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결국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인가
지난 2002년 8월 8일부터 8월 14일까지
6박 7일간 중국 산동성을 다녀왔다. 산동성은 산동반도라는 지명으로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곳인데, 새벽에 닭 우는소리가 들렸다고 할 정도로
우리나라와는 지리적으로 아주 가까운 곳이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화교들도 대부분이 산동성 출신이고, 우리나라의 중국 음식도 대부분
산동식이라고 한다.
산동성은 그 넓이가 남한의 두 배 정도 되지만
중국 전체로 보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번 산동성 여행에서 중국을 모두 보았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이번 여행에서 마음속에 가장 많이
남고, 잘 풀리지 않았으며, 또 매우 가슴아팠던 것은 '중국혁명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1934부터 1936년, 중국 홍군이
강서성에서 산서성까지 국민당 군과 목숨을 건 전투를 하면서(장정에 참가한 홍군 중 10분의 9가 희생되었다) 1만 2000km를 걸어서 이동한
'대장정'의 성공으로 비롯된 중국혁명이 현재 중국에게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처음 가 본 중국에 대한 첫인상은 극심한 빈부격차였다.
천박한 자본주의의 대명사인 우리보다 어느 면에서는 더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길거리 도처에 거지가 구걸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무릇
사회주의라 함은 모든 인민들이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것일진대 그렇다면 이미 중국은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만 것인가 ? 이제 사회주의는 중국 헌법
제4조 "중국은 공산당의 영도 아래 마르크스 레닌주의, 모택동 사상, 인민민주주의 독재와 사회주의의 길을 견지한다”에나 나오는 사문화된
수사(修辭)일 뿐인가 ? 등소평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론', 등소평 이후의 개혁, 개방이란 결국 자본주의의 다른 이름이었고 그것은 곧
빈부격차를 말하는 것이었나 ? 반면에 청도(산동성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항구도시)의 고급 주택가는 우리나라로 치면
강남 못지 않았다. 차도 고급 외제차가 즐비했고 사람들의 의 입성도 매우 화려했다. 1년 동안 뼈빠지게 벌어봐야 천위안(우리 돈 16만원
정도)을 넘지 못하는, 그래서 자식들 학교도 보내기 어려운 농민들이 대부분인데 비해, 한번 입장하는데 천위안이 넘는 골프장(그래도 우리나라로
치면 무지 싼 것이기는 하지만)을 삼십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무시로 출입하고 있는 중국. 우리를 안내했던 조선족 가이드도 매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옛날에는 부지런한 사람이나 게으른 사람이나 모두 똑같이 분배했다. 그래서 중국 사회가 정체되었다. 더 열심히 일한 사람이 더 많이
받는 게 당연하다. 현재 중국 젊은이들의 꿈은 돈 많이 버는 회사 사장이다." 중국은 결국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인가.
망망대해라는 말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인천에 살면서도 국제여객터미널이 두 개
있는지도 몰랐다. 중국 가는 배는 당연히 연안부두거니 생각했는데 제2 국제여객터미널이 따로 있었다. 거기서는 산동성의 위해항과 청도 항 두 곳만
운행하는데 왜 그렇게 터미널을 여기저기 나누어 놓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8일 11시에 배를 타서 1시에 출항했다. 어렸을
때 사회 교과서에서 배웠던 갑문식항의 원리를 제대로 구경했다. 갑문을 빠져나가는 데만 해도 몇 시간이 걸렸다. '뉴골든브리지'라는 이름의 배를
탔는데 중국 청도 까지는 20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점심은 청국장, 저녁은 스테이크를 먹었다. 승무원은 남녀 모두 거의 백 프로 조선족이었는데
조선족 중에서 예쁜 처녀들만 골라 뽑아다 놓은 듯 했다.
