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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 피플

공주 왕촌학살, 56년만에 첫 위령제

"형, 형... 이제 죄수복 벗어"
공주 왕촌학살, 56년만에 첫 위령제
텍스트만보기   심규상(djsim) 기자   
▲ 6일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공주 왕촌희생자 위령제가 56년만에 열렸다.
ⓒ 오마이뉴스 심규상
▲ 공주 왕촌 암매장지에서 가족들을 잃은 유가족들. 김중구(왼쪽부터), 김기, 곽정근씨
ⓒ 오마이뉴스 심규상
"이제야 모였구나/ 오늘 여기 모였구나/민본에다 애민붙여/덕치주의 인내천에/민주주의 들먹이며/온갖 자랑 일삼더니/이런 억지 어디 있나/이런 행패 어디있나/ 금쪽 같은 생명이요/생떼 같은 목숨인데/이리 쏘고 내버리고 /저리 쏘고 내던지나/ 파리보다 못한 목숨/억울하다 억울하다/..." (전병철씨의 공주 왕촌 희생자 추도 글 중에서)

충남 공주 왕촌리 인근 야산이 6일 통곡과 눈물로 젖었다.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희생된 1000여명의 공주형무소 수감자 및 보도연맹원에 대한 첫 위령제가 56년만에 열린 것.

이날 위령제에는 행사를 주최한 공주민주시민사회단체협의회 회원을 비롯 한국전쟁 당시 대전과 충북 등 전국 각지에서 희생된 유가족 등 100여명의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추도사와 추모의 노래, 축문 낭독 등을 통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했다.

하지만 공주 왕촌 희생자 유가족은 곽정근(67)씨 등 세 가족이 전부였다. 충남 태안이 고향인 곽씨는 이곳에서 친형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쟁 발발 직전 공주형무소에 수감돼 있었다는 것.

전남 광양에서 올라온 김기씨는 여순사건 관련으로 수감된 부친이 이곳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중구(59)씨는 당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소위 임관을 앞두고 있던 삼촌(김주현)이 희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김씨는 이날 위령제 도중 미리 준비해온 한복을 제단에 꺼내 놓으며 "이제 죄수복과 군복을 벗어달라"며 오열해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이제 죄수복과 군복 벗어달라"

▲ 김중구씨는 소위 임관을 앞두고 수감됐다 희생된 삼촌에게 한복을 바치며 "이제 죄수복을 벗으라"며 오열했다.
ⓒ 오마이뉴스 심규상
그렇다면 어렵게 마련된 위령제에, 1000여명의 유가족 중 극소수 유가족만 참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공주민주시민사회단체협의회 관계자는 "공주 왕촌사건 자체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 공주 왕촌사건은 <오마이뉴스>에 의해 2001년 처음으로 공론화 됐다. 이전까지만 해도 공주형무소 수감자 및 보도연맹원 대다수가 대전 산내 암매장지 등 다른 곳으로 끌려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돼 왔다.

관계자들은 또 다른 이유로 희생자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현실을 꼽고 있다. 태안 서산 등 충남은 물론 여순사건 등 전국 여러 지역 사건 관련자들이 망라돼 있다. 이 때문에 희생자 유가족들을 규합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밖에 한국전쟁 당시 희생사건에 대해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백안시하는 지역정서도 유가족들을 나서지 못하게 하고 있다.

공주민주시민사회단체협의회 정선원 공동회장은 "공주에 거주하는 희생자 유가족 몇 분에게 위령제에 참석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아직은 나서기 어렵다'며 거절했다"고 밝혔다. '빨갱이 가족'과 '연좌제' 꼬리표의 기억과 공포가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으로 보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진실화해위원회에도 진상규명을 신청한 공주 왕촌사건 유가족이 극소수인 상태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관계자는 "정보화 시대에 진상규명에 착수한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해 신청을 못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진실화해위원회와 언론의 적극적인 노력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36명이 4년동안 수천건 조사?"

▲ 공주 왕촌 암매장지에서 드러난 희생자 유골 및 탄피(2001년)
ⓒ 오마이뉴스 심규상
이 관계자는 이어 "4년간 한시조직인 진실화해위가 100만명이 희생된 수천여 건의 사건에 대해 36명이 인력만을 배치해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며 "조사인력을 지금보다 3배 이상 증원하는 등 조사팀을 대폭 확대개편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진실화해위원회 관계자는 "희생자와 8촌 이내 친척이면 조사 신청을 할 수 있다"며 희생자 유가족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당부했다.

한편 공주 왕촌 현장에는 한국전쟁 직후인 7월초경 공주형무소 수감 정치범을 비롯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민간인 1000여명이 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학살된 뒤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목격자들은 "당시 총살해 구덩이에 파묻은 사람이 15트럭이라는 얘기를 후에 전해 들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현장에는 암재장지로 보이는 길이 30m, 폭 2.5m 정도 구덩이 4개가 남아 있다.

