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균
‘2003 이제는'-맥아더와 한국전쟁 기획안
1. 부 제 - 맥아더와 한국전쟁
1부 - 태평양의 시저
2부 - 또 하나의 전쟁
2. 방송일시 - 2003년 5월 11일(일)/ 18일(일) 밤 11:30~
3. 기획의도
왜 지금 맥아더인가?
한국전쟁 중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 중의 하나가 맥아더 장군이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겨우 버티고 있던 대한민국을 구해낸 인천상륙작전은 전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전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는 트루먼이 그의 해임 연설에서 밝혔듯이 ‘3차 대전’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인물로 지적되기도 한다. 한반도 내의 제한전을 전쟁정책으로 삼고 있던 트루먼에 도전해 중국과의 전면전을 요구하고, 원자폭탄의 사용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등 전쟁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위해 전쟁을 이용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또 51년 3월에 모색 중이던 휴전협상을 망쳐버린 인물이기도 하다. 그 결과 한반도는 2년이나 더 전쟁의 참화를 겪어야 했다.
그동안 우리 기억 속의 맥아더는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반공통일의 동반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을 때, 4.19 시위군중들이 맥아더 동상에 꽃다발을 걸어줬던 것이 단적인 예이다.
올해로 정전협정 50주년, 그저 반공의 영웅으로만 묘사되어 왔던 맥아더의 실상을 더듬음으로써 한국전쟁을 재해석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1. 맥아더의 핵심 측근들의 마지막 증언을 담고 있다.
-섬너(맥아더 연설문 작성 담당), 프랭크 색튼(극동사령부 보좌관), 닐스 본드(맥아더 정치자문), 로버트 피어리(국무부 극동 담당) 등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미국의 전쟁 정책과 맥아더의 전략, 그리고 트루먼과의 갈등을 재구성한다. 대부분이 80대에서 90대인 이들의 증언은 한국전에 관한 마지막 증언이 될지도 모른다.
2. 맥아더가 주장했던 원자폭탄 공격 계획의 실상을 기밀문서와 증언을 통해 파헤친다. 특히 트루먼이 승인한 핵무기 사용 계획, 아이젠하워가 승인한 계획 등 충격적인 사실이 공개된다.
3. 프랭크 기브니, 커티스 프랜더가스트 등 당시 전쟁을 직접 취재한 종군기자들의 증언은 알려지지 않았던 일화들을 통해 맥아더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4. 한국전쟁사 분야에서 학문적 업적을 쌓아온 마이클 샬러, 브루스 커밍스, 스탠리 웨인트럽 등이 한국 전쟁 해석의 새로운 시각 을 제시한다. 특히 첸지안은 중국의 참전이 소련에 의해서 조종된 것이라는 서구 중심의 해석 대신, 중국 내부의 역동적인 구조때문이라는 새로운 해석과 함께 중국군이 참전할 당시의 일화를 들려준다. 특히 모택동의 맥아더에 대한 평가와 함께, 둘 사이의 두뇌싸움은 흥미를 더해준다.
5. 한국전쟁 기간동안에만 초점을 맞추어 맥아더를 해석할 경우 빠지기 쉬운, 단선적인 이해를 극복하고 맥아더의 전 생애를 돌아봄으로써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일례로, 왜 맥아더는 38선을 돌파하려 했는가, 왜 중국과의 전면전을 주장했는가 하는 문제는 2차 대전과 일본 점령군 사령관으로서의 행적을 돌아보지 않고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4. 주요 내용
■ 1부/ 태평양의 시저(5월 11일 방송)
▶ 맥아더 장군, 인천에 상륙하다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은 자신도 5000대 1의 승률이라 말할만큼 도박에 가까운 작전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맥아더는 ‘태평양의 시저’라는 별명에 ‘인천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더 받는다. 그러나 그는 한국전쟁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킨 인물로 세계전사에 빛나는 영웅인 동시에, 3차 대전을 초래했을지도 모르는 영웅심리에 불타는 위험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맥아더, 그 신화는 무엇이고 진실은 무엇인가?