갑판 위에 올라가 보니 사방을 둘러봐도 모두 수평선뿐이었다. <사진 1> 무섭도록 시커먼 바다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런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다. 아, 이런 걸 망망대해(茫茫大海)라고 하는구나. 그 말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할 얘기가
많은데 잘 만나지 못했던 사람끼리는 마음먹고 중국행 배를 한번 타보는 것도 좋을 듯 했다. 스무 시간 동안은 바다에 뛰어내리지 않는 이상 어쩔
수없이 서로 붙어 있어야 하니까. 저녁을 먹고 나서 맥주를 한 캔 마신 후부터 드디어 멀미가 시작됐다. 고통스러웠다. 그렇다고 배에서 뛰어 내릴
수도 없는 일이니 겪어내는 수밖에. 침대 위에 올라가 누우니 침대 전체가 흔들려 더 울렁거렸다. 몸의 리듬을 배의 흔들림에 내맡겨야 한다는데
말이 쉽지 어림없는 일이다. 배에서 내리면 다시 땅이 흔들린다던데. 토하려고 하는 것을 참다가, 그래서 진땀을 흘리다가 또 토하려다가 간신히
잠이 들었다.
"홍와(紅瓦), 녹수(綠樹), 청해(靑海)"의 도시,
청도(靑島)
9일 새벽 6시쯤, 아침식사를 하라는 선내
방송 때문에 잠을 깼다. 시계를 중국시간으로 맞추어 놓으라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그 동안은 중국과의 시차가 얼마나 되는 지도 관심이 없었는데
우리보다 한 시간이 늦었다. 중국은 워낙 땅덩어리가 넓어 원래는 중국내 시간도 지역마다 제각각이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불편하기 때문에
그냥 북경 시(時)를 기준으로 전국이 통일해서 쓴다고 한다. 그래서 해뜨는 시간, 해 지는 시간 등 생활과 전혀 맞지 않는 지역이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고, 그런 지역에서는 출퇴근시간 등을 조정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북경의 출근시간이 아홉 시라면 다른 지역에서는 일곱 시, 또 다른
지역에서는 열 한시 하는 식으로 말이다.
시계를 앞으로 돌려놓았더니 한 시간을 번 기분이다. 콩나물국을
아침으로 먹으면서 이제 며칠동안은 꼼짝없이 중국음식만 먹어야겠구나 생각하니 약간 걱정스러웠다. 배는 아침 9시쯤 청도 항에 도착했고, 수속을
마치고 청도 터미널에 나온 시간이 10시 반이었다. <사진 2, 3> 난생 처음 중국 땅에 발을 디뎠다. 일주일 동안 우리를 태우고
다닐 관광버스가 터미널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많이 태우려고 그랬는지 버스에 의자를 한 줄 더 놓는 바람에 버스가 매우 비좁고 불편했다.
청도시는 산동성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독일식 건물(특히 벽돌 색 지붕), 일본식 건물, 독일 총독관저 등 곳곳마다 식민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1898년 독일에 조차되었는데
그때 지어진 건축물들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앞으로 지어지는 건축물들도 일부러 독일식으로 짓는다고 하니, 그런 식민지 유산들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광자원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도는 또한 청도 맥주로도 매우 유명한데(중국에는 '청도 시는 몰라도 청도
맥주는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맛도 좋고 특히 값도 매우 쌌다. (제일 큰 것 한 병에 인민폐로 3위안, 호텔이나 음식점에서는
5위안을 받는데, 3위안이면 우리 돈으로 480원이다. 나중에 야시장에 갔을 때 셋이서 푸짐한 양고기 꼬치 안주에 맥주 세 병을 거나하게 먹고
나서 지불한 돈이 14위안이었다. 내가 값을 치렀고, 함께 먹은 사람들한테 잘 얻어먹었다는 인사까지 들었다. 우리 돈 2240원 갖고서. 놀랍지
아니한가 ? 미친년 널뛰듯 하는 중국 물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다)
청도에 내려 제일 처음 간 곳이 독일 총독관저였다. <사진 4>관저 2층에 올라가니 청도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식민지 역사가 뭐 자랑이라고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구경까지 시키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걸 자기 것으로 만드는
나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에서 말한 그 유명한 청도 맥주도 사실 알고 보면 식민지의 슬픈 유산 아닌가 ? 청도 맥주는 독일
사람들이 청도를 점령하고 나서 만든 독일식 맥주인 것이다.
