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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TV방송

[스크랩] 영안 모자는 불자도 좋게 보는 군요



 

 

 

 

전쟁고아 출신 세계 모자王 白聖鶴, 은혜를 갚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손자로 유복하게 살다가, 6·25 때 元山철수 현장에서 가족들과 헤어져 미군부대 쇼리가 된 소년. 오갈 데 없는 한국 소년을 돌봐 주고 생명까지 구해 준 미군병사 빌리. 성공해서 꼭 은혜를 갚겠다고 결심한 전쟁고아는 백만장자가 되어 생명의 은인과 36년 만에 해후했다. 초등학교 3학년 중퇴가 최종 학력인 모자王 白聖鶴 회장의 드라마틱한 삶

 

李根美 月刊朝鮮 객원기자 

 

백만장자가 된 한국 고아 소년

 

 가끔 신문 한 귀퉁이에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인이 한국 고아를 찾는다는 기사가 실린다. 50여 년 전의 꾀죄죄한 모습을 담은 사진까지 실릴 때면, 보는 사람들도 과연 그 소년이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해 한다. 은혜를 입은 한국 소년이 자신을 도와준 미군을 찾고 싶어 미국 신문에 광고를 낸 일은 혹시 없었을까? 그런 일이 있었다. 백만장자가 된 한국의 전쟁고아와 그 고아를 도왔던 미군병사는 36년 만에 극적인 해후를 했고,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미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생명의 은인 빌리를 찾은 고아 소년은 한국의 영안모자 주식회사 白聖鶴(백성학·63) 회장이다. 연간 1억 개의 모자를 생산하여 全세계 모자 판매량의 35%를 점유하고 있는 영안모자는 세계 최대의 모자 생산업체이다. 白회장은 은인 빌리를 찾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전쟁에 참전한 300자주포 대대의 생존 부대원들과 2년마다 미국 와이오밍州에서 친목 모임을 갖고 있다.
 
  白회장은 300자주포 대대원들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첩 「MEMORY OF THE KOREAN WAR」를 제작해 600여 명의 생존 대원들에게 무료로 배포했다. 48페이지로 구성된 이 사진첩에는 한국전쟁의 참상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병사의 앳된 모습, 그들이 七旬 노인이 된 모습이 담겨 있다.
 
  白聖鶴 회장은 열 살 때인 1950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월남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김좌진 장군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에게 군자금을 댔던 日善 백운휘씨이다.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 목릉현 흥원진에 어마어마한 땅을 갖고 있었던 백운휘씨는, 3·1 운동 때 신의주로 건너가 신의주 형무소를 폭파하는 데 주역을 맡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함께 투옥되었던 독립운동가 37명과 탈옥에 성공,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모두 지명수배되어 국내로 돌아올 수 없었다. 이 사실은 1947년에 먼저 월남한 삼촌 백동섭씨로부터 들은 얘기라고 한다. 白회장은 1963년, 한국일보에서 펼친 이산가족찾기를 통해 삼촌과 재회했다.
 
  광복이 되자 백운휘씨는 家産(가산)을 정리해 신의주와 가까운 용암포로 돌아왔다. 광복되던 해 장남이 장티푸스로 목숨을 거두자 손자 聖鶴을 끔찍이도 아꼈다. 백운휘씨는 용암포에서 정미소와 벽돌 공장을 세우고 여섯 개의 지사를 설립했지만 1946년에 공산당에게 다 빼앗기고 말았다. 1946년에 가족들은 모두 원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원산과 가까운 안변에 친척에게 관리를 부탁했던 과수원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1947년 여름 공산당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에게 세금을 고지하고, 세금을 내지 못하면 재산을 빼앗았다. 공산당의 폭정에 못 견뎌 메이지대학 정치과를 나온 성학의 삼촌이 남한으로 먼저 내려갔다.
 
  광복 이후 공산당은 기독교인들을 감시하면서도 예배보는 일을 막지는 않았다고 한다. 聖鶴의 가족들은 매주 원산의 광석교회에 출석했다. 1950년 5월 초순에 밤이면 군인들이 무기를 싣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본 사람들이 많았고 6월까지 인민군들의 움직임이 부산했다. 정작 1950년 6월25일은 평온했다고 한다. 6월29일 원산의 기름탱크가 美軍機의 폭격으로 폭발하여 대혼란이 있었다. 사나흘간 계속 불길이 타오르면서 온 시가지가 기름 냄새로 뒤덮였다.
 
 
  원산에서 李承晩 대통령 연설 들어
 
  7월 초에는 한국군이 포로로 잡혀 지나가는 것을 거리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공산당은 젊은 청년들을 마구 잡아다 인민군에 입대시켰다. 聖鶴의 가족들은 교회 청년들과 함께 원산 외곽에 있는 신고산 밑으로 피란을 갔다. 하지만 10월 초순에 가족들은 다시 원산으로 나왔다. 먹을 것이 없어 산 속에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집이 폭격에 날아가 버리고 없어 교회 근처 빈 집에 들어가 생활해야 했다.
 
  10월15일이 되자 남쪽 군인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인민군들이 여기저기 숨어서 전투기를 향해 총질을 하는 등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사람들이 태극기를 갖고 나와 군인들을 환영했다. 白회장은 10월 하순, 李承晩 대통령이 원산역전 광장 해방탑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연설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李承晩 대통령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억양이 이상했다는 것과 연설 중간 중간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이라고 했던 말은 기억이 나요. 어른들이 「남한의 대통령이 왔으니 이제 통일이 되었다」며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12월 초가 되자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인민군을 돕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원산항 부두를 오가던 미군들이 겨울 들어 부쩍 줄어들더니 아예 보기조차 힘들어졌다. 공산당이 다시 내려오면 기독교인들이 큰 화를 당할 거라는 얘기가 떠돌았다. 광석교회 교인들은 다함께 원산에서 30리 남쪽에 있는 안변섬에 잠시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12월5일 백운휘씨가 미군 GMC 트럭에 치어서 거동을 못 하게 되자 聖鶴의 가족들은 피란을 포기했다. 출발하기로 한 7일 아침, 聖鶴은 교인들이 떠나는 모습을 보려고 부두에 나갔다.
 
