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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나눔의 기쁨-나눔의 바다로1

[커버스토리|나눔의 기쁨]

‘탐욕 열차’서 내려 나눔의 바다로
아름다운재단 박원순 상임이사 … “나눔의 마음, 성공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습관”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박원순(49) 변호사는 ‘나눔 전도사’다. 2000년 8월 그가 첫 씨앗을 뿌린 ‘아름다운재단’은 이제 우리나라 기부문화의 상징이 됐다. 박 변호사는 우리나라 최대 모금단체인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감사이기도 하다. 그 외 여러 복지·모금 단체 및 기업 사회공헌팀들이 그의 지지와 조언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우리 기부문화를 이끌어가는 실질적 리더이자 가장 신뢰받는 파트너 중 한 명이 됐음을 증명하는 내용들이다.

사람들에게는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참여연대’를 대표하는 시민운동가에서 사회사업가로 ‘변신’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함께 나누며 사는 세상’을 꿈꾸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의 일이다. 연원을 따져 들어가면 이렇다.

“전 입학 시험에 두 번 떨어졌어요. 한 번은 고등학교, 한 번은 대학교였죠. 고교 재수 때는 꼭두새벽부터 밤까지 단팥빵 하나로 버티기 일쑤였고, 그 뒤로도 고학을 하느라 고달픈 점이 많았지요. 대학에 입학하면서 ‘이제 큰 어려움은 끝났다’ 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서울대 법대 1학년생이던 1975년 5월, 도서관에서 ‘타임’지를 읽으며 미팅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바깥에서 요란한 함성이 들려왔다. 캠퍼스로 난입한 경찰이 학생들을 무차별 폭행, 연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눈에 불똥이 튄 그는 무조건 밖으로 달려나갔다. 시위 대열에 끼여 이리저리 휘둘리다 결국 경찰에게 연행되고 말았다.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된 며칠 후였거든요. 저야 단순가담자에 불과했지만 엄벌에 처해졌죠. 수감생활 4개월에 학교에서도 제적됐고요.” 하지만 감옥은 그에게 새로운 학교였다. 다른 소년범들과의 우정을 통해 오히려 그는 ‘인간은 선하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다양한 ‘교양서’들을 읽으며 세상 보는 눈도 넓혔다. 그는 “이렇듯 예기치 못한 경험과 각성들이 결국 나를 나눔의 바다로 이끄는 첫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영국·미국 유학길에 서구의 기부문화 체험

출소 후 몇 년을 방황하다 비로소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법의 목적은 평화이고,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투쟁’이라는 독일 법철학자 예링의 말이 길잡이가 돼 줬다. 24세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검사가 됐으나 생활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죄를 따져 벌을 매겨야 하는 업무가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사표를 내고 변호사가 됐다. 그리고 돈 버는 맛을 알았다. “기사가 모는 승용차를 탔고 휴대전화도 썼어요. 제법 큰 단독주택도 마련했으니 또래 친구들과 비교하면 잘나가고 있었던 셈이죠. 경치 좋은 곳을 지날 땐 ‘저런 곳에 별장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으니까요.”

그렇다고 그가 ‘돈만 밝히는’ 변호사였던 것은 아니다. 여러 단체에 크고 작은 기부를 하고 있었고 주변의 어려운 이들에게도 인색하지 않았다. 권인숙 성고문 사건, ‘말’지 보도지침 사건 등을 맡아 인권변호사로도 활약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의 자신에 대해 “이미 탐욕이란 열차에 올라탄 상태였다”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 아차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조영래 변호사 병문안을 갔을 때였어요. 절 보시더니 ‘돈 그만 벌고 이젠 눈을 좀 돌려봐, 외국에도 나가보고…’ 하시더군요. 가슴이 뜨끔했지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