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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설명: 기생 어미로부터 신체형을 당하는 한 기녀. 고대의 기녀는 최하류
신분계층으로 상품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中國妓女史') 상하이 거주여성 21명중 한 명이 기녀 1917년 영국의 사회학자 갬블(Gamble) 박사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8대 도시를 선정, 공창(公娼, 국가의 허가를 받은 매춘여성)제도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여기에는 런던, 베를린, 파리, 시카고 등과 같은 서구제국의 도시가 있는가 하면, 도쿄와 상하이 같은 아시아 국가들의 도시도 있었다. 갬블 박사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도시 총인구에 비례한 공창 수를 발표했는데, 여기서 수위를 차지한 것은 단연 중국의 상하이였다. 상하이는 137명 주민당 1명꼴로 기녀였는데, 이는 서구에서 가장 많은 공창이 존재했던 시카고의 437명당 1명보다 세 배나 많은 비율이었다. 만약 여기에 조사를 하지 않았던 사기(私妓)까지 포함한다면 그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를 뒷받침하듯, 중국 사회학자 궈한이(郭咸一)는 자신의 저서 '중국부녀문제'에서 "1935년 상하이 거주 여성의 21명 중 한 명이 기녀"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중국의 대도시에 어찌하여 이렇듯 많은 섹스산업 종사자가 늘어났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당시 중국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46년 발생한 아편전쟁 이후 청왕조는 이전과는 다른 이방인을 상대해야만 했다. 당시 전 세계를 무대로 주름잡던 영국을 위시한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외화내빈의 늙은 제국 청을 단계적으로 침략하면서, 전 국토를 갈가리 유린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태평천국과의 긴 전쟁에서 상처뿐인 승리를 겪었던 청조는 양무운동을 통해 부국강병을 꿈꾸었다. 허나 1893년 청일전쟁에서의 처절한 패배는 중체서용방식 개혁의 허구성을 노출시키면서 국운이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그 뒤 1911년 신해혁명으로 통해 청을 멸망시켰던 쑨원(孫文)의 부르주아 민주주주실험 역시 당시 군사적 실권자였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반동정치로 실패를 하면서, 중국은 기나긴 정치적 분열과 내전, 외세 침략의 수렁덩이에 빠져들었다. 날마다 거듭되는 생존투쟁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 살아가야 했던 중국 민중의 삶은 고달픔 그 자체였다. 당시 중국의 대도시에는 서구 자유주의 바람과 신문명의 풍조가 넘실대고 있었다. 하지만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거주하는 농촌은 아직도 경직된 봉건사회의 질서 속에 유지되었던 것이 당시 중국의 현실이다. 대륙 5세대 영화감독의 선두주자인 첸카이거(陳凱歌)가 찍은 영화 '풍월'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폐쇄적이고 경직된 당시 한 농촌지역 명문가의 일상을 예리하게 보여주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미국의 소설가 펄 벅 역시 자신의 소설 '대지'와 '아들들'에서 불량지주의 핍박과 군벌간의 내전 속에 신음했던 중국 농민의 고난스런 생활상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구밀도에 비해 경작지가 적고 자연재해가 빈발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중국의 한 특성이다. 이것은 20세기 전반에는 더욱 심하여 북부지방의 극심한 가뭄과 양자강의 대홍수는 당시 중국 민중들에게 커다란 재앙이었다. 주기적으로 닥치는 가뭄과 홍수, 그리고 군벌간 혹은 국민당-공산당간의 내전 속에 신음하고 있었던 중국에는 지긋지긋한 가난 속에 살면서 날마다의 생존투쟁에 얽매인 인구가 무려 4억이 달했다. 조금의 토지를 갖고 있긴 하지만 살아가기에 너무 모자랐던 대다수 농민들이 자연재해의 극한 상황 아래 택했던 손쉬운 방법은 가정의 '입'을 줄이는 것이었다. 