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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와 자치단체, 남대문시장 모두 '시장 현대화'에 초점을 맞추면서 남대문시장의 거취 문제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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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김연기 |
| IMF를 막 통과하던 지난 99년, 세계적인 팝 아티스트 백남준은 다소 엉뚱한 칼럼을 신문에 기고했다. 요지는 이랬다.
"세계경제의 경쟁력은 자유시장 기능인데, 남대문시장은 이 문제를 이미 일백년 전에 해결해 놓았다. 외환위기가 닥쳐도, 불타 폭삭 주저앉아도 다음날 여지없이 가장 먼저 문을 여는 곳이 남대문시장이다."
그래서 한국인의 가능성과 생명력은 남대문시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백남준은 주장했다.
그로부터 6년이 흐른 2005년. 남대문시장은 지금 중대 기로에 서 있다. 한때 의류와 액세서리의 메카로 불리다 대형할인점과 쇼핑몰의 기세에 눌려 불황의 늪에 빠진 남대문시장이 재기의 몸부림을 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급격한 유통시장의 환경 변화는 남대문시장의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정부와 자치단체, 남대문시장 모두 '시장 현대화'에 초점을 맞추면서 남대문시장의 거취 문제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남대문시장이 새삼 주목받고 있는 이유다.
대지면적 2만평. 점포수 1만172개, 취급품목 의류 등 1700여 종. 시장종사자수 약 5만명. 1일 출입 고객수 약 35만~40만명. 1일 외국인고객 출입수 약 1만명. 남대문시장은 서울 중구 남창동과 남대문로 3·4가, 회현동 일부에 걸쳐있는, 여전히 국내 최대의 종합 재래시장이다.
90년대 중반까지 의류산업 메카... '부르뎅' '원 아동복'을 아시나요
88년 서울올림픽을 거치고 지난 90년대 초중반까지 남대문시장은 우리나라 의류산업의 중심지였다.
여기에 수입자유화가 있기 전까지 일명 '도깨비 상가'로 불리는 수입품 가게의 명성도 자자했다. 일제 라디오에서부터 고급 양주까지 '도깨비에서 구하지 못하면 국내엔 없는 제품'이란 말이 나돌 정도였다.
매일 새벽 남대문시장으로 몰려드는 전국 각지의 소매상들로 서울역 주변부터 교통정체가 빚어졌고 시장 일대는 새벽 내내 불야성을 이뤘다.
"밤을 꼬박 새우고 일해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죠. 그땐 정말 돈을 긁어모으고 다녔다니까요. 그렇게 일했던 사람들이 전부 그 돈으로 자식들 대학 보내고 시집, 장가 보냈는데…"
남대문시장 본동상가에서 32년째 의류가게를 운영해온 윤형자 할머니는 80년대 잘 나가던 시절을 이렇게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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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대문시장에서 팔리는 아동복이 곧 한국 아동복시장의 역사였다. '부르뎅', '크레용', '포키', '마마', '포핀스', '원아동복' 등 전부 지금의 20~30대에게는 익숙한 이름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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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김연기 | 아동복 시장은 남대문시장의 '꽃중의 꽃'이었다. 이곳에서 팔리는 아동복이 한국 아동복시장의 역사였다. '부르뎅' '크레용' '포키' '마마' '포핀스' '원 아동복' 등 전부 지금의 20~30대에게는 익숙한 이름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20년 넘게 남대문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백승학 남대문시장주식회사 기획부장은 "80년대 초반 교복자율화가 발표되고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거치면서 의류시장은 최고 호황을 누렸다"고 말했다.
그 때만 해도 남대문시장의 경기가 곧 나라의 경기와도 같았다. 내수와 체감경기를 살필 때면 언론은 어김없이 남대문시장부터 들르곤 했다.
80~90년대 남대문에서 "골라, 골라"를 외치던 '청년 사업가'들은 밑천을 두둑이 챙겨 '진짜' 사업으로 뛰어들었다. 최근 <비즈니스 위크>가 급성장 기업으로 소개한 아시아 7개 기업 가운데 한국에선 유일하게 소개된 '더페이스샵'의 정운호 사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정 사장은 "나를 키운 건 8할이 남대문시장"이라고 말할 정도로 남대문시장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전문대를 중퇴한 그는 일찌감치 남대문시장에서 과일장사를 시작해 지난 92년부터 화장품 가게를 열었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 2003년 서울 명동에 더페이스샵 1호점을 내고 이 회사를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회사로 키웠다.
"골라, 골라" 외치던 사업가 "나를 키운 건 8할이 남대문"
외환위기에도 호황이 가시지 않은 남대문시장에 불황의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1년 초부터다.
