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밀착취재] |
이방인들의 고향 仁川 |
포용과 융합의 용광로인가, 서울로 향하는 임시정거장인가 |
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
● 해마다 전체 인구 10% 이상이 들고나는 도시 ● 실향민 애환 서린 만석동, 용현동 ● 50년대 피란민, 60년대 충청인, 70년대 전라인 삶의 터전, 수도국산 ● ‘이동성’ 높아 지역 문제에 무관심 ● ‘인천사람 의식’ 눈뜨는 이주민 2, 3세들 ● 19세기 근대화 관문에서 21세기 동북아 중심도시로 ● ‘배꼽 떨어진 용’이 여의주 물고 하늘 오르는 풍수 |
인천(仁川)은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구한말엔 외세 침략의 관문이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수탈과 대륙침략의 최전선이었다. 광복 후엔 전쟁을 피하기 위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고향을 등진 실향민들의 집결장이었다. 자연히 도시는 이방인들로 가득 찼다. 지금도 인천은 해마다 15만명이 유입되고 15만명이 떠난다. 역사에 ‘인천’이라는 지명이 처음 기록된 것은 1413년, 조선 태종13년이다. 하지만 이미 1400년 전부터 이곳의 역사는 시작됐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이 첫째부인 예씨에게서 낳은 유리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둘째부인 소서노가 자신이 낳은 두 아들(비류와 온조)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 온조는 지금의 서울 풍납동 일대에 백제를 세웠고, 큰아들 비류는 더 좋은 곳을 찾겠다며 서해 바닷가로 가서 터를 잡고 미추홀이라 이름지었다. 하지만 그곳은 바다와 너무 가까워 물이 짜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비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며 자결한 것으로 ‘삼국유사’는 전한다. 비류가 처음 나라를 세운 미추홀이 지금 인천시 남구 문학동 일대다. 인천은 백제 초기 중국과의 해상교역통로로 활용되기도 했다. 송도 옥바위 능허대가 그곳이다. 하지만 고구려에 점령당한 뒤부터는 줄곧 변방의 작은 어촌으로 머물렀다.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의 역대 왕조는 모두 육로를 통해 중국과 교역했다. 굳이 험한 뱃길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토박이는 실향민으로
오늘날의 인천을 이야기하려면 아무래도 개항지 제물포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아 경인선을 타고 제물포역에서 내렸지만 포구는 보이지 않는다. 길 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중구청 쪽이 옛 제물포라고 일러줬다. 1883년 조선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하며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개항을 한다. 당초 정부에서는 인천이 ‘도성(서울)의 인후(목구멍)’라 하여 반대했지만 1884년 1월1일 일본이 강요해 문을 열었다. 당시만 해도 인천은 도시라 하기엔 초라했다. 인구래야 겨우 7000명 정도였고, 더욱이 제물포는 인구 70여 명의 작은 어촌이었다. 하지만 개항 이후 제물포는 국제항으로 급변하기 시작했다. 세창양행, 이화양행 같은 외국 무역회사들이 자리를 잡았고, 서구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항구라 화물작업이나 도로공사, 건설공사 등 일거리가 넘쳐났다. 박해를 피하려는 천주교인들, 동학교도들, 탐관오리의 수탈에 못이긴 빈농들이 고향을 등지고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이내 충청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생기더니 제주도 골목, 경상도 마을도 등장했다. |
인천 토박이인 오광철(71) ‘인천일보’ 주필에 따르면 개항 후 인천의 상공업은 번창일로였지만 그 혜택이 인천 토착민에게 돌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당시 최대 이권단체이던 미곡중매인업체 ‘인천근업소’ 회원들만 해도 일본인을 따라 인천으로 온 영남인들이었어요. 이들은 거간으로 활동하거나 정미소 등을 하며 재산을 축적했죠. 율목동에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이방인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대신 토박이를 실향민으로 만들기도 했다. 1902년 제물포항에서는 인천 내리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121명이 겐카이호(號)에 올라 하와이로 떠났다. 이민사(史)의 첫 장을 연 것이다. 이후 많은 사람이 제물포를 통해 하와이로, 멕시코로 이민을 떠났다.
