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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가는 뚜벅이

[스크랩] 클래식 카메라와 함께 떠나는 사진여행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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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자동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옛 것을 취하고, 그로부터 파생하는 불편함을 감수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노릇이 아니다. 특히 사진은 (외형적으로만 보자면) 정밀기계공학과 광학, 화학이 유기적으로 맞물린 첨단공학의 산물이다. 사진의 태생이 그러할진대 어찌 '새 것'을 도외시하고, '옛 것'을 취한단 말인가. 특히 사진을 찍어 밥을 벌어먹는 사람들에게 카메라는 새것일수록 편하고 '본때' 나며, 그것이 내재한 편리는 작업 능률을 획기적으로 높여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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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진이 때로는 사람을 울고 웃게 하며, 시대의 반영체이자, 동력체로 작용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이것이 결코 '첨단공학의 메커니즘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 역시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아름다움과 추함 그리고 기록과 기억에 대한 인간의 의미부여'가 발생할 때 비로소 사진다워진다.
결국 카메라는 너무도 소중하지만, '도구'로 인정함이 옳은 것이다.
현장을 중심으로 한 저널리즘적 사진작업을 해온 내게 옛날 카메라는 편하지도 않으면서 값만 비싼 이상한 물건에 다름 아니었다. 물론 라이카 M시리즈와 같은 명품 레인지파인더 카메라를 하나쯤 갖고 싶긴 했지만 그 얼토당토않은 '전설'에 대한 반감과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고려할 때 실현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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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장에서 사용하는 무거운 카메라말고, 늘 휴대할 수 있으며, 초점을 확인할 수 있고, 셔터속도과 조리개 손조작이 가능하며, 단단한 내구성을 갖췄으면서도 가격마저 합리적인 그런 '물건'에 대한 갈망은 늘 있어왔다.
그러던 와중에 손에 굴러 들어온 녀석이 바로 '캐논 G-III QL 17'이다. 6만원이라는 놀라운 가격에 레인지파인더를 통한 이중상합치식 포커스, 조리개와 셔터속도 손조작 가능, F1.7 40mm의 밝은 렌즈. 게다가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크기에,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니콘F3에서나 느낄 수 있는 단단함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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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정겨운 빨래터이자, 연날리기 놀이터,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였다던 청계천은 1920년대 일본에 의해 복개가 시도됐다. 일본은 청계천의 오염 때문에 전염병이 나돈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겪으면서 한반도를 병참기지화 하려는 야심의 일환이었다. 그들은 '대경성 프로젝트'를 짜고 1936년에 밑에는 지하철, 위에는 고가도로를 놓는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데 이어 1937년에 청계천 상류인 광화문 사거리∼광통교 구간의 복개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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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것을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이 1958년부터 복개공사를 재개하고, 박정희 정권이 1963년 12월에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어 1966년 '불도저'란 별명으로 유명했던 김현옥 서울시장이 청계고가를 건설하면서 청계천은 지하의 하수와 지상의 도로, 그 위의 고가도로라는 오늘날의 3층 구조를 갖추게 됐다. 일본의 시나리오가 그대로 적중한 셈이다.
청계천 주변은 그 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서민들의 질퍽한 삶의 애환이 소통하는 '광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청계천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재래상가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과 상품의 오고감으로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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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지는 않지만, 가장 싼값의 물건 뒤에는 가장 싼값에 일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개발독재 시절 청계천 주변의 영세공장들은 저임금 고강도 노동의 신음터였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평범한 요구를 위해 제 몸을 불살랐던 청년 전태일 역시 청계천의 노동자였다. 그 스스로가 '또 다른 전태일'이었던 청계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노동운동의 기수가 된 '청계피복노조'가 꾸려지고, 군사독재를 긴장시킨 가열찬 투쟁이 벌어진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다.