  『배가 떠나는 걸 구경하려고 서 있는데, 배 위의 교회 선생님이 나를 불러요. 무슨 일인가 하여 부두와 배를 잇는 浮橋(부교) 발판 위에 올라갔어요. 배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할 때였죠. 교회 선생님이 내가 안되어 보였던지 돈을 주면서 사탕이나 사먹으라고 하더군요. 그 돈을 받으려다 그만 가족들과 이별하게 되었죠』
 
  聖鶴이 그 돈을 받는 순간 통통선이 고동소리를 울리며 목선을 힘껏 잡아 당겼다. 그 충격으로 부두와 목선 그리고 통통선을 이어 주는 부교가 기우뚱했다. 자칫하면 聖鶴이 바다에 빠질 상황이었다. 돈을 건네던 교회 선생님은 聖鶴의 손을 꽉 붙잡고 배로 끌어올렸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울부짖었지만 배는 육지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열 살에 전쟁고아가 되다
 
  어른들은 사흘 후면 원산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거라고 했으나, 국군과 UN군이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결국 닷새 만에 피란선은 주문진으로 향하게 되었다. 주문진에서 열흘 정도 지낸 다음 교인들은 각자 흩어지기로 결정했다. 聖鶴을 데려가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자가 된 聖鶴은 피란민들 틈에 끼어 경주까지 내려왔다.
 
  전쟁 중이라지만 경주는 매일 장이 열렸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聖鶴이 취직한 곳은 경주의 신흥식당이었다. 하지만 그릇을 자주 깨뜨리는 바람에 쫓겨나게 되었고, 다음에 얻은 일자리가 병원 청소부였다. 밥도 적게 주어 늘 허기가 졌던 병원에서 한 달 정도 일하다가 聖鶴은 구두닦이로 나섰다. 하지만 구두닦이들의 텃세가 심해 그 일도 여의치 않았다. 그 와중에도 미군들에게서 물건을 얻으면 구두통에 넣어 소중하게 간직했다. 전쟁터에서 그런 물건은 화폐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1951년 초 날씨가 풀리고 戰勢가 호전돼 유엔군들이 북상을 하자, 그제야 원산의 가족들에게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군들에게 얻은 물건을 주면 기관사가 기차를 태워 줬습니다. 북쪽과 가까운 곳으로 가기 위해 강원도로 향했죠. 어른들이 철로를 따라 걸으면 길을 잃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기에 기차가 다니지 않으면 무조건 철로를 따라 걸었죠』
 
  강원도 홍천까지 무사히 왔지만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었다. 격전지 근처라 사람들도 별로 없어 얻어 먹을 데도 마땅찮았다. 1951년 6월 말, 더운 날씨에 며칠을 굶은 聖鶴은 결국 길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눈 감으면 죽을 것 같아 눈을 부비고 일어나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요. 신문지로 둘둘 말아 놓은 게 보이는 겁니다. 그 속에 말라서 딱딱해진 찐빵 두 개가 들어 있었어요. 날씨가 푹푹 찌는데 찐빵이 상하지 않고 딱딱하다니… 불가사이한 일이죠. 거친 밀가루로 만든 찐빵을 조금씩 떼어 먹으며 기운을 회복했지요』
 
  聖鶴은 산 속에서 헤매다가 강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닷새 동안 오디만 먹고 견딘 적도 있었다.
 
 
  聖鶴을 돌봐 준 김종만 일병
 
  聖鶴은 고아일수록 깨끗해야 한다는 생각에 남루한 옷이나마 자주 빨아 입었다. 1951년 8월 초, 그날도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국군 한 명이 강에서 세수하고 있었다. 聖鶴은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려고 했지만 군인의 눈에는 경계의 눈빛이 역력했다. 당시 남북 양쪽에 어린 첩자가 많아 군인들이 전쟁지역에 있는 아이들을 믿지 못했다. 聖鶴은 재빨리 구두통을 뒤져 아껴 두었던 콜게이트 치약을 꺼내 군인에게 내밀었다.
 
  그 일을 계기로 聖鶴은 김종만 일병과 함께 인근 110포부대에서 살게 되었다. 110포부대는 독립부대로 강원도 홍천에 위치해 있으면서, 105밀리박격포로 6사단을 지원했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열한 살 난 딸이 있었던 김종만 일병은 聖鶴을 아들처럼 아껴 주었다. 聖鶴은 헐렁한 군복을 둘둘 말아서 입고 군인들을 따라 다녔다. 당시에 갈 데 없는 고아들이 군인들을 따라다니는 일이 많았다.
 
  『내가 국군을 따라다닐 때, 북한군과의 전쟁보다 먹을 것과의 전쟁이 더 무서웠어요. 일주일치 부식을 타면 이틀 만에 다 떨어졌어요. 군인들은 틈만 나면 먹을 것을 마련하느라 온 신경을 썼을 정도예요』
 
  미군 부대의 쓰레기통을 뒤지면 먹을 게 나왔다. 110포부대 군인들은 미군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끌어 모아 「한고」라는 통에 넣고 팔팔 끓여 먹었다. 때로는 퀴퀴한 냄새가 날 때도 있었지만 성냥과 담배 등 쓰레기를 건져내고 끓여서 모두들 나눠 먹었다. 군인들은 부대 주변에서 뱀, 개구리, 꿩, 노루, 새, 물고기 등을 닥치는 대로 잡아 먹었다. 특히 산까마귀가 많아 군인들에게 좋은 양식이 되었다. 중공군 시체의 배낭에서 피가 밴 강냉이 가루를 찾아내 끓여 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식량이 모자라 부대원들이 굶는 일이 많아지자 聖鶴은 텅 빈 민가를 돌아다니면서 식량이 될 만한 것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뭔가 공헌을 해야 군인들을 따라다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쇠꼬챙이로 여기저기 쿡쿡 찔러 보면 감자나 곡류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군인들은 어렵게 식량을 구해와도 금방 다 먹어 버렸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먹고 보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白회장은 그런 군인들 틈에서 살아남을 궁리를 했었다고 회고한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프리마 몇 개는 비상식량으로 꼭 간직하고 있었어요. 한국 사람들은 C레이션 안에 들어 있는 프리마를 그냥 버렸어요. 그걸 모아 두었다가 이틀 정도 굶었을 때 혼자 개천에 가서 깡통에다 물을 붓고 하나를 타서 끓여 먹곤 했지요』
 
