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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sthetics of they

[스크랩] 상상력으로 읽는 시(詩)를 아시나요?

부제: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詩)



님의 침묵(沈默)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끼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

.

중략.


위 시는 우리가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배웠던 명 시 중 한 편입니다. 시가 지어졌을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고 일반적인 마음으로 읽어도 분명 좋은 시에는 틀림없으나 우리는 공부 할 때 시를 외우는 것에 머리 아파했으며 현대 시와 같은 자유적 주제 보다는 교훈적인 주제들로 쓰여 진 것이 대부분이어서 시라는 문학 장르에 쉽게 다가서기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특히 386세대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겐 시가 메마른 정서에 단비 역할을 해주는 게 아닌 아주 딱딱한 문학이었다고 생각하게 해주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80-90년대 들어 시의 장르도 다양해지고 무겁지 않은 주제로 써내려간 시들이 늘어나면서 차츰 시가 주는 메시지는 딱 정해지지 않고 읽는 사람마다 조금씩 틀리 게 받아 드릴 수 있게끔 바뀌어졌으며 시에 대한 무거운 고정관념도 많이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현대 자유시들을 읽고 있노라면 예전 보다는 나아졌지만 시 한편을 읽고 나면 거기서 얻는 느낌은 오십보백보 차이 밖에 나질 않습니다. 이 원인은 주제는 자유롭게 주어졌지만 시가 써지면서 시인의 마음을 고스란히 글로 모두 표현 했기에 독자들이 얻는 느낌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지요. 해서 발표되는 시들은 무수히 많으나 내용을 보면 거의 다 설명해 놓은 듯 한 작품들이 많아 오히려 식상하게 여기는 독자들도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식상함에 찬물을 끼얹고 나타난 시가 있어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제가 시를 읽어 오면서 시들의 내용이 ‘거기서 거기다’라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은 1996년 여름이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에 관심을 갖고 쓰기 시작하면서 꾸준히 시집들을 읽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답답함을 느낄 만큼 제 개인적으로는 현대시에서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 게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해부터인가 시집을 읽지 않게 되는 몹쓸 병에 걸렸었지요. 당시엔 왠지 시집들을 읽고 있으면 내 시를 쓰는 데 있어 도움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내 시만의 색을 잃을 것 같다는 우려에서였지요. 제 시가 유명해질 만큼 좋아서가 아니라 1996년부터 2003년까지 한 통신사에서 마련해준 사이버문학 게시판을 통해 시와 수필을 연재하고 있던 터라 나만의 글 색을 갖고 싶었던 욕심이 많아서 더욱 타인의 시집들을 읽지 않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 봄. 류시화 님이 엮어 발표한 시집 ‘한 줄도 너무 길다’라는 작품집을 접하면서 제가 갖고 있던 시에 대한 갈증이 한순간 해소돼 버렸습니다. 이 작품집에 수록된 시들은 ‘하이쿠시’라고 불리는 작품들로서 그 시의 길이가 짧은 게 특징입니다. 하이쿠시란 일본에서 처음 파생된 5.7.5조의 음률로 이루어진 짧은 시입니다. 주로 자연을 노래한 서정시에 가까우나 그 내용이 너무 짧아 이해하기 어려워하거나 일부 사람들은 아예 대놓고 혹평을 하기도 하는 시 장르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아래는 일본에서 유명한 하이쿠 시인 이싸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허수아비 뱃속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네


위 시를 읽고 무슨 생각들 하셨습니까? 참 다양한 반응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에 저는 위 시를 읽고 다음과 같이 느꼈습니다.


가을이 짙어진 어느 밭에 홀로 서 있는 허수아비. 비록 허수아비는 생명 없이 서 있는 허울에 불과하지만 그 아수아비 뱃속 즉, 지푸라기나 그밖에 것들로 채워진 허수아비 뱃속에 귀뚜라미가 들어가 울음으로서 허수아비가 생명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어 준 따듯한 시라고 느꼈습니다. 반대로 아무 느낌 못 느끼고 ‘이게 뭔 시야?’ 라고 말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이쿠시는 짧지만 이 시가 이렇게 쓰여 지게 된 나머지 부분은 독자들의 해석에 맡겨 같은 시를 읽고도 느낌은 천차만별로 틀려지게 한다는 시작법이 매력적으로 저는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읽는 이들의 상상력에 의해서 완성되는 시라고 표현하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합니다. 다시 모리다케 라는 시인의 하이쿠시를 한 편 더 소개해 봅니다.