총독관저 옆에 붙어 있는 신호산공원에
올라가니까 청도 시내가 더 잘 내려다 보였다. 신호산은 옛날에 배가 항구로 들어 올 때 신호를 올리던 곳이라고 하는데 꼭대기에 회전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회전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청도는 홍와(紅瓦), 녹수(綠樹), 청해(靑海)"의 도시라고 한 가이드의 설명이 실감났다. 청도는
독일식 붉은 기와집에, 집들 사이로 들어선 울창한 나무들, 그리고 푸른 바다가 함께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였다.<사진 5, 6>
노신공원과 청도 해수욕장을 버스 안에서 보면서
드디어 점심식사를 할 식당에 도착했다. 말로만 듣던 중국요리를 처음으로 먹어보게 되었다. '중국사람들은 바다 속에 떠다니는 건 잠수함 빼놓고 다
먹고, 하늘에 날아다니는 건 비행기 빼놓고 다 먹고, 육지의 다리 달린 건 책상과 걸상 빼놓고 다 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예를 들면 상어
지느러미 요리, 곰 발바닥 요리, 모기눈알요리 하는 식이다. 그러면 모기눈알 요리는 어떻게 만드는가 ? 박쥐가 모기를 잡아먹고 사는데 유독
눈알만은 소화를 잘 못시킨다고 한다. 그래서 박쥐의 배설물 중 모기 눈알만 따로 골라내서 요리를 한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정말 듣던
대로 요리도 다양하고, 양도 많고, 가짓수도 많이 나왔다. 열 접시도 훨씬 넘었던 것 같다. 물론 사람들 모두 다 먹지 못하고 태반을 남겼는데
아까운 생각도 들었고, 낭비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중국은 아직도 음식을 많이 남겨야 먹은 사람이나 차린 사람이나 잘 대접받았고,
잘 대접했다고 생각한다니 중국도 빨리 고쳐야할 겉치레 음식문화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날 점심 식사 때 나온 음식을 소개해 보면(중국에는
4대 요리가 있는데 산동요리는 좀 짜고, 사천요리는 맵고, 상해요리는 깔끔하고, 광동요리는 약간 느끼하다고 한다. 물론 우리 일행이 먹은 음식은
당연히 산동요리인데 음식들이 정말 대체로 짰다. 특히 산동은 산, 바다 등에서 나는 물산이 풍부해서 요리의 소재가 다양하다고 한다) 닭고기
볶음, 돼지고기 볶음, 족발 튀김, 새우 튀김, 야채볶음, 잉어 찜, 미역과 달걀 흰자를 풀어 끓인 국, 양장피 비슷한 것, 조개 익힌 것,
밥, 차 , 맥주 등등 수도 없이 계속 나왔다. 일 인분에 10달러 정도 한다는데 우리 돈으로는 싼 거지만 중국 돈으로 하면 청도 맥주 스물
다섯 병을 사먹을 수 있는 돈이니 매우 큰돈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음식이 아무리 화려하고 가짓수가 많아도 입맛에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중국식 향료를 일부러 뺐다는 데도 그랬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여행 내내 식사시간이 썩 즐겁지는 않았다.
중국 음식점에서 알아두어야 할 것을 몇 가지
말하자면 일단 중국은 음식점에서 물을 안 준다. 물은 무조건 사먹어야 한다. (물 한 병에 2 위안 정도 한다) 그 대신 차를 준다. 중국이
차(茶) 문화가 매우 발달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인데, 그건 바로 물 사정이 나빠서 그런 거다. 중국인들은 여행을 다닐 때 대부분 개인용
다기(茶器)를 꼭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또 중국 음식점에서는 이빨이 나간 접시나 그릇을 그대로 쓴다. 음식점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말해주는
거라 하여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순마갱(殉馬坑)과 강태공의 사당
점심을 먹고 나서 순마갱과 강태공의 사당을 보러 치박시까지 버스로 3시간을 달렸다. 치박시는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수도였던 곳이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중국은 땅덩어리가 참으로 넓은 나라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고속도로는 4차선으로 비교적 잘