“노예처럼 일하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하와이 이민자들은 조국을 등지지 않았어요. 일제 강점기엔 독립운동자금을 댔고, 광복이 되자 성금을 모아 학교를 세우는 데 보탰어요. 그게 바로 인천의 ‘인(仁)’자와 하와이의 ‘하(荷)’자를 따서 이름을 지은 인하대예요.”
중구청으로 가는 길에 무지개 모양의 돌문(홍예문)을 지나자 색다른 거리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100년 전 일본 거리에 선 듯한 느낌을 주는 일본식 건물들이 인상적이었다. 오늘날 일본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1900년대 초 세워진 일본식 건물들이 남아 있는 ‘재팬타운’이다.
화교들의 쇠락
중구청 입구를 지나자 이번엔 중국풍 건물들이 늘어선 차이나타운이 나타났다. 개항과 함께 인천에 들어와 120년 넘게 이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화교들의 근거지다. 차이나타운은 인천역까지 이어지는데, 곳곳에 ‘북경반점’ ‘파이란’ ‘피아노’ ‘육남매’ 등 이곳이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였음을 알리는 표지판들이 눈에 띄었다.
화교는 개항 후 인천과 중국 산둥반도를 오가며 중개무역을 통해 상권을 장악했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상권이 마비되자 대거 대만, 미국, 동남아시아로 떠났다. 남은 화교들은 주로 잡화상과 음식점을 하며 살았다. 일부는 부두근로자로 전락하기도 했다.
광복 직후 중국과의 무역이 재개되면서 화교사회가 반짝 활기를 띠기도 했다. 인천시사(史) 편찬위원인 김양수(73)씨는 “당시 돈 있는 인천 사람은 다 화교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전했다. 하지만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국교가 단절되자, 화교들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게다가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화교에 대한 차별과 배타정책에 따라 곤궁한 삶을 살아야 했다.
“1961년에 외국인의 토지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을 만들었는데 외국인은 1가구 1주택 1점포만 소유할 수 있게 했습니다. 주택면적은 200평 이하, 점포는 50평 이하로 제한했고요. 또한 점포는 자신만 사용할 수 있고 타인에게 임대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논밭이나 임야 취득도 불가능했고요. 사실상 재산을 증식할 기회를 박탈한 셈이죠. 이 정책은 1998년 IMF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 토지 소유 규제가 풀릴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그는 한국에 정착한 화교들이 외국의 화교들처럼 재산을 축적하지 못한 데는 자초한 면도 없지 않다고 했다.
“외출복 한 벌을 3대(代)가 같이 입을 정도로 근검하게 살았던 것은 인정해요. 그런데 1950년대 해마다 보릿고개 시기가 되면 중국인들이 밀가루를 매점매석했어요. 당연히 밀가루 파동이 일었죠. 이를 안 이 대통령이 화가 나서 중국음식값을 동결해버렸어요. 게다가 화교들은 돈을 은행에 넣어두기보다는 집 안에 쌓아뒀습니다. 그러다 두 차례 화폐개혁이 이뤄지면서 휴지가 돼버렸어요. 일정액 이상은 새 화폐로 교환해주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화교 밑에서 자장면 배달하던 한국인들이 어깨너머 배운 기술로 중국집을 개업하면서 경쟁이 심해졌죠.”
‘짱꿰’와 ‘꺼우리방’
그 사이에 화교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1942년 전국적으로 8만명에 달하던 화교는 지금 2만여 명에 불과하다. 이들 중 인천에 사는 화교는 28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인천화교학교 학생들은 초중고교를 합쳐도 500명이 안 된다고 하니 앞으로 화교 숫자는 더 줄어들 듯하다.
차이나타운에서 만난 한 한국 노인은 화교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거리감이 있지. 개항 때는 부녀자를 잡아다 간을 빼먹는다는 말이 있었고, 내가 어릴 때도 밤에 혼자 다니는 아이들 잡아다 판다는 말이 있었거든. 물론 밤에 못 돌아다니게 하려고 어른들이 지어낸 말이지만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어. 게다가 중국인에 대한 괜한 우월감이 있었어. 우리도 못살았지만 화교들은 더 못사는 것처럼 보였거든. 그래서 ‘떼놈’이라고 놀렸어. 자기들이 하도 ‘대국(大國)’이라고 내세우니까 ‘대’자에 악센트를 줘서 떼놈이라고 부른 거지.”