  1951년 8월 말, 110포부대는 전투투입 명령을 받았다. 聖鶴도 전투지역에 따라가서 포탄 뒤에 붙이는 화약을 나르고, 적군이 쏜 포탄이 몇 km나 날아왔는지 거리를 쟀다.
 
  『특수임무 때 적진에서 고립되거나 대치하고 있을 때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 사복을 입은 내가 항상 앞서 나갔지요. 나는 태연한 척하고 인민군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소대장이 지시한 대로 적군의 포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적군의 수는 얼마나 되는지 슬금슬금 살펴봤죠. 간혹 의심에 찬 눈으로 나에게 말을 거는 인민군이 있었어요. 그러면 능청스럽게 평안도 말과 함경도 말이 섞인 사투리를 구사했죠. 북쪽 말투를 들으면 대개의 인민군들은 별 의심 없이 보내 줬어요』
 
 
  꼬마 정탐꾼이 되어 적진 살피다
 
  지뢰 매설 지역을 찾을 때도 날렵한 아이들이 앞장서기도 했다. 聖鶴도 지뢰제거 작업에 여러 번 동행했지만 한 번도 위험에 빠진 적은 없었다.
 
  1951년 12월에 110포부대는 후방 남원으로 이동해 남원8사단의 전라도 공비 토벌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독립부대인 110포부대는 요청이 있을 때마다 보병 뒤에 붙어다니면서 지원하는 일을 맡았다. 全소대원들이 기차로 제천까지 내려와 트럭에 옮겨 탄 뒤 저녁 무렵에 출발했다. 아흔아홉 구비 박달재를 넘어야 하는데 눈까지 내렸다. 白회장은 지금도 그때만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고 말했다. 박달재를 넘다가 차가 전복되어 34명 가운데 절반인 17명이 죽고 말았다.
 
  『트럭에는 포와 기름을 넣은 드럼통이 실려 있었어요. 갑자기 차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질 때 트럭을 덮은 천막이 찢어지면서 그 천막이 내 몸을 감싼 덕에 나는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았어요. 죽지 않은 사람 가운데서 부상을 입지 않은 사람은 서너 명에 불과했어요. 차가 전복될 때 튕겨나가면서 나뭇가지에 찔리거나 바위에 부딪쳤기 때문이죠』
 
  최극 소대장과 선임하사와 함께 마을로 달려 내려가 총을 쏘면서 동네 사람들을 불러 냈다. 동네 사람들이 지게를 갖고 와서 동네로 시체를 날랐다. 전쟁 중이라 그렇게 하지 않고는 도움을 받을 길이 없었다고 한다. 겨우 부상병들이 몸을 추스르고 있을 때 미군 헌병차와 앰뷸런스가 와서 부상병들을 실어 날랐다. 소대장은 聖鶴에게 죽은 사람들의 주머니를 뒤져 유품을 정리하고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전방에 있을 때 골짜기에서 중공군 시체도 보고 국군 시체도 많이 봤지만 별 감정이 없었어요. 워낙 죽은 사람을 많이 봤기 때문이죠. 하지만 내가 아는 분들의 유품을 꺼내 이름을 확인할 때마다 눈물이 줄줄 흘렀지요. 모두들 나에게 친절했던 형과 아저씨들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나를 처음 부대로 데리고 간 김종만 아저씨는 가벼운 부상만 당했었죠』
 
  이틀 후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장작을 지펴 시체를 모두 화장했다. 최극 소대장은 함께 일하던 병사들을 가족들에게 인계하기 위해 전쟁 중에도 화장을 했다. 모두들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소대원의 반이 죽고 나머지도 부상을 입었으나 보충병이 와서 함께 남원으로 향했다.
 
 
  트럭에 깔린 김종만 일병
 
  110포부대는 3개월간 남원 운봉리 포부대에서 전라도 공비 토벌을 지원했다. 민간인 가운데 공비들과 연결된 사람이 많아 부대원이 모두 몰살당할 뻔한 일도 있었다. 공비 토벌을 마치고 나서 얼마 남지 않은 부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운명을 맞았다. 4.2인치 포는 모두 보병에 인도되고 각각 전출되는 운명을 맞은 것이다. 독립부대인 110포부대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聖鶴은 강원도 양구의 96포병대대 제2포대 3분대로 배치된 김종만 씨를 따라 다시 강원도로 올라왔다. 금성 읍내에서 동남쪽 3km 후방에 떨어져 있는 770고지에 위치한 부대였다. 훈련장에는 155밀리 곡사포가 늘어서 있었다. 제2포대는 병사들이 많은데다 분위기도 삭막했다.
 
  박격포 소대의 군인들이 聖鶴을 친동생처럼 아껴 주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聖鶴이 할 일이라고는 대원들이 훈련 나간 사이에 막사를 지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聖鶴은 스스로 일감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였다. 대원들이 벗어 놓은 빨래를 하고, 양말을 깁고, 때로 총기 손질도 해 놓았다.
 
  부대 앞을 흐르는 강 건너편에는 미군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강 건너라고 해봐야 훤히 보이는 곳이었다. 어느 날 미군부대 쪽을 보던 聖鶴은 깜짝 놀랐다.
 
