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불안한 시대의 ‘불온한’ 다큐 만들기
이기형(경희대학교 언론정보학부 교수)
I. 들어가기: 무어, 다큐에 힘을 불어넣다!
개인적으로 자동차 혁명의 초기부터 스파크 플러그를 GM에 납품하던 미시간 주의 플린트라는 대표적인 미국 중서부의 공업도시가 제너럴 모터스(GM)라는 거대기업의 새로운 이윤 창출과 탈지역화 전략에 의해 어떻게 공동화되고, 대량실업이라는 사측의 갑작스런 결정이 그곳에 거주하는 수많은 개인들의 삶에 어떤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 <로저와 나, 1989>를 우연히 접했던 시절부터 마이클 무어의 팬이 되었다. 그 이후로 계속된 무어의 작품과의 대면은 다큐의 사회성과 정치학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무어식의 현실 개입적이지만 주관적이고, 동시에 정치적인 가치들이 들어간 다큐 만들기가 제공하는 가능성과 논쟁점들에 대해서도 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글은 무어의 다큐 만들기 작업에 대한 필자의 ‘비판적인 지지’를 담고 있음을 먼저 밝히고 시작하겠다.
<로저와 나>는 미국 중서부의 이제는 ‘녹슨 띠의 벨트(rustbelt)’라고 불리는 탈산업화 과정 속에서 GM이 값싼 노동력을 찾아 공장을 이전함으로써 단시간 내에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고통받게 된 플린트 시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도시 자체가 일종의 화자가 되는 이 다큐는 플린트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관객들이 몰랐거나 피상적으로만 인지하던 거대기업의 횡포와 대량해고가 만든 우울한 현실과 플린트 시의 보통사람들이 감내해야 하는 일상의 일그러진 단면들을 한 편의 파노라마를 보듯이 생생하게 전해 준다. 이 작품에는 웃음과 공분을 동시에 자아낼 수 있는, 하지만 동시에 그 웃음 속에는 어려운 시기를 감내해야 하는 보통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 그리고 남의 삶에 엄청난 파고를 가져오는 권력자들에 대한 통렬한 조롱과 비꼬기가 내재되어 있다.
<로저와 나>의 성공에 힘입어서 일약 대중문화 속의 유명인사가 된 무어는
마이클 무어의 다큐 만들기 작업의 첫번째 특성은, 자신이 직접 작품 속에 출연하고 인터뷰어와 내레이터로 텍스트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점이다. 무어는 <로저와 나>에서 플린트의 기업가, 정치인, 관료 등과 같은 인물들을 쉬지 않고 인터뷰하고, 이 도시 출신의 대중 스타와 명사들에게 이 도시의 이미지에 관해 질의한다. 동시에 무어는 개개의 삶의 현장에서 GM의 공장 폐쇄로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플린트의 평범한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이 겪고 있는 가난과 고통, 실업, 이직과 전직의 드라마 그리고 절망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화자로서 무어는 이러한 다양한 목소리들을 교직으로 삼아서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집단, 부자와 빈자, 권력자와 보통사람들의 초상을 그려 낸다. 인터뷰어로서의 무어의 특징은 그가 일종의 일견 맹목적이거나 무모하게 보이는 ‘스토커’가 되어 자신이 지목한 인물들이나 유명인사들을 집요하게 찾아 나선다는 점이다. <로저와 나>에선 당시 GM의 대표였던 로저 스미스를 찾아서 그가 일하는 GM의 사무실에서, 그가 즐겨 찾는 요트 클럽과 피트니스 센터, 그리고 미시간 주를 떠나 뉴욕의 주주총회에까지 찾아간다. 물론 <로저와 나>에서 채택한 이러한 끈질긴 추적의 과정은 그가 직접 당시의 GM의 최고 책임자를 만나 노동자들의 처참한 현실을 알리고 대량해고를 결정한 사측의 결정을 돌려 보겠다는 데 진정한 목적이 있기보다는, 내러티브를 흥미 있게 진행시키고 관객에게 궁금증을 유발시키기 위한 수법으로 사용된다. <볼링 포 컬럼바인>에서는 한때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액션 스타였고, 초강경 보수의 편에서 총기 자유를 설파하는 미국 사회의 거대 이익집단인 전국총기소유자연맹(National Rifle Association)의 대표였던 찰톤 헤스턴이 무어의 스토킹의 대상이 되며, 이 작품에서 무어는 헤스턴을 직접 만나서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총기 문제 그리고 폭력의 문화에 대한 설전을 벌일 기회를 포착하기도 한다.