꽃잎 하나가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우스운가요? 저는 장난치듯 나풀거리는 나비를 참 예쁘게 표현했다고 느꼈습니다. 바로 이것이 상상력으로 읽는 시입니다. 매력 있지 않은가요? 이 작품집을 읽고 바로 흉내 내보며 저만의 하이쿠시를 잠시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한 2백 30여 편을 연재했는데 당시 건강 문제로 활동을 1년 반 넘게 못하면서 제 문단 게시판이 폐쇄가 되어 일반 시들과 하이쿠시 포함해 1,200여 편과 수필 100여 편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원본은 보관중이지만 문단 게시판에선 흔적 없이 사라졌지요. 그러다 최근 제 블로그를 통해 하이쿠시를 다시 쓰기 시작을 했습니다. 몇 년 만에 쓰는 것이라 감이 떨어지지만 짧은 시 매력에 다시 빠져들었다고나 할까요? 이렇게 매력 있는 시의 장르도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리기 위해 이 글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한 번 더 강조해 드리지만 하이쿠시를 읽는 법은 상상력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쓰여 진 문장만 갖고 해석하기엔 결코 쉬운 작품이 아니란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상상력으로 읽는 시에 한 번 여행을 떠나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래는 그동안 블로그에 올려놓았던 제 하이쿠시들 몇 편입니다. 상상력으로 읽어 주시고 아름다운 마음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푸른비의 하이쿠詩


- 장마 (하이쿠詩 233)


끝 안 보이는

실낱같은 그리움

퍼 묻는 날들


...



- 새벽 (하이쿠詩 236)


수줍은 달이

아침에게 안기려

옷 벗는 시간


...



- 거미에게 (하이쿠詩 241)


창가에 줄 좀 걷어주게. 내님 오는 모습 좀 보게.


...



- 석양 (하이쿠詩 243)


힘들던 하루

붉은 얼굴로 지는

하늘의 주름


...


- 침묵 (하이쿠詩 244)


한마디 말과

악쓰는 통곡보다

무서운 교감


...


- 태풍 (하이쿠詩 245)


슬픔과 아픔

한 아름 안고 오는

거친 먹구름


...


- 소리 (하이쿠詩 246)


보이지 않는

수백 수만 가지의

멋진 형상들


...


- 벼락 (하이쿠詩 247)


수 십 년 가야

통할까 말까 하는

너와 나의 연(戀)


...


- 소나기 (하이쿠詩 249)


꾹 참던 설움

못 참고 쏟아 붓는

하늘의 발악

,...


- 물에 잠긴 나무를 보며 (하이쿠詩 251)


아직 아닌데

푸른 혈기 꺾일 때

아직 아닌데


...


- 스친 바람에게 하는 말 (하이쿠詩 255)


칠월 하늘 중

넌 어디에 숨었던

가을 향이니


...


- 붉은 흙탕 강물 보며 (하이쿠詩 256)


푸르던 강물

지난 비와 싸우다

핏물 되었네


...


- 아침을 앞에 두고 (하이쿠詩 257)


잠 안자고 오늘을 지켰는데 내일이 밝았네


...


- 손톱 (하이쿠詩 260)


잊을 만하면

생각나는 너처럼

자라는 미련


...


- 장마 끝에 서서 (하이쿠詩 261)


숱하던 눈물

바람 따라 어디로

떠나는 걸까

...


- 물안개 낀 강가에서 (하이쿠詩 264)


아차. 했으면 미친 듯 네 안에 날 던지려했지


...


- 바람에게 화를 내다 (하이쿠詩 266)


내 상한 마음

지나는 바람에게

풀어 버렸네


...


끝.


출처 : 푸른비가 남긴 얘기들
글쓴이 : 박준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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