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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다면체 배우 공리

운명을 거스르는 관능의 얼굴
다면체 배우 공리
2007.03.07 / 박혜영 기자 

공리는 1990년대 초반 장이모우 감독의 페르소나이자 중국을 대표하는 얼굴이었다. 국제적인 영화제를 통해 그 진가를 인정받았던 공리가 최근 <게이샤의 추억> <마이애미 바이스> <황후花> <한니발 라이징>으로 이어지는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마흔이 넘은 지금. 우아함과 관능적인 매력을 더해가는 공리의 20년 연기인생을 돌아본다.

언어는 장벽이 아니었다. 적어도 공리에게 영어 연기는 필요조건이지, 필수조건은 아니었다. 공리는 <게이샤의 추억> <마이애미 바이스> <한니발 라이징>에서 영어라는 장벽을 뛰어넘었다. 쉼 없는 발음연습을 거쳐 완벽하게 극중 인물에 도달했다. 세 작품으로 "오만한 눈빛에 자신감이 넘쳐나며 천박하기보다 우아한 관능미가 돋보인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1990년대 초반 칸, 베를린, 베니스영화제 등 세계 최고의 영화제에서 쏟아졌던 찬사가 드디어 바다 건너 할리우드에 당도한 순간이었다. 공리는 일약 이소룡 이후 할리우드를 사로잡은 최고의 중국 배우가 되었다. 심지어 “국수 이래 중국으로부터 온 최고의 수입품”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동양 배우로 유일하게 “연기를 살아 있는 예술로 승화시킨 배우”로 공리를 꼽으며 칭송의 대열에 적극 가세했다. ‘타임’의 영화평론가 리처드 콜리스는 <게이샤의 추억>에서 공리가 연기한 하츠모모에 대해 “베티 데이비스 이후 최고의 악녀”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베티 데이비스뿐 아니라 할리우드 배우에 비유된 찬사는 수없이 쏟아졌다. 어떤 이들은 공리의 신비한 매력을 일컬어 '중국의 그레타 가르보'라 칭했으며, 할리우드 연기파 배우 메릴 스트립과 비교하기도 했다. 공리는 이제 세계적 아이콘이 됐다.

국민 배우의 득과 실



공리는 1965년 중국 요녕성의 선양지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경제학 교수였던 공리는 교사가 되길 바라는 부모의 바람과 달리 어린 시절부터 가수가 꿈이었다. 하지만 1985년 음악학교 입시에 실패한 후 베이징의 중앙희극학원에 입학했다. 이것이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공리는 “떨어진 게 오히려 더 잘된 것 같다”며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는 가수가 아닌 스크린 위에서 가수, 시골 촌부, 마약 판매상, 황녀 등 다양한 꿈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베이징 중앙희극학원에 다니던 공리를 일약 중국을 대표하는 문화사절로 이끈 것은 장이모우 감독이었다. 공리가 장이모우 감독의 눈에 띈 것은 1987년. 촬영감독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던 장이모우는 자신의 데뷔작 <붉은 수수밭> 공개 오디션장에서 만난 공리에게 선뜻 주인공 자리를 안겨줬다. 행운은 이어졌다. <붉은 수수밭>이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하며 공리는 장이모우 감독과 더불어 중국영화의 새로운 목소리와 얼굴을 대변하게 되었다. <붉은 수수밭>에서 공리는 나병에 걸린 노인에게 시집가는 여주인공 주얼 역을 맡아 1920년대 후반 봉건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힌 중국사회의 동요과정을 덤덤히 담아낸다. 공리는 이 영화로 “고전적인 중국 여인상을 가장 완벽하게 연기해낸다”는 평을 받으며 단번에 세계적인 여배우로 떠올랐다.

공리와 장이모우는 1987년부터 1995년까지 <붉은 수수밭> <대호 미주표> <국두> <홍등> <귀주 이야기> <인생> <트라이어드> 등 7편의 영화를 함께했다. 실제 연인 사이기도 했던 두 사람은 공리의 결혼과 함께 일에서도 멀어졌다. 7편의 영화를 찍는 동안 두 사람은 장 뤽 고다르 감독과 그의 페르소나였던 안나 카리나처럼 영화의 동반자였으며, 영감을 주는 커플이었다. 이들은 중국의 경직된 전통과 새로운 혁신이 부딪치는 동요의 순간을 과거 중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려냈다.