두 번째로, 그의 다큐의 특징은 무어가 일종의 브리콜라주(bricolage)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로저와 나>에서 무어는 플린트라는 도시의 성장과 쇄락, 가난이 할퀴고 간 상흔을 담고 있는 기록영상에서 다양한 PR 자료, 뉴스 화면, 그리고 그래픽 이미지들을 자신의 인터뷰와 조합시켜 사용한다. <볼링 포 컬럼바인>에서는 청년층이 즐겨 보는 냉소적인 애니메이션 <사우스 팍>을 인용하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이미지들의 조합, 교차편집 그리고 걸쭉한 입담을 통해 무어가 잡아 내는 장면들이 주는 대중적인 소구력과 충격적인 효과는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필자가 무어가 만든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로저와 나>에서 그는 크리스마스에 집세를 내지 못해 집에서 쫓겨나는 이들의 모습을 GM 본사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파티의 장면과 교차시킨다. 한쪽에선 대부분이 인종적인 소수자들인 플린트의 시민들이 그들의 안식처에서 쫓겨나고, 깨끗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고등학생들이 GM사의 파티장에서 캐럴송을 부르며 성탄을 축하하는 장면을 대비시킨다. 이 교차편집을 통한 극적인 대비가 불러오는 부자와 빈자 사이의 사회적인 모순에 대한 예시효과는 무척이나 강렬하고 여운을 남긴다.
무어식 다큐의 세 번째 특징은 풍자와 유머, 그리고 위트의 강조다. 그의 작품 속에서 무어는 일관되게 미국 사회의 권력자들과 대기업의 임원들을 조롱하고, 그들의 위선과 무책임한 행위를 공박한다. 무엇보다도 무어의 덫에 걸린 유명인사들의 모습은 한없이 우스꽝스럽게 희화된다. 특히 <화씨 9/11>에서 무어의 카메라는 애상적으로 노래를 부르거나 TV 촬영 전에 침을 발라 머리를 매만지는, 평소에는 근엄한 네오콘 정치인들의 우스운 모습을 보여 주거나, 뉴욕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비행기가 충돌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한동안―정확히 7분 가까이!―눈만 껌벅이면서 자신이 받은 충격을 제어하지 못하고 충격에 싸여 어찌할 바 모르는 조지 부시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 무능한 제국의 수장을 보는 것―특히 거대한 제국의 좌장으로서의 텔레비전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근엄한 대통령의 모습이기보다는 유약한 한 사내의 안절부절못함을 목격하는 것―은 관객에게 보기 드문 재미와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무어는 유머와 위트 그리고 패러디를 자신의 다큐 영화의 기본적인 정서로 사용하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기득권층에 대한 그의 유머와 위트 그리고 폭로의 톤은 동시에 신랄하고 냉소적이다. 그의 유머와 조롱 그리고 풍자 속에는 대중들에게 공유되지 않았던 충격적인 진실의 파편들이 담겨 있고, 그는 이런 유머와 재치를 가지고 대중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어간다.