대형 할인점이 전국 곳곳에 들어서면서 지방 소매상이 크게 줄어든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강용호 남대문시장주식회사 사장은 "과거 80~90년대에 비하면 지방 소매상인의 숫자가 절반에도 못 미친다"며 "지방에 대형점포들이 들어서면서 (지방 소매상들이) 장사가 안 되니까 남대문시장에서 상품을 대량으로 사가는 지방 소매상들도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백남준이 말했듯 '불이 나서 폭삭 주저앉아도 가장 먼저 문을 열 것 같았던' 남대문시장은 과거와는 달리 침체된 국내 경기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2002년 월드컵 이후 현대식 시설을 갖춘 대형 쇼핑몰이 이곳저곳 생기면서 상가마다 매출이 30% 이상 떨어졌다. 3년 전에는 대표적인 아동복 브랜드인 '원 아동복'이 매출 부진으로 결국 문을 닫기도 했다. 점점 불황의 늪은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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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감온도가 영하 10도를 웃도는 혹독한 추위에도 관광안내소 주변은 상인과 고객들로 북적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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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남소연 |
| 그리고 2005년 12월 16일 오후 5시, 남대문시장 내 외국인 관광안내소 앞. 체감온도가 영하 10도를 웃도는 혹독한 추위에도 관광안내소 주변은 상인과 고객들로 북적였다. 이 시간은 노점상들에겐 영업을 시작하는 시간이지만 지방 소매상들을 상대로 새벽장사를 하는 상인들한텐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다. 여전히 시장은 살아 있었다.
백승학 남대문시장주식회사 기획부장은 "올 초부터 감지된 경기 회복세에도 불구하고 재래시장 만큼은 찬바람을 면치 못했으나 최근 들어 방한 의류를 찾는 고객이 늘면서 의류매장 매출은 지난해와 비교해 30%나 늘어났다"고 밝혔다.
최근 몇 년간의 경기침체와 시장의 환경 변화는 남대문시장의 변화를 불러왔다. 재래시장 침체를 보다 못한 정부가 장기적 관점에서 재래시장 활성화 대책을 준비하는 것도 고무적이다.
여기에 외국 손님들의 발길은 예전보다 더 잦아졌다. 남대문시장의 거취가 다시 주목받고 있는 이유다. 남대문시장내 관광안내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관광협회 관계자는 "요즘엔 의류뿐만 아니라 액세서리 가게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시장 현대화가 살 길"... 상인들이 나섰다
최근 재래시장 살리기에 발벗고 나선 김성진 중소기업청장은 남대문시장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요소로 ▲시설의 현대화 ▲전문시장화 ▲상인들의 창의성과 패기 등 3가지를 꼽았다.
우선 상인들부터 시장의 현대화를 위해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퇴계로 부근 입구에서 액세서리를 팔고 있는 윤무성씨는 요즘 일과 중에도 인터넷을 들락거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최근 인터넷 쇼핑몰을 개설하면서 인터넷 주문을 검색하기 위해서다.
윤씨는 "가장 큰 변화는 매출 신장"이라며 "예전엔 지방 소매시장 상인들이 일주일에 한두번 서울로 올라와서 물건을 받아갔는데, 지금은 인터넷으로 거래가 이뤄지면서 거래 횟수도 잦아지고 매출도 늘어났다"고 말했다.
현재 남대문시장에서 인터넷 쇼핑몰을 개설한 점포수는 690개 정도. 아직은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중소기업청은 재래시장이 온라인판매망을 구축할 때 관련 비용을 지원해 준다.
지난 6월 정부가 내놓은 '재래시장 활성화 방안'에 따르면 남대문시장처럼 경쟁력이 있는 시장은 국제적인 수요에 대응할 수 있도록 현대화되고 전문화된 시장으로 육성된다.
서울시와 관할구인 중구청에서도 남대문시장 현대화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다. 중구청 지역경제과 관계자는 "재개발 과정에서 융자대금 대출과 세금 감면 등 시장 현대화 과정에 보탬을 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남대문시장의 현대화 계획은 이미 30년 전에도 논의된 적이 있다. 지난 68년 남대문시장에 대형화재가 발생했을 때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지하 3층 지상 25층 빌딩 규모의 남대문시장 현대화 계획을 세웠다.
층별로 취급품목을 다양화하고 빌딩 안에 주차시설까지 갖추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혁신적인 안은 철골구조물을 막 쌓아 나가기 시작할 무렵 중도에 무산됐다. 현재 시장 중심부에 위치한 꽃 도매상가 건물 옥상엔 아직도 목이 잘려나간 철골 잔재가 흉물스럽게 남아 있다.
백승학 기획부장은 "당시 김현옥 시장이 청계고가와 세운상가를 세우면서 이것들과 함께 근대화의 상징으로 남대문시장 현대화를 구상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러나 둘(청계고가와 세운상가)은 되고 하나(남대문시장)는 안 됐는데, 왜 그렇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사라진 청계고가, 재개발되는 세운상가... 남대문시장의 살 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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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5시가 지나면 상가를 얻지 못하고 노천에서 장사를 하는 노점상들이 "골라, 골라"를 외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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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김연기 |
| 강용호 남대문시장주식회사 사장은 "2~3년 안에 본동 상가와 퇴계로 변 1번가 중 한 곳은 현대식 건물로 재건축 된다"며 "1번가 상가에는 음식점과 오락시설과 대규모 복합상영관도 넣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대화 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아직도 땅주인의 30% 가량이 재건축에 동의를 하지 않아 구체적인 공사일정을 잡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정부나 자치단체도 원칙적으로 시장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방침 아래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지만 남대문시장은 세운상가, 청계고가 등과 더불어 고난했던 우리 근대화의 경제성장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청계고가는 이미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고 세운상가 역시 서울시의 도심부 발전계획에 따라 2020년까지 녹지 및 대형 주상복합단지로 재개발될 예정이다. 이제 남은 건 남대문시장 뿐이다.
