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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무관심에 대한 도전, <그놈 목소리>




우리 시대 무관심에 대한 도전
<그놈 목소리> 감독 박진표 | 출연 설경구, 김남주 | 제작 영화사집 | 개봉 2월 1일

아버지 한경배(설경구)는 잘 나가는 9시 뉴스 메인 앵커다. 전 국민에게 어필하는 묵직하고도 신랄한 클로징 멘트로 인기가 높고 정계 진출도 예상되는 이른바, 이 사회의 엘리트다. 어머니 오지선(김남주)은 그런 남편의 방송분을 꼼꼼히 모니터하고 집안 살림과 자기 관리를 똑 부러지게 하는 세련된 주부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오며 이뤄냈고 소유했던 모든 것을 잃는다. 왜? 부모이기 때문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식이 사라지는 순간, 그들의 세계는 무너진다. 어느 날 저녁 무렵 아파트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던 아홉 살짜리 아들 상우가 밤늦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대신 ‘그놈’의 전화가 걸려온다. “뉴스 잘 보고 있고요. 상우를 데리고 있습니다.” 그놈은 끊임없이 소름끼치도록 지적인 목소리로 협박을 하고 부모는 그야말로 지옥을 경험한다.

노년의 섹스를 다룬 <죽어도 좋아>, 시골 노총각과 에이즈 보균자인 다방 레지의 신파 멜로 <너는 내 운명>에 이어 박진표 감독은 또 한 번 파란의 소재를 선택했다. 1991년 1월 29일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일어난 이형호 어린이 유괴사건이다. 2006년 1월 29일, 결국 미결 처리된 이 사건의 공소시효는 만료됐지만 박진표 감독은 그것이 끝은 아니라고 믿는다. SBS의 시사 고발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 몸담았던 당시, 1회 방영분으로 ‘이형호 유괴사건-살해범의 목소리’편을 방송하면서 그는 세상의 또 다른 면을 들여다봤다. 끔찍한 사건의 진상과 부모의 고통, 그리고 절대 용인될 수 없는 범죄를 방치한 사회적 무관심을. <너는 내 운명>의 성공으로 인해 박진표 감독은 마침내 가슴 속에 있던 이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촬영 초기부터 예상했던 대로 제작진은 실화를 소재로 한 이 영화의 상업성 논란에 시달려왔다.

하지만 외부의 시선은 오히려 견딜 만했다. 보통의 유괴극이 아니라 범인을 잡고 싶다는 목적이 분명한 ‘현상수배극’이 컨셉이다 보니 상업적이어선 안 되지만 그래도 많은 관객이 봐주도록 만들어야 하는 <그놈 목소리>의 기이한 딜레마가 훨씬 더 제작진을 괴롭혔다. 박진표 감독은 “그래도 범인의 알려지지 않은 모습을 예상하지 않는다, 납치된 아이의 불쌍한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부모와 범인의 두뇌 싸움을 그리지 않는다라는 우리만의 세 가지 원칙은 지켜냈다”고 말한다. 경찰의 전폭적인 협조 하에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44일간의 기록을 찍어낸 제작진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검열을 해야 했다. 3년 전 이미 출연을 약속했던 애 아버지 배우 설경구와 첫 아이 출산 직후 영화에 뛰어든 김남주는 창자가 끊어지는 부모의 아픔을 연기하기 위해 나날이 말라갔다. 강동원은 데뷔 이후 처음 외모가 아닌 목소리만으로 연기를 해야 했다. <그때 그사람들>에서 그토록 유려했던 김우형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스릴러 장르 특유의 화려한 카메라 워크 대신 담담히 기본을 지켰고, 조명, 미술, 음악, 사운드 모두 극중 부모와 사건보다 튀어나오는 법이 없도록 조율됐다. 철저히 계산되고 계획된 <그놈 목소리>의 진심, 이 충무로 초유의 시도는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피 말리는 기다림이 있을 뿐이다. 김혜선 기자



박진표 감독 인터뷰


일단 촬영을 마친 소감은?
우울하다.(웃음) 촬영이 끝나도 끝나지 않은 영화고, 개봉이 끝도 아니니까. 언제 완성될지 아무도 모르니까.

실제 사건이 일어났던 서울 시내 여러 장소들에서 촬영을 했는데.
무릎 꿇고 빌어서라도 실제 장소에서 찍으려 했고 대부분 찍었는데, 안 되는 곳도 있었다. 그래서 스탭들에게 화도 많이 냈다. 오죽했으면 인간이 변했단 소리를 들었겠나. <그놈 목소리>는 나도 몰랐던 내 본성이 드러난 영화다.(웃음)

촬영 내내 가장 힘들었던 건 뭔가?
초심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업 영화니까 상업적이어야 하지만 경계를 넘지 말아야 했다. 좋은 영화, 재밌는 영화 만들고 싶은 욕심, 할 수 있는 한 다 버렸다.

아버지 역의 설경구는 감독이 너무 미워서 좋았다고 하던데.
얼마나 미웠을지 알고도 남는다. 내가 설경구 씨에게 살 빼거나 굶으라고 한 적은 없다.(웃음) 실화다 보니까 스스로를 몰아칠 수밖에 없었겠지.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게 뭔가?
관객들이 <그놈 목소리>를 범인과 부모의 치밀한 두뇌 싸움이 있는 스릴러로 기대하고 올 거라는 점이다.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휴먼 드라마다.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실제 부모와의 소통은 어느 정도 있었나?
앞으로 그분들 입으로 밝히시겠지만 많이 고마워하셨다. 그분들이 원하는 건 더 이상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작은 희망이다. 나도 그 때문에 이 영화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