무어의 다큐 만들기 과정 속에 들어가는 관점은, 한마디로 요역한다면, 일종의 ‘대중주의(populism)’이며, 사회적인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라고 할 수 있다. 무어는 <화씨 9/11>에서 대중주의자로서의 자신의 보통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동지애를 감추지 않는다. 이라크에서 아들을 잃고 반전주의자가 된 한 어머니의 모습을 따라가는 그의 카메라는 그녀가 백악관 앞에서 오열하고 반전 구호를 외치는 장면들을 보여 준다. 그는 또 의사당 앞을 배회하면서 마주치는 의원들에게 그들이 설파하듯이 조국을 위해 자식들을 이라크로 보내라고 일갈한다. 더 나아가, 무어는 이들 의원들의 자제들 중에 단 한 명만이 이라크에서 복무하고 있음을 성토한다. 이런 다분히 의도된 해프닝과 편집 그리고 대중들이 인지하지 못했던 정보의 공개를 통해 무어는 기존 정치인들과 이익집단으로서의 기업인들의 위선을 까발리며, 그들이 취한 정책에 의해 삶의 행로가 바뀐 이들의 목소리를 불러오고, 그들에게 동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물론 무어식 다큐가 전달하는 고발 저널리즘에 대한 비판 역시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도 무어식 다큐의 연출 방식에 제기된 비판은 그의 다큐가 지닌 지나친 주관성의 문제와 편집상의 논리적인 비약이다. 그의 <화씨 9/11>은 드러내놓고 부시의 재선을 막겠다는 날것으로서의 목적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나쁜 영화’이며, 무어는 자신의 목적을 설파하기 위해 일어났던 일의 순서를 의도적으로 재배치하거나 축약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일례로 <볼링 포 컬럼바인>에서 무어는 은행구좌를 열면 무상으로 총기를 선물로 주는 미시간 주의 한 은행에 찾아가서 실제로 통장을 만들고 경품으로 총기를 받는다. 그러나 사실은 이 은행이 무어가 그린 것처럼 구좌를 열었다고 1시간 안에 바로 총기를 내주는 것은 아니다. 공짜로 총기를 받기 위해서는 신원조회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열흘 가까운 시간이 소요된다(<시네 21>, 2003. 4). 무어는 미국 사회 내의 총기 문화에 대한 집착과 총기 문화의 단면을 드러내고 그의 정치적인 메시지를 극단적으로 증폭시키기 위해 일종의 과장된 황색 저널리즘식의 기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무어식의 다큐는 감독의 입장과 그/그녀가 지닌 가치의 다큐 텍스트로의 개입을 줄이면서 현실을 가능한 비개입적으로 관찰하고 설명하려 시도했던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적인 관습이나, 작가로서의 감독의 개입에 대해 성찰적으로 반성하는 최근의 보다 주관적이지만 조율된 다큐멘터리 경향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일인칭 다큐를 통한 주관적인 퍼포먼스와 자신이 설정한 정치적인 가치와 시선을 통한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보여 준다.
무어식 다큐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미국의 보통사람들의 애환과 분노와 그리고 그들의 상처받은 삶의 초상에 감정이입을 하고, 그들의 편에서 내레이션을 행하는 무어의 시점에 미국 중심적이고 ‘포플리스트’적인 측면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무어의 다큐는 권력집단 대 보통사람, 대기업 대 노동자의 이항대립을 설정해 놓고, 보통사람들로부터 ‘미국이란 나라를 빼앗아 간’ 권력집단과 부유한 기업인들의 허위와 거짓, 그리고 범죄행위를 까발리는 데 주력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단순화된 계급 대립의 결과물로서 사회적인 모순을 접근하기 때문에 무어식의 다큐는 제국으로서의 미국의 패권주의와 미국과 다른 국가들 간의 불평등한 관계를 구조적인 측면에서 보거나, 9․11 사건으로 불거진 테러의 역사적 측면과 원인 제공자로서의 미국의 일방주의적인 역할에 대한 진지하거나 정치한 역사적인 분석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무어의 영화는 철저하게 미국 중심적이며, 모든 악의 근원을 부시와 그의 일당들에게 돌림으로써 오히려 냉철하게 미국의 대외정책과 제3세계에 대한 개입을 비판적으로 파악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런 무어의 미국 중심주의와 지나치게 단순화된 역사 인식은 어쩌면 ‘자유주의적인 좌파’ 감독이 만든 주관적이고 특정한 목적성을 지닌 다큐멘터리가 보여 주는 한계일 수 있다. 