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는 천당이 있고, 아래에는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 (上有天堂 下有蘇抗) 중국사람들이 극찬해
마지않았던 미도(美都) 쑤저우와 항저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베니스와 그 모습이 비슷하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견문록에는 쑤저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도시가
얼마나 큰지 둘레가 40마일에 이른다.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아서 누구도 그 숫자를 알지 못할 정도인데, 그들이 만약 용사였다면 만지 지방의
사람들이 아마 전세계를 정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용사가 아니다. 여러분에게 말해두지만 그들 중에는 영리한 상인과 갖가지
손재주를 지닌 뛰어난 장인들, 또한 자연에 대해 매우 잘알고 있는 훌륭한 철학자와 의사들이 있다. 이 도시는 돌로 만들어진 다리가 6000개나나
있으며, 그 아래로 한두척의 갤리선이 충분히 지나갈 정도다. 또한 이 도시에 있는 산지에서는 대황이 자라고 있고 생강도 아주 많다. 여러분에게
말해두지만 베니스 1 그로트면 신선하고 품질 좋은 생강 40파운드를 살 수 있다. (동방견문록 151장 / '여기서 그는 수주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중에서)
동양의 베니스 쑤저우는 과연 아름다운 운하의 도시였을까? 잔뜩 기대를 지니고 간 필자는 쑤저우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실망하기에 충분했다.
운하와 함께 작은 석교들이 연이어 걸려있고, 서민들의 옹색한 집들이 닥지닥지 붙어있다. 운하에서 배들은 볼 수 없고 가끔 가다 관광용 보트들만이
보인다. 거리를 걷다보니 집집마다 나와있는 이상한 나무통이 하나 보였다. 우리가 옛날에 사용하던 요강만한 크기였다. 이 정체불명의 나무통에 대한
궁금증은 조그마한 손수레를 끌고 다니는 할머니에게서 풀렸다. 이 할머니는 나무통을 수레에 싣고 있었는데 필자는 수레에 가다가 나무통의 뚜껑을
열었다. 오! 맙소사. 그건 정말로 요강이었다. 안에는 인분이 잔뜩 들어 있었다. 코를 막는 필자의 모습에 할머니는 깔깔대고
웃었다. 아직도 이런 나무요강을 사용하는 것은 소주의 주택에 화장실이 없기 때문이다. 공중화장실이 드문드문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요강을 사용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요강에 담긴 분뇨들인데 충격적이게도 한 주민이 필자가 보는 앞에서 나무요강에 든 내용물을 과감하게 운하에
쏟아 버리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운하는 똥물인 것이었다.
쑤저우의 전경을 볼 수 있는 북사탑으로 향했다. 쑤저우를 남북으로 가르는 최대 번화가인 인민로를
따라 걷다보니 온통 거리는 공사장이다. 관청도 새로 공사중이고 상점도 개축 중이다. 요즘 중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차이나모바일과 같은 회사들은
으리으리한 빌딩을 신축 중이다. 그 때문에 거리는 비산먼지로 앞이 뿌옇게 보일 정도였다. 사람들은 아예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도
한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북사탑은 9층에 높이가 76m나 됐다. 올라가기 전에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코를 풀었더니 새카만 콧물이 나온다.
쑤저우 거리의 공해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만 하다. 북사탑을 오르니 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온다. 가까스로 차가운 공기를 쐬기 위해 난간으로
갔다. 쑤저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양자강의 고도 쑤저우는 짙은 안개에 신비롭게 감추어 있었다. 아니 안개가 아니라 스모그 였다. 자동차
매연과 비산 먼지가 운하의 안개와 결합한 것이다. 그 아름답다는 쑤저우는 왜 중국에서도 악명 높은 공해의 도시간 된 것일까? 일찍이
쑤저우는 효과적인 생태계 이용을 통해, 벼농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농업은 물론, 원활한 수운교통을 토대로 발달한 상업, 우수한 노동력을 활용한
수공업, 그리고 높은 수준의 문화와 교육을 보유함으로써, 선진지역이었다. 수리문제를 중심으로 효과적인 생태계 이용을 이룩한 결과, 쑤저우는
중국 경제의 중심지역으로 떠올랐다. 특히 높은 쌀 생산 수준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쑤저우가 풍년이면, 천하가 배부른다라는 말도 같은 시기부터
나돌았다. 동시에 고도의 수도작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노동의 질 자체가 향상됐고, 그 결과 수공업이 일찍부터 성행했다. 방직과 자수 등이
쑤저우에서 발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 결과 한때나마 쑤저우의 인구는 200만명 선까지 육박하기도 했다. 쑤저우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지역이었다. 무려 명나라 때만 271개, 청나라 때만 130개의 정원이 설립될 정도로 부와 미,
그리고 힘마저도 넘치는 곳이었던 것이다. 쑤저우의 흥성이 운하로부터 비롯됐다면, 쑤저우의 상대적 쇠퇴 역시 운하문제로 야기됐다. 쑤저우
운하가 근대에 쇠퇴하는 것은 대운하의 기능 정지였다. 공식적으로는 1899년 폐쇄가 선언됐지만,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운하는 제구실을 못했다.