닦여 있었는데 도로가 굽은 곳이 거의 없이 그냥 쭉 뻗어 있었다. 고속도로 양옆으로는 옥수수를 심었는데 옥수수 밭은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산동성은 강수량이 부족하여(우리나라의 반밖에 안 된다고 한다.) 벼농사는 안되고 대신 밀과 옥수수를 이모작 한다는데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을
보면서 전 세계 사람이 다 먹어도 남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산동성은 농경지가 전체면적의 60%를 차지한다는데 내가 보기에는 고속도로 빼고는
전부 농경지처럼 보였다.<사진 7>
순마갱(殉馬坑)은 동주 시대에 말을 좋아하는
왕 제견공이 죽으면서 말을 600마리나 함께 순장했다는 곳인데 농부가 밭 갈다가 발견했다고 한다. 수백 마리나 되는 말의 화석들이 죽 누워
있었다. 어떻게 살아있는 말을 600마리씩이나 함께 묻을 수 있었는지. 순마갱 입구에서 동네 사람들이 윗통을 벗고 장기를 두거나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에는 별 관심도 없는 듯한 표정들이었다.<사진 8, 9>
강태공사(姜太公祠)는 후에 제나라의 시조가
되는 강태공을 모셔 놓은 사당이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과 그의 아들 무왕을 도와 천하를 평정한 이인데 위수에서 낚시질을 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주 문왕을 만나게 되었다는 사람이다. 그는 "세월을 낚는 것이지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이로 잘 알려져 있지만
"엎질러진 물은 접시에 다시 담을 수 없다"는 말로도 유명하다. 궁핍을 참다못해 도망친 아내를 훗날 거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의 아내가 다시 함께 살게 해달라고 애원하자 그의 아내에게 했던 말이다. 중국은 아직
관광의 개념이 없는 듯 했다. 순마갱도 그냥 인가 한가운데 있었고 강태공사 역시 양고기꼬치와 술을 함께 파는 장사꾼들과 뒤섞여 있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진 10> (하기야 나중에 보니 장사꾼들은 어디에도 있었는데 공림, 공묘 안은 말할 것도 없고 터미널에서는 심지어
출입국 심사대 안에까지 들어와 있었다.)
중국에서의 첫날, 치박시 제도
대주점(大酒店)에서 일박을 했다. <사진 11> 중국에서는 호텔이라는 말을 안 쓰고 자기들 식으로 반점(飯店), 주점(酒店) 또는
대주점(大酒店), 대반점(大飯店)이라는 말을 쓰는데 (물론 영어로는 HOTEL이라고 쓰지만) 작은 술집이나 중국 집을 주점이나 반점으로 쓰는
우리 식으로 생각해 보면, 수십 층이나 되는 으리으리한 호텔 건물에 써놓은 반점, 주점이란 말이 약간 낯설었다. 대부분의 호텔은 국가소유이며
따라서 종업원들도 모두 공무원들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제남시의 황태호텔에서였던가, 아침에 호텔 앞마당에 빨간 티셔츠와 검정바지를 통일해 입은 종업원들이 모두 모여 엄숙하게 국기 게양식을 하고
있었다. 호텔에서 게양식을 마치고 나서야 일과를 시작하는 모습, 호텔과 국기 게양식,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기묘한 결합이었다.
공자의 고향, 곡부
중국에서의 여행을 이동시간으로 따져 우리나라와
비교한다면 인천에서 하나보고, 그 다음 또 대구까지 달려가서 하나 보고, 또 광주 가서 하나보고 하는 식이었다. 그만큼 땅덩어리가 넓다는
뜻이겠다. 10일 아침 8시에 치박시를 출발해 오전 내내 고속도로를 달려 곡부시에 도착했다. 가끔 휴게소에 들렀는데 화장실이 아주 엽기적이었다.
중국의 오래 된 화장실은 칸막이가 없다. 있어도 중간 정도만 가리게 되어 있다. 남성들은 그렇다 쳐도 재래식 화장실 사용해 본 여성들은 매우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또 농민들이 오이를 깎아 파는 게 인상적이었다. 한 개에 일 위안했는데 전부 오이를 하나씩 입에 물고 맛있게 먹는 풍경이
게 약간 우스웠다. 곡부에 도착하자마자 또 점심을 먹었다.
곡부는 공자가 태어난 곳이고 노나라의 수도였다. 기독교의 예루살렘처럼 유교문화권에서는 성지로 여기는
곳이다. 곡부에서는 공부(孔府)와 공림(孔林), 공묘(孔廟)를 구경했다. 이 셋은 모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전부 공자와
관련된 문화유산들이다. 곡부는 시 전체가 공자로 먹고사는 동네 같았다.