천안문 사건을 초래한 근원적인 문제를 다룬 <국두>에서 공리는 낡은 유교적 사고에 고통 받는 여성으로 출연한다. 1920년대 작은 외딴 마을의 염색공장에서 나이 많은 남편으로부터 시달리던 여성이 필사적으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라스트 신에서 공리가 불을 지르는 장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니벨룽의 반지>의 비극적 여주인공 크림힐트’를 떠올린다. 이 작품에서 공리는 희망 없는 상태에 놓인 여성의 갈망과 억압된 욕망을 긴장감 있게 녹여내고 있다.

뿐만 아니다. <귀주 이야기>에서 공리는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위협적인 전통과 인습에 과감히 맞서는 시골 아낙으로 출연해 사회,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운명을 거스른다. 이처럼 공리는 전통적인 중국 여성을 연기하는 순간에도 절대 의존적이거나 수동적인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독립적이며 강인한 이미지를 남겨두었다. 그 힘은 운명을 거스르는 그녀의 앙다문 얼굴에서 쉼 없이 발산된다.

장이모우 감독과 공리가 호흡을 맞춘 영화들마다 해외에서의 호평이 이어졌다. <국두>는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된 첫 번째 중국어권 영화가 되었으며, 이어 <홍등>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노미네이트되었다. 하지만 공리가 출연했던 장이모우 감독의 초기작들은 중국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했다는 이유로 정작 중국 검열기관으로부터는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공리는 세계적으로는 중국을 대표하는 배우였지만 정작 중국인들은 공리의 모습을 영화 속에서 만나기 힘들었다. 하지만 중국 내의 사정과 달리 해외에서는 이러한 갈등이 더욱 폐쇄적인 중국사회를 반영했다는 이유로 화제가 되었다. 그만큼 공리의 인지도도 높아졌다. 공리는 봉건적인 중국사회에서 억압받는 민중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배우로 이름을 알리며 중국을 대표하는 배우로 성장했다.

영화제를 통해 이름을 알린 배우 공리의 명성은 대중 스타를 향한 열광과 달랐다. 적어도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에 제작된 중국영화 속에서 그녀의 이미지는 상업 영화로 인기를 얻은 보통의 스타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대중 스타이기에 앞서 공리는 중국을 세계에 알리는 문화전도사였다. 20대 초반부터 그는 젊은 여배우의 싱그러움 대신 국민 배우라는 무거운 수사를 짐처럼 껴안아야 했다.

중국 5세대 영화의 페르소나

1991년 홍콩의 왕정 감독이 연출한 <도협 2-상해탄도성>에 출연한 공리는 시대극에서 빛을 발했던 기존의 이미지를 접고 코믹한 이미지로 연기 변신을 시도한다. 하지만 장이모우의 그림자가 너무 컸던 탓일까. 현대극에 출연한 공리의 모습은 낯설기만 했다. 이듬해 공리는 홍콩영화계 진출을 접고 다시 장이모우 감독의 <귀주 이야기>에 출연한다. 결국 이 작품으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후 공리는 중국 5세대 감독 중 한 명인 첸 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를 통해 또 한 번 세계의 주목을 받고, 1995년에는 장이모우 감독의 <트라이어드>에서 밤무대 가수로 등장해 섹시한 매력을 선보인다. 장이모우 감독은 <트라이어드>에서의 공리를 일컬어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한 중국 여성의 전형을 새로운 타입으로 뒤집어버렸다”고 평한다.

