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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판 ‘불량주부’가 사는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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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인구통계조사 결과 ‘살림하는 남편’ 9만 80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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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다음 / 최지은 미국 통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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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회사에 다니는 아내, 살림하는 남편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불량주부’가 인기를 얻은 뒤 살림하는 남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미국에서는 이제 살림하는 남편은 드라마 소재가 될 만큼 신기한 일은 아니다. 사회의 한 부분을 이루는 집단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미국은 2003년 처음으로 인구 통계 조사에서 ‘살림하는 남편’ 항목을 추가했다. 당시 조사에서 이 항목에 해당하는
사람이 9만 8000명으로 조사돼 그 숫자가 결코 적지 않음을 보여줬다.
아내 대신 살림을 하며 살아가는 미국 ‘불량주부’의
일상을 따라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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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원 앞 놀이터에서 아들, 아들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빈스. [사진=최지은 통신원]
| 10년 경력의 베테랑 주부이자 세 아이의 아버지인 빈스는 아침 6시면 눈을 뜬다. 그는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 대신 아이들의 등교 준비로 분주하다.
중학교에 다니는 첫째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둘째 그리고 유아원에 다니는 막내
까지 모두 깨우는데도 30분이 넘게 걸린다. 아이들을 깨우고 나면 아이들의 아침 식사를 챙기고 옷가지와 준비물을 챙긴다. 학교 급식을 먹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위해 도시락 세 개까지 싸고 나면 7시 30분이다.
첫째와 둘째를 학교 버스에 태워 보내고 막내를 직접
유아원까지 데려다 주고 집에 돌아오면 9시 30분이다. 빈스는 이때서야 늦은 아침을 먹을 수 있다.
잠깐 휴식을 취한 뒤 설거지,
청소, 세탁 등 집안일을 하고 나면 점심시간이다. 1시는 유아원이 끝나는 시간이다. 시간에 맞춰 막내를 데리러 유아원에 간다. 유아원이 끝나면
유아원 놀이터에서 막내, 막내 친구들과 함께 1시간 정도 놀며 시간을 보낸다. 2시 30분, 3시 30분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갔던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다. 아이들의 간식을 챙기고, 숙제를 점검하고 나면 어느덧 저녁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다. 저녁을 먹고 나면 잠깐 휴식
시간을 갖은 뒤 아이들의 잠자리를 챙기고 나면 하루가 저문다.
빈스도 처음부터 집안 살림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결혼할 당시
빈스는 학교 선생님이었고 아내 줄리는 한 은행의 홍보담당관이었다. 맞벌이 부부로 살다 아이가 생기면서 아이들을 보육시설에 맡기는 돈이 적지 않게
들기 시작했다.
결국 월급을 더 많이 받고 있던 아내가 회사에 계속 다니기로 하고 빈스가 살림을 맡았다. 아내는 직장을 더 좋아했고
빈스는 살림을 더 좋아해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빈스가 처음 살림을 시작했던 10년 전만 해도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빈스는 “낮에 아이를 데리고 공원에 앉아 있으면 지나가던 경찰이 다가와 신분증을 요구하기도 했다”며 “멀쩡한 남자가 낮
시간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으니 내가 아이를 유괴한 것으로 오해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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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하는 남편 프레스톤과 그의 아들이 다정하게 포즈를 취했다. [사진=최지은 통신원]
| 그러나 지금은 일하는 아내, 살림하는 남편이 하나의 가정형태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요즘에는
빈스도 공원에서 아이를 돌보는 이웃 남성을 만나기도 한다. 서로 멋쩍게 인사를 하기는 하지만 10년 전에 비하면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빈스의 아내 줄리도 이 생활에 아주 만족하고 있다. 줄리는 “처음에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남편이 살림을 너무 잘해주고 있어
안심하고 일을 할 수 있다”며 “남편은 직장생활을 잘 알고 있고 나는 살림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서로 어려움을 잘 이해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살림하는 남편들이 순탄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프레스톤 에지 역시 3살 난 아들을 키우고 있는 살림하는
남편이다. 그는 항상 직장에 얽매인 생활을 답답해했다. 결국 이런 갈등으로 인해 이혼까지 했다. 재혼을 하고 난 뒤 아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하자
에지는 망설임 없이 살림하는 것을 택했다.
아이들을 돌보며 지내는 생활에는 만족했지만 그의 주변에서는 그의 선택을 쉽게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에지는 “아버지는 끝까지 내가 직장에 다녀야 한다고 나무라셨고 내가 살림한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아 결국 나는
친척들 사이에서 비밀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며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고민이 있어도 의논할 상대가 마땅치 않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현재 미국에는 살림하는 남편을 지원해 주는 전국적인 조직은 없지만 각
주나 도시별로 이들을 돕기 위한 협회가 생겨나고 홈페이지 개설이나 책 발간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살림하는 남편을 위한
홈페이지에서는 살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뿐 아니라 각 지역의 살림하는 남편을 연결해 주고 있어 친목을 도모하는 역할도 한다.
스텐버그는 살림하는 남편을 위한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그도 역시 집에서 살림을 하고 있다. 스텐버그는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이 적성에 잘 맞았지만 자신이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에 힘들어했다. 물론 이웃집에는 살림을 하는 아내들이 있었지만 좋은 대화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살림하는 남편을 위한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이 홈페이지는 살림 정보를 공유하는 것 외에도 서로 고민을 털어놓는 좋은
장이 되고 있다.
스텐버그는 앞으로 살림하는 남편들이 이 사회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활동을 펼칠 생각이다.
그는 “남자 화장실에도 아이의 기저귀를 갈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 달라고 건의하거나 살림하는 남편을 소재로 한 소설이나 영화대본을 공모하는 등의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며 “이런 활동을 통해 살림하는 남편에 대한 편견을 없애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스텐버그는 이어 “내가
원하는 세상은 대낮에 공원에 나가면 다섯 명의 엄마와 다섯 명의 아빠가 아이들을 돌보고 있고 또 누구도 살림을 하는 남자들에게 왜 집에 있게
됐는지 의심 어린 얼굴로 묻지 않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