'공부'는 공씨 집안이 대대로 살아온
장원(莊園)으로 방이 463개나 된다니 당시 공씨 가문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겠다. 가이드를 따라가지 않으면 찾아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마치 미로 속을 헤매는 듯 했다. 공덕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77대손은 아직 생존해 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살다가 지금은 대만에서 산다고
했다.<사진 12 >
공림은 공씨 집안의 가족묘지 같은 곳인데
공자를 비롯해서 그의 아들, 손자 등등이 묻힌 세계최대의 씨족묘지이다. 그런데 공림 안에도 온통 장사가 양옆에 즐비했다. 도장 파
는 사람이 수도 없었는데 우리말로 도장, 도장하면서 호객을 했다.
또 그 안에는 우리나라 놀이공원에 있는 코끼리 기차처럼 돈을 받 고 공림 안을 순회하는 차도 있었다. 어떻게 생겼을까, 늘
마음속으로만 그려왔던 공자의 묘에 도착했는데 별다른 감흥은 일지 않았다.<사진 13,14,15>
공묘는 공자를 모셔놓은 사당인데 유명한 대성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했다. 기둥의 용조각이 유명하다고 한다.
진시황 때 분서를 피하기 위해 책을 감추어 놓았던 곳도 있었다. <사진16, 17>
공부, 공림, 공묘 주변은 거지들이
득실거렸다. 다가와서 뭐라고 중국말로 구걸을 하거나, 그냥 땅바닥에 앉아 있거나 했다. 거지와 사회주의, 그 함수관계가 잘 풀리지 않았다.
<사진 18, 19>
곡부에는 이렇다할 호텔이 없는지 '태산의
도시'인 태안 시로 이동해서 동악산장이라는 곳에 짐을 풀었다. 동악은 태산의 다른 이름이다.
저녁을 먹고 나서 야시장을 구경했다. 중국의
야시장은 시간을 미리 정해 놓고, 해질 무렵부터 밤10시까지만 열리는 장인데, 물건의 질은 매우 조악했지만 물건 종류는 매우 다양해 거의 없는
게 없었다. 특이한 것은 노래방 기계를 거리에 설치해 놓은 것이었다. 지나가다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돈을 내고 거리에 서서 부르는 모양이었다.
또 포켓볼 비슷한 당구대도 거리에 설치해 놓고 당구를 쳤다. 중국에서 물건값은 정해진 게 없으니 일단 무조건 반으로 후려쳐야 한다고, 먼저
중국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하도 교육을 많이 받아서 도대체 왜 그렇게 말했나 무척 궁금했는데 겪어 보니 그것은 정말 사실이었다. 중국의 물건값은
문자 그대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나도 한번 경험 삼아 흥정을 해보려고 모자 파는 장사에게 다가가서 '태산'이라는 글씨가 한자와 영어로 새겨진
모자를 가리키면서 "쩌거 뚜오 샤오 찌엔(얼마입니까)"하고 물었더니 "스 얼 위안"이라고 했다.
아니 모자 하나에 12위안이라니 싸도 보통 싼 게
아니었다. 12위안이면 2000원도 안 되는 돈이다. 나는 "타이 꾸에이(너무 비싸요)"라고 말했지만 양심상 도저히 6위안으로는 후려칠 수
없어서 2위안을 깎아 10위안을 주고 모자를 샀다. <사진 20> 우리 돈으로 1600원이다. 나는 너무나 싼 모자 값에 감격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모자 자랑을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어떤 사람이 태산에서 나와 똑같은 모자를 5위안을 주고 샀다고 했다. 800원이다. 도대체 중국이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 그래도 남으니까 팔았을 텐데, 그렇다면 그 모자의 원가는 도대체 얼마라는 얘기인가 ?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못 줘도 최소한 만원은
넘게 주어야 살 수 있는 모자를 800원에 파는 나라. 갑자기 중국의 경쟁력이 무서워졌다. 모자뿐 아니라 물건값이 거의 다 그런 식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야시장 옆 좌판에 앉아 14위안을 주고 푸짐한 양고기 고치 안주로 청도 맥주를 세 병이나 먹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태산이 높다하되
11일, 아침에 호텔에 미리 와 대기하고 있던
셔틀버스를 타고 태산으로 갔다. 대형버스는 태산에 못 올라가는 모양이었다.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태산, 양사언의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의 그 태산에서부터 아이들에게 늘 가르쳐왔던 공자의 유명한 시 '등태산이소천하(等泰山而小天下,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게 보인다)'의 그 태산에 드디어 도착했다.