왜냐하면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중국정부가 준설공사 등 꾸준한 운하관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강남지역의 운송체계는
내지의 수로보다는 해안 수송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교역도시로서 쑤저우의 역할은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주변의 상하이, 우시 등이
발달했던 것에 비해 쑤저우는 상대적으로 정체를 경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쑤저우는 전통적인 농업보다 공업을 권장했고,
쑤저우는 동부연안의 소비재 생산기지로 떠오른다. 대운하는 다시 한번 정비를 시작했고 지금은 명실상부하게 북경과 소주, 항주를 잇는 대동맥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 대신 쑤저우는 돌이킬 수 없는 공해를 운하에 쏟아 붓게 되는 것이다.
이번 취재에 동행한 카메라는 보이그랜드에서 50년대에 출시한 포켓용 폴딩카메라인
'페르케오'였다. 우선 이 카메라의 미덕은 아주 작은 6X6 카메라라는 점이다. 한 손바닥에도 들어오는 120mm 중형 카메라라! 아주
매력적이지 않은가? 50년대는 폴딩카메라의 전성기였다. 독일 메이커들을 중심으로 아주 다양한 폴딩 카메라가 출시됐다. 포맷은 6X4.5,
6X6, 6X9까지 아주 다양한 사이즈를 제공했다. 물론 이 카메라들은 렌즈셔터가 부착된 고정형들이었지만 이 때문에 아주 가벼운 몸체를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상표들이 자이스이콘의 슈퍼이콘타시리즈, 아그파의 이솔레테, 보이그랜드의 페르케오시리즈였다. 이 폴딩 카메라들은 거리계와
카운터, 이중노출방지 장치 등을 부착한 것은 고급형으로, 거리계 등이 모두 생략된 보급형으로 나뉘었다. 현재도 보급형 카메라들은 100달러
미만으로 이베이 등에서 구입이 가능하다. 이번에 사용한 페르케오 I은 거리계와 카운터, 이중노출방지장치 등이 생략된 보급형 폴딩카메라였다.
그 때문에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고 다녀도 전혀 무게감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미덕 외에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것이 있다. 우선 거리를
맞추기가 힘들어 개방상태에서 촬영이 힘들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ASA 400 필름을 사용해 조리개 심도를 높였다. 주로 f16 상태로
촬영했다. 이쯤되면 거리문제는 웬만해서 해결된다. 둘째로는 이중노출방지장치가 없기 때문에 종종 필름 감는 것을 잊고 두 번 촬영하는 문제가
생겼다. 아주 버릇처럼 촬영 후에는 꼭 필름을 감아둘 필요가 있었다. 이런 불편함만 감수한다면 페르케오는 분명 샤프하면서도 중후한 맛의
중형 사진을 제공해 준다. 만일 핫셀과 같은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헤매면서 사진을 찍는 다면 금방 지쳐버릴 것이다. 하지만 이 페르케오는 그
작업을 가능하게 해주는 미덕이 있는 카메라이다.
쑤저우에 왔으니 옛 부와 미학이 절묘하게 결합된 정원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쑤저우의 정원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이 아니던가? 송나라 때의 문인 범성대는 개인 저택 정원의 모범적인 전형이라 평가를 받는 쑤저우의 창랑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는 "10무의 저수지가 있고, 그 옆에 작은 산이 있으며, 위아래로 굽이쳐 꺾이고, 그 주위를 물이 흐르고 있다"고
했다. 그 창랑정으로 갔다. 밖에서 보기에는 규모가 작았지만 정원 밖으로 흐르는 운하가 한층 운치를 더한다. 1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창랑정은 1044년 송나라 초기 시인 소준흠이 물옆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창랑정이라 불렀다. 지금은 그 면적이 1ha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가
됐다. 창랑정의 명성은 그 정원의 아름다운 배열에 있는데 좁은 통로를 지나면 새로운 정원이 연속적으로 나타난다. 좁은 듯 커 보이고 큰 듯
하지만 아기자기한 옛 정원 설계자들이 섬세한 손길이 배어있는 곳이다. 창랑정에 비해 규모가 조금 더 크면서도 시원한 눈맛을 주는 정원이
사자림이다. 원나라 때 천여선사가 그의 스승 중숭화상을 위해 건립한 사자림은 사자형상을 한 수많은 기암괴석을 배치해 한복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하긴 중국 정원이란 바로 그런 산수를 집안에 표현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닌가? 정원을 나와 쑤저우의 운하와 다리 그리고 불교사찰이
가장 멋지게 어우러졌다는 한산사로 향했다. 한산사는 502년에 건립된 고찰이지만 몇 차례 화재로 소실되고 청대 말에 재건됐다. 한산사는 장계의
시 풍교야박(楓橋夜泊)으로 유명하다.
