양인으로 만든다.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해양제국의 수도로 암스테르담이 등극한다.

VOC(동인도회사) 본부가 있던 붉은 벽돌의 빌딩을 찾아갔다. 이 거대한 빌딩 속에서 아시아를 지배하던 세계화 마스터플랜이 논의되고 결정되었다. 하멜의 한반도 표착도 동인도회사의 직원으로서 인도의 고아,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와 포모사를 거쳐 나가사키 데지마로 향하다 어긋난 것이다. 무수한 하멜들이 바다를 누비고 다녔다.

암스테르담 자체가 운하도시다. 물을 떼어 놓고는 삶을 생각할 수조차 없다. 선장과 선원들, 무수한 돛대와 깃발, 항해장비가 도시를 채웠다. 세계 각지에서 바다 건너온 사람들이 도시의 언어를 다양하게 만들었다. 암스테르담 도심 외곽에 열대박물관이 있다. 자신들이 지배하던 열대를 중심으로 한 제국의 식민지에 관한 학습 결과물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이 엄청난 자료는 영국 자연사박물관의 보고만큼이나 기실 인류 및 지구의 문화유산으로서 손색이 없다. 비록 약탈과 수탈로 이룩되었지만 이미 소멸된 자료가 많기에 희귀품이 되고 말았다.

암스테르담은 창고의 도시이기도 하다. 도시 전체가 창고로 뒤덮였다. 서구의 도시사에서 암스테르담만큼 창고가 많은 곳이 없었다. VOC는 세계 각지에 창고를 지었다. 물류는 끊임없이 가격을 따라서 이동하였다. 자본의 흐름에 따라 VOC의 배들이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으니 세계화는 이미 이때쯤 1차로 완성된다. 신앙과 자본은 있었지만 윤리는 존재할 수 없었다. 네덜란드인은 그 자신 뛰어난 자유인들이었지만, 그 이전에 뛰어난 노예장사꾼이었음을 고려할 일이다. 자유민들의 항거로 독립된 나라이며 한때 히피들의 도피처로 널리 알려졌다고 하여 네덜란드의 자유정신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혹심했던 노예무역의 역사를 몰각한 일면의 사태일 뿐이다.

VOC의 최고 관리자 얀 피터스존 쿤은 '전쟁 없이는 무역도 없고, 무역 없이는 전쟁도 없다'는 명언을 남긴다. 네덜란드는 끊임없는 식민전쟁을 계획하고 실천한다. 그네들은 다른 나라가 향료무역에 손대는 것을 참지 못하였으며 오로지 '독점'을 위해 움직인다. 아시아에서의 플랜테이션 단작농업도 그네들 작품이다. 그리하여 17세기에는 아시아 모든 국가에 네덜란드의 정착지와 무역거점, 식민지가 있을 정도였다. 서인도회사는 성공작이랄 수는 없었으나 브라질과 수리남 등의 중남미에 식민의 씨앗을 뿌린다. 아프리카 기니해안에서 브라질로 노예를 끌고 온다. 마침내 네덜란드인들은 북아메리카 허드슨강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뉴 암스테르담이라 명명한다. 오늘날의 미국 제 1의 도시, 뉴욕이 그곳이다.

시내 운하변에 자리잡은 싱겔 꽃시장에서는 오늘도 아름다운 튤립들이 꽃피운다. 튤립은 단순한 꽃이 아니었다. 튤립이 한때 투기자본의 총아가 되어 뿌리 하나가 집 열채 값을 상회하는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참혹했던 식민 지배의 역사와 무관하게 암스테르담은 예술과 학문의 본향이기도 하다. 구태여 반 고흐를 예로 들 것도 없다. 국제법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그로티우스나 철학자 스피노자도 암스테르담을 거닐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해양력을 기반으로 가능했음을 새삼 인지한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로테르담에 들린다. 암스테르담이 고전적 품격을 유지한 도시라면 로테르담은 전혀 새로운 도시다. 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17세기의 흔적이 남아있는 델프스하벤이나 시청사 정도를 제외한다면 지난 반세기에 건설된 건축물뿐이다. 전쟁의 파괴로 인해 오히려 자유로워질 수 있던 측면도 있다. 혁신적이고 지극히 저돌적인 건축물들이 속속 들어차서 가히 '현대건축 박물관 도시'라는 애칭도 듣는다. 1950년대에 지어진 큐브하우스 같은 첨단건축물이 그것이다.

그러나, 로테르담은 역시나 항구도시다. 중앙역 근처의 현대적인 둘렌 콘서트홀 앞에는 항만에서 흔히 쓰는 기중기를 빗댄 조각품들이 서 있다. 항구도시의 조형물을 세우면서 항만시설과는 전혀 무관한 것들만 세우는 우리와 비교된다. 해양박물관에는 19세기 네덜란드 해군의 상징이던 군함 부펠호도 끌어다 놓았고 등대까지 세워놓아 해양의 역사를 기념한다. 비록 과거와 같은 영화는 사라졌으나 바다를 거점으로 세계 최고의 물류기술을 보유한 강력한 해양력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이제 그네들이 애초에 건설하였던 뉴 암스테르담, 즉 뉴욕으로 떠날 순서다. 로테르담 해양박물관의 주요 테마 역시 네덜란드인을 포함한 유럽인들의 뉴욕 이민행이다. 대서양 중심의 해양세계는 이후 미국으로 넘어가며, 이는 곧 미국이라는 신 해양제국을 탄생시켰으며 태평양 시대를 열어갔다. asiabada@hanmail.net

부산일보 | 14면 | 입력시간: 2009-06-08 [09:59:00]

출처 : Marie의 문화세상(부산)
글쓴이 : Mari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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