태산은 해발 1545미터쯤 되는 산이니까 사실
그렇게 높지는 않은 산인데 사방이 평지이다가 갑자기 태산이 우뚝 서 있으니 더 높게 생각되는 모양이다. <사진 21, 22>태산은
역대 왕들이 봉선(封禪)의식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중국사람들이 매우 신성한 산으로 치는 곳인데 한번 오르면 10년이 젊어진다는
속설 때문인지, 아니면 휴일이라서인지 내가 간 날도 사람이 무지하게 많았다. 걸어서 올라가면 중천문까지만 해도 6566계단을 올라야하고,
중천문에서 남천문까지 약 3시간, 남천문에서 정상까지 약 30분 걸린다고 하는데, 나는 중천문까지 셔틀버스를 타고 가서 남천문까지는 케이블카를
타고 갔고, 결국 남천문에서 도교 사원인 옥황정이 있는 정상까지만 잠깐 걸었으니 엄격히 따지면 사실 태산을 봤다고 할 수 없다. 하기야 태산을
제대로 보려면 일주일도 넘게 걸린다던가 ? <사진 23, 24>
옥황정에는 사람들이 향을 피우고 진지하게
기도를 올렸다. 옥황정은 물론 옥황상제를 모셔놓은 도교식 절인데 태산의 분위기로만 보아서는 중국은 유교의 나라가 아니라 도교의 나라 같았고,
도교가 중국의 민족종교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옥황정에서 한가지 특이한 풍경은 쇠사슬에 수천, 수백 개의 자물쇠를 매달아 놓은
것이었는데, 연인들이 이곳에 와서 자물쇠를 산 다음 쇠사슬에 걸어 잠그고 나서, 열쇠는 태산 꼭대기에서 밑으로 던져버린다고 한다. 그러면 둘이
영원히 함께 산대나, 둘 사이에 절대로 이별은 없대나 어쩐대나. <사진 25, 26> 태산에서 어떤 선생이 5원주고 모자를 샀다는
얘기는 이미 했는데 태산 매표소 옆의 기념품 파는 곳에서는 똑같은 모자를 무려 70위안이나 불렀다. 올라갈 때는 한 개에 2위안 하다가 내려올
때는 1위안에 두 개 하는 복숭아 값, 그게 중국의 물건값이다.
소달구지에서 핸드폰까지
태안에서 점심을 먹고 제남으로 이동했다.
제남시는 산동성 제일의 도시이다. 산동성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이며 그래서 산동성의 성도(省都)다. 교통 얘기가 나온 김에 이제
중국의 교통과 무질서한 거리 얘기를 좀 해야겠다. 중국의 도로와 거리는 정말로 무질서의 극치다. 중앙선을 지키는 차는 거의 없다. 차와 사람,
오토바이와 자전거, 전차가 뒤섞여 있다. 차가 사람을, 사람이 차를 서로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사고가 덜 난다고 하는데,
곧 부딪힐 듯 하다가도 용케 피해간다. '무질서 속의 질서'라고나 할까 ? 또 중국은 우리가 상상 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거의 모두 존재한다.
전차와 자동차와 오토바이, 자전거는 이미 말했고 그밖에도 씨클로 비슷하게 생긴 자전거로 끄는 인력거, 자전거로 끄는 리어카, 독일영화에 나오는
2차 대전 당시에 썼던 싸이드 카, 아 물론 마차도 있고 소달구지도 있다. <사진 27, 28>
소달구지 옆으로 링컨컨티넨탈도 지나간다. 자동차의 번호 판은 맨
앞이 한자로 '魯'자이고(산동성의 자동차라는 뜻이라는데, 아마 산동성이 공자 당시에 노나라의 땅이어서 그런 모양이다) 다음은 알파벳으로 A,
B, C 순서로 나가는데 제남시는 A, 청도시는 B, 치박시는 C 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차번호가 魯 B 00852라는 자동차라면 산동성 청도시 소속의 자동차라는 뜻이다. <사진 29> 시내 버스 운전을 젊은
처녀들이나 아줌마들도 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중국의 교통정책에서 몇 가지 배울 게 있었는데 넒은 도로에서는 자전거 도로가 따로
있다는 것과(우리 식으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게 아니라 차도 바로 옆에 자전거 도로를 따로 만들어서) 또 신호등의 남은 시간을 숫자로 표시해
준다는 것이다.
