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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이 하는 기부 오른손이 알도록˝

˝왼손이 하는 기부 오른손이 알도록˝
1% 나눔운동 하나둘 알려지면 급속히 느는 법

“아름다운 부자가 되세요”
시민운동의 간판급 얼굴로 알려져있는 박원순(47·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변호사
의 요즘 화두는 ‘기부’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정신없이 만나고 다니면서
기부문화의 아름다움과 1%의 나눔을 역설하고 다닌다. 지난해 2월 참여연대
사무처장에서 물러난 뒤 지난달 말에는 상임집행위원장 자리마저 내놓았다.
일부에서는 박 변호사에게 ‘이제 완전히 시민운동을 떠난거냐’고 묻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새로운 시민운동의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한다.
어쨌든 짧은 기간 동안 놀란만한 변신을 한 건 틀림없다.
박 변호사는 “참여연대를 떠난 뒤 몇 달 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다”며 “8년
이상 밤낮으로 시민단체 일로 고민했었는데 막상 일을 그만두니까 정신적인
공황이랄까, 일종의 금단현상에 시달렸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기부운동 역시
우리사회의 철학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중요한 운동’이라고 역설하는 그의
표정에는 여전히 운동가의 힘과 진지함이 느껴졌다.

참여연대 새로워질 것

- 창립 때부터 몸담아오던 참여연대를 떠나기 쉽지 않았을 텐데. = 오래 전부터
리더십의 교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생각처럼 발을 빼는 게 쉽지
않았다. 어느 일요일 오전 아무도 모르게 짐싸들고 나온 뒤로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참여연대를 외면했다. 새로운 마인드를 가진 젊은 후배들과 조직을 위해
그게 올바른 방향이라고 판단했다. 또 한편으론 그동안 각종 법개정 운동과
소액주주운동, 낙선운동 등 사회에 큰 바람을 일으키며 쉼없이 달려온 데 대한
피로감이 작용했던 것 같다. 젊은 간사들과 함께 많은 성과를 남겼지만 그들을
너무 많이 괴롭혔다는 생각도 들었다.
- 아름다운재단 일을 맡게 된 뒤 오히려 참여연대 때보다 더 바빠진 것 같다.=
기부문화는 전부터 관심 있었던 영역이고, 재단 역시 99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돈쓰기 운동’으로 기획돼 2000년에 설립됐다. 참여연대에서
뛰쳐나왔는데 참여연대와 비슷한 영역의 운동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민사회의
영역 안에 있으면서 시민사회의 성장과 성숙에 필요한 일을 찾은 셈이다.
참여연대가 엔지오(Non-Government Organization)라면 아름다운재단은
엔피오(Non-Profit Organization)의 영역이다.
- ‘재단법인’을 시민사회의 영역에 넣는 게 아직 생소하다. = 인간은 언제나
생명을 영원히 연장하려는 노력을 해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대신 육체가
사멸해도 그 뜻은 영원히 남는 제도를 만들어냈는데, 이게 바로 법인제도다. 특히
재단법인은 인간이 남긴 돈에 인격을 부여하고 여기에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법률적 장치다. 사람은 죽어도 그가 남긴 돈은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과거엔 재단법인이 일부 경영자들의 편법적인 회사경영에 이용되는 사례가
많았지만, 앞으론 좀 더 많은 공익법인이 생겨나 공익과 자선을 위해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자신이 피땀흘려 모은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줘 낭비하기보다
공익법인 기증을 통해 영원한 삶을 부여하고 선행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법인의 이런 역할은 정부가 할 수 없는 민간의 자발적인 영역이다.
-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재단 보다 아름다운가게가 더 많이 알려져 있다. =
아름다운재단은 아름다운 가게운영 외에도 1% 나눔운동, 기업의 사회공헌프로그램
컨설팅 등을 하고 있다. 기부문화 확장을 위해 사회기부 지수를 만들고, 격년으로
기업의 사회공헌지수라는 것도 만들기로 했다. 기부총서 제작이나 나눔교육도
한다. 또 상속문화의 개선과 유산의 사회적 환원을 위해 ‘아름다운 이별
프로젝트’도 준비 중이다. 지금까지는 언론을 통해 재단소식을 접한 기업이
연락을 해오는 식이었지만, 내년부터는 조직적으로 기부도 권장하고 사람들도
관리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펴나갈 계획이다.