한 중국음식점에 들어갔다. 자장면 값이 3000원이니 싼 편이다. 40대 후반의 사장은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다.
“화교가 한국에서 취업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저는 그래도 운 좋게 중국무역을 하는 회사에 취업할 수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했지만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에서 제일 먼저 잘리더라고요. 그래서 이걸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자장면집말고는 없습니다.”
그는 인천에 애정도 있지만 서운함도 크다고 했다.
“어려서 ‘짱꿰’라고 놀림받았습니다. 자장면과 발음이 비슷해 우리를 비꼬아 부르는 말입니다. 여기서 놀림 받는 게 싫어 대만으로 갔는데 거기서도 차별을 받았어요. 우리를 ‘꺼우리방(고려방)’이라고 놀렸습니다. ‘난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인천 화교협회 사무실을 찾았다. 언덕 위에 있는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1960년대 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실내 장식은 물론 사무실 책상, 의자, 캐비닛 등 소품 하나하나가 요즘은 찾아보기 어려운 낡은 것들이었다. 화교협회에서 일하는 노효만(26)씨는 젊은 화교들의 고민을 들려주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고민이 많아져요. 나는 한국인인가 중국인인가 하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취직 고민…. 한국에선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 어려워요. 그렇다고 중국보다는 한국에 더 익숙한 우리들이 대만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도 그렇고…. 그래도 저나 제 친구들이나 결혼은 한국인이 아닌 화교와 하고 싶어해요.”
피란민 몰려 살던 ‘똥마당’
자유공원에 올랐다. 자유공원은 서양인들이 이 땅에 만든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다. 하지만 지금은 냉전의 유물을 간직한 공원이 됐다. 공원 한 켠에 세워진 맥아더 동상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이희환(40)씨에 따르면 당초 시민단체에서는 맥아더 동상 철거가 아니라 송도 인천상륙작전기념관으로의 이전을 추진했다고 한다. 그런데 철거 주장이 나오면서 이념 문제가 덧씌워졌다는 것. 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증거다.
동상에서 조금 떨어진 벤치에서 세 노인이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고향을 물으니 황해도와 함경북도라고 했다. 인천은 그 어느 지역보다도 이북 실향민이 많이 살고 있다. 인천이북5도민회에서는 인천 거주 이북실향민 가족(2, 3세 포함)이 77만여 명에 달한다고 주장한다.
장회준(80)씨는 서울의 금융기관에서 일하다 전쟁을 맞았다고 한다.
“피란을 갔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서울로 들어갈 수가 없더라고. 다행히 인천에 내가 다니던 회사 지점이 있어 이곳으로 왔지. 그래도 난 직장이 있어 크게 어렵지는 않았는데, 아무것도 없이 내려온 사람들은 월미도나 만석동 같은 해안가에 움막 짓고 살면서 막노동으로 겨우 입에 풀칠을 했어. 만석동을 예전엔 ‘똥마당’이라고 불렀어. 피란민이 너무 많아 공중변소의 똥물이 넘친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던 것 같아. 송현동에도 피란민이 많이 살았지.”
옆에 있던 도영수(78)씨도 거들었다.
“6·25 전에 내려온 사람과 전쟁 때 내려온 사람은 형편이 달랐어. 전쟁 전에 내려온 사람들 중엔 지식층이 많아 일찍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지만, 전쟁 때 내려온 사람들은 고생 많이 했지. 집 지을 판자가 없어 땅굴에 사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나도 그때 창현국민학교에서 배식 타다 먹으며 겨우겨우 연명했던 기억이 나.”