남대문시장은 40년 넘게 서울의 한복판에 자리하며 나라 경제발전의 영광과 고난을 지켜봤다. 이제 다시금 변화의 기로에 서 있는 남대문시장, 백남준의 주장대로 불타 폭삭 주저앉아도 다음날 가장 먼저 문을 여는 시장으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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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새벽, 천원짜리 잔치국수 '불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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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새없이 돌아가는 남대문 시장 24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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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남소연 | 시장은 24시간 쉴새없이 돌아갔다. 일반 직장인들은 잠자리에 들 시간인 밤 11시 남대문시장의 일과는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때부터 다음날 이 시간까지 매일 30만~40만명의 고객이 남대문시장을 드나든다. 이 곳에서 생계를 꾸려가는 시장 상인들도 5만명에 달한다.
새벽 3시가 되면 전국의 소매상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성시를 이룬다. 새벽 4시를 넘어서 소매상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면 상인들도 잠시 여유를 갖지만 이내 서울 근교의 소매상인들의 발걸음으로 시장은 다시 북새통을 이룬다. 남대문시장의 24시간을 둘러봤다.
새벽 4시
깜깜한 새벽, 중앙상가건너편 먹자골목은 낮 시간대보다 이 때가 더 바쁘다. 간밤에 서울로 올라온 지방 상인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에 출출한 배를 채워가는 곳이다.
비빔밥, 보리밥, 잡채, 설렁탕, 호박죽, 팥죽, 곱창, 순대, 머리고기 등 메뉴도 다양하다. 이 중에서도 단돈 1000원짜리 잔치국수가 가장 인기있는 메뉴다.
특히 손님 대부분이 시간에 쫓기는 만큼 거의 주문과 동시에 음식이 나올 정도로 주인들의 손이 빠르다. 사람에 따라 조금 차이는 있겠지만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하고 음식값을 치르고 나올 때까지 채 5분이 걸리지 않는다.
이후에도 커다란 비닐봉투나 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지방 소매상인들로 물건을 떼러 왔다가 아직 남대문시장을 벗어나지 못한 경우들이다.
오전 10시
1차 노점상이 좌판을 펼치고 물건을 팔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남대문시장의 하루 일과 중 가장 한산한 시간이다. 한가한 시간대를 골라서 온 외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간혹 눈에 띈다.
오후 4시
여기저기서 '골라, 골라'를 외치는 상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주로 도소매 상인보다는 일반 고객들을 상대로 물건을 파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오후 5시부터 영업을 하는 2차 노점상인들이 모여드는 때이기도 하다. 이들이 하나둘 좌판을 깔고 짐을 풀어놓으면 시장 골목은 발디딜 틈 없이 북적거린다.
학교를 마치고 옷을 사러오는 학생들과 저녁 장을 보러 오는 주부들로 하루 중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때다. 최근에는 주변의 신세계백화점에 왔던 사람들까지 이곳을 다시 들러 더 혼잡하다.
또 이 때는 도매상들을 상대로 하는 상가들이 근무교대를 하거나 밤 11시 문을 다시 열기까지 잠깐 쉬어가는 시간이다. 밤과 새벽장사를 위해 포장마차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는 모습도 눈에 띈다.
밤 8시
외국인 관광객들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시간이다. 전체 외국인 손님의 절반 가량은 일본인이지만 최근에는 미국이나 남미 쪽 사람들도 자주 목격된다. 미국이나 남미 사람들은 목걸이, 팔찌 등 주로 액세서리에 관심이 많다.
아쉬운 점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붐빌 시간에 외국인 관광안내소가 문을 닫는다는 점이다.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 당황해하는 외국인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밤 11시
말그대로 시장통이다. 아동의류와 숙녀복 등 의류상가가 다시 문을 여는 시간이다.
도로 주변엔 지방 상인들을 실은 수십대의 버스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버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상인들 손에는 하나같이 커다란 비닐봉투와 보따리가 쥐어져 있다.
보통 직장인이라면 하루를 모두 마치가 잠자리에 들 시간이지만 남대문시장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일과가 시작된다.
80~90년대 남대문시장이 최고 번창할 때는 이 시간이면 지방에서 올라온 상인들을 실은 차들로 서울역부터 정체 현상이 빚어졌다고 하지만 지금은 시장 주변 도로에만 차들이 길게 늘어선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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