분식회계 악용 현실 착잡

- 최근 상장기업들의 기부금 액수와 순위를 공개했는데 반향이 있었나= 우리
기업은 몇번째냐고 묻는 전화를 많이 받았다. 기업들의 기부문화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좀 놀란 것은 기부금 액수에서 윗순위에 올랐던 한 기업이 다급하게
내게 전화를 했는데, 기부금 액수가 많으면 오해를 받을 수 있어 부담스럽다는
요지였다. 기부금이 분식결산이나 불투명한 회계에 이용되는 일이 많은 우리
기업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지난달 발표 때는 정치자금이나
스포츠단 지원금도 포함돼 있어 실질적인 기부 내용을 비교하지 못했지,만 올 11월
발표 때는 기부의 질까지도 판단할 수 있는 자료를 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 기부문화운동의 대상이 상류층들에게 집중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 아름다운재단에는 1% 나눔운동팀에 간사들이 제일 많다. 1% 나눔에 동참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 가운데는 행상도 있고, 가난한 월급쟁이 직장인이 더 많다. 정부
보조금을 받는 장애인이 1%를 나누겠다고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언론이
상류층의 활동에 많이 주목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만 보도되는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상류층의 기부를 끌어내는 일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나눔’은
기본적으로 ‘부의 이동’이기 때문이다. 최근 50억을 기부한 태평양 창업자
서성환 회장처럼 부자들이 선례를 남기는 게 중요하다.
- 기부문화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셈인데, 초반 평가를 한다면= 서울 안국동
아름다운 가게는 하루 매출액이 200만원이 넘는다. 그 자체로도 이미 흑자구조로
돌아섰다. 정부종합청사 안에 설치된 재활용 가게는 한달 매출액이 40만원이다.
이런 결과가 생긴 이유는 자발성과 헌신성을 갖춘 민간단체가 생산성과 효율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 기부는 일단 정착되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특성이 있다.
최근 하나둘씩 아름다운 기부소식이 알려지지 시작하면서 문의도 늘고 있다. 최근
만난 한 인사는 자신이 운영하는 재단을 우리가 운영해 주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해오기도 했다. 모든걸 정부나 기업에 의존했던 척박한 기부문화에 점점 새싹이
돋고 있다. 5년쯤 뒤엔 기부·모금 시장의 규모가 상당한 수준으로 성장하고 본
궤도에 오를 것으로 생각한다.

아름다운 가게 흑자 돌아서

- 민간의 영역이지만 정부에서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할 부분이 있을 것
같다.= 결국 기부도 인센티브가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기부하고도 세금내야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국내 세제혜택은 개인의 경우 소득의 10%, 법인의 경우는
5%까지밖에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는 개인은 50%, 법인은 30%까지
세제혜택을 준다. 상속의 경우도 50%까지 인정하는 유인책을 쓰고 있다. 아름다운
가게의 경우도 우리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외진 곳에 있다. 돈이 없어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의 옥스팜의 시내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가게를 내주는 건물주에게는 국가가 혜택을 주기
때문이다. 참여정부가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민간 고유의 영역을 인정하고 이들에게 힘을 보태주면,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박 변호사는 인터뷰 말미에 그가 자주 인용하는 10가지 제안을 소개했다.
△의심하지 말고 지금 당장 나눠라 △작은 것부터 시작해 습관으로 만들어라
△좋은 일도 전염된다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1% 나눔을 선물하라 △가진 것
하나만 주면 행복 둘이 돌아온다고 믿어라 △내 자식이 잘되길 바란다면 재산이
아닌 지혜를 물려줘라 △부자를 꿈꾼다면 나눌 줄 아는 부자가 돼라 △돈에서
자유로워지면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젊어서 의식이 명료할 때
유언장을 작성하라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알게 하라
그는 ‘부가 선망의 대상인 사회’가 아니라 ‘부자가 존경을 받는 사회’를
꿈꾸고 있었다. 석진환 기자 soulfat@hani.co.kr