그후 만석동에 대한 개발이 이뤄지면서 실향민들은 겨우 일군 삶의 터전에서 또다시 쫓겨나야 했다. 이들이 간 곳은 일명 독쟁이고개라 부르는 남구 용현동과 학일동 일대였다. “억척스럽게들 살았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으니까. 그러다 보니까 토박이들이랑 갈등을 빚기도 했어. 우릴 ‘이북놈’이라고 멸시하기도 했지. 그래도 그렇게 억척스럽게 살았으니까 여기에 정착할 수 있었던 거지. 토박이보다 이북 실향민이 더 잘사는 경우가 많아. 물불 안 가리고 이 악물고 번 결과지.” 실향민들은 대부분 50년 넘게 인천에 살았으니 이젠 인천이 고향이라고 할 만도 하건만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다. “이제 뼈를 묻어야 할 곳이 인천 아니냐”고 하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살아서 북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안 해. 그래도 고향이 그리워. 실향민들은 대부분 통일동산에 묏자리를 정해놓았어. 나도 그렇고.” 죽어서라도 고향을 볼 수 있는 곳에 묻히고 싶다는 뜻이다. 이들은 요즘 나들이 삼아 강화도 교동섬이나 김포를 자주 찾는다고 했다. 멀리나마 고향 땅 황해도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북 실향민들은 결속력이 남달랐다. 그래서 정치적 입김이 거셌고, 실향민 출신 국회의원을 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옛이야기라고 푸념한다. “다들 늙었으니까. 게다가 자식들은 고향에 대한 애정이 없어. 고향 이야기를 해도 시큰둥하고, 이북5도민 행사에도 무관심해. 하긴, 그 놈들 고향은 이북이 아니라 인천인 셈이지” 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밑바닥 인생들의 장터’
1960년대 인천은 다시 한번 이방인들로 북적대기 시작했다. 특히 서산, 당진 사람이 많이 올라왔다. 이희환씨도 태어난 지 50일 만에 부모 품에 안겨 올라와 인천시민이 됐다. “어린 시절 수도국산이라 불리던 송현동에서 살았어요. 송현동은 1900년대 초엔 일본인에게 땅을 빼앗기고 쫓겨난 인천시민들이 터잡기 시작했어요. 6·25전쟁 때는 피란민의 동네였고요. 그러다 1960년대엔 충청도에서, 1970년대엔 전라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이곳으로 왔어요. 아무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처음에 터를 잡는 달동네였던 셈이죠.” 인천 토박이들에 따르면 수도국산은 산비탈을 따라 3000개가 넘는 판잣집이 거미줄처럼 얽힌 동네였다고 한다. 골목이 좁아 손수레도 제대로 다니기 힘들고, 집은 허술하고 낡아 언제 무너질지 모를 위험이 있었다는 것. 어린 이희환의 눈에 비친 인천은 풍요로운 기회의 땅이 아닌, 그날그날 먹고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밑바닥 인생들의 장터였다. 다시 경인선을 타고 부평역에 내렸다. 1930년대 일제는 중국침략을 위해 이곳에 조병창(造兵廠)을 세우고 각종 무기와 잠수함을 만들어 최전방에 공급했다. 일본이 무기공장을 해외에 만든 것은 이곳이 유일하다. 또한 근로보국대라는 명분 아래 갖가지 공사에 한국인들을 강제 동원했다. 이때 한인들이 모여 살던 곳 가운데 하나가 지금의 부평역 근처, 동아아파트 입구에서 북인천우체국 사이, 일명 다다구미라 불리던 곳이다. 일제가 패망하며 조병창이 문을 닫자 갈 곳 없는 인부들이 다다구미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6·25 때 폐허로 변했지만 전쟁이 끝나자 흩어졌던 주민들이 다시 모이고 피란민들까지 합세해 거대한 달동네를 이루었다. 부평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 수출산업공단으로 지정되어 자동차공장들이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일자리를 찾아 다시 8도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바다는 물을 뿌리치지 않는다’
이후에도 계양과 부평 등 서울 인접 지역을 중심으로 베드타운이 형성되면서 외지인들이 밀려들어왔다. 서울에 직장이 있지만 서울에서 살 형편이 안 되는 서민들에게 인천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집값도 싼 적격지였다. 인천은 서울 위성도시들 중에서도 집값이 가장 싸다. 게다가 대부분 외지인들이어서 다른 도시처럼 이방인에게 폐쇄적인 분위기가 없어 정착이 용이하다는 점도 작용했다. |