이후 결별한 공리와 장이모우 감독은 10년 넘게 각자의 행보를 걸었다. 장이모우에게 장즈이라는 또 다른 페르소나가 생겼으며 공리는 홍콩과 할리우드를 오가며 세계적인 배우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들이 다시 만난 것은 2006년 <황후花>를 통해서다. 당나라 말기의 궁중사극 <황후花>에서 비운의 황후로 출연한 공리는 섹시한 몸매를 맘껏 과시하며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90년대 중국영화를 논할 때 장이모우를 빼놓을 수 없듯, 공리도 빼놓을 수 없다. 장이모우 영화에서 공리는 독립적이고 거만한 듯한 모습으로 중국영화의 힘을 세계에 알렸으며, 중국의 현대역사를 영화 속에서 체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공리는 또한 90년대 중국영화가 서구와 만나는 접점을 마련해준 배우였다.

하지만 장이모우와 헤어진 후 공리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연기보다 영화제 심사위원, 국제적인 영화 관련 행사에서 중국의 얼굴마담에 머무르는 세월이 이어졌다. 1997년 칸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이후 지금까지 베를린, 베니스, 도쿄영화제에서 심사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98년 프랑스 정부에서 영화계 공로자에게 헌정하는 문학 예술인상을 수상하며 중국의 문화대사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냈지만 필모그래피는 날로 초라해졌다.

공리가 배우로서 침체기를 맞은 1990년대 후반은 시기적으로 중국 5세대 감독들이 세계 영화제에서 물러나는 시점과 맞물린다. 이런 면에서 공리는 중국 5세대 영화감독들과 흥망성쇠를 함께한 배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집스러운 광대뼈로 운명을 응시하는 공리의 이미지는 당시 중국의 모든 장르, 표현방식과 단호하게 단절하고자 했던 중국 5세대 감독의 작품을 빛내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던 그녀가 서서히 자신의 이미지를 재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왕가위 감독의 <2046>를 통해서다. 공리는 왕가위 감독과 일하면서 “카메라 앞에서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법과 세상 어떤 감독과도 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삼부작 옴니버스영화 <에로스> 중 왕가위 감독의 <그녀의 손길>에서 홍콩 고급 매춘부 역으로 출연한 공리는 자신의 우아한 관능미를 적극 끌어내 위엄과 고상함을 잃지 않는 가운데 터질 듯한 매력을 뿜어냈다. 그러나 그녀의 강인하고 도발적인 이미지가 관능적인 아름다움으로 본격 승화된 것은 <게이샤의 추억>부터라고 할 수 있다.

열정과 관능으로 세계를 사로잡다

1990년대 중반 공리는 마이클 만 감독의 <히트>에서 로버트 드 니로의 아내 역을 제의받았다. 마이클 만 감독은 <붉은 수수밭> <홍등>을 통해 공리에게 매료돼 이같은 제안을 했다. 하지만 공리는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와 연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영어가 미숙하다는 이유로 거절한 바 있다. 1990년대 후반 꾸준히 할리우드 진출을 모색해온 공리는 1997년 웨인 왕 감독의 <차이니즈 박스>로 첫 영어 연기에 도전했다. 하지만 장만옥에게 가려 <차이니즈 박스>에서는 빛을 발하기 힘들었다. 이후 공리는 할리우드 진출을 조심스럽게 타진해갔다. 하지만 대다수 할리우드 감독들은 공리에게 의존적이고 고통 받는 전형적인 아시아 여성의 이미지를 원했다. 그런 역에 흥미가 없었던 공리는 “좋은 대본과 감독이 나타나기를 천천히 기다리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결국 그 기다림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시카고>의 롭 마셜 감독이 건네준 대본이었다. “롭 마셜 감독이 직접 <게이샤의 추억>의 대본을 가지고 찾아왔다. 그것은 아시아의 이야기를 진심어린 시각으로 담아낸 영화였다. 무엇보다 나를 끌리게 했던 것은 하츠모모라는 캐릭터였다. 대단한 캐릭터였기 때문에 충분히 도전할 만했다.” 그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게이샤의 추억>은 공리의 강렬한 이미지를 집약적으로 담아낸 영화였다.

