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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창간특집/작지만 강한 대학]<7>佛고등경제상업교 ‘에섹’

[창간특집/작지만 강한 대학]<7>佛고등경제상업교 ‘에섹’



상경계 그랑제콜인 ESSEC의 대형 강의실에서 한 학생이 교수와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발표하고 있다. 이 학교는 기존 학제를 미국식 경영대학원(MBA) 시스템으로 전환해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사진 제공 에섹

《“참 창피한 일이야.” 프랑스에서 새 고용법을 둘러싼 대학생들의 시위가 한창이던 지난달 플로랑스 쿠아리에(22·여) 씨는 학교의 외국인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쿠아리에 씨는 “대학생들이 변화에 도전할 생각은 않고 안정만 추구한다”고 꼬집었다. 쿠아리에씨 역시 대학생이다. 그러나 시위에 참가한 대학생들과는 ‘신분’이 다르다. 그는 에섹(ESSEC)에 다닌다.》

270개 기업과 제휴…18개월간 현장 실습

이 학교는 파리에서 고속도로 A15번을 타고 서북쪽으로 40분가량 달리면 나오는 소도시 세르지퐁투아즈에 있다. 그랑제콜(Grandes Ecoles) 가운데 상경계에서 1, 2위를 다투는 학교. 그랑제콜은 우리나라 학제에는 없지만 대학 이상급인 프랑스 학교다.

따라서 이곳 학생들에게 취업 걱정은 남의 나라 얘기다. 쿠아리에 씨가 길거리에서 분노의 함성을 외치는 다른 학생들을 비판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에섹은 고등경제상업학교란 뜻이다. 상업과 무역 분야의 일꾼을 키워 내기 위해 베르사유의 상공인들이 주도해서 1907년에 세웠다.

설립한 지 100년이나 되는 명문 학교로 졸업생들의 취업에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학교다. 그런 에섹이 10여 년 전부터 체질을 바꾸고 있다. 기존 학제를 미국식 경영대학원(MBA) 시스템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 에섹을 방문했을 때 캠퍼스 여기저기에서 노트북 컴퓨터를 켠 채 머리를 맞대고 있는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삼삼오오 모인 학생들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섞어 대화를 나누면서 열심히 노트북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컴퓨터실에서 학생들이 교수의 설명을 들으며 프로젝트 작성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ESSEC

오후 10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컴퓨터실에는 여학생 4명이 모여 문서작업에 한창이었다. 루이비통으로부터 마케팅 관련 보고서 작성을 의뢰받아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밤늦은 시간까지 보고서 작성이라? 프랑스의 일반 대학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잘나가던 학교가 개혁에 나선 이유가 뭘까.

피에르 타피 총장은 “이전에도 에섹 졸업생들은 빵집에서 맛있는 빵이 동나듯 잘 팔려 나갔다”면서 “하지만 세계화시대에 맞는 글로벌 인재라고 하기엔 부족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프랑스 업계가 아니라 국제 비즈니스 업계가 요구하는 인재를 키우기 위한 개혁이라는 설명이다.

개혁의 주요 대상은 3년제이던 그랑제콜 학제였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2년간 준비반(classe pr´eparatoire·햇볕을 보지 않고 공부만 한다고 해서 ‘두더지반’으로 불림)을 거친 뒤 다시 치열한 입시를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는 그랑제콜이었지만 학교는 이를 과감하게 4년제로 전환했다. 이름도 에섹MBA로 바꿨다.

4년제로 전환한 것은 현장 실습을 늘리기 위해서다. 기업체의 인턴십 과정 6개월을 현장 실습 18개월로 늘렸다. 홍보 담당 에스텔 아르두앙 씨는 “단순 업무를 하면서 분위기만 맛보던 인턴십과는 크게 달라졌다”고 강조했다. 학생들은 마케팅 회계 부동산 같은 실무 부서의 책임자 아래 보조 직원으로 고용돼 ‘제대로’ 일을 한다. 기업체의 실습생 파견 요청이 매년 1만1000여 건에 이른다.