▶ 두 번의 실수가 가져다 준 성공과 몰락
한국전쟁의 오랜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는 한국전 발발을 미국은 정말 모르고 있었는가, 몰랐다면 왜 몰랐는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 정보장교로 첩보망을 구성했던 싱글러브 장군은, “맥아더 사령부는 전쟁 발발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보고 받았지만 무시했다”고 증언한다. CIA의 에이전트를 통해 워싱턴의 미국 정부도 한국전에 대한 정보를 보고 받았지만, 맥아더와 마찬가지로 그 정보를 무시했다. 그러므로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책임은 워싱턴과 맥아더 양쪽 모두에게 있었다. 이 첫 번째의 실수는 맥아더에게 인천상륙작전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그의 명성을 드높였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웨이크 섬에서 만난 트루먼에게 맥아더는 한국전에 중국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맥아더의 두 번째 실수였다. 그의 판단에 따라 미국의 정책과 전략이 중국군이 참전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세워짐으로써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고 만다. 중국의 모택동은 한국전이 발발한지 2주일이 되기도 전에 이미 한국전 참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합리적인 정보나 분석보다도 자신의 직관을 과신한 그의 오만함이 빚어낸 실수였다. 당시 중국의 마오쩌둥은 “나는 맥아더가 오만하기 때문에 그를 좋아한다. 오만하면 오만할수록 우리는 더 쉽게 그를 패배시킬 수 있다.”고 정확하게 분석했다. 결국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맥아더는 미국 역사상 가장 길고도 치욕스러운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의 실수는 맥아더의 명성을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적으로 맥아더 혼자서 책임져야 하는 것이었다.
▶ 태평양의 시저
맥아더는 미국의 지배 영역을 서쪽, 즉 태평양과 아시아로 확장시키는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다. 한국전이 발발하기 전, 1945년 필리핀 수복을 이뤄냈고, 맥아더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더불어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일본의 민주화와 개혁을 추진하면서 천황보다도 높은 위치에 올라선 맥아더는 확장된 미국의 힘의 상징이었다. 그런 맥아더에게 한국전쟁은 또 한번의 기회였다. 한국전쟁 중에도 맥아더의 야망은 확장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한 대한민국의 회복, 38선을 돌파하면서는 북한 공산집단을 한반도 밖으로 몰아내는 자유민주주의의 통일, 중국군이 개입하면서는 중국 공산당을 무너뜨리고 국민당 정부를 복귀시키는 것이 그의 목표가 되었다. 결국 한국전쟁은, 맥아더가 운명으로 받아들인 서쪽으로의 확장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참전은 ‘태평양의 시저’를 몰락의 길로 인도했다. “새로운 적과의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고 워싱턴에 보고한 맥아더는 12월 말, 중공군의 대공세에 맞서 ‘필승계획’이라는 것을 제안하는데 그것은 중국과의 전면전이었다.
■ 2부/ 또 하나의 전쟁(5월 18일 방송)
▶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뿐이다."
역전의 노장군 맥아더는 1951년 4월 10일, 트루먼 의해 해임된다. 해임 후 고국에 돌아와 가진 양원합동의회 연설에서 그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자신의 말처럼 맥아더는 그 후에도 죽지 않았다. 사라지지도 않았다. 트루먼은 그의 끈질긴 공격에 결국 재출마를 포기해 버린다. 뒤이어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의 원자폭탄 공격을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리고 한반도의 전쟁은 2년이나 더 지속된다.
▶ 3월 24일의 대반란
맥아더의 해임은 그가 자초한 것이었다. 중국군의 참전으로 궁지에 몰린 맥아더는 끊임없이 확전을 되풀이 요구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는 트루먼을 압박하기 위해,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언을 하는가 하면, 실제로 한국정부의 소개계획을 제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불길한 예언은 빗나간다. 야전사령관 리지웨이는 51년 1월 말부터 시작된 반격을 통해 3월에는 38선까지 대부분의 영토를 회복한다.