인천을 구성하는 이방인은 또 있다. 조선족, 해외 이주노동자들이다. 시에서 파악한 바에 따르면 조선족 8200여 명, 해외 이주노동자 9400여 명에 이른다. 여기에 불법 취업자까지 합하면 만만치 않은 규모다. 해외 이주노동자들은 주로 남동공단, 부평공단에 밀집해 있는데, 이 지역엔 이들을 위한 전용 슈퍼마켓이 생기는 등 화교처럼 또 다른 문화를 형성해가고 있는 중이다.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정영태(49) 교수가 1998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천에서 태어난 사람은 전체 인구의 30%가 채 안 됐다. 아버지 고향부터 따지면 토박이는 13%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모두 외지에서 온 이방인들이다. 그래서 새얼문화재단 지용택(69) 이사장은 인천을 ‘해불양수(海不讓水)’라고 했다. ‘바다는 물을 뿌리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김양수씨는 ‘인천합중시’라고 표현했다. 인천학연구원 김창수(48) 상임연구원은 ‘이주성(移住性)’이야말로 인천의 긍정적인 특징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국제도시치고 이주민이 주축의 하나를 형성하지 않은 도시가 없다는 것. “미국도 끊임없이 이주민을 받아들이고 융화하면서 성장한 나라예요. 이주성이 역동적인 힘이 된 거죠. 저는 대구가 계속 침체되는 이유가 이주성이 작기 때문이라고 봐요. 순수혈통이 강하면 도시가 박제화할 수밖에 없어요. 반면 인천의 포용력과 융합력은 인천 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황해도 실향민들이 내려와 인천 문화로 흡수된 은율탈춤과 풍어제가 있어요.” 화교 역시 마찬가지다. 화교의 전통문화는 인천 문화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특히 자장면과 호떡은 인천의 대표적인 음식문화로 자리잡았다. “자장면은 제물포 부두 노동자들의 점심식사 거리로 개발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호떡도 청일전쟁 후 생계가 막연해진 화교들이 만들어 팔던 것이고요. 한 세기 안에 국민음식이 되기란 대단히 어려운데, 자장면은 중국에 수출될 정도로 유명해졌잖아요.” 반면 오광철씨는 “이주민이 너무 많다보니 인천이 서울살이에서 탈락한 사람들과 서울로 가려는 사람들이 잠시 머무르는 정거장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인천을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돈만 벌면 당장 서울로 가겠다고 생각하죠. 그러다 보니 지역 문제에 관심이 없죠. 옛날에 명성을 날리던 송도해수욕장이 ‘똥물’이 되고, 대기오염이 서울보다 더 심해지고… 갈수록 교통이 혼잡해지고, 오염의 도시로 낙인찍혀도 분노하지 않아요.” 향토사학자 조우성(58)씨는 “인천시민들의 애향심이 낮은 건 태어난 곳을 중시하는 농경시대의 사고가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태어난 곳을 중히 여기다 보니 자연히 향우회가 활발하다. 특히 이북, 충청도, 전라도 향우회가 강해 시군 단위까지 조직되어 있을 정도다. 이희환씨에 따르면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인천공설운동장을 빌려 서산군민회를 열었다고 한다. 인천시민은 물론 정당관계자나 학계 사람들도 “인천은 충청 출신이 30%, 전라 출신이 30%, 이북5도민이 20%로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하대 정영태 교수가 1998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부친의 고향을 기준으로 충청 출신이 21.5%, 전라 출신이 16.4%, 이북5도 출신이 10.4%에 불과했다. 이들 향우회가 얼마나 결집력이 강하고 적극적인지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인천에서 이겨야 대권 잡는다”
