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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 피플

[스크랩] 우리에게 `월드컵`은 없다.

 

우리에게 ‘월드컵’은 없다.

 

"인천 만수동 향촌리 철거민들을 찾아서.."

 

월드컵열기로 온 세상이 붉게 물들어버린 세상풍경 속에서 세상의 관심사로부터 한참이나 멀리 비켜서있는 사람들이 있다. 가파른 고개처럼 가난은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작은 행복과 희망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은 단 몇 평의 쪽방이라도 있어 행복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소박한 사람들이 인천 만수동 향촌리 철거민들이다.

 

만수종합시장을 들어서 끝부분에 다다르자 옥상에 펄럭이는 깃발들과 전쟁터 폐허처럼 뭉개지고 파편처럼 흩어진 곳이 향촌리 철거현장이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폐허처럼 을씨년스러운 곳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았던 수 천세대의 사람들은 어디론가 대부분이 떠나 버렸고, 살아갈 여력도, 몸뚱이 하나 누이고 살 형편이 못되는 철거민들만이 하나 남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 만수동 향촌 철거민 철대위 건물 -  '투쟁은 정당하다'는 펼침막과 옥상의 깃발들

 

▲ 폐허처럼 널부러진 잔해들이 철대위 건물 옥상에서 뻥 뚫린 구멍으로 비추어진 모습이다.

 

사전에 취재를 약속하고 그곳에 도착했지만, 그곳에서 남아 처절하게 싸우는 사람들의 경계의 눈빛 속에서 그리고 입구에 쌓아둔 타이어와 층계마다 쇠파이프로 촘촘히 박아 덧대어 만들어진 계단은 한눈으로 보아도 철거와 침탈에 대비한 흔적들임을 알 수 있었다.

 

철대위 사무실에 들어서자 그곳은 지난 3월에 사망한 고 신현기 씨의 분향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타들어가는 작은 촛불이 녹아내린 촛농으로 그의 죽음을 서럽게 알리고 있었다.

 

고 신현기 씨는 살아생전 8평 남짓한 방 한 칸에 보증금 100만원 월 10만원을 내고 3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고아였던 신현기 씨는 직계가족도 없었고 다만 양아버지를 비롯한 지인들이 그에 유가족이라는 것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 고 신현기 씨의 영정 앞에서 붉은 빛을 토하는 추모 촛불 


고 신현기 씨는 사망하기 전날까지도 강제철거를 반대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하고 싸웠던 분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그는 강제철거가 시작되던 다음날 처절하게 절규하며, 쉰 살을 하루같이 가난과 서러움에 몸부림치다 결국 남아있는 목숨을 스스로 끊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이 곧 이들의 죽음이라는 것을 취재를 하면서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날 철대위 사무실에서 만났던 사람은 향촌리 철거대책 위원회 조영숙 위원장이었다.
조영숙 위원장은 인터뷰가 이루어지자 “그동안 너무도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정작 이곳까지 찾아와 취재했던 언론들은 가고나면 그것으로 끝나기 일쑤였습니다.”라고 말을 꺼내들며 언론에 대한 그동안의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했었다.

 

▲ 빈곤과 가난의 굴레를 벗어던지기를 바라는 해방 만화가 벽면에 붙어 있었다.

 

조영숙위원장은 철거가 시작된 첫날 아이들은 유치원에 그리고 학교에 다 가고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유치원과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자신들의 집들을 보면서, “왜 우리 집이 없어진 것이야?” 라는 아이들의 수없는 같은 질문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듯이 아팠던 심정을 털어 놓았다. 또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은 “그날 옷가지 몇 개만 달랑 들고 뛰쳐나와야 했어요. 혹여 많은 짐을 챙겨 나온들 세상천지 어디에 갖다 놓고 살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라고 말하면서 지금 살림살이도 주변에서 대부분이 얻어온 것이라 말했다.


조영숙위원장이 이곳 향촌리에 살게 된 것은 지난 2000년이 되던 해부터라고 했다.  대구에서 올라와 원주를 거쳐 정착한 곳이지만, 벌이라고는 막노동꾼으로 일을 해야 했던 남편이 전부였고, 가난의 덫을 벗어나지 못한 생활형편 때문에 막내인 중3 아이는 시골에 계시는 할머니가 돌보고 있다고 했다.

 

▲ 만수 향촌 세입자 철거대책위원회 조영숙 위원장

 

“지난 14개월 동안 시골에 계시는 부모한테 돈 한 푼 보내드리지 못했습니다. 아이가 벌써 중3인데 이것저것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을 테지만 저희들이 이곳을 벗어나 살아갈 곳도 없습니다. 그래도 이곳이 삶의 터전이기에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짐승도 집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인데, 사람이 집 없이 어떻게 살겠어요? 저희들은 처음에 철거민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그 고통과 아픔이 어떤 것인지 정말 몰랐습니다. 그냥 뉴스에나 한 번쯤 비추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라 생각했어요.”

 

조영숙위원장 뿐만이 아니다. 이곳에 함께 생활하고 있는 서른 세대 모든 분들이 이런 처지이며, 누구하나 다르다 생각할 차이가 없다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길거리에 내몰려 오갈 곳 없이 살아야 하는 처지의 사람들이 그동안 이어온 생활이란 하루 벌어서 먹고 살아야 했던 건설일용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다. 쪽방생활 월 셋방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던 그들이기에 이들이 바라는 소박한 희망이란 영구임대주택에 들어가 살 수 있는 날이면 족하다고 말했다.

 

▲ 인간의 기본권을 박탈하는 '주거환경 개선사업'을 신랄가게  비판하고 있다.