이에 트루먼은 ‘전쟁 전 상태의 회복’이라는 전쟁의 목적이 달성되었으므로 휴전을 고려한다. 맥아더는 ‘그것을 그냥 앉아서 보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골든 섬너 증언) 트루먼이 휴전을 제안하기 전, 3월 24일 소위 ‘평화계획’을 발표한다. 사실상 중국에 항복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트루먼에 대한 도전이자 전쟁 선언이었다. 이로써 유엔과 미국 정부가 추진하던 휴전 협상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4월 10일 트루먼은 그를 해임한다. ‘3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해서.’
▶ 맥아더는 해임을 자초했다?
맥아더의 극동사령부는 며칠 전부터 그가 해임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맥아더 자신도 보좌관에게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말했다.
한국전쟁에서 그가 할 일은 남아있지 않았다. 전쟁은 그의 불길한 예언에도 불구하고 리지웨이의 지휘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다. 중국 개입 예측 실패, 중국 대공격에서의 후퇴, 한반도의 통일에도 실패한 맥아더는 한국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맥아더는 초라하게 귀환하느니 차라리 순교자의 길을 택했다.’(마이클 샬러, 스탠리 웨인트럽) 즉, 트루먼으로부터 해임 당함으로써 자신의 계획대로라면 더 큰 승리를 얻어낼 수 있었을 텐데 트루먼이 막아서 그러지 못했다는 명분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그럼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한 근거를 마련한다. 52년 대통령 선거, 그의 꿈은 미국 대통령이었다.
▶ 원폭 계획
중국과의 전면전은 트루먼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맥아더 또한 트루먼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확전을 주장했다. 맥아더는 러시아와 만주에 원자폭탄을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취재진이 찾은 비밀문서에 의하면, 1950년 12월에 맥아더는 26개의 원자폭탄을 요구했다. 그리고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방사능 오염지대를 만드는 계획도 세웠다. 트루먼은 이 요구를 거부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4월 10일과 4월 11일에 트루먼이 두 개의 명령에 서명했다는 것이다. 하나는 맥아더의 해임이고, 다른 하나는 원자폭탄을 괌과 오키나와로 배치하면서 전략공군사령부(SAC)에 핵 사용권한을 위임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트루먼은 그것을 맥아더가 미리 알지 못하도록 비밀에 부쳤다. 맥아더가 핵무기를 사용해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때문이었다.
‘2003 이제는'-맥아더와 한국전쟁 기획안
1. 부 제 - 맥아더와 한국전쟁
1부 - 태평양의 시저
2부 - 또 하나의 전쟁
2. 방송일시 - 2003년 5월 11일(일)/ 18일(일) 밤 11:30~
3. 기획의도
왜 지금 맥아더인가?
한국전쟁 중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 중의 하나가 맥아더 장군이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겨우 버티고 있던 대한민국을 구해낸 인천상륙작전은 전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전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는 트루먼이 그의 해임 연설에서 밝혔듯이 ‘3차 대전’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인물로 지적되기도 한다. 한반도 내의 제한전을 전쟁정책으로 삼고 있던 트루먼에 도전해 중국과의 전면전을 요구하고, 원자폭탄의 사용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등 전쟁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위해 전쟁을 이용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또 51년 3월에 모색 중이던 휴전협상을 망쳐버린 인물이기도 하다. 그 결과 한반도는 2년이나 더 전쟁의 참화를 겪어야 했다.
그동안 우리 기억 속의 맥아더는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반공통일의 동반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을 때, 4.19 시위군중들이 맥아더 동상에 꽃다발을 걸어줬던 것이 단적인 예이다.
올해로 정전협정 50주년, 그저 반공의 영웅으로만 묘사되어 왔던 맥아더의 실상을 더듬음으로써 한국전쟁을 재해석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1. 맥아더의 핵심 측근들의 마지막 증언을 담고 있다.
-섬너(맥아더 연설문 작성 담당), 프랭크 색튼(극동사령부 보좌관), 닐스 본드(맥아더 정치자문), 로버트 피어리(국무부 극동 담당) 등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미국의 전쟁 정책과 맥아더의 전략, 그리고 트루먼과의 갈등을 재구성한다. 대부분이 80대에서 90대인 이들의 증언은 한국전에 관한 마지막 증언이 될지도 모른다.
