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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낯선 이곳에 끌려와 죽었을까'를 생각했을 그 머리 속은 흙이 돼 있었다. 흙으로 변하기 전, 그 이유를 알아내기는 한 걸까. 대전 간다던 트럭이 왜 산속에서 멈췄는지. 하얗게 질린 얼굴에 왜 총알을 박았는지. 왜 아무도 찾지 못할 이곳에 버려지듯 암매장됐는지. 6.25를 사흘 앞둔 지난 22일 오후. 일행 여섯 명과 이곳을 다시 찾았다.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매장지로 추정되는 한 곳을 파기 시작했다. 10여 분 정도 지났을까? 지표면과 약 20-30cm에 불과한 곳에서 첫 두개골이 드러났다. 작은 두개골이 10대쯤으로 짐작됐다. 썩은 살은 문드러져 농익은 흙으로 변해 있었다. 검붉은 핏빛을 닮아 흙마저 그렇게 검은 것일까. 떨리는 손으로 긴 뼈마디를 들어 올렸다. 이럴 수가? 뼈조각 한 켯에 붉은 핏기가 선명하게 배어 있다. 동행한 일행들 모두의 눈에도 핏기로 보였다. 뼈마디에 한 점 혈흔이나마 새겨 처절했던 당시를 증거하려 했던 것일까. 손가락을 곡괭이 삼아 주변을 헤집어냈다. 또 드러나는 두개골. 또 다른 뼈조각이 흙더미와 함께 무너져 내린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녹음에 가려진 햇볕으로 골짜기 전체가 깜깜했다. 모든 게 멈춰선 듯 주변엔 정적이 흐른다. 엷게 느껴지는 눅눅한 바람결만이 시간의 흐름을 짐작하게 했다. 일행들은 넋을 놓고 그렇게 한참을 주저앉았다. 다시 흙더미를 올렸다. A1 탄피를 이고 있는 머리 위에 그대로 흙더미를 채웠다. 마치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꼭 51년 만에 드러난 약 1천명의 기구한 사연을 간직한 30cm 땅 아래 진실은 20여분만에 그렇게 파묻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파지 말았어야 했다. 반 세기 동안 탄피를 이고 온 유골을 보고서도 못본 척 다시 흙을 덮을 것이라면 애시당초 확인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아예 찾아 나서지 말았어야 했다. 뒤엉킨 유골 무더기를 보고서도 그냥 되묻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다면 온 동네, 온 산을 찾아 헤매지 말았어야 했다. 지난 5월 30일, 무작정 공주로 암매장지를 찾아 나섰다. 근거자료는 50년 당시 북한 신문이 보도한 '공주 금강변 말머리재'가 전부였다. 이미 몇 번을 헛걸음한 터였다. 누구에게 물어도 '말머리재'라는 곳은 들어보질 못했단다. 그 날도 별기대 없이 길을 나섰다. 공주대학교 학생기자들이 동행했다. 금강변에서 가까운 마을을 취재범위로 정하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물으며 다니다 오랜 집성촌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간 것이 적중했다. 상투머리에 갓을 쓴 이 마을(공주시 왕촌3리) 이종선(78) 씨가 야트막한 뒷산을 가르켰다. 그러나 이종선 씨를 비롯 마을주민들은 대강의 장소를 설명할 뿐 정확한 매장 위치를 기억하진 못했다. 그 날 이후 누구도 '무섭다'며 그 골짜기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시간을 야산 이곳저곳을 뒤졌지만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해도 기울고 예정된 일정도 있어 산을 내려오다 마을과 좀 떨어진 외딴집 한 채를 만났다. 반신반의하며 그 집을 찾아가 '암매장지를 아느냐'고 물으니 대답대신 집주인인 이규성(64) 씨가 씁쓸하게 웃는다. "정확한 무덤위치를 아는 사람은 나 뿐일 거요. 학살이 있은 뒤에 산 너머 전답을 가기 위해 할 수 없이 그 곳을 자주 지나다녀서 잘 알아요." 이 씨의 안내로 찾아간 그 곳은 대전-공주(공주에서 대전방향 5km)간 국도변과 불과 100여m 떨어진 지척이었다. 도로변 산 기슭에 그 많은 주검이 묻혀 있을 줄이야. 하얀 꽃 피우고 쩍쩍 알밤을 쏟아내던 밤나무 숲 아래 처참한 사연과 흉흉한 총소리가 묻혀 있을 줄이야. 하지만 유골이 묻혀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엄습해 오는 것은 자괴감이었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랴. 약 3천여명이 학살돼 매장돼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대전 산내(골령골) 암매장지 현장은 쓰레기장이 돼 있다. 폐비닐, 폐깡통, 폐플라스틱, 잡쓰레기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또 일부는 밭으로 개간돼 쟁기질을 할 때마다 드러난 유골이 널려 있다. 그리고 여전히 그 땅에는 봉분대신 밭이랑이, 잔디대신 마늘과 배추가 자리잡고 있다. 지난 해 여름 확인된 충북 옥천군 월전면 보도연맹관련자 500여명의 암매장지로 추정되는 현장 일부(하천변)는 물에 잠겨 있다. 정부와 자치단체의 철저한 무관심과 외면 때문이다. 