이와 관련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해방일보>는 " 50년 7월 7일 군·경이 공주 금강변에서 애국자 및 남녀노소 800여명을 무차별 살육했다"는 보도한 바 있다.

 

51년만에 드러난 30cm 땅 아래의 진실
6.25에 말하는 '공주 민간인 학살' 취재기
텍스트만보기   심규상(djsim) 기자   

▲ 30 cm쯤 흙을 걷어내자 각기 다른 두개골과 뼈조각들이 드러났다.
2001 심규상
사실이었다. 그 곳에 주검이 있었다. 이 사람 뼈와 저 사람 뼈가 뒤엉켜 있었다. 머리 위에 퍼렇게 녹슨 A1소총 탄피를 이고서.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 목숨을 앗아간 총탄의 몸신을 이고 반 세기를 누워 있었으니.

'도대체 왜 낯선 이곳에 끌려와 죽었을까'를 생각했을 그 머리 속은 흙이 돼 있었다. 흙으로 변하기 전, 그 이유를 알아내기는 한 걸까. 대전 간다던 트럭이 왜 산속에서 멈췄는지. 하얗게 질린 얼굴에 왜 총알을 박았는지. 왜 아무도 찾지 못할 이곳에 버려지듯 암매장됐는지.

6.25를 사흘 앞둔 지난 22일 오후.
일행 여섯 명과 이곳을 다시 찾았다.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매장지로 추정되는 한 곳을 파기 시작했다. 10여 분 정도 지났을까? 지표면과 약 20-30cm에 불과한 곳에서 첫 두개골이 드러났다. 작은 두개골이 10대쯤으로 짐작됐다.

썩은 살은 문드러져 농익은 흙으로 변해 있었다. 검붉은 핏빛을 닮아 흙마저 그렇게 검은 것일까. 떨리는 손으로 긴 뼈마디를 들어 올렸다.

이럴 수가? 뼈조각 한 켯에 붉은 핏기가 선명하게 배어 있다. 동행한 일행들 모두의 눈에도 핏기로 보였다. 뼈마디에 한 점 혈흔이나마 새겨 처절했던 당시를 증거하려 했던 것일까.

손가락을 곡괭이 삼아 주변을 헤집어냈다. 또 드러나는 두개골. 또 다른 뼈조각이 흙더미와 함께 무너져 내린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녹음에 가려진 햇볕으로 골짜기 전체가 깜깜했다. 모든 게 멈춰선 듯 주변엔 정적이 흐른다. 엷게 느껴지는 눅눅한 바람결만이 시간의 흐름을 짐작하게 했다. 일행들은 넋을 놓고 그렇게 한참을 주저앉았다.

다시 흙더미를 올렸다. A1 탄피를 이고 있는 머리 위에 그대로 흙더미를 채웠다. 마치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꼭 51년 만에 드러난 약 1천명의 기구한 사연을 간직한 30cm 땅 아래 진실은 20여분만에 그렇게 파묻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파지 말았어야 했다. 반 세기 동안 탄피를 이고 온 유골을 보고서도 못본 척 다시 흙을 덮을 것이라면 애시당초 확인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아예 찾아 나서지 말았어야 했다. 뒤엉킨 유골 무더기를 보고서도 그냥 되묻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다면 온 동네, 온 산을 찾아 헤매지 말았어야 했다.

지난 5월 30일, 무작정 공주로 암매장지를 찾아 나섰다. 근거자료는 50년 당시 북한 신문이 보도한 '공주 금강변 말머리재'가 전부였다. 이미 몇 번을 헛걸음한 터였다. 누구에게 물어도 '말머리재'라는 곳은 들어보질 못했단다. 그 날도 별기대 없이 길을 나섰다. 공주대학교 학생기자들이 동행했다.

금강변에서 가까운 마을을 취재범위로 정하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물으며 다니다 오랜 집성촌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간 것이 적중했다.
상투머리에 갓을 쓴 이 마을(공주시 왕촌3리) 이종선(78) 씨가 야트막한 뒷산을 가르켰다.

그러나 이종선 씨를 비롯 마을주민들은 대강의 장소를 설명할 뿐 정확한 매장 위치를 기억하진 못했다. 그 날 이후 누구도 '무섭다'며 그 골짜기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시간을 야산 이곳저곳을 뒤졌지만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해도 기울고 예정된 일정도 있어 산을 내려오다 마을과 좀 떨어진 외딴집 한 채를 만났다.

반신반의하며 그 집을 찾아가 '암매장지를 아느냐'고 물으니 대답대신 집주인인 이규성(64) 씨가 씁쓸하게 웃는다.
"정확한 무덤위치를 아는 사람은 나 뿐일 거요. 학살이 있은 뒤에 산 너머 전답을 가기 위해 할 수 없이 그 곳을 자주 지나다녀서 잘 알아요."

이 씨의 안내로 찾아간 그 곳은 대전-공주(공주에서 대전방향 5km)간 국도변과 불과 100여m 떨어진 지척이었다. 도로변 산 기슭에 그 많은 주검이 묻혀 있을 줄이야. 하얀 꽃 피우고 쩍쩍 알밤을 쏟아내던 밤나무 숲 아래 처참한 사연과 흉흉한 총소리가 묻혀 있을 줄이야.