공리가 연기한 하츠모모는 불처럼 격정적이고 파괴적이다. 게이샤의 운명을 거스르고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으며,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는 데 두려움이 없다. 영화에서 게이샤 하츠모모를 열연한 공리는 주인공 장즈이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발산하며 비로소 할리우드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공리는 “하츠모모는 자신까지 태워버리는 불같은 여자라 생각한다”며 “그는 결코 원작 소설에서처럼 악역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공리는 하츠모모를 연민을 자아내고, 관객을 매혹시키는 인물로 탄생시켰다. 다섯 달 동안 모든 에너지를 하츠모모에 집중시킨 탓인지 그녀는 <게이샤의 추억> 이후 힘든 시간을 보냈다. “내가 나오는 촬영분이 끝나는 마지막 날.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의지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심한 상실감을 느꼈고, 그것은 극중 하츠모모가 집에 불을 지르고 떠나는 순간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게이샤의 추억> 이후 공리는 마이클 만의 <마이애미 바이스>에 출연했다. <히트> 때부터 타진돼온 마이클 만과의 만남이 결국 성사된 것이다. 조직 보스의 정부 이사벨라 역을 맡은 공리는 쿠바 악센트가 들어간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다.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영어 코치에게 매일 두 시간씩 특별수업을 받아야 했으며, 틈틈이 인물분석을 해야 했다. 공리와 작업한 후 마이클 만 감독은 “공리는 세계에서 가장 연기를 잘하는 여자배우 중 한 명”이라며 “강함과 연약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흔치 않은 재능의 소유자”라고 극찬했다.

<마이애미 바이스>를 촬영하던 중 피터 웨버 감독이 찾아왔다. <게이샤의 추억>에 매료된 그는 공리가 <한니발 라이징>에서 한니발의 첫사랑 역을 맡기를 희망했고, 그녀에게 한니발의 첫사랑인 신비의 여인 레이디 무라사키 역을 주저 없이 맡겼다. 레이디 무라사키는 공리의 처연하고 강인한 매력이 더해져 희대의 살인마 한니발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공리는 레이디 무라사키에 대해 “특별하고 신비스러운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다. 그가 레이디 무라사키를 바라보는 느낌은 많은 관객들이 공리를 볼 때 느끼는 바이기도 했다. “한니발처럼 무라사키의 인격 안에도 악마 같고 어두운 면이 있다. 하지만 무라사키와 한니발이 다른 점은 그녀는 자신을 통제할 수 있지만 한니발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전쟁 중 겪었던 심리적 외상으로 괴로워하는 한니발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자 어린 한니발을 보호하는 여인이자 한니발의 첫사랑이었다. 공리는 <한니발 라이징>의 출연을 “일종의 모험이자 기회”로 받아들였고, 피터 웨버 감독은 공리가 “본능적으로 캐릭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모든 대사를 소화해야 했지만 그녀에게 언어는 장벽이 되지 않았다. 이미 <게이샤의 추억>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영어 연기를 한 덕분에 훨씬 수월한 작업이 됐다. 그러나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쿠바 악센트가 들어간 영어 연기였다면 이번에는 영국 악센트가 들어간 영어 연기라 수없이 연습하고 준비해야 했다. “영국 억양을 대사 코치와 함께 연습하는 것은 재밌는 일이었다. <한니발 라이징>은 <마이애미 바이스> 직후에 찍은 영화라 대사 코치가 왔을 때 ‘영어발음이 꽤 근사하게 들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상류층의 영국 악센트를 가져오기 위해 <마이애미 바이스>의 억양은 버려야 했다.” 결국 비교적 훌륭하게 영국 악센트를 소화해낸 공리는 카리스마와 상실감을 오가는 눈빛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공리는 지금까지 맡았던 역할에 대해 “나처럼 강하고 끈질긴 점이 좋았다"고 평한다. “그들 대부분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투쟁하는 여성들이었다.” 황녀, 농부, 매춘부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캐릭터를 오갔지만, 그 숱한 캐릭터를 관통하며 형성된 공리의 이미지는 강인함과 우아함이다. 어느새 공리는 "가장 아름다운 여성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감독들이 함께 작업하길 희망하는 가장 좋은 여배우"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제 아시아를 대표하는 배우라는 말은 더 이상 공리를 위한 수사가 되지 못한다. 나이 마흔이 넘어 최고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출처 : 문화영토 또다른 시선으로
글쓴이 : 심호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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