무어의 작업은 제3세계와 비서구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할 정도로 자기비판적 이거나 성찰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어식 다큐는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강요하는 미국 지배층의 기만적인 정치행위와 그들이 주류의 미디어의 협력을 받으며 유포하려는 신화들을 탈신화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지나치게 비판받을 사안만은 아니며 나름의 강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더 냉철한 입장에서 혹은 1세계의 감독이 아닌 갈등과 고난을 겪고 있는 제3세계의 감독들이 만든 다큐들이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무어식 다큐가 차지하는 니치가 분명히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골리앗 앞의 다윗과 같은 존재로 혹은 언더독들의 후견인과도 같이 그는 권력을 행사하고 전횡하는 권력집단 대 힘없는 보통사람들이라는 대립항을 만들어 놓고, 카메라를 들고 권력집단에 의해 일그러진 진실과 우울한 현실을 향해 저돌적으로 그리고 맹렬하게 달려간다. 그의 <볼링 포 콜럼바인>은 미국의 심각한 사회 정치적 문제인 총기 소지와 그것을 넘어서서 총과 폭력에 미친 미국인의 삶에 가져온 비극을 정면으로 다룬다.
참고로, 총기 보급률이 미국과 비슷한 캐나다에서 한 해에 총기 관련 사고로 사망한 사람의 수는 165명이었고, 미국의 경우는 1만 1,127명이었다(<키노>, 2002 7월호). <화씨 9/11>은 ‘테러와 전쟁’이라는 어쩌면 미국의 지배층이 현 단계의 국가적인 생존권과 최고의 정책적인 관심사로 정의하고 끌어가는 전쟁 수행 과정과 관련된 주장들이 기실은 얼마나 기만적이고 허구에 가득 차 있는지를 낱낱이 밝히고자 한다. 아니 무모할 정도로 부시와 그의 주변인물들과 중동의 석유 자본, 그리고 정치인들 사이의 유착관계를 과감하게 까발린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무어는 주류의 시사보도나 뉴스에서는 간헐적으로 다루어지거나 아예 거론되지 않은 이슈들을 공적인 이슈들로 전환시키는 데 탁월한 통찰력을 발휘한다. 무어의 다큐와 그가 구사하는 수사 속엔 구조적인 사회문제들과 복잡하게 얽힌 정치사안들이 비록 지나치게 단순하게 다루어지거나 음모론적인 시각에서 다루어질 때도 있지만, 동사에 관객은 불합리한 세상에 대해 발언하고 폭력적인 권위에 도전하는 그의 용기와 열망을 읽을 수 있다. 세상에 공식석상에서 애국법과 테러 정치의 히스테리아 속에서 “부시, 부끄러운 줄 아시오!”라고 직설적으로 일갈할 수 있는 미국인을 우리는 과연 몇 명이나 목격했는가!
II. 미디어 액티비즘과 마이클 무어의 작업
마이클 무어의 다큐는 영화와 TV라는 강력한 시각 매체들을 통해 종종 은폐된 진실에의 추구와 정치인과 거대기업들에게 늘 무시당하고 그들의 결정에 의해 예기치 않게 삶의 행로가 뒤바뀌는 보통사람들의 애환과 사회적 소수자들의 신산 어린 삶 속의 경험들을 보여 주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영상 운동을 통해 사회 변화를 구현하고자 하고, 미디어 액티비즘을 실천하는 현실 참여적인 독립다큐멘터리들과 넓은 면에서 궤적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지나치게 무거운 사회 고발의식에 둘러싸여 지나치게 진지하게 들리거나, 다큐 수용자의 흥미를 끌어 내기에는 때로는 역부족이거나, 영상보기의 즐거움을 피하면서 냉철한 비판적인 거리감을 유지, 강조하는 고발저널리즘이나 리얼리즘 지향의 ‘정통 다큐’들과는 달리, 무어의 작품들은 보는 재미와 함께 쉽게 공명할 수 있는 패러디적인 현실비평의 방식과 개입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미디어 활동가 그리고 16mm 카메라를 든 저널리스트로서 무어의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고 논쟁의 장소에 발로 뛰어드는 그의 액티비즘은 일견 무모해 보이고, 대다수의 수용자들이 인지하지 못했던 사실에 대한 교육과 ‘계몽’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주류의 다큐 경향성에서 이탈하되, 기득권과 권위를 행사하는 미국의 권력집단들의 탐욕과 위선 그리고 ‘양심불량’을 희화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만들어 낸다.