2. 맥아더가 주장했던 원자폭탄 공격 계획의 실상을 기밀문서와 증언을 통해 파헤친다. 특히 트루먼이 승인한 핵무기 사용 계획, 아이젠하워가 승인한 계획 등 충격적인 사실이 공개된다.
3. 프랭크 기브니, 커티스 프랜더가스트 등 당시 전쟁을 직접 취재한 종군기자들의 증언은 알려지지 않았던 일화들을 통해 맥아더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4. 한국전쟁사 분야에서 학문적 업적을 쌓아온 마이클 샬러, 브루스 커밍스, 스탠리 웨인트럽 등이 한국 전쟁 해석의 새로운 시각 을 제시한다. 특히 첸지안은 중국의 참전이 소련에 의해서 조종된 것이라는 서구 중심의 해석 대신, 중국 내부의 역동적인 구조때문이라는 새로운 해석과 함께 중국군이 참전할 당시의 일화를 들려준다. 특히 모택동의 맥아더에 대한 평가와 함께, 둘 사이의 두뇌싸움은 흥미를 더해준다.
5. 한국전쟁 기간동안에만 초점을 맞추어 맥아더를 해석할 경우 빠지기 쉬운, 단선적인 이해를 극복하고 맥아더의 전 생애를 돌아봄으로써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일례로, 왜 맥아더는 38선을 돌파하려 했는가, 왜 중국과의 전면전을 주장했는가 하는 문제는 2차 대전과 일본 점령군 사령관으로서의 행적을 돌아보지 않고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4. 주요 내용
■ 1부/ 태평양의 시저(5월 11일 방송)
▶ 맥아더 장군, 인천에 상륙하다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은 자신도 5000대 1의 승률이라 말할만큼 도박에 가까운 작전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맥아더는 ‘태평양의 시저’라는 별명에 ‘인천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더 받는다. 그러나 그는 한국전쟁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킨 인물로 세계전사에 빛나는 영웅인 동시에, 3차 대전을 초래했을지도 모르는 영웅심리에 불타는 위험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맥아더, 그 신화는 무엇이고 진실은 무엇인가?
▶ 두 번의 실수가 가져다 준 성공과 몰락
한국전쟁의 오랜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는 한국전 발발을 미국은 정말 모르고 있었는가, 몰랐다면 왜 몰랐는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 정보장교로 첩보망을 구성했던 싱글러브 장군은, “맥아더 사령부는 전쟁 발발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보고 받았지만 무시했다”고 증언한다. CIA의 에이전트를 통해 워싱턴의 미국 정부도 한국전에 대한 정보를 보고 받았지만, 맥아더와 마찬가지로 그 정보를 무시했다. 그러므로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책임은 워싱턴과 맥아더 양쪽 모두에게 있었다. 이 첫 번째의 실수는 맥아더에게 인천상륙작전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그의 명성을 드높였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웨이크 섬에서 만난 트루먼에게 맥아더는 한국전에 중국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맥아더의 두 번째 실수였다. 그의 판단에 따라 미국의 정책과 전략이 중국군이 참전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세워짐으로써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고 만다. 중국의 모택동은 한국전이 발발한지 2주일이 되기도 전에 이미 한국전 참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합리적인 정보나 분석보다도 자신의 직관을 과신한 그의 오만함이 빚어낸 실수였다. 당시 중국의 마오쩌둥은 “나는 맥아더가 오만하기 때문에 그를 좋아한다. 오만하면 오만할수록 우리는 더 쉽게 그를 패배시킬 수 있다.”고 정확하게 분석했다. 결국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맥아더는 미국 역사상 가장 길고도 치욕스러운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의 실수는 맥아더의 명성을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적으로 맥아더 혼자서 책임져야 하는 것이었다.