때문일까? 1990년대만 해도 청계천과 동대문 인근은 전민련, 전노협, 민가협, 전국노점상연합회 등 굵직한 운동단체들이 자리를 튼 '재야1번지'였다.
사람이 넘쳐나고, 물건이 넘쳐나기에 청계천에서는 "없는 것 빼놓고는 다 있다"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의류시장 외에도, 전기전자, 카메라, 헌 책, 골동품, 보석, 공구상가들이 구름처럼 모여있기에 '운집'이란 말이 딱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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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청계천 전기수리 기사들만 단합하면 인공위성도 만들 수 있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으니, 그 나름의 자신감도 만만찮았던 듯하다.
그러나 이 청계천의 풍경도 조만간 사그라들 운명에 놓였다. 대신 "맑은 강이 흐르는 생태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겠다"고 한다. 이명박 서울시장의 '주장'이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한편 아쉬워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개발독재 시대를 대표했던 건설회사 '현대건설'의 신화를 창조했던 이 시장에게서 1966년 김현옥 시장의 별명 '불도저'가 연상되는 건 왜일까? 하긴 짓는 것도, 부수는 것도 '불도저'가 해야 할 일이긴 하다.
이 어설픔들.
나는 어설픈 카메라에 어설픈 필름을 넣고, 이 어설픈 과거의 지문을 찾아 어설프게 청계천에서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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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능을 손조작 할 수 있는 카메라 중 가장 싼 축에 속하는 'Canon G-III QL17'에 가장 싼값의 필름(35mm 36컷 1500원)을 넣고, 가장 싼 것들을 파는 동네 청계천을 어슬렁거리는 행위는 사실 즐거운 일이었다.
덩치 큰 카메라를 들이댈 때 자주 듣던 "왜 찍냐? 어디서 나왔냐?"는 질문도 들을 일이 없었다. 세상에, 필름 로딩만 잘하면 서른아홉컷까지도 촬영할 수 있지 않은가. 36컷 딱 누르면 자동으로 감아버리는 얌체 같은 요즘 카메라에서 느낄 수 없는 절약의 미덕도 고마웠다.
알고 보니 이 녀석은 1972년부터 1982년까지 11년간 생산되는 동안 120만개나 팔려나간 캐논 최고의 효자였다고 한다.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 어찌나 많이 팔려나갔던지 청계천 끝자락 황학동의 고물카메라 가게들에서도 여지없이 이 녀석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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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명칭은 'Canonet G-III QL17'이지만 'G-III'만 떼서 부르기도 하고, 'QL17'이라고만 부르기도 한다. 이름엔 뜻이 있게 마련, G는 grade up을 III는 Canonet과 New Canonet의 뒤를 이은 3세대의 뜻을 가진다. QL은 Quick Load를, 17은 렌즈 밝기인 1.7에서 따왔다고 한다. 퀵로딩 방식은 캐논이 자체 개발한 필름 로딩방식으로 흔히 수동카메라에 필름을 장착할 때 느끼는 번거로움을 대폭 줄였다.
여기에 장착된 4군6매 40mm 렌즈는 해상도가 높기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찍어본 결과는? 글쎄... 35mm 필름 가지고 해상도를 논한다는 것에 늘 웃음을 참지 못해왔으므로 노 코멘트! 사진의 색감은 렌즈보다는 필름과 채광상태에 더 좌지우지된다는 게 평소 생각이므로 역시 노 코멘트! 다만 매우 밝은 렌즈이기에 실내에서 플래시 없이 감도 100 필름으로도 인물을 찍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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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는 이 녀석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사용기가 올라와 있다.
http://ql17.cyworld.com
http://www.cameraquest.com/canql17.htm  [Edition 43, 2003.6]
 
 


ㆍ제조사 : canon
ㆍ발매 년도 : 1972부터 1982년
ㆍ렌즈 : 40mm f1.7(4군 6매)
ㆍ셔터 : 1/4 에서 1/500까지, leaf shutter
ㆍ협찬 : 황학동 주민들

출처 : 나는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
글쓴이 : LEEPD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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