주지하다시피 이 곰 같은 사내가 어슬렁거리며 대기업의 로비를 찾거나, 그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유명 정치인과 명사들에게 마이크를 갖다 대거나, 정치인들의 회합장에 나타날 때, 그의 작품 속에서 재연되는 기발하고 의표를 찌르는 인터뷰 전술과 이 어리숙해 보이지만 야구모자를 쓴 감독이 게릴라적인 방문 전술로 끈질기게 만들어 내는 위트로 가득한 해프닝과 기발한 소극(farce), 그리고 그런 무어의 전술로 잡아 내는 에피소드들은 상당히 흥미롭고, 그런 인터뷰가 발휘하는 정서적인 공명 효과는 관객이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을 만큼의 흡인력과 대중적인 소구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볼링 포 콜럼바인>에 나오는 한때는 대단한 액션배우였던, 지금은 수구정치의 아이콘이 된 NRA의 전 회장 찰턴 헤스톤이 무어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황급히 자리를 뜨는 장면이나, 십대들의 아이돌 스타인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화씨 9/11> 속에서 부시를 지지한다며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생각 없이 답변하는 장면을 한번 떠올려 보자. 아니면 그런 팝 아이돌에 비교해, 쇼크 록의 대명사로 불리며 폭력을 예찬하고 비미국적인 가치를 설파한다고 보수세력에 의해 공격받는 록 스타 마릴린 맨슨이 조리 있게 자신의 논점을 설파하는 장면을 상기해 보자.
물론 그의 작품이 앞에서 언급했듯이 자신이 설정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동적일 수 있는 메시지나 대중이 쉽게 공분을 느낄 수 있는 이미지들을 특정한 목적성을 지닌 편집 과정을 통해 의도적으로 강조하거나, 사회적인 팩트와 인과관계를 자기 논지에 맞추기 위해 일정 부분 단순화시키는 등의 ‘왜곡’을 저지르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아울러 무어의 현실에 대한 다큐를 통한 개입은 마치 추문폭로가(muckraker)가 정치적인 스캔들을 쫓듯이 매우 센세이셔널한 주제들을 추적하기도 한다. 온라인의 대표적인 영화평론가인 듀나는 <화씨 9/11>을 “시끄럽고 야비하고 뻔뻔스러우며 노골적인 악의와 분노를 품고 있는 영화다. 영화의 목적 역시 그런 성격과 잘 어울린다. <화씨 9/11>의 의도는 현 미국 대통령인 조지 W. 부시를 모욕하고 그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물인지 폭로한 뒤 곧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그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화씨 9/11>은 당당하고 숨기는 게 없는 정치선전 영화”라고 평가한다.
대안적인 미디어 비평이라는 앵글에서 보았을 때, 노움 촘스키식의 미디어 비평이 기존 미디어의 근무 유기와 선동성이라는 맥락 속에서 정치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예리한 비평을 제공하고, 참여적인 미디어 운동의 계열에서 만들어진 다큐들이 진정성과 더불어 왜곡되거나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역사적인 사실들을 발굴하는 소명성을 발휘하고 있지만, 영상 텍스트의 소비자인 대중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 이들 텍스트들은 극영화와 비교할 때 지나치게 딱딱하거나 재미없을 수 있다는 문제를 안겨 준다. 또 하나의 예로, 진실과 역사의 재현이라는 다큐적인 진실 찾기 과정 전반에 걸친 드문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클라우드 란즈만의 <쇼와>와 같은 실험적인 다큐들은 전통적인 다큐에서 활용되는 기록영상과 같은 관습적인 이미지들을 사용하지 않고 수많은 인터뷰만으로 연결된 반주류적인 다큐 관행을 보여 준다. 하지만 란즈만의 작품이 갖고 있는 기성 다큐 문법의 거부와 다큐 만들기 자체에 관한 수준 높은 미학주의적인 표현 그리고 철학적인 성찰이 성취하는 의미 있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일반 관객에겐 그의 텍스트는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난해함과 소통상의 문제라는 간과하기 어려운 문제점을 던져 준다.