  『아이들이 있는 거예요. 세상에 나 같은 어린아이가 있다는 걸 생각을 잠깐 잊고 있었던 거죠. 얼마 후 미군부대에 있는 아이들과 마주치게 되었어요. 그 친구들이 나에게 껌과 초콜릿을 주더군요. 그 친구들은 나에게 된장과 고추장을 얻어 갔어요』
 
  聖鶴은 그 아이들을 따라 미군부대에 놀러 가기도 했다. 聖鶴이 미군들에게 얻어 온 비스킷과 초콜릿 등으로 한국군들이 다과회를 갖기도 했다.
 
  聖鶴은 먹을 것도 많고 영어도 배울 수 있는 미군부대가 좋아 보였지만 김종만씨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김종만씨는 聖鶴이 미군부대에서 놀다가 조금 늦게 가면 어떻게든 밥을 남겨두었다가 주곤 했다.
 
  가끔 나타나는 중대장은 귀찮게 아이를 데리고 다니느냐면서 내보내라고 했지만 김종만씨는 끝까지 聖鶴을 돌봐 주었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왔을 때 김종만씨가 포를 연결하고 있었다. 聖鶴은 아저씨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트럭 위로 올라가서 놀고 있었다.
 
  『아악!』
 
  『멈춰, 사람이 깔렸다!』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들리고 사병들이 놀라서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聖鶴도 재빨리 뛰어내려 차 밑을 바라보았다. 포를 연결하다가 잘못되었는지 김종만씨가 트럭에 깔려 있었다.
 
  『아저씨!』
 
  聖鶴은 눈물을 흘리며 차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분대원들이 다가가 얼른 그를 꺼냈지만 이미 다리에서 피가 흥건히 배어 나왔다. 신속하게 들것에 실어 김종만 씨를 앰뷸런스에 태우고 떠나버렸다.
 
  『저도 같이 가요. 저도 태워 줘요』
 
  성학의 외침에도 아랑곳없이 앰뷸런스는 속도를 냈다.
 
  『부대원들은 곧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고 아무도 내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요. 김종만 아저씨가 없는 부대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어요. 그 자리에 푹 꼬꾸라져서 한참을 울다가 건너편 미군부대로 터벅터벅 걸어갔어요』
 
  白聖鶴 회장은 김종만 일병과 함께 지낸 기간이 불과 9개월이지만 그 기간이 마치 10년처럼 길게 느껴졌다고 한다. 김종만씨가 없었다면 자신이 전쟁터에서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후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김종만씨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聖鶴이 찾은 미군부대는 제300자주포 대대로 미군 제24사단과 한국군 6사단을 지원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미국 와이오밍州 방위군의 한 병력으로 한국전쟁에 긴급 동원된 부대였다.
 
 
  미군부대의 쇼리가 되다
 
  홍천을 거쳐 금성 전투에 참가했다가 금성천 지류인 월봉산 기슭에 포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전선의 변동으로 96포대가 있는 교암산 아래 능동 벌판에 자리하게 되었다.
 
  聖鶴은 미군부대 앞에서 서성거리며 자주 만나던 친구 쇼리 문이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해질녘에 쇼리 문이 정문으로 나오는 걸 보고 聖鶴이 달려갔다. 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쇼리 문이 미군들에게 聖鶴을 쇼리로 일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모두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스름 저녁에 갈 데라곤 없는 聖鶴을 위해 쇼리 문이 다시 한번 사무실에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있던 한 미군 병사가 두 아이를 보고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쇼리 문이 聖鶴을 소개하자 그 병사도 세탁부를 둘 만한 형편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어쩐지 그 병사가 친근하게 느껴졌어요. 그동안 귀동냥으로 들은 영어를 총동원하여 갈 곳이 없으니 여기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죠. 내가 안 되어 보였던지 한참만에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聖鶴은 그 길로 미군 병사 빌리의 쇼리가 되었다. 당시 빌리의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다. 聖鶴은 원산을 떠난 뒤로 거의 1년 반 만에 끼니 걱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쇼리들은 미군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었지만 굶는 일은 없었다.
 
  『한국 군인들은 「인민군이 나타나면 하나 쏴 죽이고 고깃값이나 하고 죽어야지. 내 살값은 해야지」라며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에 비하면 미군들은 여유가 많았어요. 한국군들은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몰라 늘 긴장해 있었는데 미군들은 춤추고 기타 치며 여가를 즐겼어요. 일단 미군들은 먹을 게 풍부하니 여유가 있었던 거죠』
 
  하지만 미군들도 치열하게 전투를 했다. 며칠 밤을 새며 포를 쏠 때면 쇼리들이 뜨거운 커피를 끓여서 밤새 미군들에게 날랐다. 북쪽에서 미군부대로 포가 날아들어 포탄에 푹푹 파인 구덩이가 생겼다. 산 뒤에서 미군부대를 향해 날아온 곡사포에 미군들이 죽기도 했다.
 
  聖鶴은 다른 군인들에게도 인정받아야 쫓겨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막사를 깨끗이 청소하고 다른 사람이 벗어 놓은 양말이나 셔츠까지 말끔히 세탁했다. 빌리는 聖鶴에게 늘 먹을 걸 챙겨 주었고 밤이면 자신의 침대 옆에 나무 박스로 잠자리를 만들어 그 위에 재웠다. 빌리는 시간이 나면 聖鶴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고, 독감에 걸렸을 때 약을 구해 주고 밤새 간호했다. 빌리는 일본으로 휴가를 다녀오는 길에 聖鶴에게 줄 호랑이가 그려진 점퍼와 여러 가지 선물을 사갖고 왔다.
 
  미군들은 적군이 보이지 않는데 포가 계속 날아오는 것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소위가 OP 관측소에 시찰을 갔다가 날아온 포탄에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聖鶴은 영웅심에서 정찰을 나가겠다고 자청했다.
 