하지만 유골이 묻혀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엄습해 오는 것은 자괴감이었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랴.

약 3천여명이 학살돼 매장돼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대전 산내(골령골) 암매장지 현장은 쓰레기장이 돼 있다. 폐비닐, 폐깡통, 폐플라스틱, 잡쓰레기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또 일부는 밭으로 개간돼 쟁기질을 할 때마다 드러난 유골이 널려 있다. 그리고 여전히 그 땅에는 봉분대신 밭이랑이, 잔디대신 마늘과 배추가 자리잡고 있다.

지난 해 여름 확인된 충북 옥천군 월전면 보도연맹관련자 500여명의 암매장지로 추정되는 현장 일부(하천변)는 물에 잠겨 있다. 정부와 자치단체의 철저한 무관심과 외면 때문이다. 이번에 드러난 공주 밤나무골 암매장지에 대해서도 정부는 못본 척, 못들은 척 눈과 귀를 닫고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공주시민사회단체협의회 정선원(43) 사무국장은 "주검에마저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야만의 역사가 여지없이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 서글프다"며 " 좌익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이든 우익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이든 그들은 똑같은 전쟁의 피해자일 뿐"이라고 말했다.

부끄러운 또 하나의 역사를 공주 밤나무골에, 대전 골령골에 파묻어 놓고 '평화'를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누군가의 말처럼 전쟁에 대한 반성없이 평화가 오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사건을 위한 특별법 제정'은 결코 진보적일 수 없다. 그저 사람의 '주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뿐이다.
▲ 1천여명의 피학살자들이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공주시 왕촌리 뒷산.

 

충남 공주, 집단 양민학살 현장 발견
공주형무소 정치범 등 1천여명 학살 추정
텍스트만보기   심규상(djsim) 기자   
▲ "10년 가까이 코를 막고 지나 다녔어요" 암매장 현장 증언한 이규성(64)씨
2001 심규상
6.25직후 정치범을 비롯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민간인이 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학살된 뒤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현장이 충남 공주에서 발견됐다.

충남 공주시 왕촌3리 이종선(78) 씨 등 이 마을 주민들은 "6.25전쟁 직후인 7월 초경 군인과 경찰들이 마을 뒤편 산속으로 사람들을 끌고 간 후 하루종일 총소리가 났다"고 주장했다. 주민들은 당시 끌려간 사람들이 "공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좌익수들과 보도연맹관련자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마을 이규성(64. 李圭聖) 씨는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현장을 제시한 후 "총소리가 오전 10시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계속돼 근처 주민들이 하루종일 불안에 떨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당시 총살해 구덩이에 파묻은 사람이 15트럭이라는 얘기를 후에 전해 들었다"며 " 한 트럭당 50-60명씩 실어 날랐다고 하니 적어도 700-900명쯤 되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이씨가 제시한 암매장지는 이 마을 뒷산 골짜기에 모두 4개의 구덩이며 한 개의 구덩이가 길이 30m, 폭 2.5m 정도이다.

6.25당시 북한의 '해방일보'가 " 50년 7월 7일 군.경이 공주 금강변 말머리재에서 애국자 및 남녀노소 800여명을 무차별 살육했다"는 보도를 한 적은 있으나 공주에서 이처럼 학살현장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지난 96년부터 98년 9월까지(2년 9개월) 여순사건 관련 생존자와 유가족 등 1000명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피해 실태 조사 분석보고서에도 대상자중 4명이 공주형무소에서 '총살' 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그동안 학살장소가 밝혀지지 않아 대전 산내면 골령골(대전형무소 정치범 학살지)로 옮겨져 함께 처형됐을 것으로 추정해 왔었다.

이씨는 " 당시 군.경은 이 야산으로 통하는 모든 진입로를 통제했고 산꼭대기 등 골짜기 전체를 에워쌓아 다른 사람들은 얼씬도 못하게 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이씨는 또 "학살이 있은 후 전답을 가기 위해 할 수 없이 이곳을 자주 지나 다닐 수밖에 없었다"며 "송장 썩는 역한 냄새가 10년 가까이 골짜기에 진동을 해 코를 막고 다녀야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어 "총살된 2명의 여자는 따로 묻혀 후에 유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해 간 것으로 안다"며 "마을사람들이 무섭다며 아무도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아 유골이 그대로 보존돼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주시민단체협의회 관계자는 " 집단 양민학살 현장이 확인된 만큼 정부와 학계, 시민단체 등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진상조사단을 구성, 철저한 조사와 함께 하루빨리 발굴작업을 벌여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암매장지로 추정되는 근교에 '말머리재'와 유사한 옛 지명인 '말재'가 있고 불과 200-300여m 거리에 금강이 흐르고 있어 당시 북한의 '해방일보'가 보도한 곳과 동일한 학살지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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