달이
지고 까마귀는 울고 하늘에는 서리가 가득한데, 강에는 단풍이 들고 고깃배에는 불이 들어 잠을 잘 수가 없구나. 쑤저우 성밖 한산사로부터,
한밤중의 종소리는 나그네의 배까지 들려오는구나. (月落鳥啼霜滿天, 江楓漁火對愁眼, 始蘇城外寒山寺, 夜半種聲到客船)
이 시는 장계가 장안(지금의 시안)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갔다가 3번째의 고배를 마시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중 그가 탄 배가 풍교와 강춘교
사이에 머물렀을 때 한산사의 종소리가 들려와 수심에 찬 그에게 시상 을 일으켜 읊게 되었다고 한다. 한산사 뒷편 경항운하 언저리에 자리한
풍교로 갔다. 누각 뒤로 역사적인 석교가 모습을 드러냈다. 풍교에 오르자 멀리 경항운하를 오가는 목선들이 보인다. 하지만 그 옛날 흥취를
내기에는 풍겨오는 썩은 물 냄새가 역겹다. 풍교 아래로는 퇴적물들이 쌓이고 쓰레기가 떠다닌다. 소주에서 오직 깨끗한 곳은 관광지로 만든 정원을
뿐인 것이다.
높고 험준한 산, 깊고 맑은 물, 천천히 적셔드는 한 필지의 경작지, 풀과 나무가 자라나는
신명. (당나라 沈佺期의 『範山人畵山水歌』 중에서) 이처럼 산수는 영원한 찬미의 대상이자 영감의 소재이기도 하다. 또한 산수는 중국 정원
건축의 기본적인 양식이기도 했다. 산과 물, 건물, 나무와 꽃은 정국 정원의 4대 요소이다. 그 모든 것이 쑤저우에 있었다. 그렇다면 정원과도
같은 산수가 도시와 결합할 수 있을까? 중국의 건축가 우량용은 산수도시의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질문한다. "중국의 산수를 시(市)로 만들고,
중국의 고전 정원 건축과 산수화를 함께 합쳐 산수 도시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베이징 대학의 후자오량 교수는 이에 대해 "중국은 산과
물이 많은 국가이다. 특히 인구가 몰려있는 동남부의 산수 경관은 매우 뛰어나다"며 산수문화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산수 도시의 출발점이라고
한다. 뛰어난 경관을 지녔던 쑤저우가 중국의 대표적인 공해도시로 전락한 요즘 이 산수도시의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중국과학기술협회의 주석을
지낸 첸쉐선은 "사람은 자연을 떠났지만,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산수 도시는 도시 정원과 도시 수목의 결합체이다"라고 이야기한다. 바로
죽어가는 자연을 되살리는 생태도시에 대한 언급이다. 이미 서구에서 자연과 도시가 공존하는 방안이 많이 시험되고 있기도 하다. 중국은 이와 같은
서구의 움직임을 받아들이되 동양적 철학을 근간으로 한다는 생각이다. 분명 쑤저우의 운하는 죽어가고 있다. 경제발전이라는 인간의 이기심은
스스로의 운하의 환경을 비참하고 열악하게 하고 있다. 넘치는 쓰레기와 탁해지고 썩어가는 운하의 물이 그 증거이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쑤저우의 전통을 살려내는 것이다. 물과 정원이 조화롭게 공존하던 그 시대의 정신이 쑤저우의 희망인 것이다. 오랫동안 쑤저우
사람들은 효과적인 수리사업 등을 통해,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인간 삶을 개선시키려는 생태학적인 태도를 지녀 왔다. 비록 농업사회가 아닌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생태계의 이용은 새로운 접근방법을 요구하지만, 기본적 원리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즉 자연과 인간의
조화, 과거와 미래의 조화, 도시와 농촌의 조화, 전통과 현대의 조화, 실용성과 미학의 조화 등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진정 하늘에 천당이,
땅에는 쑤저우가 있는지 지켜 볼 일이다.[Edition 41, 20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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