  『한국군에 있을 때 정찰을 나가 본 경험이 있었던데다 어려서 겁이 없었던 거죠. 미군들에게 잘 보여서 쫓겨나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작용했겠죠. 미군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방법이 없었던지 나에게 이틀 동안 지도를 짚어 가면서 주변 지형을 교육했어요』
 
  聖鶴은 냇물을 건너가서 이틀 동안 돌아다니면서 적진의 포부대가 어디 있는지 살펴보았다. 남루한 옷을 입고 금성 시가지 인근의 개울가를 따라 10리 길을 걸어갔다. 적진 쪽을 넘자마자 인민군에게 발견되었다.
 
  『동무, 여기서 뭬하는 게야?』
 
  인민군이 눈을 부라리며 물으면 聖鶴은 천진한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인민군으로 나간 아바지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해서 온 거야요』
 
  聖鶴이 함경도 사투리로 말하면 대개 의심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적진의 동태를 살핀 뒤 해질녘에 미군부대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낮에 본 것을 그림을 그려 가면서 미군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밤이면 인민군들이 전화 선을 끊곤 했는데 그럴 때면 聖鶴이 OP 관측소에 뛰어올라가서 메모를 전해 주기도 했다.
 
 
  생명의 은인 빌리
 
  聖鶴이 미군부대 생활에 익숙해지고, 영어도 웬만큼 익혀 어려움이 없을 때 난데없는 소식이 날아왔다. 美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이 미군부대에 있는 열다섯 살 이하 어린이를 모두 고아원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여섯 명의 쇼리 중에 열두 살이었던 聖鶴만 그 대상이었다. 이튿날 聖鶴은 미군 차량에 실려 후방에 있는 고아원으로 갔다.
 
  그러나 군대에서 성인들과 생활하면서 조숙해진 聖鶴은 또래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결국 몰래 고아원을 도망나온 聖鶴은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미군부대로 되돌아왔다. 부대원들은 聖鶴이 유난히 빌리와 친밀하게 지낸 것을 알고 함께 생활하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1952년 12월, 성탄절을 며칠 앞둔 날 빌리는 聖鶴에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스웨터 한 벌과 바지 몇 벌, 털장화 한 켤레, 가죽 단화 두 켤레가 들어 있었다. 聖鶴은 너무 감격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빌리가 미국의 가족들에게 부탁하여 聖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한 것이다.
 
  1953년 6월, OP 센터에 서류를 갖다 주고 오는 길에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성학은 개천에서 5~6m 떨어진 곳에서 포탄 상자에 따뜻한 물을 채우고는 팬티만 입고 들어갔다. 개울물은 목욕하기에는 아직 좀 차가웠던 것이다. 갑자기 「뿅뿅」 소리가 들렸다. 「뿅뿅」 소리는 가까운 데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이고, 「쉐쉐쉐」 하는 소리는 포탄이 멀리 날아가는 소리이다. 성학은 한국군 포부대에 있었던 경험을 살려 아주 가까운 곳에 포탄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막사로 들어가기 위해 일어섰다. 그 순간 근처 기름통에 포가 명중해 다른 기름통으로 옮겨 붙으면서 주변이 불바다가 되었다.
 
  『휘발유통 하나가 나에게 쏟아지면서 온 몸에 불이 붙은 겁니다. 순간적으로 개천으로 뛰어 들어가서 엎드렸어요. 「치이익」 하고 불 꺼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내 몸에 불이 붙었던 시간은 몇 초에 불과했을 겁니다. 하지만 맨살에 기름불이 붙었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지요. 개울로 달려가 엎드린 후 정신을 잃었어요. 그냥 두었으면 정신을 잃고 개천에 떠내려가다가 가라앉아 죽었을 겁니다』
 
  개울에서 40~50m 떨어진 곳에 벙커가 자리하고 있었다. 聖鶴의 몸에 불이 붙은 사실을 알고 빌리가 야전 점퍼를 들고 뛰어 나갔다. 빌리는 막 떠내려가는 聖鶴을 건져 점퍼에 싸서 벙커로 돌아왔다. 곧 중대장에게 연락했고 포탄이 잠잠해진 틈을 타서 지프에 聖鶴을 실었다. 聖鶴의 몸은 부풀어 진물이 나기 시작했다. 부대에서 20km를 달려 헬기장에 도착했고, 헬기는 聖鶴을 태우고 화천 인근의 미군 야전병원으로 날아갔다.
 
  18시간 만에 깨어난 聖鶴의 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성한 데라곤 한 군데도 없었다. 얼굴까지 붕대로 덮여 입만 겨우 벙긋거릴 수 있었다. 미국인 간호중위가 하루에 두 번 몸에 감긴 붕대를 새로 갈아주었다. 몸에서 진물이 흘러나와 시트를 날마다 갈아 줘도 늘 흥건히 젖었다. 白회장은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빌리가 찾아오는 게 유일한 樂(낙)이었다고 회상했다.
 
  『빌리는 틈만 나면 찾아와서 위로해 주고 용기를 주었어요. 친구들까지 데리고 열 번 정도 왔을 거예요』
 
 
  열다섯 살에 모자상점 점원이 되다
 
  1953년 7월, 전쟁의 막바지에 철의 삼각지대인 중부전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300대대도 이 전투에 참여했고, 밀고 밀리는 가운데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마침내 총성이 멎었다.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되었고, 3년 1개월간 끌어온 전쟁이 勝者 없이 멈췄다.
 
  聖鶴은 休戰(휴전)이 되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얼굴의 붕대를 풀었을 때 한동안 오지 않던 빌리가 찾아왔다. 聖鶴의 몸은 군데군데 진물이 남아 있고 껍질이 벗겨지긴 했지만 처음보다 훨씬 좋아진 상태였다. 빌리는 병실에 들어오면서 탄성을 질렀다.
 
