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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설명: 중국 고대 기루(妓樓)에 놓여졌던 남녀 성관계 모습을 한 청대 도자기.
뛰어난 사실적인 묘사(?)로 인해 해외로 유출 당할 뻔했던 작품이다. ('中國古代性文化', 영하인민출판사) 남성의 권력화를 통해 확립한 일처다첩제 섹스산업의 기원에 대한 중국 학계의 의견은 분분하다. 최근 중국 전역에서 발굴되고 있는 유적에 따르면, 역사상 최초의 왕조로 입증이 된 하(夏)왕조 시기에 이미 노예기녀(妓女)가 등장하고 있다. 한자사전인 '사해'(辭海)에는 이런 기녀를 단순히 '고대사회에 있어 매춘을 강요당했던 여성'이라 해석하고 있지만, 고대에 있어서 기녀의 정확한 뜻은 '노래와 춤에 능한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중국에서 성학(性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체로 섹스산업의 등장을 씨족사회에서 사유제가 출현하는 시기와 밀접하다는 입장이다. 즉, 일부일처제가 사회관념으로 정착하면서 결혼은 다이내믹한 성생활을 제한하는 속박이 되었고, 이에 따라 사회의 강자격인 남성이 약자인 여성을 금전의 힘을 빌어 성노리개로 전락시켰다는 주장인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급속히 재편되어 가는 신분제 구조와 맞물리면서, 여성의 소유를 하나의 권력행위로 인식하는 의식이 보편화되기도 한다. 신분이 높은 지배계급에 있어서 여러 명의 여성을 거느리는 것이 하나의 특권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의 섹스산업은 단순히 돈을 통한 매매의 개념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남성'이란 존재의 권력화, 계급분화를 통한 권력화는 여성을 일부일처 다첩제의 구조에서 철저한 하부매개로 빠뜨리면서 수천년 중국사회를 지탱하는 통념으로 자리잡는다. 씨족공동체적 사회 유풍을 완전히 벗어나 고도의 국가체계를 형성하는 춘추전국시대에는 중국의 섹스산업, 이른바 기업(妓業)이 장족의 발전을 이룬다. 기관마다 수백 명의 관기를 두기도 이전 시기까지만 해도 개념조차 모호했던 기녀들은 이 때부터 국가에서 운영하는 관기(官妓), 민가에서 고용하는 가기(家妓) 혹은 사기(私妓) 등 종류가 세분화된다. 또한 도시 곳곳에 대규모의 기원(妓院)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하나의 계급층을 형성한다. '전국책'(戰國策)에는 "춘추시대 제환공은 시중에 700명에 달하는 기녀를 둔 기원을 만들었다"고 적혀 있는데, 이는 당시 섹스산업의 규모가 만만치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제환공이 기원을 설립한 목적이 국가재정의 수입을 늘리고 사회모순을 감소시키며 유능한 인재를 모으고, 제환공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때만 해도 국가가 주로 운영하는 기원에 속해 억압을 받았던 기녀가 진-한대에 이르러서는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된다. 관기의 경우,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체제 아래에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한서'(漢書)에 따르면, 한무제는 수천 명의 후궁을 두었고 귀족-호족들은 십여명의 첩을 거느렸으며, 각 지방의 기관마다 보통 수백 명에 달하는 관기를 운영했다고 한다. 일부 백성들이 결혼 상대자를 제대로 구하기 힘들자 쌓여가는 사회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민간에서 운영하는 기원도 갈수록 늘어난다. 이것은 시대 변화에 따라 진전되는 신분제와 화폐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섹스산업이 사회구조의 한 일각을 차지하는 요소로까지 정립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관기는 그 후 왕조의 위상에 따라 심한 변화를 보이는데, 상대적으로 국가권력이 약했던 위진남북조시대와 송대에는 쇠퇴하지만 통일제국으로 강성했던 수-당대와 원대에는 다시 그 수가 늘어난다. '기녀가 일반 백성보다 많다' 송대에 있어 나타나는 섹스산업의 특징은 상업화의 진전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 남방지방을 중심으로 한 도시경제의 번영과 밀접한데 중국에서 처음으로 야시장이 나타나고 밤문화가 형성되는 배경에 힘입은 것이다. '송사'(宋史)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송의 수도 임안(지금의 항저우, 杭州)은 인구 140만명의 세계 최대도시였다고 한다. 임안에서 생산되는 산물은 바닷길을 통해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낮의 장시에는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들끓어 인종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밤에는 도시 곳곳의 기원에서 넘쳐나는 기녀들이 오가는 사람들을 유혹했으며, 그녀들이 내뿜는 노랫소리와 웃음소리가 온 도시를 휘감았다고 한다. 송대 문장가 호자(胡仔)는 이런 임안을 '색해'(色海)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명-청대는 중국 섹스산업의 역사에서 최전성기라 할 수 있다. 이전 시대까지만 해도 기업을 좌우했던 것은 국가권력의 의지였다. 당대에 있어 일정시기 유지한 엄금령으로 상당수 기원이 문을 닫고 민간에서도 기녀를 찾는 이가 급감했다. 하지만 송대의 상업화를 거쳐 상당한 규모를 이룬 기업은 명대에 와서는 국가의 통제가 불가능하기에 이른다. 특히 정치-경제의 중심지였던 베이징과 난징(南京)에서는 "기녀가 일반 백성보다 많다"고 할 정도로 기원이 번영했다. 명태조 주원장과 영락제 이외에 대체로 우둔했던 명대 황제들은 평생을 성적 쾌락에 몰입했는데, 이는 일반 민중사회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웃음-노래에서 육체 제공으로 변화한 청대 청대에 이르러 섹스산업은 중요한 변화가 나타난다. 수천 년동안 기녀의 한 축을 형성했던 관기가 사라진 것이다. 소수의 지배자 만주족이 다수의 피지배 한족을 통치하는 현실 속에서, 청대 황제들은 민중 회유책의 일환으로 섹스산업에 철퇴를 내리는 정책을 실시한다. 이에 따라 관이 운영하는 기원은 문을 닫고 섹스산업의 주도권은 급격히 민간으로 넘어가게 된다. 또한 명대부터 기녀는 이전의 웃음과 노래를 파는 위주에서 육체를 제공하는 것으로 변한다. 이는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200년간의 평화로운 시대 분위기와 함께 사회 전반에 걸쳐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확산된 데에 있었다. 한동안 태평성대를 맞은 중국 섹스산업에 변화의 핵폭탄이 닥쳐온 것은 19세기. 급격히 늘어난 인구와 밀려오는 서구 제국주의의 침입 속에서 섹스산업도 자유롭지 못했다. 왕조 말기에 나타난 부패현상으로 먹고살기 힘든 민중들은 늘어나는 입을 줄이기 위해 기원에 딸이나 아내를 파는 행위가 급증한다. 여기에 전혀 다른 성격이 이방인이었던 서구인들의 침략은 중국 각지에 조계(租界)를 형성하면서 중국의 전통적인 섹스산업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기원을 무대로 관기, 가기-사기라는 이름의 기녀를 데리고 운영하는 기업에 전혀 다른 영업개념이 필요해지게 된 것이었다. 다음 회에서는 군벌시기와 국민당 집권시기에 다양한 양상을 보인 섹스산업의 변모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
*중국과 소수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