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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과학과 도시2-프랑스 신도시 '발드 유럽'

신도시의 심장, 23개의 인공호수

[기획연재 | 과학과 도시]

호수·녹지 조성의 과학으로 생태 도시를 창조한 프랑스 신도시 ‘발드 유럽’에 가다

▣ 파리=글·사진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한겨레21>은 창간 10주년 기획연재 ‘과학과 도시’의 두 번째로 프랑스 파리를 살펴보았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파리 신도시 건설의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는 마른 라 발레의 ‘발드유럽’과 파리 제13구역 ‘파리 리브 고슈’에서 인간과 자연 그리고 과학을 생각해본다. 이번 취재에는 파리에서 건축가로 활동하는 한상욱씨와 국립 건축대학 파리 라 빌레트의 박사과정에 있는 송현씨 그리고 프랑스 국립도시연구소 소속 에파 마른르의 책임 도시계획가인 미셸 파니가 동행 취재했다. 편집자


파리 순환도로 동쪽에서 A4번 고속도로를 진입한 자동차는 100km 안팎의 속도로 달렸다. 자동차가 35km 지점의 램프를 빠져나오는데도 요금소는 보이지 않았다. 고속도로를 벗어나는 순간 판교 톨게이트 통행료 논란이 떠올랐다. 한국도로공사는 성남의 분당 신도시가 생길 즈음 판교 톨게이트를 설치해 꼬박꼬박 통행료를 챙기지 않았던가. 그런데 프랑스의 교통 당국은 고속도로 35km를 공짜로 다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의문이 풀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샤를 르 드골 공항에서 40여분을 달려온 자동차가 들어선 마른 라 발레 지역 끄트머리의 신도시 ‘발드유럽’(Val d’Europe)에 해답이 있었다.


△ 파리 신도시인 마른 라 발레에 들어서는 발드유럽의 5개 코뮌 가운데 하나인 세시 마을 풍경. (사진 / 에파 마른)

흙·목재보단 기존 재료 활용 더 많아

그동안 파리의 신도시는 인구와 기능 분산 정책에 따라 거미줄처럼 밖으로 퍼져나가기만 했다. 이미 들어선 마른 라 발레·세르지 퐁투아즈·생캉탱 이블린·에브뢰·믈룅 세나르 등 5개 신도시의 개발지역은 강력한 도시 이미지를 내뿜고 있다. 사무실 단지와 쇼핑몰들이 무리지어 몰려 있고 거주지역이 고층빌딩 숲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계속 시골로 파고들어간 신도시들은 애초의 기대와 달리 ‘변두리 도시’로 존재할 뿐 또 다른 파리로서의 기능을 감당하지 못했다. 더러는 파리 중심과 소통되지 않는 사람들이 밀집된 슬럼가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발드유럽은 신도시의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고 있다. 시골 마을이 도시를 재창조하면서 유토피아를 그려내는 것이다. 고속도로를 벗어나면 곧바로 현대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전원주택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주택이 점점이 박힌 마을에서 몇 걸음 벗어나면 옥수수와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있는 녹지가 펼쳐진다. 발드유럽의 밑그림을 그린 건축가 겸 도시계획가 크리스토프 무하니는 “당장 유토피아를 실현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진 환경에서 일과 삶의 조화를 꾀하려고 했다. 도시가 시골에서 이상적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발드유럽이 생태마을 네트워크 ‘젠’(GEN, Eco-Village Net Work)처럼 생태건축(Ecological Architecture) 양식에 따른 것은 아니다. 생태건축이라면 주거단지를 주위 환경에 어울리도록 설계하면서 주택을 지을 때 비용을 줄이고 재활용이 가능하도록 흙이나 목재를 많이 활용하지만 발드유럽은 기존 건축재료를 사용했다. 지붕에 흙을 얹거나 빛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며 집집마다 지붕에서 내려오는 빗물을 받는 탱크를 두어 식수로 이용하는 모습도 눈에 띄지 않는다. 집집마다 텃밭을 가꾸긴 해도 인과 음식물 쓰레기 등을 자연 발효시켜 퇴비로 활용하지도 않는다. 다만 도시인의 삶이 얼마나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어렴풋이 보여준다.