그렇다면 마이클 무어 식의 논쟁적이고 정파적일 수 있으되, 공격적인 유머와 패러디를 바탕으로 한 다큐 만들기가 보여 주는 미덕은 아마도 영상 세대들에게 다큐란 아예 재미없거나 지나치게 정치적인 메시지를 나르거나, 혹은 다큐가 소수의 전문가들에게 어필하는 모호한 예술성을 지녔다는 고정관념을 깨면서, 영화제나 학교가 아닌 대중적인 영화 공간을 통해서도 접근 가능하고, 흥미 있는 다큐를 통해 수용자가 텍스트를 본 뒤에도 곱씹어 생각할 질문들을 던져 준다는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지금 대다수의 관객들은 주관적이되 정치적인 포지션닝을 수행하는 이른바 ‘편파적인’ 그의 다큐와 고발정신에 대대적으로 환호를 보내고 있지 않은가?
III. 끔찍한 현실, ‘차악(次惡)의 저널리즘’과 현실 참여적인 다큐멘터리의 정치학
양식과 재현의 수법은 바뀌었으되 영상 텍스트로서 다큐멘터리는 아직까지도 사회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강력하게 발언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이자 정치적인 실천수단이다. 블록버스터를 위시한 상업영화들, 그리고 각양의 리얼러티 쇼와 연성 다큐의 범람 속에서 전통적인 다큐의 정체성과 존재 방식이 이미 심각하게 흔들리고 오랜 기간 주류의 영상문화의 장에서 주변화되어 왔지만, 현실의 문제점들을 간파하고 탐색하고자 하는 다큐의 능력이 지금보다 더 급박하게 요청되는 시대가 있을까. 다큐와 사회성 그리고 재현의 정치성을 거론할 때, 그리고 다큐를 둘러싼 논쟁을 이야기할 때, 이제 마이클 무어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무어의 작업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진영에서 본다면, 무어 식의 다큐는 부시의 낙선을 기도하거나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전에 대한 개입의 이유가 허구라는 것을 폭로하는 목적에 복무하는 저급한 ‘선동적인 텍스트’이자, ‘객관적인 팩트’를 바탕으로 ‘진실’을 전달해야 하는 다큐의 전통적인 소명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 반대자들에게 무어는 자신이 설정한 목적을 위해 왜곡을 일삼는 선동가나 추문 폭로가에 지나지 않거나 이슈를 제기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명망을 만들어가고 이익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로 그려진다. 얼마나 그의 행태가 눈엣가시처럼 느껴졌으면, 무어의 작품에서 다루는 내용과 행적을 낱낱이 추적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웹사이트 무어워치닷컴(moorewatch.com)이 생기기도 했고, 안티-마이클 무어를 표방하는 영화들을 모아 영화제를 열겠다는 발상도 미국의 보수진영으로부터 제기되었다.