▶ 태평양의 시저
맥아더는 미국의 지배 영역을 서쪽, 즉 태평양과 아시아로 확장시키는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다. 한국전이 발발하기 전, 1945년 필리핀 수복을 이뤄냈고, 맥아더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더불어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일본의 민주화와 개혁을 추진하면서 천황보다도 높은 위치에 올라선 맥아더는 확장된 미국의 힘의 상징이었다. 그런 맥아더에게 한국전쟁은 또 한번의 기회였다. 한국전쟁 중에도 맥아더의 야망은 확장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한 대한민국의 회복, 38선을 돌파하면서는 북한 공산집단을 한반도 밖으로 몰아내는 자유민주주의의 통일, 중국군이 개입하면서는 중국 공산당을 무너뜨리고 국민당 정부를 복귀시키는 것이 그의 목표가 되었다. 결국 한국전쟁은, 맥아더가 운명으로 받아들인 서쪽으로의 확장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참전은 ‘태평양의 시저’를 몰락의 길로 인도했다. “새로운 적과의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고 워싱턴에 보고한 맥아더는 12월 말, 중공군의 대공세에 맞서 ‘필승계획’이라는 것을 제안하는데 그것은 중국과의 전면전이었다.
■ 2부/ 또 하나의 전쟁(5월 18일 방송)
▶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뿐이다."
역전의 노장군 맥아더는 1951년 4월 10일, 트루먼 의해 해임된다. 해임 후 고국에 돌아와 가진 양원합동의회 연설에서 그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자신의 말처럼 맥아더는 그 후에도 죽지 않았다. 사라지지도 않았다. 트루먼은 그의 끈질긴 공격에 결국 재출마를 포기해 버린다. 뒤이어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의 원자폭탄 공격을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리고 한반도의 전쟁은 2년이나 더 지속된다.
▶ 3월 24일의 대반란
맥아더의 해임은 그가 자초한 것이었다. 중국군의 참전으로 궁지에 몰린 맥아더는 끊임없이 확전을 되풀이 요구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는 트루먼을 압박하기 위해,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언을 하는가 하면, 실제로 한국정부의 소개계획을 제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불길한 예언은 빗나간다. 야전사령관 리지웨이는 51년 1월 말부터 시작된 반격을 통해 3월에는 38선까지 대부분의 영토를 회복한다.
이에 트루먼은 ‘전쟁 전 상태의 회복’이라는 전쟁의 목적이 달성되었으므로 휴전을 고려한다. 맥아더는 ‘그것을 그냥 앉아서 보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골든 섬너 증언) 트루먼이 휴전을 제안하기 전, 3월 24일 소위 ‘평화계획’을 발표한다. 사실상 중국에 항복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트루먼에 대한 도전이자 전쟁 선언이었다. 이로써 유엔과 미국 정부가 추진하던 휴전 협상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4월 10일 트루먼은 그를 해임한다. ‘3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해서.’
▶ 맥아더는 해임을 자초했다?
맥아더의 극동사령부는 며칠 전부터 그가 해임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맥아더 자신도 보좌관에게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말했다.
한국전쟁에서 그가 할 일은 남아있지 않았다. 전쟁은 그의 불길한 예언에도 불구하고 리지웨이의 지휘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다. 중국 개입 예측 실패, 중국 대공격에서의 후퇴, 한반도의 통일에도 실패한 맥아더는 한국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맥아더는 초라하게 귀환하느니 차라리 순교자의 길을 택했다.’(마이클 샬러, 스탠리 웨인트럽) 즉, 트루먼으로부터 해임 당함으로써 자신의 계획대로라면 더 큰 승리를 얻어낼 수 있었을 텐데 트루먼이 막아서 그러지 못했다는 명분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그럼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한 근거를 마련한다. 52년 대통령 선거, 그의 꿈은 미국 대통령이었다.
▶ 원폭 계획
중국과의 전면전은 트루먼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맥아더 또한 트루먼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확전을 주장했다. 맥아더는 러시아와 만주에 원자폭탄을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취재진이 찾은 비밀문서에 의하면, 1950년 12월에 맥아더는 26개의 원자폭탄을 요구했다. 그리고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방사능 오염지대를 만드는 계획도 세웠다. 트루먼은 이 요구를 거부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4월 10일과 4월 11일에 트루먼이 두 개의 명령에 서명했다는 것이다. 하나는 맥아더의 해임이고, 다른 하나는 원자폭탄을 괌과 오키나와로 배치하면서 전략공군사령부(SAC)에 핵 사용권한을 위임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트루먼은 그것을 맥아더가 미리 알지 못하도록 비밀에 부쳤다. 맥아더가 핵무기를 사용해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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