고향에 대한 이주 1세대의 집착은 2∼3세대로 내려오면 현저히 약해진다. 그들에게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바로 인천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천의 문화와 역사를 공유한다. 김양수씨는 이들 새로운 토박이들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인천 토박이가 10%도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여기가 고향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60%가 넘어요. 신(新)인천 토박이들이 생겨난 거죠.” 광복 직후 인천은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렸다. 그만큼 좌익세력이 강했다. 북한에서 부주석을 지낸 이승엽이 이곳 출신이다. 인천은 항구도시인데다 공업도시여서 일제 강점기부터 노동자가 많았다. 사용주는 일본인이나 친일파였고, 노동자는 한국인이었기에 계급 문제와 민족 문제가 일치한데다 서울과 가까워 좌파 지식인들이 이곳에 내려와 노동자들을 의식화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야당 거물이었던 조봉암과 장면을 배출했고, 7대 대선 때도 김대중 후보에게 56.9%의 높은 지지를 보냈다. 말 그대로 ‘야도(野都)’였다. |
그러나 언제부턴가 정치성향이 바뀌었다. 1987년부터는 각 정당의 전국 득표 결과와 인천 득표율이 거의 비슷하게 맞아떨어져 인천이 우리나라 전체 유권자 성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됐다. “인천에서 이겨야 대권(大權)을 잡는다”는 말까지 생겼다. 인천은 투표율이 전국에서 가장 낮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인천의 역대 선거 투표율과 전국 평균 투표율을 비교해보면(표 참조) 특이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 지자체선거로 내려갈수록 투표율 격차가 크게 벌어진다. 이에 대해 정영태 교수는 “이동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국가적인 이슈니까 다른 지역과 큰 차이가 없지만 지자체선거는 달라요. 인천에 뿌리내리고 살기보다는 기회가 되면 서울이나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사람이 많으니까 지역 현안에 대한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자기 삶에 큰 영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조우성씨는 이런 정치 민심 때문에 인천이 손해를 본다고 말했다. “인천은 서울과 부산 다음으로 큰 도시인데도 장면 총리 이후 거물 정치인을 배출하지 못했어요. 3년 전, 과기처 장관 한 명 나온 후로는 변변한 장관조차 없어요.” 인천 출신의 정치 리더가 없다 보니 인천이 역차별을 받기도 한다는 것. 인천은 2014년 아시안게임 개최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같은 해 강원도 평창이 동계올림픽 유치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IMF 경제위기 이후 경기은행, 동화은행 등 인천지역 금융기관은 대부분 퇴출됐어요. 그런데 이들 은행보다 결코 재무상태가 좋다고 할 수 없던 충청, 호남권 지방은행은 살아남았어요. 인천에 힘있는 정치인이 있었다면 그랬겠냐는 거죠.” 오광철 주필은 인천의 위상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고 걱정했다. “1960년대 중반 서울에 있던 경기도청의 이전지를 놓고 수원과 인천이 경쟁을 벌였는데, 어느 모로 보나 인천이 훨씬 큰 도시였는데도 수원으로 갔어요. 지금 다른 광역시들은 다 도청소재지가 있던 곳이고, 그 지역의 맏형노릇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인천은 그러지 못해요. 오히려 손해보는 일이 더 많았죠. 인천방송도 이름이 경인방송으로 바뀌었잖아요. 원래 경인지역이란 서울과 인천 사이를 말하는 거예요. 경인공단은 구로, 부평, 부천 등 서울과 인천으로 이어지는 공업단지를 일컫는 거죠. 그런데 지금 경인지역이라고 하면 뭐가 연상됩니까? 경기와 인천이잖아요. 자존심 상하죠.”
‘이반’은 많아도 ‘준빠’는 없는 도시 우리 사회의 영원한 이방인 가운데 하나가 ‘이반’이 아닐까 싶다. 동성애자들은 일반(一般)적인 이성애자들과 자신들을 구분해 ‘이반(二般)’이라 부른다. 서울에선 종로3가가 이반들의 아지트이듯 인천에선 부평역전이 이반들의 아지트라는 이야기가 들렸다. 부평역 일대를 헤맸지만 이반들이 모인다는 DVD방도, 찜질방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들이 간판을 걸고 영업하는 게 아니어서 모르는 사람은 전혀 찾을 수 없다. 골프연습장과 여관촌 사이 골목을 지나다 끄트머리쯤에서 건물 2층에 있는 허름한 카페가 눈에 띄었다. 혹시나 하고 서성거리는데 건물 1층 ‘D소주방’이란 간판을 내건 가게에서 “누굴 찾아왔냐”며 50대 초반의 사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중년 남자들이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벽에 걸린 그림들로 보아 한눈에도 이반의 아지트임을 알 수 있었다. 인천 이반들의 현황을 취재 중이라고 하자 선선히 이야기를 꺼냈다. “인천엔 서울 다음으로 이반이 많이 살아요. 인구비율로 따지면 서울보다도 더 높을 걸요. 이반 카페나 사이트 회원들과 채팅하다 마음에 들어 만나자고 하면 30∼40%는 인천에 산다고 해요.” D소주방 주인 김석철(40)씨의 이야기다. |
