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팎의 적에 둘러싸인 지상파방송
이 희 용 연합뉴스 문화부 차장
최근 들어 지상파방송 위기론이 부쩍 빈번하게 거론되고 있다. 한국언론재단이 발간하는 「신문과 방송」의 조사에서도 지상파TV 종사자의 86.1%가 위기론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종사자들의 대부분이 위기임을 감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심각성을 드러내주는 방증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마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조이기도 하다. 고금의 역사는 위기가 닥쳐온 징후를 깨닫지 못하면 퇴조나 멸망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이제 지상파방송은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시작했다고 봐도 좋은 것인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보기에는 어려운 구석이 너무도 많다.
우선 위기의 실체조차 불분명하다. 경영적 위기가 가장 문제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이들은 공영적 가치의 위기를 걱정하고 있으며, 누구는 또 정체성의 위기나 신뢰의 위기를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게 합쳐진 총체적 위기인지도 모른다.
원인에 대한 진단 역시 십인십색이다. 기술 발달에 따른 자연스런 추세인지, 뉴미디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경영진의 개혁 드라이브가 조직 구성원들의 공감대를 얻지 못한 탓인지, 이념적 편향성으로 시청자들이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인지, 경기 침체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인지, 지상파의 독과점을 지속적으로 견제해 온 방송정책에 책임이 있는지 쉽게 가려내기 어렵다.
병명도 제대로 모르고 발병 원인도 모호하다 보니 치료방법도 사람마다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비용 절감과 구조조정을 통한 경영 효율화가 우선인지, 경영 다각화를 통한 수익 확대가 더 중요한지, 공영성 강화에 무게를 두어야 하는지, 공정성과 신뢰 회복이 급선무인지 등을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논란 속에서 고용 불안과 임금 저하를 우려하는 내부 반발이 터져 나오는가 하면 비용 절감이나 수익 확대가 지상파의 공영성을 훼손시키는 방향으로 가면 안된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한 방송사 내부에서도 직종에 따라, 직급에 따라, 사람에 따라 처방이 다를 뿐 아니라 방송사마다 입장 차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다 보니 목소리를 한 데 모아도 위기에 대처하기 쉽지 않은 터에 이를 둘러싸고 내부 갈등까지 증폭되고 있다.
지상파방송사 종사자들을 더욱 괴롭게 만드는 것은 외부의 싸늘한 시선이다.
지상파방송이 여러 면에서 발전을 거듭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국민의 수준도 높아질 대로 높아져 경영적 측면에서나 프로그램 만족도와 신뢰도 등에서 개선의 여지는 아직도 많다. 잊을만 하면 불거지는 간부들의 공금 유용 의혹 등은 도덕적 해이나 방만한 경영을 드러내주는 징표로 여겨지며 종종 터져나오는 방송사고와 윤리성 시비는 혀를 차게 만든다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경쟁매체의 입장에서는 지상파방송이 두려우면서도 부러운 존재이기도 하다. 비록 지난해 지상파방송의 순익이 60%나 급감한 반면 케이블TV의 순익은 갑절 이상 늘어났고, 지난 5월 TV 3사의 시청률 합계도 처음으로 60% 아래로 떨어졌다고 하지만 지상파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반면 대중매체의 맏형 격인 신문의 신뢰도와 영향력과 순익 등은 해를 거듭할수록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케이블TV는 이제 막 걸음마 단계에서 벗어났고 위성방송과 DMB의 정착 여부는 아직도 불투명하다.
한국언론재단의 지난 봄 조사에서는 기자들의 평균 연봉이 중앙방송사(6,221만 원), 지역방송사(5,895만 원), 케이블TV와 라디오 등 특수방송사(4,941만 원), 중앙종합일간지(4,384만 원), 스포츠지(3,963만 원), 경제지(3,843만 원), 인터넷신문(2,582만 원), 지방일간지(2,258만 원)의 차례로 나타났다.
신문기자 처지에서는 지상파방송사들의 ‘앓는 소리’가 ‘배부른 소리’로 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기자들의 만족도나 사기, 이직 희망 등의 항목을 보더라도 방송사 기자들의 사정이 한층 나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케이블TV 종사자들도 시청률이라든지 매출의 통계를 놓고 지상파들이 위기라고 주장하면 “우리는 개국 전부터 10여 년 동안 위기 아닌 적이 없었는데 너희는 그동안 호시절을 보내왔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보다 훨씬 낫지 않느냐”는 항변을 쏟아낸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중간광고 허용, 간접광고 도입, 방송시간 자율화 등을 추진하는 지상파방송사들의 움직임에 대해 이들 경쟁매체가 시청자의 권익이나 매체간 균형발전 등의 명분을 들어 집중포화를 퍼붓는 까닭을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경쟁매체들의 불만이 ‘밥그릇’때문이라고 몰아붙일 수만은 없다.실제로도 시청률 경쟁에 따른 상업화를 우려하면서 정작 수신료 인상을 통한 광고비율 축소에는(그들의 광고시장 파이가 늘어나는 데도) 반대하는 것처럼, 그 불만은 상당 부분 국민 정서에 기대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명분을 누를 수 있는 논리로 국민을 설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상파방송의 독점적 지위가 흔들리는 것은 전송망의 독점적 이용이 더이상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케이블TV와 위성방송에 이어 위성DMB가 등장했고 IPTV와 와이브로도 서비스 개시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와 함께 시청자들의 매체 이용 행태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
이 자체가 위기라면 어쩌면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기술의 발달에 따른 매체 지형도의 변화는 지금까지도 늘 있어왔기 때문이다.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매체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
몇 해 전부터 언론학계에서는 신문산업의 위기를 말하면서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저널리즘의 위기와 지성의 위기가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학자나 국민 모두 신문사들의 경영 여건이 호전되고 신문 종사자들의 대우가 좋아져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신문산업의 위기가 미칠 악영향과 부작용을 걱정하고 있다.
지상파방송의 위기 담론도 공공적 서비스의 위기나 공영적 가치의 위기에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 이 점을 간과하고 경영적 위기만 해소하려고 한다면 시청자들과 경쟁매체의 역공에 (그 주장이 설혹 비합리적이라 하더라도) 버텨내기 어렵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heeyong@yna.co.kr(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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