신도시의 생태적 가치는 주거지에 조성한 크고 작은 23개의 인공호수에서 찾을 수 있다. 습기가 많은 지역 토양으로 인해 물을 가둬야만 하는 탓에 호수를 조성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호수는 자연경관의 아름다움과 홍수 방지의 본래 기능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호수는 특유의 온도조절 기능으로 여름에는 공기를 서늘하게 하고 겨울에는 온기를 보존한다. 온갖 수생식물들은 호수에서 물을 정화하는 구실을 한다. 호수 주변에 심어놓은 포플러 나무 역시 환경오염 물질을 빨아들이는 능력이 탁월하다. 생태적 순환의 논리가 인공호수에 숨겨져 있는 셈이다.

이렇듯 발드유럽은 호수와 녹지를 중심으로 도시를 재창조한다. 물론 이전 신도시 건설의 폐해를 극복하려는 데서 출발한 것이다. 실제로 1970년대에 계획된 신도시들은 콘크리트로만 가득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파리의 기능성과 예술성을 옮겨놓으려 했던 건축물들은 주변 환경에 어울리지 못하고 자체의 위용만을 자랑했다. 마른 라 발레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리 동쪽 10km부터 가로로 펼쳐진 가용 공유 면적이 파리 전체 면적(1만540ha)보다 1.5배나 넓게 펼쳐진 마른 라 발레 4개 지역에 도시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국가에서 전권을 위임받은 국립도시연구소 소속의 에파 마른르(EPA. Marne)가 총괄했다.

모토 ‘휴먼사이즈’…초대형 매장도 친숙


△ 에파 마른의 도시설계가 미셸 파니가 공사 부지를 가르키고 있다.

이미 에파 마른르는 3개 지역 신도시 건설에서 새로운 도시의 이미지를 내세웠다. 그것은 고전적 형식을 따르며 과장된 고밀도 건축물 위주로 도시를 설계하는 것이었다. 어디에서도 자연환경 혹은 주변 거주지 등과의 조화는 찾을 수 없었다. 에파 마른르의 책임 도시계획가인 미셸 파니는 이전 신도시 계획에 대한 반성에서 발드유럽이 잉태됐다고 말한다. “이전의 신도시 계획이 ‘분리’에 가까웠다면 발드유럽은 ‘통합’에 초점을 맞췄다. 건축물이 인간을 압도하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구획을 정돈하는 데도 자연환경을 근거로 삼았다. 재창조된 도시는 자연과 더불어 성장해나갈 것이다.”

발드유럽 일대를 둘러보던 미셸 파니는 끊임없이 ‘씨앙스 유맨’(Sciences Human·인간과학)을 말했다. 그의 인간과학은 인간을 위하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에 가까웠다. 발드유럽 건축의 모토는 ‘휴먼 사이즈’였다. 당연히 거대한 건축물은 눈에 띄지 않았다. 발드유럽 진입로에 있는 초대형 할인매장만 해도 전체 넓이가 12만㎡에 길이가 1km나 된다. 하지만 누구도 건물의 규모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간혹 지하 매장이 있지만 위로는 한층밖에 없다. 아울렛 역시 디즈니랜드를 옮겨놓은 듯한 단독 건물 매장으로 이뤄졌다. 아울렛은 복합 문화공간 구실을 한다. 부모들이 쇼핑을 하는 동안 아이들은 고품질 우레탄으로 바닥을 깔아놓은 놀이터에 있으면 된다.


△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진 유토피아를 꿈꾸는 신도시 발드유럽은 오는 2020년까지 30여년에 걸쳐서 공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발드유럽의 중심가인 토스카니 광장 일대는 90년대 후반부터 공사가 시작됐다.