“인천의 이반 인구가 얼마나 되냐”고 묻자 “그건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이반이 얼마나 되는지는 어디서도 파악이 안 된다는 것. 워낙 음성적으로, 다양하게 만나기 때문이다. 특기할 점은 인천의 이반 인구에 비해 관련 유흥시설은 발달하지 못했다는 것.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깝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천의 이반들은 대부분 서울로 가요. 아무래도 규모가 크니까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익명성이 보장되잖아요. 그래서 인천에는 전부터 이반 전용 유흥업소가 별로 없었어요. 주안, 석바위, 제물포 등 역 주변에 몇 개씩 있는 정도였죠. 그러다 4년 전, 부평역에 롯데마트가 들어서고 상권이 발달하면서 업소가 이곳으로 모이기 시작해 지금은 15개 정도 있어요. 동암에 2∼3개 있고요.” 그는 인천의 이반 전용 유흥업소가 수적으로나 시설 수준에서 서울은 물론 부산, 광주, 대구, 대전에 비해서도 떨어진다고 했다. 그만큼 손님이 없다는 뜻이다. D소주방만 해도 손님이 적을 땐 하루 5명, 많아도 20명을 넘지 않는다고 했다. 부평역 일대 업소를 모두 합쳐도 하루 평균 200∼400명. 고객이 적으니 업소간 경쟁도 치열해 새로운 유흥업소라도 생기면 심하게 견제한다고 한다. “인천엔 ‘준빠’도 없어요.” 룸살롱의 여성 접대부를 호스티스라고 한다. 남성 접대부는 호스트라고 부른다. 호스트 바는 남성 접대부가 나오는 곳을 말한다. 남성 접대부가 상대하는 고객은 여성인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남자손님(이반)을 상대하는 곳도 있다. 이런 곳을 속칭 ‘준빠(‘準호스트 바’의 줄임말)’라 부른다. 박석일(51)씨는 2년 전까지 대구에서 준빠를 운영했다고 했다. “6대 도시 가운데 준빠가 없는 곳은 인천뿐이에요. 이 지역의 소득수준이 낮아 준빠가 성공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그만큼 다른 업소들의 견제가 심하다고 할 수 있어요. 지난해인가, 준빠가 하나 생겼는데 다른 이반 휴흥업소에서 손님을 빼앗길까봐 당국에 계속 불법 영업신고를 해 결국 문을 닫았어요.” 인천의 경제사정이 넉넉지 못하다는 것은 트랜스젠더 바가 없다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일반인이 호기심에 찾는 게 트랜스젠더 바다. 간석동에 트랜스젠더 바가 하나 생겼지만,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금방 사라졌다. 반면 여성 이반인 레즈비언들은 자기들의 아지트 카페를 갖고 있다고 한다.
인천 출신 선수 드문 SK와이번즈
축구가 1882년 인천 앞바다에 머물던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號) 수병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해졌듯이 야구 또한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 1899년 인천영어야학회 학생들 사이에서 이미 야구가 유행했다. 1920년대엔 한용단 같은 한국인 야구단이 있어 일본 팀과 겨루기도 했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인천고와 동산고가 부산, 광주, 서울의 고교야구 명문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인천 짠물 야구’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인천의 프로야구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인천을 연고로 프로야구팀을 창단하겠다는 기업이 하나도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출범 전날 삼미그룹이 전격적으로 인천팀 창단을 발표, 삼미슈퍼스타즈가 만들어졌지만 삼미의 사세(社勢)만큼이나 선수들 수준도 떨어졌다. 국가대표 출신 선수가 한 명도 없는 팀이었다. 