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늦은 시각에 찾은 자유공원. 공원 시계탑이 저녁 6시 45분을 가리키고 있다.
맥아더 동상으로 가는 입구부터, 작년에는 없던 화단이 곱게 조성되어 있다.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전체를 '자유공원'이라 부르는데, 조성연대는 서울의 파고다공원(1897)보다
몇 년 앞 선다고 한다. 인천항 개항 뒤 외국인 거류민단(居留民團)에서 관리 운영하여, 당시 시민들은
이를 만국공원(萬國公園)이라 불렀고, 그 뒤 일본의 세력이 커지면서 1914년 각국 거류지의 철폐와 함께 공원 관리권이 인천부(仁川府)로 이관되자 그 때부터는 서공원(西公園:일본인들이 이른바 神社를
지어놓은 동공원이 따로 있었음)으로 불렀다.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응봉산 정상에 세워진 1957년 10월 3일부터라고 한다.
< 맥아더 장군이 오른손에 쌍안경을 들고 월미도를 내려다보는 모습과
그 맥아더를 보러 온 온 미국인 관광객들 >
자유공원은 인천 시가지와 주위의 항만·앞바다 등 풍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시민의 휴식의 공간이며 위락장소이기도 한 곳이다. 그러나 2005년도 여름에는 맥아더 동상 철거를
두고 保革세력간의 갈등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루기도 했다.
맥아더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진영, 맥아더가 '점령자'로 이 땅에 왔고, 분단을 야기한 인물이므로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것이고. 반면 철거 반대 세력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전 전세를 역전시킨
맥아더는 한국민들이 추앙해야 할 인물"이라는 주장이 상충한 것이다. 진지한 논의나 검증없이
맥아더 동상을 두고 철거 문제로 패가 갈려 양극화되는
모습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항공모함과 구축함 등 260여 척과 16개국 7만5000여 병력을 투입한 연합군을 인천상륙 후
그 여세를 몰아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해 한국전 전황을 일거에 역전시킨 작전으로 유명한 戰史다.
그 상륙작전을 기념한 부조물. 맥아더 동상 오른쪽 가장자리에 있다.
상륙작전 성공 후, 인천 앞바다를 걸어서 상륙을 하는 맥아더 장군과 군인을 형상화한 부조물.
맥아더 동상 오른쪽으로 난 가파른 계단 길.
이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왼쪽으로 보면 인천문화원 건물이 있다.
SBS 드라마 <피아노>를 촬영했던 곳이기도 하다.
긴 장마끝에 오랜만에 해가 떴다. 그사이 지쳤던 해바라기도 기지개를 켜듯 꿈틀거리고
너머에 펼쳐진 새파란 하늘은 괜시리 사람의 마음도 활짝 웃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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