박원순 변호사는 참여연대 이끈 대표적 시민운동가

미문화원 방화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부천 성고문 사건, 말지 보도지침
사건 등.
박원순 변호사는 80년대 수많은 시국사건의 변론을 맡은 인권변호사 출신이지만,
그에게도 한때는 돈 잘벌고 잘나가는 ‘좋은시절’이 있었다. 제법 큰 단독주택에
살며 기사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남들이 삐삐를 신기하게 여길 때 그는
휴대폰을 사용했었다.
박 변호사가 그런 삶의 궤도를 수정하게 된 건 평소 존경하던 선배 조영래
변호사의 죽음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속물적인 부자를 꿈꿔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자신이 두려워졌다는 그는 1991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몇년 뒤
돌아올 때는 평범한 시민운동가가 돼 있었다. 고급 주택도 사라지고, 승용차의
운전기사도 없어졌지만 1995년 몇몇 동료들과 함께 만든 참여연대는 한국사회의
주요한 이슈들을 만들어 가는 중추적인 시민단체로 성장했다. 그가 참여해 이룩해
낸 시민운동의 성과를 인정받아 2000년엔 시민운동가가 뽑은 ‘지난 10년간 가장
훌륭한 시민운동가’로 선정됐었고, 미국 경제전문지 ‘비지니스 위크’가 선정한
‘아시아의 스타 50인’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검사, 변호사, 신문사 논설위원, 겸임교수, 사무처장, 상임이사 등 과거 공식직함
외에도, 그는 이런저런 ‘위원’ 활동 등을 거치며 시민사회를 조율하고 연대를
주선하는 ‘마당발’ 역할을 해왔다. 한 인터넷 포탈 사이트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2160여개의 웹문서가 나타난다. 한사람의 시민운동가 치고는
한국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만 하다.
석진환 기자 soulfat@hani.co.kr

인터뷰 뒤안길참여연대 시절 날카로움 대신나누는 재미로 부드러움 가득

갑작스런 소나기가 쏟아지는 1일 오후 서울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원순
변호사는 이날 인터뷰 몇시간 뒤 곧바로 해외 출장을 떠났다. 네팔과 방글라데시를
거쳐 인도를 다녀오는 2주 동안의 장기 출장이었다.
박 변호사는 “제3세계의 물건을 국내에 들여와 팔고, 거기서 남은 이익을 다시 그
나라 저소득층에 돌려주는 대안무역을 위해 출장을 떠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담보 없이 신용으로 소액의 돈을 빌려주는
소액융자, 이른바 ‘마이크로 크레디트(Micro credit)’를 운영하는 ‘그라민
은행’을 벤치마킹 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출장일정을 설명하는 내내 그의 눈과 몸짓에서는 40대 한국남성들에게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매너리즘’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찾아
몰두하는 그는, 다른 모든 걸 떠나 일단 행복해 보였다. 박 변호사 스스로도
“만일 내가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사건을 다뤘다면 이렇게 열심히 일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요즘 벌이고 있는 기부문화운동에 색다른 재미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참여연대에서 일할 때는 항상 정부기관이나 국회 등에 날을 세우며 항상 어떻게
그들을 비판하고 또 새로운 법안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었어요.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일이었죠. 하지만 기부문화운동은 생활 속에서 새로운 것들을 창조해
나가는 즐거움을 줘요. 신나는 일이죠.”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으면서 ‘시민운동 할 때보다 표정이 한결 부드럽고
여유로워 진 것 같다’는 느낌이 점점 더 확신에 가까워져 갔다. 석진환 기자
soulfat@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