인터넷사이트 ‘인천의 짠물야구(bruce2k.com.ne.kr)’를 운영하는 야구팬 김훈희(35)씨는 인천의 프로야구는 시작부터 꼬였다고 했다. “1970년대는 인천 고교야구의 침체기였어요. 그러다 보니 프로야구 출범 무렵인 1980년대 초에 잘하는 성인야구 선수가 적었죠. 그나마 인호봉, 김진우, 임호균 선수가 있었는데, 그들마저 1983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 출전해야 한다는 이유로 국가대표로 묶여 프로팀에 들어오지 못했어요.” 개막 당시 인천야구장은 라이트 시설이 없어 야간경기를 수원구장에서 했다. 스타급 선수가 없어 성적도 안 좋은데다 인천에서 경기조차 안 하니 열성 팬이 생겨날 리 없었다. 이듬해인 1983년 ‘너구리’ 장명부가 돌풍을 일으키며 인천에 다시 야구 붐을 일으켰지만 삼미그룹은 사세가 기울어 1985년 청보로 야구단을 넘겼다. 인천 프로야구팀은 다시 1988년 태평양, 1996년 현대로 계속 넘어갔다. 마지막인 줄 알았던 현대마저 4년 만인 2000년 지역연고를 서울로 옮기겠다며 인천을 떠났다. “인천시민의 사랑을 듬뿍 받은 팀은 태평양돌핀스였어요. 특히 1994년이 절정이었죠.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을 뿐 아니라 인천 출신 선수들로 이뤄져 짜임새가 있었어요. 현대유니콘스는 우승을 하기도 했지만 금방 인천을 ‘배신’하고 떠났잖아요.” |
인천 야구팬들은 현대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했다. 2000년에 인천을 떠났으니 벌써 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응어리가 남은 모양이다. 현재 인천을 연고로 하는 팀은 SK와이번즈다. 인천 팬들은 아직 SK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고 있다. “현대와 비교하면 아직 멀었어요. SK는 인천에서 좋은 선수가 나와도 잘 키우질 못해요. 올해만 해도 인천 출신의 슈퍼 루키 류현진을 제쳐놓고 1차 지명에서 포수 이재용을 뽑았어요. 결과는 더 두고 봐야겠지만 지금 성적으로 봐서는 대어를 놓친 거죠. 늘 그런 식이에요.” 이들의 마음속엔 아직도 현대에 대한 미련이 있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천을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프로야구팀이 어디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8월초 현재, 현대 주전 중 6명이 인천 출신이다. 반면 SK에는 인천 출신 선수가 3명뿐이다. 전북을 연고로 한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들을 주축으로 팀을 창단한 탓에 전북 출신이 7명이나 된다. 대전 한화이글스가 주전 26명 가운데 충청지역 출신이 10명인 것에 비하면 SK는 마음을 줄 ‘내 고향 선수’가 절대 부족하다. “현대가 인천을 떠날 때 인천 선수들을 많이 넘겨줬어야 했어요. 인천 팬들이 강력하게 요구해서 김경기 선수 한 명 내놓았죠. 올해 박진만 선수가 인천으로 올 줄 알았는데 돈 때문에 삼성으로 가더라고요. 인천 팬들로서는 아쉽죠. 그나마 위재영이라도 있어 위안이라고 할까.”
또다른 실향민 ‘인천 토박이’
개발이 한창인 인천의 신도시 송도를 찾았다. 2010년이면 제법 위용을 드러낼 송도는 정보화 도시, 최첨단 디지털화 도시, 교육도시로 건설될 예정이다. 송도신도시가 완성되면 인천은 인천국제공항과 인천항, 송도신도시가 트라이포트를 이루는 국제적인 도시가 될 것이다. 19세기 말 근대화의 관문에서 20세기 서울의 위성도시로 전락했던 인천이 21세기에는 동북아의 중심도시로 비약하는 셈이다. 이를 예견이라도 했던 것일까. 최원식 인하대 교수에 따르면 한 풍수학자가 인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인천은 잠자는 용이었다. 그런데 배꼽을 터뜨려(문학산 배꼽바위 봉수대를 없애고 미군기지가 들어섰다) 용이 깨어나 비상하려 한다. 용의 여의주는 아암도(송도신도시 앞에 있는 작은 섬)다.” 하지만 ‘21세기 동북아의 중심도시’란 장밋빛 청사진 뒤에도 그늘은 있다. 과거 토박이들이 산업화에 밀려 ‘근대도시’ 인천을 상실한 것처럼, 새로운 인천 토박이들 역시 어린 시절의 꿈과 추억이 묻어 있는 현재의 인천을 상실할 것이다. 그게 인천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인천 토박이들도 또 다른 의미에서의 실향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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