자신의 처나 딸을 부유한 사람들의 첩이나 기원(妓院)에 팔아야만 했던 당시 농민들의 철저한 상황은 생존을 위한 투쟁의 한 방편이기에 더욱 눈물겨웠다. 서구식으로 변모한 매매춘 종사자들 이렇듯 암울한 농촌 현실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녀로 추락하는 농촌여성들과는 달리, 도시에서의 상황은 그 모습이 달랐다. 1920,30년대 중국은 곳곳까지 이어진 철도 교통망을 이용해서, 금전결혼, 고된 농사일, 육아 등의 고난스런 농촌을 도망쳐 나오는 용감한 농촌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허나 도시로 나온 가난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한정되었다. 대다수 열악한 환경의 공장이나 작업장을 찾았지만, 저임금에 착취적인 반복노동, 상사에 의한 성적 희롱 속에서 희망을 상실하는 여성들은 결국 기원에 몸을 기탁하면서 생활의 안위를 얻고자 했다. 여기에 본래 도시에 거주했던 여성 속에서도 갑작스런 가정의 몰락과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절망 속에서 기녀를 직업으로 택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중국의 영화감독 장이모(張藝謀)는 자신의 영화 '상하이 트라이어드'에서 당시 최대 환락도시 상하이의 현대식 나이트클럽을 현란한 카메라 영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고전적인 기원과 달리 진한 서구의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나이트클럽 또한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도시 부유층을 위한 매매춘 장소로 이용됐다. 치파오(旗袍)와 엷은 화장이 아닌 유행에 맞춘 서구식 드레스와 진한 화장으로 무장한 호스티스나 쇼걸, 콜걸 등은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진 매매춘업 종사자의 새 모습일 뿐이었다. 이렇듯 20세기 전반기의 중국 섹스산업은 서구문화의 충격 속에 재빨리 변신하면서도, 지역에 따라서 옛 형태를 간직하면서 번성을 하게 된다. 더 늘어난 상품자원에 행복의 비명을 지르면서. 공산당의 집권, 섹스산업의 단절 시대적 분위기에 결부되어 번영을 구가하던 중국의 섹스산업에 암흑기가 닥쳐왔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이었다. 일찍이 1919년 이후 촉발된 신문화운동과 리따자오(李大釗)가 주창한 폐창(廢娼)운동에 큰 영향을 받았던 마오쩌뚱(毛澤東)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자들은 봉건사회의 억압 아래 신음하던 중국 여성들의 현실에 주목했다. 또한 섹스산업의 커다란 폐해와 매매춘업을 직접 관장했던 암흑가 조직과 국민당의 깊은 관계를 인지하고 있었다. 1949년 10월 1일 공산정권 수립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내린 첫 정책 중 하나인 기녀의 해방과 기원의 폐쇄는 전 중국 대도시로 확산된다. 이에 따라 베이징에만 문을 닫은 기원 수는 무려 224개에 달했고, 신분적 속박에서 벗어난 기녀는 1만1316명에 달했다. 공산정권은 소극적인 정책에만 머물지 않고, 섹스산업의 구조 타파를 위해 공세적인 정책을 취하기도 했다. 매매춘을 운영했던 조직폭력배들과 기원 주인을 잡아들여 사형에 처하는가 하면, 달리 갈 곳이 없었던 기녀와 매춘녀들을 세심하게 재교육시켜 새 삶을 살도록 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수차례에 걸친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시행되었던 대대적인 금창(禁娼)운동과 의식개혁운동을 통해 중국인들은 매매춘을 죄악시하는 인식의 변화를 이루게 된다. 이렇게 강력한 정책을 추진했던 공산정권의 노력에 따라,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 중국 대륙은 곳곳을 번식했던 섹스산업이 표면상으론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허나 역사적 현상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법. 개혁개방과 함께 불어닥친 자본주의의 바람은 오늘날 중국에 다시금 거대한 섹스산업을 잉태하게 되었다. |
*중국과 소수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