이번에 드러난 공주 밤나무골 암매장지에 대해서도 정부는 못본 척, 못들은 척 눈과 귀를 닫고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공주시민사회단체협의회 정선원(43) 사무국장은 "주검에마저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야만의 역사가 여지없이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 서글프다"며 " 좌익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이든 우익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이든 그들은 똑같은 전쟁의 피해자일 뿐"이라고 말했다. 부끄러운 또 하나의 역사를 공주 밤나무골에, 대전 골령골에 파묻어 놓고 '평화'를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누군가의 말처럼 전쟁에 대한 반성없이 평화가 오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사건을 위한 특별법 제정'은 결코 진보적일 수 없다. 그저 사람의 '주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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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시 왕촌3리 이종선(78) 씨 등 이 마을 주민들은 "6.25전쟁 직후인 7월 초경 군인과 경찰들이 마을 뒤편 산속으로 사람들을 끌고 간 후 하루종일 총소리가 났다"고 주장했다. 주민들은 당시 끌려간 사람들이 "공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좌익수들과 보도연맹관련자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마을 이규성(64. 李圭聖) 씨는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현장을 제시한 후 "총소리가 오전 10시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계속돼 근처 주민들이 하루종일 불안에 떨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당시 총살해 구덩이에 파묻은 사람이 15트럭이라는 얘기를 후에 전해 들었다"며 " 한 트럭당 50-60명씩 실어 날랐다고 하니 적어도 700-900명쯤 되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이씨가 제시한 암매장지는 이 마을 뒷산 골짜기에 모두 4개의 구덩이며 한 개의 구덩이가 길이 30m, 폭 2.5m 정도이다. 6.25당시 북한의 '해방일보'가 " 50년 7월 7일 군.경이 공주 금강변 말머리재에서 애국자 및 남녀노소 800여명을 무차별 살육했다"는 보도를 한 적은 있으나 공주에서 이처럼 학살현장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지난 96년부터 98년 9월까지(2년 9개월) 여순사건 관련 생존자와 유가족 등 1000명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피해 실태 조사 분석보고서에도 대상자중 4명이 공주형무소에서 '총살' 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그동안 학살장소가 밝혀지지 않아 대전 산내면 골령골(대전형무소 정치범 학살지)로 옮겨져 함께 처형됐을 것으로 추정해 왔었다. 이씨는 " 당시 군.경은 이 야산으로 통하는 모든 진입로를 통제했고 산꼭대기 등 골짜기 전체를 에워쌓아 다른 사람들은 얼씬도 못하게 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이씨는 또 "학살이 있은 후 전답을 가기 위해 할 수 없이 이곳을 자주 지나 다닐 수밖에 없었다"며 "송장 썩는 역한 냄새가 10년 가까이 골짜기에 진동을 해 코를 막고 다녀야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어 "총살된 2명의 여자는 따로 묻혀 후에 유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해 간 것으로 안다"며 "마을사람들이 무섭다며 아무도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아 유골이 그대로 보존돼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주시민단체협의회 관계자는 " 집단 양민학살 현장이 확인된 만큼 정부와 학계, 시민단체 등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진상조사단을 구성, 철저한 조사와 함께 하루빨리 발굴작업을 벌여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암매장지로 추정되는 근교에 '말머리재'와 유사한 옛 지명인 '말재'가 있고 불과 200-300여m 거리에 금강이 흐르고 있어 당시 북한의 '해방일보'가 보도한 곳과 동일한 학살지인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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