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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가 신라인의 신앙을 인도하기 위해 지은 절 적산 법화원, 물론 복원한 건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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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근영 |
| 우리나라의 지도를 펼치면 중국 대륙에서 황해바다로 툭 튀어나온 반도가
있다. 산동반도다. 한국인이 중국대륙을 향하여 가면서 내디뎌야 할 발판이다. 신라시대 장보고 장군은 이 산동반도를 디디고 천여 년 후 해상왕
아니 해신으로 우리 앞에 우뚝 섰다.
1200년 후 장보고의 후예들은 해신 장보고의 발자취를 찾아서 이 산동반도로 향한다.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를 동북아의 해상권과 무역권을 장악한 해신 장보고가 우리를 부른다.
내가 중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것은
1990년 겨울. 그때로부터 16년이 지난 2006년 여름, 이제 중국대륙을 다시 밟게 되었다. 두 번째의 중국방문이다. 처음 중국을 방문하던
1990년은 중국여행이 자유롭지 못할 때였다. 관용여권으로 상해, 서안, 북경을 돌아보았다. 이번엔 룸칭(영성), 지보(치박), 타이산(태산),
취푸(곡부), 웨이하이(위해), 시포우(석도)를 3박 4일 여정으로 둘러보았다. 3박4일이긴 하지만 배위에서의 여정까지 감안한다면 5박6일이
된다.
중국은 넓다. 그래서 한두 번 중국을 갔다 와서 중국이 어떻다고 말하는 것은 장님이 손으로 본 코끼리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겠지. 16년 전의 중국이 캄캄한 어둠 속에 놓여 있었다면 16년 후의 중국은 햇볕 속에 놓여 있다고나
할까.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지만 그것도 옛말이다. 오늘날의 3년은 선사시대의 3천년과 맞먹는다. 그만큼 세상은 급변한다.
중국이라고 해서 가만히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중국은 경운기를 차로 개조해서 거기다가 번호판을 달고 있었다. 그 옛날 한국에서 신사복을 입은
젊은이와 갓을 쓴 늙은이가 같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는 듯하지 않는가.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고층건물, 아파트로 새 옷으로
말쑥하게 갈아입은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가 하면 한국으로 말하자면 초가와 같은 해초를 말려 지붕을 덮은 그런 집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논이
거의 없는 이곳에서는 벼농사를 모르니 볏짚이 있을 턱이 없다. 볏짚대신 그들은 해초를 지붕을 덮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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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룽호 배, 한국 평택과 중국 시포우를 오고 가는 18,000천톤 급의 여객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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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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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농촌, 해초를 말려 지붕을 덮었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초가 같은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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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근영 |
| 산동반도. 15.7만 평방킬로미터로 중국 전체 넓이의 1.6%에 지나지
않는 곳이지만 남한의 1.5배나 된다. 들판과 구릉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산은 저 멀리 떨어져 보였다. 가는 곳마다 산이요, 그 산 속으로 난
길로 여행을 하게 되는 한국과는 또 다른 여행길이다.
시포우(石島)는 작은 어촌으로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다. 중국인들도 잘 모르는
곳이라고 하지만 이제 새로운 휴양지로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 사람들을 두루 부른다. 멀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이 중국 땅에서 우리 조상의
자취를 보는 것은 반갑고도 즐겁다.
장보고는 이곳 산동성 적산에 신라방을 만들어 고국 사람들을 살게 했으며 그들의 정신의 안정을
위해서 법화원이란 절을 지어 불교를 믿게 했다. 일본인 승려 엔닌이 여기서 몇 해 머물면서 장보고의 신세를 지고는 자기 나라로 돌아가
<입당구법순례행기>를 지어서 장보고의 덕을 찬양했다고 한다.
적산 법화원은 일본인이 먼저 발굴하였다는 데 1987년에
시포우 시에서 200만 위안을 지원했다고 한다. 중국 돈 200만 위안이라면 한국 돈으로는 2억 6천만 원 정도가 아닌가. 결코 큰 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뒤 기념관도 새로 짓고 경역이 넓어지기도 했지만 법화원은 결코 보잘 것 없는 작은 절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큰 절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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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기념관 문을 들어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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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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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기념관, 한국인의 방문을 환영한다는 펼침막이 걸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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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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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동상앞에선 한국의 학생, 이제 중국에서 한국의 초중등학생을 만나는 것도 낯설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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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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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기념관 안, 장보고가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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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근영 |
| 한국의 많은 단체들이 방문 기념비를 세워 놓기도 했지만 한글을 많이 볼
수 있고 해서 이곳이 한국 땅이 아닌가 할 정도다. 하지만 절 집의 형태나 만나는 이들엔 중국이란 것을 느끼게 한다. 어느 관광지 못지않게
붐비는 사람들은 한국인도 많지만 중국인이 더 많다. 그들은 이제 한국을 우러러 보고 있지 않을까. 오천년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 조상들은 중국을
섬기며 살아왔다. 우리 조상은 늘 중국을 상전으로 중국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거꾸로 중국 사람은 한국 사람을 치어다보며 그렇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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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왕 장보고, KBS드라마 해신의 주인공들의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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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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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세워준 장보고 기념탑, 휘호는 김영삼 전대통령의 글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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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근영 |
| 장보고의 기념관은 지난해(2005년) 5월 1일에 개관한 것 같다. 그때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개관식에 참여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 기념탑은 1994년 7월 24일에 준공한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보고기념탑’이란 휘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글씨다. 지하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이 부러워하지 않을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 나라
문화유적지마다 글씨를 남기지 않았는가. 그의 야심이 중국에까지 미칠 수 없었던 것에 억울해 하지 않을까.
적산, 붉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적산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에 붉은 바위가 퇴색한 것일까. 적산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큰 조각상이다.
신흥사 통일대불이나 법주사 불상, 부산 배산 옥련정사의 대불 등 대불에 익숙한 우리지만 중국 땅에서 큰 산을 누르고 앉은 불상이 아닌 조각상이
신기했다. 이것을 더러 장보고 상으로 오해하는 이들도 있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지만 이것은 장보고 상이 아니라 적산 대명신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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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의 숨결이 흐르는 적산포항, 해운대가 연상된다. 하지만 조용하고 아늑한 어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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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영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