  『야, 정말 많이 나았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두 사람은 오랜만에 밀린 얘기를 했고, 빌리는 무슨 얘긴지 할 듯 말 듯 하다가 그냥 돌아갔다. 빌리는 헤어질 때 평소와 달리 눈물을 흘렸다. 빌리가 귀국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병문안을 왔지만 聖鶴에게 차마 작별인사를 못 한 것이다. 얼마 후 빌리가 귀국했다는 사실을 안 聖鶴은 서럽게 울었다. 할아버지와 김종만 아저씨에 이어 빌리까지 떠나자 자신이 정말 혼자라는 게 뼈저리게 실감 났다고 한다.
 
  聖鶴은 화천 야전병원에서 3개월을 보낸 뒤 횡성 미군비행장에서 며칠을 지냈다. 1953년 9월, 1군단 고문관 의무실로 옮긴 聖鶴은 의사의 지시대로 진물이 나는 곳마다 노란 연고를 빠짐없이 발랐다. 상처에 딱지가 앉고 더 이상 진물이 나지 않자 의사는 바닷가에 가서 피부를 시커멓게 태우라고 했다.
 
  1954년 여름, 얼굴에 연고를 바른 다음 선탠을 하자 얼굴의 피부가 한꺼풀씩 벗겨졌다. 딱지가 앉은 겉피부도 자연스럽게 벗겨졌다. 세 번의 선탠을 하면서 피부가 벗겨지고 나자 보들보들한 새 살이 돋아났다. 聖鶴은 화상 흉터 하나 없이 1955년 3월에 퇴원을 하고 미군병원을 떠나게 되었다.
 
  1955년 3월, 聖鶴은 전쟁에서 살아남아 서울에 왔지만 갈 데가 없었다. 국군과 생활할 때 한 사병이 서울에 가면 자신의 누나 집에 가보라고 적어 준 주소가 있어 무조건 그 집을 찾아갔다. 그 누나 집에서 며칠 머물 때 취직하게 된 곳이 바로 학생모자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공원이 된 지 1년 만에 정식 점원이 되었고, 주인의 신임을 얻어 두 개의 점포를 관리하게 되었다. 18세 때까지 그 가게에서 일하면서 모자 제조기술과 판매방법, 유통에 대한 기술을 익혔다.
 
 
  열아홉 살에 모자공장 사장으로 변신
 
  1959년 19세 때 聖鶴은 서울 청계천 4가에 모자 상점을 차리고 사장으로 변신했다. 새벽 1~2시까지 열심히 일한 白사장은 불과 1년2개월 만에 가게를 확장하여 종로로 이전했다. 1962년 22세가 되던 해 공장 규모를 대폭 늘리고 직원도 많이 채용해 모자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갑자가 화폐단위가 「환」에서 「원」으로 바뀌면서 새 지폐가 나왔다. 1962년 여름, 정부에서는 개인당 500원만 舊화폐를 新화폐로 바꿔 준다고 발표했다. 많은 사람이 舊화폐는 휴지조각이 된다고 생각했다. 물건의 매매가 중단되었지만 白사장은 舊화폐로 물건을 팔았다.
 
  대신 모자 가격을 대폭 인상했다. 모자는 순식간에 다 팔려 나갔다. 정부가 화폐를 바꿔 주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 모험을 했던 것이다. 발표한 지 3주 만인 7월 중순에 舊화폐 전액을 新화폐로 바꿔 준다는 정책이 발표됐다.
 
  자금을 많이 확보한 白사장은 공장을 확장하여 좋은 위치로 가게도 옮겼다. 전국에 대리점을 개설하고 승승장구했다. 1965년 산업박람회가 서울에서 대대적으로 열렸는데 당시 「영안모자」도 제품을 출품했다. 격려차 현장을 방문한 朴正熙 대통령이 모자 전시장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영안모자로구만, 나도 이 회사 모자를 자주 쓰는데 제품이 아주 우수해. 무역진흥공사에서 수출육성상품으로 지원해도 좋을 것 같아』
 
  대통령의 한마디에 다음날 조사팀이 회사에 와서 수출방안을 모색해 주었다. 이듬해 공장 규모를 확장, 일본에 모자를 처음으로 수출했다. 하지만 보세가공 수준이어서 제품 물량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일본 회사가 돈을 벌었다.
 
  영안모자가 독자적으로 모자 수출을 모색하자 일본 회사는 기자재 보급을 중단하는 등 방해공작을 폈다. 하지만 白사장은 유태계 상인의 도움으로 미국 수출의 길을 열었다. 미국 대도시를 돌며 모자 세일즈를 할 때 영안모자는 큰 인기를 끌었다. 가격이 저렴한데다 바느질이 꼼꼼했던 게 주요 원인이었다.
 
 
  미국에 진출하자마자 빌리 찾아나서
 
  1970년에 영안모자는 총 15만9000달러어치를 수출했다. 白사장은 1971년에 국내 판매를 전면 중단하고 모자에 영안 상표를 부착해 해외수출에 주력하기로 했다. 국내에는 영안모자가 아니더라도 10여 개의 군소업체에서 만드는 양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白사장은 해외 바이어들에게 영안상표를 부착해 팔다가 클레임에 걸리면 100% 책임지고 가격의 3%를 할인해 주겠다는 조건을 내밀었다. 바이어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72년부터 모든 제품에 영안상표를 부착했다. 1970년대 초만 해도 국내에서 고유 상표를 부착해 수출하는 업체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해외수출이 순조로운가 했더니 1972년에 미국에서 모자를 쓰지 않는 히피족 스타일이 유행하면서 모자업계가 타격을 입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스포츠 열기가 대단했다. 야구와 미식축구에 대한 관심은 거의 광적이었다. 야구 경기를 보다가 白사장은 무릎을 쳤다.
 
  미국 프로야구단에 기념품을 50년이나 납품해 온 데이비드 왈소씨를 만나 팬 서비스 모자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납품하겠다고 제의했다. 일본과 대만, 홍콩에서 납품받은 팬 서비스용 모자가 질이 낮아 팬들에게 인기가 없어 고민하던 왈소 씨가 白사장의 제의를 선뜻 받아들였다.
 
