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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로알기

한국 영화의 힘은 일본 만화의 힘?

한 남자를 15년간이나 사설 감옥에 가둔다. 이유는? 모르겠다. 갇힌 남자는 인생 최초의 참회록을 쓰며 자신이 갇혀야만 했던 이유를 찾는다. 찾다 보니 살아온 30여년의 세월 모두가 이유인 것 같기도 하고 또 그 중 단 하나도 이 혹독한 처벌의 이유가 되기엔 시시하기도 하다. 미칠 것 같은 감금의 세월, 그는 이제 자신을 가둬둔 남자를 찾는다. 그런데 추적이 시작되기도 전에 자신을 감금시킨 당사자가 나타나 말한다. “당신은 질문을 잘못 던졌어. ‘누가’가 아니라 ‘왜’라고 물었어야지.” 이제, 질문은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또 다른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100㎏을 넘나드는 한 여자가 있다. 심성도 곱고, 능력도 있지만 뚱뚱한 외모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결심한다. 전신 성형을 하기로. 신도 버린 듯한 뚱녀의 몸과 얼굴을 바꾼다. 1년여 후, 완벽한 미인으로 탈바꿈한 그녀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 앞에 선다.



눈치챘다시피 이 두 이야기는 영화 ‘올드보이’와 ‘미녀는 괴로워’의 시놉시스(줄거리)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딴지’를 걸어보자. 15년간 사람을 감옥에 가둔다는 게 말이 될까? 세상에나, 전신 성형이라니, 말이 되나? 엄밀히 말하자면, 말이 안 된다. 가두는 것도 그렇고, 전신 성형도 그렇다. 사람들은 흔히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을 보고 ‘만화 같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사실 ‘올드보이’와 ‘미녀는 괴로워’의 이야기는 소설이 아닌 ‘만화’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그것도 우리나라 만화가 아닌 일본 만화이다.

최근 개봉한 한ㆍ중ㆍ일 합작 영화 ‘묵공’ 역시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춘추전국 시대를 배경으로 묵가적 사상의 현대성으로 재확인하고 있는 이 작품은 제작 기간이 10년 걸렸고 160억원이 투자된 매머드급 영화다.





허황되고 과장된 상상력을 대부분 ‘만화 같다’고 한다면, 일본 만화는 이 지점을 극대화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애니메이션의 왕국이 되었듯이, 일본 만화는 보이지 않는 세상을 가시화한다거나 사소한 상상력을 과장하는 데 있어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 얼핏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시피, 일본 만화의 매력은 놀랄 만큼 참신한 상상력, 그 소재에 있다. 즉 이야기의 구성이나 흐름, 탄탄함이라기보다 아이디어의 참신함에 일본 만화의 매력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영화 제작자가 일본 만화의 소재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가장 잘 만들어진 일본 만화 각색 영화에 ‘올드보이’가 꼽혔듯이 ‘올드보이’나 ‘미녀는 괴로워’는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고스란히 재구성되었다기보다 완전히 재창조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이는 만화 원작을 잠시 살펴봐도 알 수 있다. 미네아시 노부아키의 원작 ‘올드보이’에서 한 남자가 주인공을 감금한 까닭은 과거 그가 불렀던 심오한 노래를 비웃었기 때문이다. 심오하기도 하지만 쉽게 납득되지 않는 까닭을 보편적 인간의 갈등인 근친상간적 욕망으로 바꾼 것은 박찬욱 감독의 작업이었다. 이유 모를 15년간의 감금이라는 소재를 보편적이면서도 영화적인 소재로 각색해낸 것이다.

이는 스즈키 유미코의 ‘미녀는 괴로워’에도 해당된다. 만화가 변신에 성공한 미녀의 좌충우돌 에피소드에 집중하고 있다면, 영화는 한국 사회에서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성형문제의 진정성으로 이야기를 심화해나가고 있다.

이를 보면 우리나라의 영화인이 상상력을 이야기로 재구성해내는 데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일본 문화의 콘텐츠가 무한한 상상력의 보고로 차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좀더 심각하게 말해 보자면, 이제 문화계에서 특히 영화계에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구성이 아니라 소재 즉 소스(source) 자체이다. 영화계 안에서 이야기 소재를 선점하기 위한 전쟁 즉 소스전쟁이 벌어지는 것도 이러한 사정과 결부된다.

그런 점에서 일본 문화는 우리나라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가의 영화 제작에서 중요한 소재의 보고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만화를 원작으로 하지 않지만 다양하게 차용되고 있는 일본 문화 원작 작품을 일별해 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이준기·이문식이 주인공을 맡았던 영화 ‘플라이, 대디’는 가테즈로 가즈키의 소설 ‘플라이, 대디, 플라이’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재일동포 2세가 쓴 이 소설은 일본 내에서 아웃사이더로 성장할 수밖에 없는 한국인의 형편을 ‘순신’이라는 인물을 통해 입체적으로 조형해내고 있다. 2006년에 개봉했던 이윤기 감독의 작품 ‘아주 특별한 손님’도 일본 소설 ‘애드리브 나이트(adlib night)’에서 시작된 영화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송혜교·차태현이 주연을 맡았던 ‘파랑주의보’ 역시도 일본 소설인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한국판이었다. 일본 원작의 흔적은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작품에서도 뚜렷하다. 일본의 인기 드라마 리메이크작인 ‘사랑따윈 필요없어’, 손예진과 정우성이 출연했던 ‘내 머릿속의 지우개’가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일본 소설, 만화, 드라마, 영화 등의 콘텐츠가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에 차용되는 까닭은 소재의 다양성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동명 소설이 원작이었던 ‘연애시대’의 인기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혼한 뒤 다시 사랑을 느끼게 된 두 사람의 이야기는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섬세한 감성을 직조해냈다.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MBC 드라마 ‘하얀거탑’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얀거탑’은 종합병원 내의 암투와 의료분쟁을 드라마적 긴장으로 재구성해내는 데 성공했다.

중요한 것은 달라진 현실을 반영할 만한 소재가 우리 문화 안에 빈약하다는 사실이다. TV드라마를 보면 이는 좀더 분명하게 인식된다. 문화의 중심국으로서 ‘한류’의 흐름에 만족하고 있지만, 그 흐름은 실상 반시계방향으로 퍼져 나간다고 보는 편이 옳다. 일류(日流)가 한국으로, 한류는 동남아시아로 흐르는 문화적 전이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다양한 문화 콘텐츠의 교류는 필연적 현상일 수밖에 없지만, 만성적 소재 기갈에 시달리는 한국 영화계에 이 현상은 우려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한국 문화 밑바닥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일류,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강유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