 

조영숙위원장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박탁하는 주거환경 개선사업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들처럼 보증금 300만원, 500만원 월세방, 쪽방 전전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30평 40평 넘는 수억대 집을 지어서 어떻게 저희들더러 살라고 말하는 것인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워요. 이 주거환경 개선사업이 한마디로 있는 사람들 돈벌이 수단이자 저희들처럼 없는 사람들 길거리에 내 쫓으며 죽으라고 만들어 놓은 법이 딱 맞아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과거 인천 선인재단 학교들이 들어서자 그 지역에 살았던 주민들이 쫓겨 와 많이 살았다고 했다. “저희들이 철거이후에 참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철거민들의 삶은 7~80년대 당시와 하나도 변화된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곳 향촌리 사람들이 처음에는 선인재단에서 학교를 짓는다고 쫓겨서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이곳에서 쫓겨나 오갈 곳 없이 살아야 하는 형편입니다.”

 

▲ 쇠창살에 덧대에 만든 철조망에 옷가지와 붉은 띠가 묶여진 모자가 걸려 있다.

 

그동안 향촌리 주민들은 강제철거에 앞서 현 인천시장 앞으로 수차례에 걸쳐 요구서를 보냈다고 했다. 그러나 향촌리 주민들의 절박한 요구나 목소리는 외면한 채 되돌아오는 것이란 용역깡패를 동원한 강제철거 뿐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선거 때였어요. 구청장이 방문 했더라구요. 그동안 얼굴 좀 보자고 그렇게 사정을 했지만 선거 때 되니까 그 어려운 발걸음으로 찾아 왔었어요. 너무도 기가 막혀서 원통하고 서러워 눈물밖에 나오질 않더군요.” 조영숙 위원장은 가난도 서러운데 이렇게 차별받고 살아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했다.

 

▲ 주변에서 얻어온 이블이며, 합판으로 엉기성기 엮어서 만든 방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바로 철거민들의 현재의 생활상이었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서른 세대 가족 모두는 심각할 정도의 열악한 생활환경으로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철대위 건물을 지키느라 한발자국도 떠날 처지가 못 되었고, 올 해 아흔살의 노객부터 일곱 살 어린이 까지 살고 있는 방이란 고작 몸만 누이는 정도의 엉기성기 엮어서 만들어진 합판 방이 전부였다. 그야말로 비참한 피난민이 따로 없었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중학생을 합쳐 여덟 명이 있었다. 이날 취재하면서 만났던 올해 4학년인 은주와 2학년인 다은이는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친한 언니와 동생으로 지내고 있었다. 합판으로 만든 방에 들어서자 낯 설은 사람과 카메라 약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왼쪽이 은주, 오른쪽이 다은이

 

해맑고 웃음가득 해야 할 이 아이들에게 웃음은 사리지고 온통 창문은 쇠창살이 덮혀서 두려움과 공포로 아이들의 얼굴은 그늘이 가득해 보였다. 친구도 없고 누구와 놀 수도 없는 은주와 다은이가 좋아하는 곳이란 밑에 층에 있는 공부방이 전부였다. 은주는 낙서를 하다 지우고 칠판에 ‘승리’란 문구를 쓰면서 이렇게 물었다.

 

“저는요. 승리를 이렇게 쓰는데요. 친구들이 그러는데요. 이 글자가 무엇인지 글자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어요. 저는요 여기서 공부방이 제일 좋아요. 다은이도 여기가 제일 좋다고 항상 그래요.”

 

‘승리’를 왜 써야 하는지 모르는 아이들이 바라본 세상은 가난하지만 그래도 아빠와 엄마 가족들이 따뜻한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했던 그곳이 하루아침에 폐허처럼 무너져 내린 집을 보면서 아이들은 ‘승리’를 배우고 있었다.

 

▲ '승리' 글씨를 차분하고 섬세하게 쓰고 있는 다은이

 

▲ 이날 은주의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 환하게 웃은 얼굴이 항상 가득하기를...

 

그래도 주변에서 도움을 주는 분들과 단체들이 있었다.
현재 철대위 공부방 연구모임이 꾸려져 아이들을 위한 문화 공간 만들어 공부방을 꾸미고, 책꽂이, 벽화그리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고 과거 ‘꽃다지’ 노래패 활동가 박향미 선생은 귀띔했다.

 

그리고 지역단체인 ‘인천평화의료 생활협동조합’에서는 지난 2개월 전부터 2주마다 무료진료 및 건강검진을 돕고 있다고 했다.

 

▲ 박향미 선생이 결성한 철대위 노래패 '불나비' - 생협 행사에 참여해 노래 공연을 하고 있다.

 

이날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향촌리 철거주민들은 그들의 소박한 소망을 전해달라고 말했다.

 

“저희들은 오늘 하루하루가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지만, 이렇게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박탈하고 야만스럽게 길거리에 내 몰아세우는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주거환경 개선사업이 저소득층이나 영세민을 전혀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은 법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30평 40평 호화스러운 집 들어가 살라고 해도 돈이 없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사비용 30만원 90만원 받아서 어디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살겠습니까? 주거환경 개선사업 취지에 맞게 저희들이 살 수 있는 소형영구임대주택을 건립해서 입주할 수 있도록 해 주셨으면 합니다.”

 

향촌리 철거민들이 이렇게 싸움을 시작한 것도 벌써 14개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동안 무엇이 변했는지 이들에게서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정부나 지자체의 그 어떤 태도변화도 없다. 또 주택공사의 강제철거와 굳어진 사업진행은 향촌리 철거민들의 처절한 호소와 절박한 요구와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월드컵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출처 : 진보. 미래. 희망
글쓴이 : 박성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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