  영안모자에서 제작한 모자를 주는 날은 입장권이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자 운동구점이 아닌 백화점과 일반 상점에서도 모자를 팔기 시작했다. 광고용·기념품용·직원용 모자 주문이 밀려 들어왔고, 영안모자는 세계적인 모자 회사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영안모자는 1984년에 南美 코스타리카 진출을 시작으로 해외 공장 건립에 박차를 가했다.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자 사회사업 시작해
 
  白聖鶴 회장은 처음 모자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틈틈이 불우이웃 돕는 일에 나서면서 55세 이후에 본격적으로 사회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1983년 9월1일 대한항공 007편이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사건을 계기로 사회봉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틀 전에 내가 탔던 비행기였어요. 내가 뉴욕에서 업무가 늦어져서 그 비행기를 탔더라면 나도 죽었겠죠. 그러면 55세부터 사회사업하겠다는 결심을 실천할 수 없잖아요』
 
  가장 먼저 실천한 것이 독립기념관 건립에 5억원의 성금을 기탁한 일이다. 당시 대기업 회장도 2억~3억원밖에 안 할 때였다. 無名(무명)으로 거액을 기탁하자 언론에서 기탁자를 찾기 위해 한동안 애를 썼다. 이후 독립기념관에 화재가 났을 때 1억원을 더 기탁했다가 결국 白회장의 신분이 드러나 화제가 됐다.
 
  白회장은 1983년에 자신이 꼬마군인으로 활약했던 홍천 강가에 6만 평의 땅을 매입했다. 1986년에 고아원과 양로원, 교회, 장애인 수용시설, 재활 공장, 병원 등을 완공해 「백학마을」이라고 이름지었다. 건물 하나하나마다 그리운 이들의 이름을 붙였는데 장애인 수용시설은 「빌리 사랑의 집」이라고 이름 붙였다.
 
  1984년, 리더스 다이제스트社의 데이비드 리드 기자가 白聖鶴 회장을 찾아왔다. 白회장은 공연히 자신을 자랑하게 될 것 같아 취재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데이비드 기자는 빌리 얘기를 꺼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5000만 부나 발행되며 全세계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니 기사가 나가면 빌리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白회장이 미국 출장을 갈 때마다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빌리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던 중이었다.
 
  白회장은 그 얘기에 솔깃하여 인터뷰에 응했고 리더스 다이제스트 1986년 6월호에 「6·25 때 옛 전우를 찾는 한국의 모자왕 白聖鶴」이라는 기사가 7페이지나 실렸다. 기사가 나가자 미국 전역에서 300여 통의 편지가 왔다. 격려와 칭찬의 편지도 있었지만 자신이 빌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편지도 많았다. 다행히 리더스 다이제스트 한국판을 통해 한국군 부대 소대장이었던 최극씨와 분대장 박흥수씨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김종만 일병은 끝내 소식이 없었다.
 
  빌리에게서 연락이 없자 데이비드 리드 기자는 33년간 FBI에서 첩보요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코틀랜드 존스씨를 白회장에게 소개했다. 존스씨는 無보수로 빌리를 찾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기사가 나간 뒤 수확이라면 300자주포 대대 A중대 상사로 복무하다 전역한 데이비스씨가 연락을 해 온 일이다. 데이비스씨는 『부대에서 일하던 4명의 쇼리 사진을 갖고 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白聖鶴인 것 같다』는 편지와 함께 사진을 보내왔다.
 
  그 사진에는 화상을 입어 붕대로 온 몸을 칭칭 감고 있는 40년 전의 「쇼리 학」이 있었다. 데이비스 상사의 편지로 빌리가 300자주포 대대 A중대에 근무했음이 확인되자 존스 씨는 美 육군본부로 달려가 1952년 한국참전 300자주포 대대원의 명단을 열람했다. 그 부대에 「빌리」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가 12명이나 있었다. 그들의 주소를 하나하나 추적하여 연락을 취했지만, 모두 白회장이 찾는 빌리는 아니었다.
 
 
  빌리가 아닌 비티, 드디어 은인을 찾다
 
  그러던 중 白聖鶴 회장은 1986년 9월 백학마을 준공식 때 사진을 보내 준 데이비스씨 부부를 초청했다. 그때 데이비스 씨가 6·25 때 참전한 300자주포 대대 병사들에게 사진을 가져오게 하여 사진을 보고 빌리를 찾자고 제안했다.
 
  1989년 5월, 36년 만에 A중대 전우 14명이 캔자스 시티에 모였다. 白회장은 그들이 가져온 1000장의 사진을 하나하나 뚫어지게 살펴보았다. 이틀 동안 사진을 보고 또 보았지만, 빌리라고 느껴지는 사람이 없었다. 워낙 오래되어 기억이 희미해진 탓도 있었다. 전우들과 헤어지기 전날 밤, 白회장은 확대경까지 들이대고 다시 꼼꼼히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한 장의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내가 「빌리를 찾았다」고 큰 소리를 질렀지요. 그러자 전우들이 다가와서 사진을 보더니 「이 사람은 빌리가 아니라 데이비드 비티야」라고 말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비티」라고 부르는 것을 내가 빌리로 잘못 들었던 거죠』
 
  한국으로 돌아온 白회장에게 곧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비티가 필라델피아 포트 리치먼드에 살고 있음을 알아냈다는 소식이었다. 데이비드 리드 기자와 존스 씨가 먼저 찾아가 白회장의 소식을 전하자 비티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정도의 친절은 당연한 건데 뭐하러 날 찾느라 그렇게 수고를 했는지 모르겠군요』
 
  존스씨의 연락을 받고 白회장은 정확히 3시간 만에 미국行 비행기에 올랐다. 16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내내 가슴이 떨렸다고 한다. 비티의 집을 방문했을 때 58세가 된 初老의 신사가 白회장을 맞아 주었다. 36년 만에 만난 비티는 『학, 옛날보다 많이 컸군』이라며 白회장을 껴안았다.
 
