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를 가다 2
다한민궈린스정푸(대한민국임시정부)
다한민궈린스정푸. 황피난루에서 교통경찰을 붙잡고 책에 적힌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국어 발음대로 읊어주었으나, 그는 고개만 흔들었다. 급기야 나는 책속의 지도를 펴서 손가락으로 ‘여기’라고 가리켰다. 그제서야 그는 손가락으로 ‘저기’를 가리키더니 좌회전을 하라는 시늉을 해보인다. 마당루 한 켠에 자리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유적지. 생각보다 훨씬 초라하게 들어앉은 임시정부 건물 옆에는 ‘명품 가방 선물’이라고 쓴 한글 간판이 한국 관광객을 호객하고 있다. 이른바 짝퉁 가게이지만, 임시정부 전시관보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한국 관광객의 임시정부 관람은 두 가지 경우이다. 한 가지는 여행사의 여행 코스에 따라 단지 단체여행객들이 찾아와 기념사진을 찍고는 훌쩍 떠나버리는 경우이고, 또 한 가지는 개인적으로 물어물어 여기까지 찾아와 15위안을 내고 갸륵하게 전시관까지 차근차근 관람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슬픈 현실은 이 두 경우조차 외면하는 경우이다. 심지어 나는 주변에서 이런 소리까지 들었다. “아니 상하이에 구경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거기까지 가서 시간낭비를 하느냐.”는 것이다. 그에게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의 뿌리가 임시정부에 있다는 말조차 고루한 설교일 것이며, 내가 뭐라고 해봐야 그에게 나는 편협한 민족주의자로 비쳐질 게 뻔하다.
후미진 골목 사이에 전시실 입구가 있다.
또 어떤 사진가는 내게 이런 말도 했다. “거긴 그림이 안돼요.” 그가 말하는 그림은 대체 어떤 것인가! 역사적 가치에 대한 미학적 평가는 사진의 프레임 속에 있지 않다. 때때로 사진은 멍청한 것이다. 빛이 없으면 더욱 멍청해지고, 빛이 있어도 렌즈가 보여주는 화각에만 반응하는 멍청이다. 물론 그 멍청이를 데리고 나는 나의 망명정부를 찾아왔다. 사실 난 민족주의자도 아닐뿐더러 더더욱 체제순응자도 아니며, 어찌보면 무늬는 아나키스트에 가깝다. 그런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어쩌면 거길 왜 가느냐는 치들보다 더한 정체성의 환란(혼란이 아님)을 잠재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연히 나는 15위안짜리 ‘참관권’을 끊고 전시실로 들어갔다. 그 옛날의 태극기 휘장을 두른 입구를 지나 2층으로 오르면 김구 선생의 집무실이 보이고, 안창호 선생의 자취와 윤봉길 의사의 흔적이 손때처럼 남아 있는 현장!
전시실 입구. 사진을 찍지 말라는 경비원 몰래 찰칵.
물론 현장이 현실은 아니다. 더구나 이 현장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아득한 과거다. 그 과거의 주역들은 신념에 차 있었고, 분명했다. 그것은 조국의 해방이었지만, 해방은 오히려 그들의 분명한 신념을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남북을 오가며 끝까지 같이 가자고 외쳤던 김구 선생은 끝끝내 일제가 아닌 동포의 총탄을 받고 쓰러졌다. 전시실에 앉아 있는 선생의 밀랍인형은 그의 고뇌를 담아내기엔 너무 초라하고 안쓰럽다. 1919년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은 상해 임시정부는 맨 처음 지금의 자리가 아닌 공산당 성지인 일대회지와 카페 거리로 유명한 신톈디 거리 인근에서 상징적인 출발을 했다. 떠도는 가난한 임시정부가 자금이 풍부할 리 없었으니, 더러는 집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고, 더러는 감시를 피해 도망다녔다.
김구선생 집무실
7년여 간을 여기저기 떠돌던 임시정부는 1926년 결국 지금의 자리로 옮겨앉았지만, 여기에서도 그리 오래는 있을 수가 없었다. 1932년 5월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 의거(몇몇 여행책을 보니 의거를 사건이라 적어놓았다, 난 일본인이 쓴 여행책인줄 알았네, 왜 사태라고는 안하냐? 어떤 책을 보니 임시정부 내용은 16줄로 요약돼 있고, 상하이에서 그냥 참고할만한 코스로 소개돼 있다. 심지어 윤봉길 의사를 윤봉일이라고 오타를 냈다.)로 임시정부는 일제에 주 감시대상으로 떠올랐고, 결국 상하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는 지금의 마당루(과거 보경리 4호)에서 7년간 독립운동과 망명정부 활동을 한 것이다. 그러나 상해에서 한 장소에 가장 오래 눌러앉아 활동한 곳이 이 곳이며, 가장 열정적 활동을 벌인 곳도 이 곳이다. 당시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곳은 지금의 루쉰공원 쪽(과거의 홍구공원)인데, 뒤늦게 초라한 한옥 기념관(매정, 메이팅)이 세워져 그를 기리고 있다.
윤봉길 의거와 이봉창 의거 전시물을 바라보는 한국 관람객.
임시정부 전시실은 3층까지 이어져 있고, 내려오는 길에는 기념품 가게가 자리해 있는데, 여기에서는 한국인을 상대로 기부금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 기부금이 정말로 임시정부 유적 관리에 쓰이는지는 의심천만이다. 또한 전시실은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지만, 이런 역사적인 현장까지 와서 그냥 가는 것도 그렇고 해서 나는 경비원 몰래 사진을 몇 컷 찍었다. 플래시를 쓰지 않았으니, 뭐 유적에 손상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적지를 나서면서 드는 생각은 이것이다. 왜 하필 상해여야 했는가? 어쨌든 오고자 한 곳에 와 보았으니,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둥타이루 골동시장으로 향했다. 글/사진: 이용한
임시정부 전시실에서 창문을 열면 이 낡은 다가구주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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