학교 측은 또 다른 6개월 동안은 외국 경험을 쌓도록 학생들을 독려한다. 교환학생 제도를 통해 외국 대학에서 공부하거나 해외에 있는 동문의 회사에서 근무하도록 하는 식이다.

학교 측은 270개 국내외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학교 건물 1층 게시판에 있는 회사 이름을 보면 LVMH, 푸조, 라파주, 다농, 카르푸, 미슐랭 등 웬만한 프랑스 기업은 거의 망라돼 있다. 아디다스, BMW재단, 코카콜라 같은 외국 기업도 있다.

크리스티앙 발므 셸프랑스 대표, 도미니크 레이니시 코카콜라유럽 대표, 질 펠리송 아코르그룹 회장, 장 뤼크 드코르누아 KPMG프랑스 회장이 동문이다.

학생들은 실습을 한 회사에 졸업 이전에 채용되는 경우가 많다. 2003년과 2004년 통계를 보면 학생의 54%가 실습한 회사에서 고용 제의를 받았고 34.4%가 그 회사에 입사했다.

영어 강의도 크게 늘렸다. 모국어 사랑이 유별한 프랑스 학교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강의만 잘 선택하면 영어만으로도 전 과정을 마칠 수 있을 정도.

타피 총장은 “학생들에게 적어도 2개 언어는 유창하게, 1개는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교수 108명 가운데 외국인 교수는 현재 30%로 비율은 점차 높아지는 추세다.

이 학교는 에섹MBA 외에 1년 과정의 럭셔리 브랜드 매니지먼트 MBA와 호텔 MBA 코스를 운영하고 있다. 럭셔리 MBA와 호텔 MBA는 전 강의 과정이 영어로 진행된다.

‘대학 위 대학’ 그랑제콜의 변신

프랑스에서 그랑제콜에 입학한다는 것은 그순간 돈과 명예를 거머쥔다는 것을 뜻한다.

프랑스에서 그랑제콜 졸업생들은 자동적으로 상류층의 일원이 된다. 거꾸로 말해 그랑제콜을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상류층에 끼어들기는 아주 어렵다는 얘기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그랑제콜은 ‘대학 위의 대학’으로 불린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도미니크 드빌팽 총리가 졸업한 국립행정학교(ENA), 장폴 사르트르, 미셸 푸코 같은 인문학 대가들을 배출한 고등사범학교(ENS), 이공계 학교인 에콜 폴리테크니크 등이 대표적인 그랑제콜이다.

프랑스만의 독특한 학제인 그랑제콜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 양성’을 목표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그동안 대부분의 그랑제콜은 프랑스 학생만을 받아들여 프랑스의 리더로 만드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물론 수업도 프랑스어로만 진행됐다.

그러다 보니 학교도, 학생도 프랑스 안에서만 안주하려는 매너리즘에 빠졌다.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글로벌 감각을 갖추지 못한 것. 매년 주요 기관들이 발표하는 세계 대학 순위에서 프랑스가 그토록 자랑하는 그랑제콜은 거의 순위에 들지 못한다. 프랑스 학생들의 경쟁력은 세계 무대는 고사하고 통합된 유럽 안에서도 뒤처졌다.

그런 그랑제콜이 최근 부쩍 개혁에 힘을 쏟고 있다. 영어수업 비중을 늘리고 외국의 뛰어난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해외 인재 발굴에 적극 나서 2003년부터 정원의 20%를 외국인 학생으로 채우고 있다. 외국 주요 도시에 입학시험을 위한 센터도 마련했다.

에섹은 한국에서 열리는 유학박람회에도 매년 참가해 “영어로 수업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학교 알리기에 열심이다.

ENA는 유럽연합(EU) 시대에 걸맞은 인재를 키우기 위해 파리에 있던 학교를 유럽의회가 있는 스트라스부르로 옮겼다. 더불어 외국인 학생 유치에도 한층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들 그랑제콜은 이 밖에도 외국 유수 대학과 파트너십을 맺거나 이중 학위제를 체결하는 방식으로 세계화를 위한 체질 개선에 열을 올리고 있다.

세르지퐁투아즈=금동근 특파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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