신도시 개발이 시작된 1989년 발드유럽 지역에는 5천여명이 거주했다. 오래된 마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곳의 인구가 2만여명으로 늘었지만 대단지 아파트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2020년 무렵에 발드유럽의 전체 인구가 4만여명이 되더라도 달라질 게 없다. 이곳에 들어서는 건물은 모두 5층 이내로 규제받고 있기 때문이다. 발드유럽의 중심가라 할 수 있는 3600㎡ 넓이의 토스카나 광장 일대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건물 표면은 콘크리트가 아니다. 파리 도심의 고풍스러운 건물을 떠올리게 하는 네오클래식 양식의 건축물이 줄지어 들어섰다. 지금도 곳곳의 공사장에서 대형 크레인이 번화한 거리를 만들고 있지만 공포스럽게 치솟은 크레인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 프랑스 정부가 주도적으로 발드유럽을 건설하는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디즈니사가 지휘자 노릇을 했다. 지난 1987년 디즈니사와 프랑스 정부가 마른 라 발레에 ‘유로 디즈니’ 건설 계약을 맺을 때 30년에 걸쳐 디즈니랜드 인근 지역을 새로운 도시로 만들기로 했다. 이에 따라 광역전철(RER) 역을 연장 건설했고, 테제베(TGV)의 디즈니역도 신설했다. 고속도로 인터체인지에 톨게이트를 두지 않은 것도 디즈니사의 입김 때문이었다. 디즈니사의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한해에 1500만명이 유로 디즈니를 찾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경영난에 허덕이는 디즈니사는 발드유럽에 들어선 대형 할인매장이 유로 디즈니의 손익분기점 돌파에 기여할 것으로 믿고 있다.


△  광역전철역 앞에 조성된 토스카니 광장과 네오클래식 양식의 건축물들.

그렇다고 디즈니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디즈니사는 미국 플로리다에 ‘셀레브레이션’(celebration)이라는 교외 주택단지를 건설했다. 미국의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 대한 향수를 건축에 담은 것이었다. 당연히 디즈니사는 화려한 이력의 디지이너와 건축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디즈니사는 주거를 위한 첨단기계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유토피아의 이상에 도취된 사람들을 위한 디즈니사의 주택단지에는 자기성찰적 고민이 새겨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 중앙 통제식 건축모델이 발드유럽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누구도 사적 공간을 거대한 기계의 부속물로 여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일과 삶이 통일되는 작은 천국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연합체 SAN·거주자·디즈니사 손잡고


△ 발드유럽의 마을이 조성된 지역에는 어김없이 인공호수가 있다. 인공호수는 물을 정화하는 구실을 하며, 부근의 녹지는 대기오염 물질을 제거한다.

프랑스 정부는 유로 디즈니 유치를 위해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정부의 결정보다 중요한 게 발드유럽 거주자의 선택이었다. 발드유럽 도시계획 과정 하나하나는 도시개발조합과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지자체형 관리조직 ‘SAN’(Syndicate d’Agglometation Nouvelle·신도시연합체)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5개 코뮌을 중심으로 결성된 발드유럽 SAN의 브루노 로우아울트 책임 감독관은 “또 하나의 신도시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신도시를 만든다는 생각에서 정부안과 주민안을 놓고 끊임없이 토론을 벌인다. 여전히 공터가 많이 있지만 서두르진 않을 것이다. 도시의 분위기는 역사 속에서 형성된다고 믿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 발드유럽에 있는 마을은 5천여명이 거주했던 1980년대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기존의 건축물과 새로운 주택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발드유럽 SAN과 거주자, 디즈니사는 톱니바퀴처럼 얽혀서 발드유럽의 미래를 만들고 있다. 현재 디즈니사에서 일하는 사람이 1만1천여명이나 된다. 디즈니사는 한해에 2천만유로를 세금으로 내는데, 이것으로 SAN이 학교나 도서관 등의 공공건물을 짓고 있다. 앞으로 유로 디즈니가 안정적으로 운영돼 2700만유로를 세금으로 부담하면 발드유럽 SAN이 성공적으로 살림을 꾸려갈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을 밑거름 삼아 거주자들이 땅을 밟으면서 쾌적한 도시생활을 즐기도록 하려고 한다. 발드유럽의 도시 설계자들은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녹지와 호수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다. 녹지와 호수가 생태도시로 진입하는 길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현재 발드유럽은 주택과 상가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지금 발드유럽을 디자인하는 사람들은 그동안의 신도시 건설 경험을 통해 ‘베드타운’의 명멸을 수없이 보았다. 무엇보다 고용 창출이 관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난 3월 발드유럽 중심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곳에 알링톤국제산업단지를 개장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곳은 앞으로 20년 동안 180ha 넓이에 66만㎢의 사무공간이 들어설 예정이다. 살아 있는 도시를 만들려는 발드유럽의 계획은 젊은 부부나 어린 자녀를 둔 가족들이 실현할 것으로 보인다. 세리스라는 마을만 해도 전 인구의 60%가 40살 이하다. 지금 그들이 자연의 이법에 따르는 과학으로 재창조한 도시의 역사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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