교통수단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중국은
60년대부터 2천년대까지의 문물이 함께 공존하는 나라였다. 곧 쓰러질 듯한 집부터 수십 층 되는 빌딩이 한 도시에 있다.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노인 옆으로, 한 젊은이가 핸드폰 통화를 하고 있다. (핸드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 넓은 중국 땅덩어리 어디든 핸드폰이 다 터진단다. 심지어
몽고까지도. 중국 대륙 전체에 벌써 망을 다 깔았다는데 중국 대륙이 산이 별로 없는 것을 감안한다해도 놀라운 일이다. 요금은 거는 사람, 받는
사람 둘 다 낸다.)
제남시에 도착해서 산동성박물관을 구경했다.
<사진 30> 송, 원, 명, 청대의 청동기 등 흔히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유물들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박물관 3층에
올라갔더니 운 좋게도 중국 공산당 창립 80주년 기념 중국혁명 문물전을 하고
있었다. 1921년부터 1949년 중국정부 수립까지의 중국혁명과 관련된 유물 약 200여 점이 전시되었는데, 총, 망치, 끌, 작두, 칼,
가방, 깃발, 폭파장치, 지뢰, 혁명군들이 사용하던 교재 필사본, 아동단 단기, 모자, 수첩, 호외, 신문, 도장, 박격포 등등 혁명 당시 썼던
물품들을 진열해 놓았다. 저렇게 죽을 고생을 해서 성공한 혁명이 현재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니 다시금 착잡한 심정에
젖어들었다.
제남은 샘이 많은 도시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샘인 표돌천을 구경하고 황태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황하에 물이 없다.
우리가 책을 통해 알고 있는 황하는 4대
문명의 발상지로 중국 북부를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중국 제2의 강이다. 그 길이가 5,464km에 달하고,‘물 1말에 진흙 6되’라고 할 정도로
유수(流水) 중에 토사 함유량이 많다고 알려져 있는 황하강, 12일 황하를 찾아갔으나 그런데 아 ! 물이 없었다. 황하강이 이런 곳이었던가 ?
아니 이런, 황하강에 물이 없다니. 박지원의 '일야구도하기'에 나오는 그 무시무시한 강물은 아니라 하더라도, 아예 물이 별로 흐르지 않는다니.
너무나 많이 들어 왔고, 잘 알지도 못하고 가르쳐 왔으며, 그래서 꼭 한번 와 보고 싶었던 황하에 대한 실망감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산동성은 특히 황하의 하류라 더 그렇겠지만 황하는 이미 웅대한 강이 아니라 조그만 하천에 불과했다. 5400여 킬로미터를 달려 내려오느라 이미
지쳐버린 모양이다. 인구가 늘어나고 상류부터 전부 물을 끌어대 쓰다보니 하류에서는 물의 양이 급격하게 줄어든다고 했다. 다음에 황하의 상류나
중류에서 다시 한 번 봐야겠다. 과거 황하의 위풍당당한 위용을 알려주는 증거물이 하나 남아 있기는 했다. 바로 다리의 길이였다. 다리의 길이가
무려 3킬로가 되었다. <사진 31> 물이 점점 졸아드는 황하에 비해 양쯔강은 해마다 홍수로 범람하여 큰 피해를 주고 있어서 양자강과
황하강 사이를 잇는 운하를 10년 계획으로 건설중이라고 한다. 소위 '남수북조(南水北調)’라고 부르는 계획인데,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중국사람들은 아마 반드시 건설해낼 것이다. 만만디(漫漫的), 도대체 급할 게 없는 중국 사람들이니까.
유방시로 가서 연 박물관을 구경했다. 톨게이트를 빠져 나오니 벌써 연장수가 보인다. 유방은 연의 도시다.