  두 사람은 6시간이나 손을 놓지 않고 쌓인 얘기를 주고받았다. 비티는 1957년에 제대한 후 20년간 제빵공장 노무자로 일하다가 필라델피아 한 건물의 야간관리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임금은 시간당 8달러였고, 자녀는 넷이었다. 白회장이 비티에게 집과 차를 사주고, 자녀들의 학비를 대고 싶다는 의사를 조심스럽게 전했다. 그러자 비티는 이렇게 말했다.
 
  『학, 나는 너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선물이라고 생각해. 내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는 이제 월부금이 거의 끝나가고 내가 버는 돈으로 우리 식구가 어려움 없이 지낼 만해. 난 지금까지 승용차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차도 필요 없다네. 그러니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게나』
 
  1990년 3월호 리더스 다이제스트에는 「6·25 때의 은인을 찾은 모자왕 白聖鶴」이라는 제목으로 또 한 번의 기사가 나갔다. 그 기사를 계기로 1993년부터 지금까지 300자주포 대대원들은 2년마다 한 번씩 만남을 갖고 있다.
 
  첫 해에 600여 명의 대원들이 모였고, 요즘은 300여 명이 모인다고 한다. 비티는 한국을 방문해 영안모자 본사를 둘러보고, 강원도 홍성의 백학마을을 방문해 자신의 이름을 딴 기념관들을 둘러보면서 「쇼리 학」의 성공을 축하해 주었다.
 
  白聖鶴 회장과 비티는 1995년 워싱턴에 위치한 한국전쟁기념비 완공 기념식과 2000년 6월25일 한국전쟁 50주년 기념행사 등에 미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 미국 굴지의 영화사들과 출판사들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영화와 책으로 만들자고 제의했다. 白회장은 공연히 인간적인 자랑이 될까 봐 지금까지 그 일을 사양하고 있다.
 
 
  全세계 모자업체 중 1위
 
  현재 영안모자는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한 9개국에 11개 공장과 15개 판매회사를 갖고 있다. 매년 1억 개의 모자를 만들어 연간 2억2000만 달러의 매출액을 올리는 영안모자는 全세계 모자 생산량의 35%를 생산하는 세계 1위 모자업체이다. 영안모자의 全세계 공장에 근무하는 직원은 5500여 명에 이르며, 경기도 부천시에 있는 한국 본사 직원 180여 명이 연구 개발과 샘플 제작을 하고 있다.
 
  국내 본사와 해외 공장은 수시로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생산 주문과 관련된 의사 소통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영안모자는 홍콩텔레컴에 月 1만 달러를 내고 위성을 이용한 국제전화 전용회선을 사용하고 있다.
 
  白회장은 15년 전에 나라에서 버린 봉제사업을 해외로 끌고 나가 한국 직원들도 먹고 살고, 해외에서 고용 창출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白회장은 해외에서 번 돈을 국내로 들여오면서,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있다. 영안모자의 빚은 재산대비 5% 정도라고 한다.
 
  『사업이 많이 커졌지만 안 망한다는 보장이 없어요. IMF 때 이자가 35%까지 치솟았어요. 그때 빚이 있었으면 망했을 겁니다. IMF 때 우리는 실업자를 구제하는 차원에서 신입사원을 30명 정도 채용했어요. 기업인은 나라가 불안할 때 책임을 다할 줄 알아야 합니다』
 
  원부자재를 해외에서 구입해 해외에서 판매하기 때문에 국내 경기에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白聖鶴 회장은 그동안 다양한 제의가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세계적인 패스트푸드점에서 제의가 오기도 했고, 동업을 하자, 투자를 해달라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합니다. 나는 내가 갖고 있는 기술인 모자 이외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내 세대는 모자를 완성시키고, 2세들이 다른 걸로 뻗어나갈 수 있게 경영 지도를 하고 있지요』
 
  영안모자는 얼마 전 대우자동차 버스 부문을 인수했다. 白회장은 새로운 사업을 펼치는 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10년 전에 코스타리카 자동차 공장을 인수한 뒤 버스와 특장차를 생산하고 있다며, 그 연장선상에서 인수한 사업이라고 했다. 白회장은 호텔과 목장도 소유하고 있다.
 
  『부동산을 활용하기 위한 개인사업이지요. 개인사업을 해서 고용도 창출하고 세금도 내고 있습니다. 개인 돈이 없으니 회사 돈을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하는 겁니다. 세금을 적게 내려고 안간힘 쓰는 사람들이 많아요. 나는 불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하지 않기 위해 개인사업을 합니다』
 
  白회장은 44년간 사업하면서 개인소득세를 182억원이나 냈다. 1970년대 이후 언제나 개인소득 80위 안에 들었다. 白회장은 세금을 많이 내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자식에게 정직한 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제대로 내야 합니다. 제대로 상속해야 자식도 제대로 사업하지요. 자식에게 돈이 아니라 신의, 약속, 신용을 넘겨야 합니다. 2세가 신임을 얻으면 사업은 저절로 잘 되게 되어 있어요. 마음을 비우는 게 중요합니다』
 
  白회장은 빌리와 재회한 것과 아내를 만나 가정을 갖게 된 것이 가장 기쁜 일이라고 말했다. 白회장은 아내의 모교인 이화여대에 어머니를 기념한 교회를 지어 기증했고, 해외에도 백학마을 7개를 건설해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다.
 
  白聖鶴 회장은 1950년에 열 살의 나이로 월남했을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고 말했다. 그가 30년 된 가방과 지갑을 기워서 들고 다니는 걸 보고 주변에서 『너무 궁상 아니냐』며 놀릴 정도로 검소하다. 골프도 치지 않고 별다른 취미도 없다는 그는 지갑에 약간의 비상금만 넣어 다닌다고 했다. 白회장은 사업가든 정치인이든 종교인이든 과한 욕심을 내면 실패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평생 욕심 부리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출처 : 희망의 새 방송을 준비하는 사람들
글쓴이 : 와이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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