조금 다른 앵글에서 다큐를 전문적으로 비평하는 일군의 영화평론가나 문화비평가들의 시각을 통해 접근했을 때 무어의 작품은 해당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탐사를 추구하는 대신, 반부시 정서를 확산시키기 위한 ‘대중주의적’인 노선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주장이 지나치게 많이 개진된 동시에 결코 균형적이지 못한, 동시에 무어의 쇼맨십과 프로파간다가 드러나는 ‘문제적인’ 텍스트다. 사실 대다수의 관객과 문화비평가들은 무어의 다큐가 그가 믿는 정치적인 성향과 가치에 편향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문화평론가인 강명석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사실 <화씨 9/11>을 보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복잡한 생각’이 아니라 ‘분명한 선택’이다. 이 작품이 보이는 정치적 입장에 동의할 것인가 아닌가, 그리고 동의했다 하더라도 그 방법론에 대해서도 함께 동의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만약 부시에, 혹은 미국-이라크전 파병에 동의한다면 이 영화는 아예 볼 필요 없는 작품이거나 혹은 보고 ‘설득당해야 할’ 작품이고, 반대로 이것들에 반대한다면 이 영화는 절대적 지지나 비판적 지지를 선택해야 할 작품이다. 때론 보는 사람에 따라 굉장히 논쟁의 소지가 있는, 다분히 주관적인 감정이 들어간 ‘팩트’마저도 그대로 찬성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이에 대한 입장 정리가 끝난다면 <화씨 9/11>은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는 영화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미 식상하거나 무덤덤해질 만큼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해 온 주류 미디어가 생산하고 매개한 이라크의 이미지들과 거기에 폭력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제국의 지도자인 부시로 대표되는 미국 지배계급의 위선과 부도덕성을, 그런 제국의 정책에 대한 비판보다는 현실 추인적인 스탠스를 유지하거나 스펙터클로 타인들의 고통을 그날그날의 볼거리로 치환시키는 주류 미디어 제도의 문제점을 이미 상당히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사실을 쉽게 잊고 살고 있거나, 일상의 흐름 속에서 이미지 안에 종종 증발되는 진실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종종 방기하곤 한다.
무어는 말한다. “우린 논픽션을 좋아하지만, 현재 픽션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화씨 9/11>을 볼 때 전쟁의 추악함과 파괴적인 결과를 인지하기는커녕 도덕과 명분을 입에 달고 다니는 위험한 위선자로서 네오콘들을 중심으로 한 미국 정치인들의 위선과 9․11 사건과 오사마 빈라덴, 그리고 이라크를 한데 묶어 미국인들에게 분노와 공포심을 유발시키려는 우파 정치인들에게 배꼽에서부터 울컥 올라오는 정서적인 분노와 혐오감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을 넘어서서 이라크전의 커다란 맥락과, 이미 할퀴어진 타인의 땅에 빅브라더의 명을 존중해서 군대를 파병한다는 우리 정부의 몰역사적인 개입에까지도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화씨 9/11>은 한 번, 아니 두 번 이상 보면서 느끼고, 화면이 꺼진 뒤, 명멸했던 프레임 안의 이미지들과 고통 속에 있는 타인들의 표정과 목소리를 반추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볼 텍스트다. “이미지의 힘으로 부시를 끌어내려라!” 무어의 다큐가 지금까지 부시가 내세웠던 테러와의 전쟁 수행과 관련된 주장들이 얼마나 허황된 거짓말과 악행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다시 개진하는 텍스트라면 나는 무어의 다큐를 충분히 용인하고 지지한다. “목표는 이랬다. 만약 10%의 사람들이 내가 말한 점을 되새기며 미국 극장을 나선다면 큰 성공을 거둔 것이며, 만약 그들 중 5%가 어떤 일을 한다면 무엇인가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그의 생각을 전파하고 사회적인 의제들을 쟁점화하려는 무어의 다큐 만들기는 미학적으로나 재현의 기법상 이상적인 다큐 텍스트의 전형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무어의 다큐는 결점들이 눈에 띄는 ‘차악의 저널리즘’의 한 형태일지언정, 이 시대의 다큐멘터리에 활기와 가능성을 제공하는 중요한 텍스트다. 그의 작업은 기술근본주의와 초상업주의가 만드는 스펙터클과 길들여진 이미지들이 횡횡하는 시대에, 사회 현실에 용감하게 발언하고, 소신에 따라 행동하는 다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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