해마다 세계 연축제도 이곳 유방에서 열린다고 한다. 연은 전부 손으로 만들었는데, 제작한 연을 직접 팔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큰 연을 사람들이
어떻게 들고 가나 걱정했는데 모두 조립식이었다. <사진 32>
오후에 도교의 발상지 노산 북구수 계곡을
등산했다. 폭포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중국에서 가장 많이 걸어본 시간이었다. 노산을 내려오는데 비가 내렸다. 중국에 가서 처음으로 비를
구경했다. <사진 33> 첫날 도착했던 청도에 있는 강교호텔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고 까르푸에 가서 쇼핑을 한번
해보겠다고 호텔을 나섰다. 그런데 말이 안 통하니 택시를 타기도 겁나고(어떤 사람이 외출했다가 택시를 여섯 번이나 갈아타고 돌아왔다는 소문도
있고 해서) 까르푸까지 걸어서 갔다. 중국에서는 매우 낯선 (?) 정찰제였는데 거기도 역시 물건값이 정말 쌌다. 내가 야시장에서 10위안 주고
샀던 모자가 까르푸에서는 7위안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과감하게 택시를 탔다.
대부분의 택시는 몹시 낡았다. 기본요금은 칠 위안이었는데, 중국의 택시는 앞좌석과 뒷좌석이 철창으로 막혀 있다. 택시강도가 그렇게 많다는
뜻이겠는데, 사회주의와 택시강도, 그것도 참 씁쓸하다. 하기야 중국여행을 하면서 제일 많이 들었던 얘기가 여권 조심하라는 얘기와, 물건값은
절대로 부르는 대로 다 주고 사지 말라는 것이었다. 중국에는 이미 우리나라 사람들 20명이 들어와 산다고 하는데 (위해시에 사는 중국사람은 가끔
자신들을 인천광역시 위해구 주민이라고 농담한다고 한다) 물론 청도에도 우리나라 사람이 많은지 심심치 않게 거리에 우리말로 된 간판이
눈에 띄였다. 그런데 어떤 간판이냐 ? 룸살룽, 24시 불 가마, 당구장, 노래방 등등, 한국인의 생존력은 참으로 놀랍다.
배에서 내렸는데 땅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다음날, 13일, 아침식사를 끝마치고 지모로
시장에 갔다. 우리로 치면 남대문시장 정도 되는 곳이었는데 변화무쌍한 중국 물건값의 진수를 다시 한번 경험했다. 같은 주인인데 아저씨 부르는 값
다르고, 아줌마 부르는 값 다르다. 한 시간 전 부른 값과 한 시간 후에 부르는 값이 다르다. 그 값이 올라가기도 하고, 또 내려가기도 한다.
불안해서 도대체 흥정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겨우 샌들을 하나 샀다. 처음에 아저씨한테 물어 봤을 때 80위안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아줌마에게
물어보니 90위안이라고 했다. 결국 60위안 주고 샀는데 그래도 우리나라로 치면 얼마나 싼 거냐 ? 중국과 우리나라를 왔다갔다하는 보따리
장사들이 하는 무역의 양도 대단하다고 하는데 그게 이해가 갔다. 하기야 우리에게 중국은 이미 수출 2위, 수입 3위국이고, 중국에게도 우리나라는 3대 수출국이라고 하지 않는가
?
자모로 상가 앞의 그 많던 거지들, 팔이 잘린
사람, 앉은뱅이, 초점 잃은 눈빛으로 앉아 있는, 아침부터 술 취한 수많은 청년들을 봤을 때 중국의 개방 개혁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호텔에서 가끔 본 티비의 내용도 거의 자본주의 풍이었다. 제품을 파는 광고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가수 강타도
중국제품 광고에 나왔다. 소위 '한류'라는 말이 국내에 있을 때는 정말 그럴까 했는데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거리 레코드가게에서는 신승훈,
유엔의 노래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마지막 날이라 경복궁이라는 한국음식점에서
육개장으로 점심을 먹었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았다. 육개장을 먹으면서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도 시청 앞 5.
4공원에서 마지막 중국 바람을 쐬고 청도 여객터미널로 와서 수속을 밟았다. 무겁지만 않다면 청도 맥주 한 박스만 사가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아쉬운 대로 배에서 먹으려고 청도 맥주 세 캔을 샀다.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청도 맥주를 한 잔 마시면서 멀어져 가는 청도항을 바라보았다.
멀리 고층빌딩에 쌍성(雙星)이라는 글자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중국의 유명한 신발 메이커라는데. 중국에도 재벌이 있나 ? <사진
34>
돌아올 때는 20시간 동안 배 멀미를 전혀 안
했다. 술을 먹어서 그런가 ? 배에서 내렸는데 땅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인천에 돌아와서 먹은 우리나라 뼈다구 감자탕이 그렇게 달고 맛있을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