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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미도원주민 귀향대책위원회\'를 구성, 660일이 넘게 월미산 입구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주민들이 자신들이 살았던 터를 가리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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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월미도 원주민 희생사건
지금은 육지로 탈바꿈했지만 월미도는 당초 어촌마을을 낀 평화로운 섬이었다. 주민들은 갯벌에서 조개를 캐고, 밭을 일구며 살았다.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월미도의 비극은 한국전쟁과 함께 찾아 왔다. 그리고 월미도 원주민들은 한국전쟁 종전 후 지금까지 고향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죽을 때가 되면 고향이 더욱 그리워지는 법이여….”
지난 21일 월미산 입구에서 만난 윤정여(79·여)씨는 “남편이 평생을 월미도에서 숨진 부친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것에 괴로워하다 지난해 먼저 세상을 떴는데 나도 곧 그럴 것 같다”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13일 새벽 5시.
유엔군의 공군기 1개 편대(4대)가 월미도 상공에 굉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기름통과 네이팜탄이 비오듯 쏟아졌고 월미도는 이내 불바다로 변했다.
“새벽시간 미처 잠에서 깨지 못한 사람은 그냥 고스란히 타죽었어. 당시 80여가구가 살았는데 사람들이 허둥지둥 속옷바람으로 뛰어나오고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지.”
당시 19세였다는 이범기(74·남구 주안2동)씨는 “비행기가 사람만 보이면 기총사격을 해대는 통에 갯벌에서 펄흙을 잔뜩 뒤집어쓰고 숨죽여 있었다”며 금찍했던 순간을 회고했다.
월미도가 이처럼 집중포화의 표적이 된 것은 월미도에 인민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
오후에 폭격이 잦아들자 인천으로 피신했던 원주민들은 월미도와 인천을 연결한 다리를 통해 잿더미로 변한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시신을 가매장하는 등 사태수습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5일 새벽 5시 인천상륙작전이 본격 전개되면서 주민들은 함포사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끝이었다.
며칠 후 다시찾은 월미도에는 미군이 주둔했고 주민들은 고향을 눈앞에 두고도 미군들의 통제로 다리 앞에서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이어 주민들은 월미도 입구부터 지금의 대한제분 앞까지 판자촌락을 이루고 살아야 했다. 삶의 터전을 잃은 터라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굶기를 밥먹듯 했다.
“미군부대가 철수하면 고향에 들어가게 해주겠다”는 역대 인천시장들의 말만 믿고 고향에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이 많은 주민들이 세상을 등졌다.
미군이 철수하면서 주둔한 국군 제2함대사령부까지 지난 2001년 평택으로 이전했는데도 현재 생존해 있는 주민들에게 고향은 꿈속에서나 남아있다. 주민들이 살았던 지역에 공원조성공사가 한창이기 때문.
원주민들은 군사지역으로 묶인 고향을 떠나 전국 각지로 흩어졌지만 40여가구는 인천에 머물면서 귀향을 기다리고 있다.
“다른 보상은 필요없어. 죽기 전에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보금자리에서 다시 살수 있게만 해달란 것이여.”
유경예(82·여)씨는 “가슴의 한을 풀어달라고 시청에 갔는데 순사들이 시장실에 못들어가게 했다”고 말했다. 청원경찰을 `순사'라고 부르는 노인의 주름진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